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 (상·하)
원제 From Dawn to Decadence
자크 바전 지음,
이희재 옮김
민음사, 각권 869쪽, 각권 3만3000원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줄 아는 두 사람을 나는 안다. 컴퓨터 게임 '
페르시아 왕자'해본 사람? 위기에 빠질 때마다 왕자는 '시간의 단도(短刀)'라는 신비한 무기로 시간을 손쉽게 과거로 되돌린다. 또 한 사람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다. 과거의 시간을 발 밑에 쌓아 놓고 그는 말한다. "내 발 밑에 마치 몇 천 길의 골짜기를 굽어보듯, 무수한 세월을 바라보자 어지러웠다."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는 이런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가히 문화사의 페르시아 왕자라 할 만한데, 시간의 단도를 쥔 사람처럼 무려 500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이중 5분의 1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시간이다(그는 올해로 100세다). 나머지 400년은 그가 불면의 밤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시간이다. 불면증과 장수(長壽)가 만나 500년을 한 권의 책 안에 잡아넣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왜 꼭 500년인가? 바로 500년 전의 종교혁명부터 근대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류가 집어탔던 배들 가운데 미친 고래의 위장처럼 출렁거리며 가장 심한 멀미를 일으킨 근대라는 특수한 시간이 어떻게 탄생해서 융성하고 변화했는가를 그린 벽화다.
이 벽화는 근대인들이 터트린 네 개의 폭죽을 맞아 네 조각으로 잘라진 독특한 형태를 취한다. 16세기의 종교혁명, 17세기의 군주혁명, 18세기의 프랑스혁명, 20세기의
러시아혁명이 그것이다. 혁명을 기점으로 삼는 까닭은 혁명의 현기증만이 인간의 머리를 뒤흔들어 매번 새로운 문화를 토악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혁명은 문화를 뒤바꾸어 놓는다."(상권, 29쪽)
물론 '혁명의 문화사'를 부르짖는 이 대명제는 결코 사변적인 주장으로 그치는 법이 없다. 저자는 성실하게 모아들인 자료의 징검다리가 놓이지 않은 곳으로는 결코 발을 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들은 좀처럼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지난 500년 동안 출현한 인류의 가장 중요한 문헌들의 직접 인용을 한 권의 책 안에서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부터
셜록 홈즈가
바그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까지 각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는 목소리들이 생중계된다.
빈틈없는 자료들이 동원될 때 지금껏 확인해 보지 않고 믿어 왔던 정설들이 얼마나 맥없이 꼬리를 내리는지 목격하는 일 또한 이 책의 재미다. 가령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부르짖지 않았으며,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자료와 정황에 대한 주도면밀한 검토를 통해 설득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고정관념과 어떻게 싸워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비판적 사고 훈련의 지침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