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재의 이기려면 기다려라
이운재 지음 / 일리 / 2006년 1월
절판


월드컵 4강 진출은 이 땅 모든 이들이 기뻐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내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 순간 가슴 벅찼던 기억을 되살릴 때면 아직도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나는 그 느낌을 평생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을 더 많은 후배들과 나누고 싶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

=>아마도 전 국민들도 같은 기분이었을거예요.-.쪽

나는 골키퍼로 포지션을 바꾼 지 2년 만에 고교 최고 골키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키가 좀더 크지 않은 게 아쉬웠다. 중학 시절만 해도 남부럽지 않은 신장이었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 키가 182센티미터에서 멈추는 바람에 골키퍼로서 오히려 평균키를 밑돌았다. 함께 경쟁했던 서동명 선수는 주문진고에 있을 때 이미 190센티미터를 넘어섰고, 성남 일화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해운 선수도 185센티미터로 나보다 키가 컸다. 키가 187센티미터 정도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골키퍼로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유연성뿐만 아니라 남들보다 한 뼘은 더 긴 팔 덕분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 때 필드플레이어에서 골키퍼로 포지션을 바꾸는 모험을 했고, 그 모험은 대성공이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골키퍼는 내 인생의 블루오션이었다. 만일 내가 고등학교때 필드플레이어를 고집했다면…. 아마도 태극마크는커녕 대학진학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나를 골키퍼로 변신시켜주고 가다듬어준 청주상고 유인권 감독과 최종대 코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자신의 블루오션을 찾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운재가 부럽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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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젊은 시절 비화를 담은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사이언스북스. 2006)이 그의 마마보이적 기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화제다.

<우주의 고독> 으로 전미 도서비평가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저자 데니스 오버바이는 아인슈타인은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마보이’ 였다며 아내 밀레바와 겪었던 연애시절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너의 미래를 망치고 기회를 날려버릴 참이니? 어떤 집에서 그런 며느리를 들이겠니. 그애가 임신이라도 한다면 알아서 해라. 밀레바는 나이가 너무 많아!”

책에 따르면 아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와의 교제를 반대했던 어머니는 이처럼 오열하곤 했다. “네가 서른이 되면 그 애는 노파가 되어 있을 게다” 아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밀레바를 극구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의 부모들은 그가 어떻게든 성공해 경력을 높이고 취리히에 사는 연인 밀레바와는 멀어지기를 학수고대했다. 밀레바가 결혼 전 아이를 낳았지만 부모들의 반대는 계속 됐다. 손녀를 보러 가지도 않았으며 부모님의 뜻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 아인슈타인은 문제 해결을 계속 미뤄 밀레바은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후일, 베른에서 열린 이들의 결혼식에도 부모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 후 아인슈타인은 친구 베소에게 “이제 유부남이 되어 아내와 아주 즐겁고 아늑하게 살고 있네. 아내는 못하는 일이 없다네, 요리도 잘하고 항상 명랑하지”라는 편지를 보내 결혼생활의 행복함을 전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밀레바와 결혼을 올린 아인슈타인의 남다른 감회가 녹아있는 편지다.

그가 느꼈던 심적 부담감도 실려있다. 노인이 된 후 자신의 전기를 준비하던 스위스 작가에게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의 결혼에 내심 거부감을 느꼈으며 의무감으로 결혼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밀레바의 우울한 성격 때문에 열정이 점점 식어갔으며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면들이 쌓여갔다”는 말도 인용됐다.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은 4만 3천여 편의 문서와 수백 통의 편지를 바탕으로 오만한 애송이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의 젊은 시절을 흥미롭게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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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안소민 기자] 가정을 전쟁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하면 편안함이나 안온함, 사랑, 포용과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가정이야말로 가장 치열하고도 소리 없는 전쟁터이다. 단, 그것은 서로의 사랑과 용서, 이해가 전제된 천사들의 전쟁이다.

<샘터>에 연재되었던 최인호씨의 <가족>에 쓰여 있던 글이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장담하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진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서로를 당연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사랑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게 가족이다. 오히려 가까운 관계이기에 빚어지는 많은 오해들. 이러한 갈등과 문제가 없는 가족은 아마 없으리라 생각한다. 갈등이 없다면 그것은 '스위트홈'이 아니라 진정 불행한 가족이다.

 
▲ <후베란트가의 사람들> 겉그림
ⓒ2006 들녘
<후베란트 가 사람들(Houwelant)>은 가족 구성원들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오해, 상처를 다룬 독일소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관계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들의 관계는 일견 무덤덤해서 감정의 굴곡이란 '그닥'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족 구성원 누구보다 더 섬세하고 미묘한 갈등과 오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그 아버지에서 아들로, 손자로 대물림된다.

