30분에 읽는 예수 -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시리즈 21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21
김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품절


30초 SUMMARY

● 예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다 간 역사적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예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 예수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식민지 통치하에서, 종교적으로는 보수주의 사두개파, 종교적 열성주의 바리새파, 철저한 순결주의자 에세네파, 폭력적 민족주의자 첼롯당 그룹으로 나뉘었다.
● 예수시대는 사회ㆍ경제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했다.
● 예수는 어느 종교적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채 아들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과 사상을 펼쳤다.-.쪽

30초 SUMMARY

●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고 믿는다.
●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생물학적인 고백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의 소산이다.
● '구원자'라는 의미를 지닌 '예수'라는 이름이 흔한 이유는 당시 민중의 구원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
●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구원자'가 가장 낮고 비참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역설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평화 정신과 성김과 희생의 전 삶을 상징화하였다.
●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사랑과 평화정신은 이미 태어날때부터 배어있었다고 믿었다.-.쪽

30초 SUMMARY

●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빈약한 이유는 그가 특출한 인물이 아니며, 그의 제자들의 관심은 그의 공적인 3년간의 생애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
●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교육을 받은 유대교인이며, 유대교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과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재해석하고 그 정신을 철저하게 드러내려 했다.
● 예수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기존의 하나님이해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발언이었다.-.쪽

30초 SUMMARY

● 세례요한의 신앙 개혁운동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관계는 상호 연속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 세례요한의 운동이 세속적인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 신앙을 향한 회개운동으로 도덕적 삶의 변화를 지향한다면, 예수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삶에 합당한 새로운 존재변화를 지향했다.
● 예수 활동의 중심무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다.
● 갈릴리는 당시 민족운동의 중심지이며 종말론적 사상이 팽배했던 곳이다.
● 예수는 권력중심의 '예루살렘의 예수'가 아니라 '갈릴리의 예수'다.-.쪽

30초 SUMMARY

● 예수의 삶 이해는 곧 그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달려 있다.
●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죽은 뒤에 가는 천국이나 천당이 아니라 현재에 임한 현실의 세계다.
●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고통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고통과 슬픔조차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의 나라다.
●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하는 세계다.
●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왕국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쪽

30초 SUMMARY

●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강조했다.
● 예수는 먼저 가난한 민중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 예수는 민중의 몸과 영혼의 치료와 치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체험하게 했다.
● 예수의 복음과 희년 선포는 인간의 내면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억압으로부터의 총체적 해방과 자유를 지향했다.-.쪽

30초 SUMMARY

● 예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밥상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 밥상공동체는 모든 차별을 거부하는 평등공동체를 상징한다.
● 예수는 평화의 기운을 확산하기 위해 탁발생활을 원칙으로 제자들을 마을로 보냈다.
● 예수가 말한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존재의 평화를 의미했다.
● 예수가 지향한 삶의 양식의 핵심은 남을 존중하고 그들을 섬기는 삶에 있다.-.쪽

0초 SUMMARY

● 예수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었다.
● 평화주의자 예수가 폭력적으로 죽어간 것은 그의 삶이 지배자에게 도전이었음을 반증한다.
● 부활신앙은 죽임의 문화보다 살림의 문화가 더욱 강하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 부활신앙은 도망친 예수의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
● 부활신앙은 예수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쪽

30초 SUMMARY

● 예수는 인간의 참 행복을 위해 결코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제시하지 않았다.
● 예수의 길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향해 돌이킬 것은 돌이키고, 실천할 것은 실천하는 길이다.
● 예수는 죄인과 병자들, 여인과 종교지도자들 등 어떤 부류의 사람도 사랑으로 만났다.-.쪽

30초 SUMMARY

● 예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기독교는 예수 이후 역사적 산물이다.
● 기독교의 역사는 증거의 시대, 회심의 시대, 십자군 시대, 선교의 시대, 대화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 기독교는 내용적으로 '문화로서의 기독교', '종교로서의 기독교', '기독성으로서의 기독교'로 구분할 수 있다.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이 세 가지 요소를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정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제 21세기, 기독교가 '예수의 종교'로 회복될지 아니면 '무늬만 예수'인 종교로 남을지 기로에 서 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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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읽는 처칠 -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20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20
니겔 로저스 지음, 김종승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3월
품절


30초 SUMMARY

● 윈스턴 처칠은 1874년 11월 30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 그의 아버지는 하원의원이고 그의 어머니 역시 사교계의 명사라 그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 그는 수학과 라틴어를 싫어해 시험 도중에 기절하기도 했다.
● 19세 때 육군사관학교 샌드허스트에 들어갔다.-.쪽

