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박정호] 신화.꿈.신비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강응섭 옮김, 숲

312쪽, 1만7000원

19세기 인도 예언자 스모할라는 농사를 거부했다. 땅을 가는 건 우리 공동의 어머니인 대지에 상처를 내는 죄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 위해 칼을 들라는 겁니까?"라고 반문했다. '대지=어머니' 는 세계 공통의 이미지다.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따르면 따르면 최초의 인간은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절반만 인간인 채로 살다가 좀더 성숙해진 뒤 온전한 형태를 부여받았다. 지모신(地母神)은 지금도 숱한 예술작품에서 반복돼 재현된다.

신화는 현대 과학사회에선 사실.현실과 구분되는 상상.허구로 치부되곤 한다. 과연 그럴까. '세계종교사상사' '성과 속' 등으로 유명한 20세기의 걸출한 종교학자인 엘리아데는 신화를 우리 삶의 영원한 전범으로 본다. 또 지금도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파고든 원칙.모델로 판단한다. 신화 속에는 모범적인 행동을 한 초인간적 존재들의 활동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엘리아데는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대명사.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정보량이 놀랍다.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꼼꼼히 따져보면 신화의 변용에 가깝다. 세계문화의 상징이 집약된 신화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앙일보] 낸시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

낸시 랭 지음, 랜덤하우스 중앙, 184쪽,1만1000원

시쳇말로 '대략난감'이다. 이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까. 가슴선을 드러낸 노출패션으로 대중 매체를 누비는 '청담동 키즈'. 다른 한편으로는 란제리 차림으로 초대받지 않은 베니스 비엔날레(2003)를 찾아가 퍼포먼스를 펼친 용감무쌍 아티스트. 팝아티스트 낸시 랭(27)이다. 그녀는 책에서 "'당신은 예술의 대중화에 대한 성찰을 담보한 팝 아티스트인가, 아니면 엔터테이너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며 이렇게 쓴다. "아무렴 어떤가, 당신들이 행복하다면!"

그녀의 답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미술은 생쑈"이고 "최고 미술품은 명품(브랜드)"이라며 "아이 러브 달러!"를 외치는 그녀를 일체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은 도발적 아티스트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날로 이벤트화하는 현대미술의 상업적 아이돌이라고 할 것인가.

책은 제목과 표지부터가 '낸시 랭스럽다'. 표지속 낸시 랭은 제목 그대로, 비키니 상의를 걸친 핀업걸(벽에 핀으로 꽂아놓고 보는 섹시한 여자의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앤디 워홀마릴린 먼로 초상이 프린트된 비키니 상의다. 책은 가벼운 필치로 '걸어다니는 팝아트'를 자처하는 낸시 랭의 '탈엄숙 미술론'을 펼친다. "낸시 랭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유아적 필체를 쓰거나 독자에게 "쪽""뽀뽀" 등을 마구 날리기도 한다. "예술도 비키니처럼 가벼웠으면 좋겠다"는 그녀는 유명해지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 돈과 명품 숭배도 감추지 않는다.

"미술은 인정투쟁 혹은 욕망이다. 어차피 달러가 세상을 지배했다면 나는 달러를 지배하겠다. 아이 러브 달러, 쪽!" 미와 소비 사이에 등호를 긋기도 한다. "아름다움이 밥 먹여주는 세상, 보여지는 것이 전부다. 현대사회에서 미는 더 많이, 더 고급스럽게 소비하는 것과 정확히 비례한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이 미를 향유하는 것이다." 미의 상징 비너스상을 갤러리아 백화점 로고가 새겨진 포장지위에 프린트한 뒤 비너스에게 쇼핑백을 들린 그의 작품 '쇼핑하는 비너스'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낸시 랭은 뉴욕에서 태어났고 홍익대를 졸업했다. 한국 이름 대신 낸시 랭을 스스로 지어 부르고 있다. 지난해부터 패션브랜드 '쌈지'의 아트디렉터를 겸하며 국내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자신이 디자인한 '낸시 랭' 브랜드를 선보였다. 방송출연과 CF 활동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대표적인 팝아이콘. 현재 케이블TV m.net의 '트렌드 리포트 必'의 진행을 맡고 있다.