이 작품의 배경이 서양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부자 3대와 가족들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지나칠 정도로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그들의 모습은 동양정서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이자 억압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동서양이 비슷하다.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는 부자간의 갈등

가족들에게 두려움과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채 스페인의 한 섬에서 부인과 단둘이 살아가는 요르게(1대), 오로지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 외에는 달리 특별한 점이라고는 없는 무능한 토마스(2대), 무능한 아버지를 경멸하면서 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유명한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티안(3대), 이들의 갈등과 미움, 용서와 화해가 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작품은 요르게의 생일을 준비하기 위해 에스더(요르게의 부인)가 아들 토마스가 사는 독일로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생일은 에스더와 그녀의 전 며느리였던 베아테만이 계획하는 것일 뿐 다른 가족들은 알지도 못하며 더구나 이 모임에서 가족들이 만나야만 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에스더는 토마스에게 생일날 아버지를 소개할 인사말을 쓸 것을 부탁한다. 토마스는 어렵사리 글을 쓰다가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절망, 미움에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던 토마스는 아들 크리스티안에게 부탁하게 되고 크리스티안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요르게에 대한 토마스의 두려움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요르게는 꽤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그가 단순히 후베란트가의 가장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작품의 모든 갈등의 진원점이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지나친 엄격함과 금욕주의, 자신을 학대하면서까지 순수의 결정체를 찾아내고자 했던 고집스러움은 가족들에게 고통만을 안겨준다. 가족과 단절된 그의 모습은 다음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가 직접 글을 쓴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와 직접 부딪히지 않고 전달하고 명령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그를 연결해주었다. 아버지는 오로지 어머니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약하고 무능한 아들 토마스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는 가족들과 따로 지내면서 바다수영과 기도로 낙을 삼으며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혼혈아 소년에게 친부자간 이상의 애정을 느끼게 된다. 소년을 향한 애정은 그가 그의 가족에게 베풀지 못하고 또한 받지 못한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은 도망칠수록 더욱 옭아매는 그물일까?

토마스는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당한 두려움에 가까운 억압 때문에 자신의 아들 크리스티안만큼은 할아버지에게서 떼어놓으려 한다. 일종의 복수인 셈이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역시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의 무능함을 증오하게 된다. '아버지는 싫지 않지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점이 싫'은 크리스티안은 토마스와 포옹하는 것도 삼가고 아주 짧은 의사소통만 전화로 나누며 지낸다.

그러나 부자간의 이러한 오해와 갈등은 대를 이어가는 것일까? 크리스티안은 본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내 리카르다로부터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을 듣는다.

'리카르다가 옳았다. 그는 가정을 꾸려나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훌륭한 아버지라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했다. 자신보다 못한 자식이라도 자식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인내심이 있어야했고 언제나 가장 빠른 길, 가장 짧은 길을 선택하는 대신에 우회로도 함께 가주어야 했다. 자식이 실패도, 희망 없는 상태도, 보잘것없는 진전도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운명이 또 한번 그에게 실패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과제를 맡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안해요. 아빠.'

그 역시 '아버지'가 되기엔 부족함이 많은 사내였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이. 크리스티안은 그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아들이며, 후베란트 가족의 일원이라는 숙명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상태가 그 자신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어딘가 멀리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가족이었고 깊숙이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벗어나려고 기를 써야 하는 정글이고 늪이었다. 끊임없이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옭아매는 그물이었다. 그것은 후베란트였다.'

인물들의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묘사가 압권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 이 작품의 대부분은 등장인물들의 세세하고 치밀한 심리묘사에 많은 내용을 할애하고 있다.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 담겨있는 등장인물의 촘촘한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마음의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한 사람의 관점에서 쓰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 등장인물 각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서술방식은 그 같은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대화보다도 독백위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유럽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인식론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한 몫 한 듯하다.

