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
| |
 |
|
|
|
| ⓒ2006 봄나무 |
여러 해 전 한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위인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얼마 전 제 아이가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 전기를 읽고 독후감을 쓴다고 도와달라는 거예요. 읽어보았죠. 그런데 다 읽고 나니 가슴이 막막해지더라고요. 위인전이라고 학교에서 선택해준 책인데, 위인이란 본받을만한, 즉 '이렇게 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김정호는 평생 대동여지도에 빠져 가족은 모르고 살았어요. 결혼하자마자 집을 나설 정도였죠. 그렇게 고생해서 지도를 만들었는데도, 간첩 혐의를 받고 투옥되죠. 그런데 주위에서 아무도 안 도와줘요. 돈이나 명예는 없더라도,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만 있었더라도 외롭진 않았을 텐데,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차마 제 아이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김정호를 위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는 <장기려-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봄나무)란 책 때문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희생하고 개인의 행복을 멀리했던 그의 모습에서 김정호의 모습이 겹쳤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장기려를 몰랐다. 단지 '한국의
슈바이처'란 별명을 갖고 있다는 것 정도.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김은식이란 저자 때문이었다. 김은식은 <오마이뉴스> 초창기 '
맛있는 추억'을 연재했던 시민기자다. 그런 그가 전혀 맛 있지(?) 않은 책을 '턱'하니 내놓았으니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장기려가 누구이기에….
장기려, 최고의 명예와 실력을 갖춘 사람
 |
|
| ▲ 장기려는 복음병원 초창기 시절 매주 11시간 기차를 타고 서울의대와 병원을 오갔다. |
|
| ⓒ2006 봄나무 |
|
장기려는 30세가 되는 1940년
맹장염 연구로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평양 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일했다. 때가 일제 착취가 극에 달했던 1940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성공이 곱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그 시절 장기려가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도움을 줬다는 내용이 없으니 말이다(한 어린이책에선 그가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했다고 강조하고 있긴 하다).
아무튼 1945년 그는 평양도립병원 원장이 되고, 1947년엔 평양의과대학(
김일성대학 의대) 외과 교수로 일한다. 또한 북한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큰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그는 대단하다. 단지 '성공'이란 기준으로만 봐도 그는 책 주인공이 될 만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흠모해 마지않는 장기려의 모습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 등장한다. 그는 흔히 말하는 '성공'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명예가 보장된 서울의대 교수직을 버렸고, 출세의 버팀목이 될 있는 교단과 오히려 대립 각을 세운다. 부를 쌓는 것과도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한 무료진료소를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로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었다. '청십자조합'이라고 불린 그 기구의 등장은 정부가 의료조합을 만든 시점보다 10년이 앞선다.
그래서 일게다. 한국전쟁이 터져 피난한다고 정신없는 때에서부터 책이 시작된다. 그의 나이 40세 때다. 장기려가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뛰어난 학업 성취를 했는지 등의 내용으로 '화려하게(?)'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자는 다른 길을 택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보통 위인전이라고 하면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다라고 시작하죠. 그러나 저는 원래 그 사람이 착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회관계에서 어떻게 그 사람이 행동하는 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피난길 부분에서 시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무(無)와 베품'의 삶을 실천한 사람훌륭한 위인들이야 넘치고 넘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기에 장기려를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저자의 머리 글에서 잘 드러난다.
"당신이 천막병원을 열던 시절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이백 배나 불어났다는 오늘, 여전히 찬 바람을 몸으로 버텨 내는 가난한 이웃들의 삶에 또한 이백 배는 가슴 아파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지만 여전히 '퍼주기'에는 인색하다. 다른 나라의 도움을 통해 이만큼 성장하고서도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소홀하다. 저자는 '장기려'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길 바랐던 듯하다.
장기려가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자. 그는 초창기 복음병원을 운영할 때 모든 직원의 월급을 식구 수대로 나누었다. 식구 수가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았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있던 장기려는 운전기사와 같은 돈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에 직원들은 '공산당 식 분배 정책'이라며 처음엔 어색해 했다.
또한 그는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대신 내어주고, 그마저 없을 땐 몰래 도망시켜주기까지 했다.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 1만 달러도 고스란히 청십자조합에 털어 넣었다.
1995년 세상을 떠나는 날 그의 통장에 있던 돈은 달랑 천만 원. 그마저 간병인에게 선물로 주고 떠났는데, 그의 삶에 비춰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자는 맺음말을 다음과 같이 꾸미며, 자신이 책을 쓴 의도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서울과 부산에서 장기려의 후배들이 가난한 이웃을 위한 무료진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젊은 의사들이 돈벌이가 아닌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의술을 펴기 위해 제2, 제3의 청십자조합인 '의료생협'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의 삶을 돌아보는 내내 괴롭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가 그리웠다.”명예와 특혜를 거부한 사람
 |
|
|
| ▲ 노동미술가 이윤엽이 그린 판화그림은 이 책의 큰 장점 중 하나다. |
|
| ⓒ2006 봄나무 |
장기려는 '바보'라고 불릴 정도로 헌신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분노했다. 그는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이후, 모든 상을 거부하고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명예심 없이 일한 것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고 반성하면서 크게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의 애제자인 양덕호 박사가 흉상을 만들 목적으로 입체사진 기사를 데리고 나타났다. 당시 장기려는 건강이 무척 안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내 흉상을 만드는 자는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일갈했다.
그가 아들에게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몸은 태워서 부산 앞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북한에 부모와 아내, 자식 두 명을 남겨놓고 내려왔다.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던 그는, 냉전이 치열했던 시기 동베를린을 방문했다. 북한에서 잘 알려진 학자였던 아들이 동베를린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흔적이라도 확인하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렇게 북의 가족을 그리워했던 그에 대해 한국과 북한 정부가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장기려는 특혜라며 거절했다. 모질다고 혀를 차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나 또한 그렇게 느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환자를 돌본 사람책을 덮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이렇게 흠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자기가 키운 병원에서 내쫓기고, 남쪽에서 부당하게 간첩 대접을 받았다면 한 번쯤 울분을 토할 수 있지 않나. 게다가 재혼의 유혹에 흔들렸을 수도 있고, 북쪽 가족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안에 혹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전혀 없다. 저자가 취재를 부족하게 했거나, 빠트린 것은 아닐까'
게다가 그는 평생 아들을 거의 돌보지 않았으며 죽기 전 반신불수의 몸인데도 환자를 돌봤다.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환자와 고통 받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한 톨의 명예와 안락도 거부한 사람. 이렇게 산 사람을 과연 본 받으라 할 수 있을까?
김은식은 월간 <우리교육>에 '예인산책'을 연재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때 닦은 실력이 이번 책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복음병원 명예 원장인
박영훈과 양산
삼성병원 상임이사인 손동길을 비롯 김서민(전 청십자조합 사무국장), 강명미(전
동의대 간호과장), 채규철(전 두밀리자연학교 교장) 등 10여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상상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직접 취재한 내용으로 책을 꾸미려고 했던 노력이 잘 보인다. 또한 노동미술가 이윤엽이 그린 판화그림은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할 정도로 빼어나다. 단순하면서도 질박하게 표현된 그의 그림들에선 장기려의 성품이 배어나온다.
그런데 한 편으론 아쉽다. 그와 갈등관계를 빚었던 사람들. 교단 관계자들, 병원 관계자들, 보안기관원들 등으로부터 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와 좌절, 약점 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점은 두고두고 아쉽다. 완벽한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자료의 부족, 취재의 한계였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