30초 SUMMARY

● 1895년 그는 유명한 제4경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 어머니의 사교계 인맥 덕에 그는 폭넓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게 된다.
● 21세 때 전쟁에서의 경험을 기사로 써서 신문사로 보냈다.
● 오른쪽 어깨를 다쳐 평생 오른팔을 쓰지 못했다.
● 여러 신문에 기고하는 기자로 활약했으며 《말라카드 전투부대 이야기》라는 첫 책을 펴냈다-.쪽

30초 SUMMARY

● 1900년 처칠은 카키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 1901년 2월 처칠은 하원에서 첫 연설을 했다.
● 보수당의 지도자들은 반대 입장을 서슴없이 표현하는 처칠을 싫어했다.
● 아버지의 전기 《랜돌프 처칠 경》으로 그는 돈과 명성을 얻다.
● 1906년 그는 보수당을 버리고 자유당에 입당했다.-.쪽

30초 SUMMARY

● 민주당원으로서 처칠은 진보적인 개혁론자였다.
● 하지만 그는 여성참정권에는 반대했다.
● 여러 복지정책을 강변한 그는 식민성 차관이 된다.
● 그는 보수당과 자유당 둘다로부터 소외된다.
● 1911년 처칠은 해군성 장관에 취임한다.-.쪽

30초 SUMMARY

● 해군에서 처칠은 일대 개혁을 단행해 전투 태세로 돌입했다. 1912년 그는 육군을 본따 해군 전략 참모부를 만들었다.
●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영국 해군은 무적의 독일에 맞설 수 있었다.
● 처칠은 자유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일랜드 자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벨파스트를 방문했다.
● 1914년 다르다넬스 작전의 비극적인 실패로 처칠은 비난을 받았다.
● 1915년 11월 그는 관직을 떠나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쪽

30초 SUMMARY

● 보수당원들은 다시 국회로 돌아온 처칠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 로이드 조지 수상은 그를 군수장관에 임명한다.
● 군수장관이 된 그는 1917년 전차 제작을 지휘한다.
● 1921년 식민성 장관이 된 그는 이라크와 트란스요르단을 안정시켰다.
● 세 번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1925년 그는 다시 보수당에 들어갔다.
● 1929년 보수당이 무너지고 노동당이 정권을 잡자 처칠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쪽

30초 SUMMARY

● 34세 때 그는 클레멘타인 호지어와 결혼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으나 대부분 자녀들은 불행하게 되었다.
● 그림을 배운 그는 평생 취미로 삼았으며 수많은 책의 작가로서 최고의 영광인 노벨상도 탔다.-.쪽

30초 SUMMARY

●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도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처칠은 비난했다.
● 인도 문제를 오판한 뒤로 처칠은 히틀러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무시당했다.
● 국왕 에드워드 8세의 퇴위에 반대한 그는 볼드윈 수상을 비롯한 모두에게 소외당했다.
● 새 수상이 된 체임벌린에 의해 그는 다시 국회로 돌아온다.-.쪽

30초 SUMMARY

● 24년 만에 해군으로 돌아온 그는 함대를 전시 체재로 전환시키고 독일의 공격에 맞섰다.
● 1940년 그는 신임총리로서 감동적인 첫 연설을 했다.
● 영국은 레이더망으로 독일군의 공습에 대처한 덕에 영국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
● 사람들의 처칠의 승리의 V사인에 열광했다.
● 미국의 연합군 참전으로 2차 대전의 전세는 바뀌기 시작했다.-.쪽

30초 SUMMARY

● 종전 후에 처칠은 소련의 '철의 장막'을 경고했다.
● 승리에도 불구하고 1945년 7월 총선거에서 보수당은 패배했다.
● 대역사서인 《제2차 세계대전》을 집필하여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 1951년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정권을 되찾았다.
● 1955년 노령과 건강 때문에 그는 정계에서 은퇴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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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김봉중 지음 / 소나무 / 2001년 9월
구판절판


우리가 미국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활한 서부이다. 그리고 그 서부라는 의미를 더욱 포괄하는 단어가 프런티어이다. '서부'라는 용어는 단순히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말에 불과하다. 반면 프런티어는 그러한 지역적, 외형적인 의미 그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 거기에는 미국의 정신이 담겨 있고, 미국 역사의 독특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보통 국경이란 개념은 정체적이고 방어적이다. 각 민족들은 그들이 국경이라고 주장하는 곳에다 테두리를 긋고 그곳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그래서 정체적이면서도 처절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 국경이다. 국경은 날카로운 주권의 가장자리이며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지켜야 했던 최후의 방어선이다. 물론 힘이 강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가 갖는 국경의 의미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힘이 강한 나라에게 국경이란 다른 경계로 진출하는 관문關門이었지만 힘이 약한 나라의 경우 그것은 지켜야 하는 보루堡壘의 역할을 했다. 문이든 보루이든 국경 분쟁의 도화선이 국경이었고 그것을 마무리하는 의정서나 조약의 주요한 의제가 국경이었다.-.쪽