이 작품의 결말은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명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제 분신처럼 사랑했던 소년이 죽고 나서 마음의 평정을 잃은 요르게 역시 죽음을 맞게 되고 그의 생일잔치를 위해 준비했던 인사말은 축하인사가 아닌 조사가 되어버린다. 글을 읽는 크리스티안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들은 상대방을 향해 높이 쌓았던 벽이 조금씩 허물어 내리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이제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속 시원하게 서로 오해를 풀고 용서하며 받아들이길 기대했던 독자들에겐 조금 미진한 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과 용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미완의 숙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네버엔딩스토리(never ending story)랄 수 있다. 가정의 달 5월에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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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 <타잔> 겉그림.
ⓒ2006 실천문학사
김윤영의 두 번째 소설집 <타잔>에서는 낯익은 얼굴들이 여럿 보인다. 먼저 첫 번째 소설 '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의 여자가 있다. 그녀는 똑똑한 남편을 만나 남편의 뜻대로 토론토로 이민 왔다. 그녀는 그가 하자는 대로 한다. 그러다 우연히 자동차 판매 일을 하게 됐는데 그 일이 꽤 호조를 보인다. 그녀가 그녀만의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반면에 남편은 고기만 먹으며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그녀에게 불만을 쏟아내기 일쑤며 예전의 그 똑똑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남았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것이다. 그는 다시 그녀를 데리고, 절대 이혼은 안 된다며 한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녀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준비를 한다. 그에게서 벗어나는, 다른 삶으로.

두 번째 소설 '얼굴 없는 소설'의 남자와 남자의 선배는 어떨까. 선배나 남자 모두 '한결 같은 사람'이다. 선배는 직장에서 어린 여사원에게도 존칭을 쓰고 점심 먹는 자리는 언제나 똑같으며 하는 일들도 똑같다. 남자도 비슷하다. 이러니저러니 삐딱한 척 하지만 선배 못지않게 한결 같은 사람일 뿐이다.

어느 날 선배가 사라진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형수는 신경질을 내다가 한숨을 쉰다. 남자는 우연히 형수의 가게에 들렀다가 그런 형수에게 위로 한번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나온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남자와 형수는 자연스럽게 섹스를 한다. 선배를 좋아하는 남자지만, 남자도 특별히 다른 건 없다. 타인이란 본래 그렇듯, 일단 자신부터 생각하기 마련이다.

'세라'는 어떤가. 주인공 여자는 부양할 가족에 무능력한 애인 때문에 답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동남아로 여행을 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자유롭게 여행하러 다니는 세라를 알게 된다. 여자와 세라는 금방 친해지고 여자는 외모적으로 세라를 닮아가게, 혹은 흉내 내게 된다. 그때 그곳에 해일이 덮친다. 수영하던 여자와 세라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데 여자는 수영을 잘 한다. 세라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세라의 손을 놓고 혼자 도망친다. 사람들은 여자를 세라로 생각하고 위로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부터 여자는 세라로,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타잔>에서 만날 수 있는 낯익은 얼굴이란 누구인가? 표제작 '타잔'이나 다른 작품들에서 만날 수 있는 그들은 흔히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들이다. 정말 평범하다. 삶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는 것조차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하루 먹고 하루 살기도 바쁜, 배우자와 사랑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갈 곳 없어서 사는, 언제나 다른 삶을 동경하는 그들이다. <타잔>처럼 그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작품이 아니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할 일이 없는 이들이다.

그럼 소설 속에 등장한 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다른 삶'을 꿈꾼다. 자신의 뜻대로 하자고 강요하는 남편이나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는, 이력서 수백 통 써도 취직 시켜주지 않는 현실이 아닌 곳으로 훨훨 날아갈 꿈을 꾼다. 물론 그것은 '꿈'이다. 일장춘몽에도 비할 수 없는 허망한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을 이룰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욕구는 강렬하다. 어떻게든지 이루고 싶다. 그러자면 말도 안 되는 수단을 써야 한다. 첫 번째는 살인. 남편이든 부채업자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간에 죽이면 된다. 그들이 없으면 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런 짓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일 수 없는 것은 어떤가? 이를 테면 사회의 시스템은? 이럴 때는 '분열'돼야 한다.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산책하는 남자'를 보자. 주인공은 아무도 써주지 않는다. 수백 통의 이력서가 종잇조각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주인공은 사회 시스템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이미 그건 누가 시도했다가 다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포기해버린다. 그럼 남자는 어떻게 하는가? 남자는 자신을 스스로 고용한다. 현실을 보는 눈을 막고 대신 자신만의 눈으로 모든 걸 판단해버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타잔>은 무미건조하다. 마치 희망이라고는 샅샅이 찾아봐야 쥐꼬리만큼도 없다는 걸 알고 포기한 소설 속의 그들의 얼굴과도 같다. 소설의 분위기는 무거운 회색빛깔로 비유할 수 있다. 아니면 황사가 뒤덮은 인간의 찡그린 얼굴과도 같다. 어떤 것을 붙이든, 그것이 '희망없음'으로 이어진다면 <타잔>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끝까지 저자가 이런 분위기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임에도 희망에 한 가닥 믿음을 걸어보겠다는 것인지 마지막 작품 '속삭임, 속삭임'에서 약하지만, 그래도 희망이라 부름직한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아픈 기억을 남기는 게 아니라 하얀 눈 위에 내 발자국을 꾹꾹 남겨보고" 싶다고 말하는 혼령의 말이 이것을 짐작케 한다.

