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토의 땅, 러시아는 우리에게 그다지 밝은 이미지를 주지는 않는다. 수도 모스크바에서 떨어진 곳은 그나마 낫다. 살을 에는 정도의 추위는 느껴지지만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음침함은 없다.
모스크바 심장부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둠과 음모의 고약한 그림자가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동서 냉전이 허물어진 21세기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이 그림자에 갇혀 있다. 악명 높은 정보기관 KGB의 중령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국가의 최고책임자로 군림하고 있는 현실은 러시아의 모습을 압축하는 단축키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는 드러나지 않아서 생기는 이미지요 두려움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곳,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러시아의 속살을 손전등을 들고 풀어헤친 이들도 많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에가시라 히로시 국제부 편집위원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81년부터 4년 동안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이래 줄곧 러시아에 관심을 가져왔다. 히로시는 책 ‘푸틴의 제국’에서 러시아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외교정책을 풀어낸다. ‘어둠의 대국 러시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부제에 스스로 답한 책이다.
러시아의 상징인 문장은 머리 둘의 ‘쌍두독수리’다. 이 독수리의 머리는 각각 동쪽과 서쪽을 보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아무래도 동쪽인 아시아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이 한국 독자의 눈길을 끈다.
2000년 6월 사상 처음으로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은 러시아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는 2000년에 들어서도 북한에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한국과 함께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은 러시아는 직접적인 원조 없이도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때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남북대화 중재였다.
러시아는 2000년 2월 자국 이외의 자금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북한 당국의 발언을 접한다. 러시아 정부는 즉시 러시아·북한·한국의 3개국 협력 방식을 활용키로 결정한다.
 |
푸틴의 제국/에가시라 히로시 지음/이정환 옮김/달과소/1만8000원 |
남북 정상회담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한국의 자금 제공을 포함한 3개국 협력구상이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실리를 목적으로 삼은 푸틴의 한반도 외교가 남북 정상회담을 가능케 한 주 요인이었다고 추정한다. 그해 7월 푸틴의 북한 방문도 한반도에 야심을 키워온 러시아가 보여준 행보였다.
책은 이 밖에도
체첸 분쟁과 옐친의 퇴진,
카스피해 에너지 외교, 올리가키 추방과 미디어 지배, 러일 외교, 석유를 둘러싼 이권 등 신문의 국제면에서 봤음직한 사건들을 배경과 함께 설명한다. 이들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언론인 특유의 현장감에 일본인 저술가의 특징인 쉬운 글쓰기가 중첩돼 있다. 본격적인 서술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는 러시아 핵심 인물 43명에 관한 설명을 간략하게 곁들여 놓았다.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설명은 러시아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게 하는 양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