하지만 미국에게 국경이란 정체적이지 않고 지극히 유동적인 것이었다. 지금의 미국 국경으로 정착되기까지 국경이란 그 정체가 모호했다. 그 존속 기간도 지극히 짧았다. 왜냐하면 국경은 항상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의식 속에 경계선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국경은 곧 굳어진 벽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탄력적이고 지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으며, 그러다가 국경의 존재 자체도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이었다. 여기에서 관문이니 보루니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물론 보루보다는 다른 경계로 진출하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했지만 관문이라기보다는 그냥 삶의 한 부분이요, 거쳐가는 지역이었다. 결코 국가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미국 프런티어에 대한 월터 웹Walter Webb의 지적을 인용해 볼 만하다.

미국인들은 프런티어를 그들 영역 안에 놓여 있는 것이지 나라의 끝 모서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서 정지하라는 경계선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관문이었다.-.쪽

미국이 경제적 평등 면에서는 민주주의의 노정에서 겪어야 할 홍역을 비교적 수월하게 겪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유럽과 비교해서 특이한 현상은 유럽의 경우 개인이나 계층의 신분적ㆍ정치적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 투쟁의 역사를 겪었다면 미국의 경우 지역적 평등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국의 남북 대결은 미국사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한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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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서부의 개척지().

 

일반적으로 변경()을 뜻한다. 미국정부의 공식 정의로는 1평방 마일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과의 경계를 잇는 선이라 규정되어 있으며, 아직 충분히 문명화되어 있지 않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미국사회는 동부 13주를 모체로 해서 점차 서쪽으로 확대해가는 형태로 발전해 왔는데, 이 서점운동(西)에 따라 프런티어도 당초의 애팔래치아산맥 지대로부터 미시시피강() 유역, 나아가서는 그레이트 플레인스[]로 통하는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북부의 자영농민과 남부의 플랜터의 땅을 찾아가는 움직임이 그 주된 원동력이었는데, 19세기 중엽에 미국이 태평양연안의 영토를 획득하고,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 러시가 일어나자, 태평양연안을 거점으로 동진()하는 프런티어도 생겨 광물자원의 채굴이 그 추진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까지는 동·서 양쪽으로부터의 프런티어가 합쳐져 1890년 연방정부 국세조사국(調)도 프런티어가 소멸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프런티어의 존재(또는 소멸)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광대한 프런티어는 땅의 입수를 용이하게 하여 농업발달에 기여함과 동시에, 공업제품에도 충분한 국내시장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립의 기회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부의 과잉노동인구를 흡수하는 안전판의 기능을 다함과 동시에, 미국사회의 유동성()을 높여 그 중산계급화를 촉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정치면에서도 기존()의 사회적 제약이 적은 프런티어는 자유·평화라고 하는 이념()에 제대로 들어맞아 보통선거운동 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고, 자치의식도 높였다. 그리고 대자연에 맞서 살아 나가야 하는 냉혹한 상황 속에서 ‘프런티어 스피릿’이라 부르는 개척정신의 기풍이 배양되어 그것은 미국 국민의 국민성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개인주의·현실주의·합리주의 혹은 개개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성향을 강화해 주었다.

이와 같이 프런티어는 미국사회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특히 그 경제적 발전에서 불가결의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런 만큼 프런티어가 ‘소멸’하였다는 의식()은 미국인들 사이에 심각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프런티어를 찾아 해외진출로 나서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프런티어관()은 그것이 마치 무인지경이었던 것처럼 상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이므로, 프런티어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은 원주민에 대한 학대와 살육의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 종래와 같은 백인 중심의 정복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원주민의 입장에서 프런티어의 의미를 재파악하려는 움직임이 대두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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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특별한 나라가 아니라 특이한 나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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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29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책을 읽으시네요

보슬비 2006-04-2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판타지나 SF류를 좋아하지만 특별히 책을 가리지 않고 본답니다. 요즘은 마음이 콩밖에 가있어서 책외에는 다른곳에 신경 쓰기가 힘들어서 최근들어 책을 더 많이 보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