책은 엔터테이너와 아티스트의 경계에서 욕망과 소비,스타덤, 그리고 컴플렉스 없는 무한한 자기애 등을 키워드로 하는 한 세대의 얼굴을 비춘다. 얼핏 그녀를 '아티스트 효리'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낸시 랭은 소비주의와 쾌락주의, 유아적 자기중심주의가 결합된 미디어상업주의 시대의 한 초상이다. 가식없는 솔직담대함에 손들어주고 싶은가, 아니면 선뜻 동의하기 힘든가. 다시 그녀의 말을 빌린다. "아무렴 어떤가, 그녀가 행복하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앙일보 이경희] 지도전쟁

마크 몬모니어 지음, 손일 옮김

책과 함께, 336쪽, 1만5000원

세계 지도에서 그린란드 북부와 남극의 대부분이 생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은 공 모양의 지구를 평면에 옮기다 보니 일어나는 지도의 왜곡 때문이다. 가로.세로.직각으로 뻗는 위도와 경도를 맞추는 '메르카토르 도법'에 따라 지도를 그리다 보면 점 하나에 불과한 남극점과 북극점이 무한정 넓어진다. 그러나 선원들이 항로를 지도에 쉽게 표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16세기에 개발된 이 도법은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유럽의 아메리카.아프리카 대륙 개척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메르카토르 도법은 서구 제국주의의 상징물로 정치적으로 공격받는다. 이른바 '지도 전쟁'이다. 저자는 16세기 과학계의 거인이었던 메르카토르의 도법을 둘러싼 사회사를 깊이 파고든다. 지도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일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앙일보 정재숙] 고바우 김성환의 편편상

김성환 글.그림,

인디북, 252쪽, 8500원

큼직한 코, 한 가닥 솟은 머리카락, 안경 걸친 네모난 민머리의 인물로 요약되는 '고바우'는 반백 년 세월을 한국인과 함께 한 시사만화의 주인공이다. 1950년 등장해 2000년 퇴장할 때까지 '고바우'는 우리나라 최장수 시사만화로 작가 김성환(74.한국시사만화가회 명예회장)씨의 분신 구실을 했다. '고바우'는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김씨의 대변인이자 서민의 친구였다.

그가 쓰고 그린 이 책은 '편편상(片片想)'이라 제목 그대로 역사의 조각, 생각의 단편 모음이다. '고바우' 영감이 그랬듯 시시콜콜하면서도 삶의 진국이 밴 일상사를 구수한 이야기체로 풀어놓았다. 작가는 "잠이 안 올 때 듬성듬성 읽다가 잠들면서 '그런 일도 있었나?' 하고 가볍게 넘겨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고 썼다. 인간사의 뒤안길 얘기,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에 가까운 일화가 소재지만 읽고 나면 뒤통수를 치는 서른일곱 편의 중량감이 제법 묵직하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타임머신같은 역사 가로지르기도 재미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물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란 말이 있거니와 간신은 죽어서 '욕설'을 남기는 것일까?" 같은 대목에서 옹골찬 말 속의 뼈를 쪽쪽 빠는 맛이 일품이다. 주로 중국.일본.한국의 옛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현재로 끌어와 교훈을 찾아내는 작가의 솜씨는 평소 그의 독서량과 생각의 품을 헤아리게 한다. 크고 작은, 다시 말하면 거시적인 시각과 미시적인 의외성이 서로 얽혀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그는 한 컷 만화로 다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앙일보 조우석] 구름의 역사

한운사 지음,민음사

341쪽, 1만5000원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1962년 발표된 '잘 살아보세'는 당시 실세 정치인 김종필씨가 "많은 이들이 함께 부를 큰 노래를 지어달라"는 의뢰를 함으로써 만들어졌다(134쪽). 작사를 의뢰받은 이는 한운사. 그는 당시 '현해탄은 알고 있다'로 라디오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했던 드라마 작가.

'남과 북''서울이여 안녕' 등 라디오.TV 드라마 극본과 영화 시나리오를 합쳐 그가 만들었던 것은 무려 100편 내외. '아낌없이 주련다''빨간 마후라'처럼 그들 중 상당수는 영화로 재탄생했다. 해서 스스로 붙인 문패가 '잡가(雜家). 경성대 예대 출신의 한운사(84.한국방송작가협회 고문)씨가 자신의 삶을 회고한 '구름의 역사'는 이렇듯 개인사이면서도 현대문화사를 짙게 반영한다. 그만큼 보편성을 인정할 만하다.

책은 2년 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연재물과 함께 신문.잡지 기고문을 덧붙였다. 짧고 스피드 있는 문장에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사실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이를테면 방송작가 활동 이전에 한국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던 그가 발굴했던 '무서운 젊은이'가 문학평론가 이어령씨.

당시 신출내기 대학생이었던 그가 평론가 조연현, 소설가 김동인 등이 좌지우지하던 기성문단을 융단폭격하는 글'우상의 파괴'를 부탁해 거침없이 지면에 실었다. 그걸 신호탄으로 문단의 세대교체가 빨라졌으니 한씨의 결단은 가히 문화사적 사건을 '연출'한 셈이다. 뒷얘기도 흥미롭다. 본래는 이어령씨 대신 당시 열혈 문청(문학청년) 박맹호(현 민음사 회장)씨를 섭외했다는 것, 그런데 박씨의 고사로 이씨에게 원고가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게 56년 무렵.

책 제목 '구름의 역사'는 한씨의 아호이자 필명인 운사(雲史)에서 따왔다. "한 가닥 구름 이는 것이 태어남이요,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 헛헛한 달관이 배어있으면서도 운치 넘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