그 혼령은 "그럼 여러분, 그때까지 모두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저 먼 곳으로 떠나간다. 그리고 작품도 끝을 맺고, <타잔>도 끝을 맺는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긴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만남을 기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작품집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저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이나 분열 같은 비극적인 수단이 아닌 정상적인, 누구나 가능한 것으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을?

<타잔>은 황사가 뒤덮은 인간의 찡그린 얼굴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러나 이 끝맺음으로 인해 인간은 황사가 물러날 조짐을 발견하고 찡그린 얼굴을 피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활짝 웃을 수 있을 것인가? 아직 그건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건 확실히 알 수 있다. 저 멀리서 햇볕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과는 벽을 쌓고 사는 이들에게 비쳐지려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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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1908년 작 ‘물뱀2’


갤리온의 클림트


예담의 클림트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고흐처럼 비극적 삶을 살지도, 모네처럼 세기의 로맨스를 남기지도 않았지만 이들 못지 않게 오늘날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가다.

관능적이고 화사하면서 동시에 우울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그의 신비한 화풍은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정작 화가의 삶은 그리 존경받을 만한 것이 못되었다. 순진하고 가난한 시골처녀를 유혹해 신세를 망쳐 놓는가 하면 자기 아이를 낳은 뒤 궁핍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여인을 차갑게 외면했다. 오죽하면 ‘빈의 카사노바’로 불리며 14명의 사생아를 남겼을까. 그렇지만 클림트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이자,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한 두려움 많은 한 인간이기도 했다.

황금빛 ‘키스’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을 다각적으로 그린 두 권의 소설 ‘클림트’가 나란히 출간됐다.

◇갤리온의 ‘클림트’=웅진출판사 계열인 갤리온에서 나온 소설 ‘클림트’(원제 Klimt)는 독일의 지적 소설가 크리스티네 아이헬이 쓴 것으로 하반기 개봉할 영화 ‘클림트’의 원작이기도 하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음악학을 전공한 저자는 광기의 예술가 클림트를 세기 전환기의 퇴폐적이고 몽환적 풍취와 함께 한꺼번에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던 클림트는 파리의 한 저택에서 신비하고 관능적인 여인 클레오 레아의 유혹에 깊이 빠져든다. 그녀와 꿈 같은 정사를 치른 클림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레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정작 초상화를 완성하기도 전에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릴없이 빈으로 돌아온 클림트는 파리에서의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다.

이후 클림트는 더욱 관능적인 미를 추구하는 그림에 몰두하게 되고 그 중심에는 늘 미지의 여인 클레오 레아가 자리하게 된다. 클림트를 충격과 혼돈으로 몰아넣은 ‘클레오 레아’의 진실은 무엇이며 그가 혼란에 빠질 때마다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양복의 남자는 누구일까. 소설은 마치 환상소설을 보듯 기묘한 분위기로 흐르면서 무서운 빠르기로 절정에 오른다.

한편 영화 클림트는 칠레 출신 세계적 영화감독 라울 루이즈가 만들었다. 존 말코비치가 천재화가 클림트 역을 맡아 열연하며 국내에서는 월드컵 시즌을 피해 하반기 개봉할 것으로 알려졌다.

◇예담의 ‘클림트’=미술사와 예술학을 전공한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히키의 처녀작으로 원제는 ‘The Painted Kiss’다. 화가의 전 생애를 그의 마지막 연인이라 할 수 있는 에밀리 플뢰게의 눈과 입으로 써내려가는 형식을 취했다. 클림트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과도한 여성편력을 참아내면서 결국 화가의 마지막 여인이 되는 에밀리의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 주로 그려진다.

소설은 에밀리가 12살 어린 나이에 자신과 언니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위해 집에 온 화가 클림트와 첫 대면을 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이후 클림트와 에밀리는 미술선생과 제자로, 화가와 모델로, 사업적 동반자로, 그리고 친구이자 연인으로 평생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인연을 길게 이어간다.

소설은 특히 ‘키스’ ‘임신부의 누드’ ‘잠자는 소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스케치’ 등 클림트 그림이 탄생하는 장면을 군데군데 재현해 놓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모델들을 벌거벗긴 채 혹사시키는 작업 스타일,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과 작가적 욕심 등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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