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수탈기 일본인들이 조선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상인과 문학가, 깡패, 기생 등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더 이상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악랄하게 조선의 피를 빨았고, 일제 식민지 전략의 첨병 역할을 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군인들에 의해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풀뿌리 침략’, ‘풀뿌리 식민지 지배’를 통해 유지되고 힘을 받았다.

이 책은 다양한 사료를 통해 조선 내 일본인 군상을 파헤쳤다. 그들이 일제 식민지 정책과 일본인의 조선관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그들의 행동이 조선인에게는 어떻게 비쳐졌는지를 살폈다. 저자 다카사키 소지는 쓰다주쿠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 한일 근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그동안 일본인의 왜곡된 한국 인식 실태 등을 연구해 왔다.

일본 정부의 정책적 식민지 수탈은 이미 알려진 사실. 그러나 일본 서민들의 조선 약탈도 여기에 뒤지지 않았다. 초기 이민자들은 주로 조선인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벌였고, 그 횡포도 심했다. 조선인이 빌린 돈을 제때 갚지 않으면 그 사람 집 대문에 못을 박아 가두거나 사설 감옥에 구금했다. 1개월에 1∼2할의 높은 이자를 붙인 뒤 정작 기한이 다가오면 고의로 자리를 피해 변제일을 넘겼다. 나중에 이를 구실로 토지와 가옥을 약탈하기 일쑤였다. 일본 상인은 조선인을 경멸했다. 조선인 손님에 불친절했고 채무자는 종 대하듯했다. 많은 일본인이 위조화폐를 만들어 유통질서를 어지럽혔다. 이들은 조선의 경제를 우습게 여겼고 약탈과 수탈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문화적 풀뿌리 식민화는 일본 지식인, 종교인들이 앞장섰다. 1913년 조선문우회는 ‘조선개척지’라는 책을 발간해 조선사와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편견의 글을 퍼뜨렸다. 총독부 자금을 지원받은 기독교 전도사들은 조선인에겐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일본인에겐 조선에 대한 허위정보를 제공하는 등 어용사상 전도에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고려청자 등 문화재 도굴이 끊이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솜방망이 처벌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밥’이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군사·경제·문화적 지배를 위해 이민을 장려했고, 국민들은 적극 따랐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8만3000여명이던 일본인은 1919년 34만명을 넘어섰고, 1942년에는 75만명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결코 식민지 조선에 섞이지 않았다. 조선인은 착취의 대상일 뿐 인격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서 일본인의 이런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인 유지들은 사건 주모자들이 일본으로 송환되기 전 성대한 송별연을 베풀었고, 당일 인천 부두에는 일본인 환송인파가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왜 이렇게 ‘극악한’ 일본인들이 조선에 넘쳐났을까. 저자는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 대부분이 본국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조선에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선은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요 약탈의 대상이었다. 본토 일본인보다 더 악의적으로 조선을 수탈한 것도 이 때문이다. 3·1운동 직후 일본 내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터져나왔을 때도 정작 조선 내 일본인 사이에선 잠잠했다. 이들은 오히려 먹이를 놓칠까 노심초사했고, 차별과 약탈의 고삐를 더욱 바짝 쥘 뿐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지음/이규수 옮김/역사비평/1만2000원


조선 거주 일본인 가운데 조선에 대해 연민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 저자는 일본인을 셋으로 구분한다. 제1유형은 일본 제국주의가 퍼뜨린 왜곡된 식민의식을 그대로 믿고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와 달리 조선에서 나고 자라 순수하게 식민지 조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제2유형,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제3유형이다.

스스로를 제3유형에 속한다고 밝힌 저자는 “두 번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역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같을 수 없다. 이 책에서 일본인의 조선 약탈은 숫자와 통계로만 보여질 뿐, 학교와 직장, 마을 구석구석에서 날마다 벌어지던 약탈과 차별의 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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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생물 시간, 완두콩의 우성·열성 인자로 학생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멘델. 우리는 학창 시절 ‘멘델의 법칙’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렇게 익숙했던 인물임에도 그의 출생, 인생 행로, 선구적 학자가 겪었을 법한 시련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막연히 그를 우리와 이질적인 천재로 여기고, 고교 졸업과 동시에 잊어버렸다.

그레고어 멘델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천재가 결코 아니었다. 대신 7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완두의 육종 실험을 완성한 ‘끈질긴 노동자’였다. 1822년 오스트리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은 ‘농투성이’ 운명을 거부하고 학업과 명성을 탐했다. 19세기 유럽에서 돈 한푼 없는 젊은이가 교육을 받기 위해선 수도사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25살에 수도사들의 지식 습득을 장려한 성 토머스 수도원에 들어간다. 독학 끝에 교사 자격증 시험을 보지만, 천재의 재능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발굽이 있는 동물의 유용성을 논하라’는 필기시험 문제에 ‘코끼리는 짐을 실을 수 있는 훌륭한 동물’이란 황당한 답을 달았다. 설상가상, 소심한 성격으로 구술시험에 말을 더듬어 시험을 중도 포기하기도 했다. 멘델은 번뜩이는 천재성이 아닌 성실한 소걸음으로 목표에 다가간 인물이었다.

오늘날 일부 학자는 멘델을 식물 교배에 능한 아마추어 식물학자라고 폄하한다. 그의 명성은 1900년대 생물학자들이 제 이론을 내세우기 위해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더라도 7년간의 초인적인 자료 수집과 수학적 분석이 평가절하되지 않는다. 그가 수천 개의 완두콩을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았다면, 유전 현상을 깔끔한 비율로 설명하는 멘델의 법칙이 도출될 수 없었다. 저자는 그가 천재인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단 그의 천재성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인간 ‘멘델’을 되살린다.

그는 눈부신 지능 대신 학문에 대한 우직한 집념으로 유전학계의 거인이 됐다. 자신이 생물학의 대명사가 될 미래를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10대 소년 시절 “내가 무덤에서 일어나면, 내 뒤에 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기술이 평화롭게 번성하고 있음을 목격하는 즐거움이 있으리라”란 시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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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49) 시인에게 푸른 빛깔은 슬픔이지만 한편으로는 평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의 슬픔은 통곡의 고통과는 달라서 평화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불가피한 의례와도 같은 감정이다. 그래서 그에게 푸른 밤은 ‘둥근 평화’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슬픔의 터널이 된다. 그 지난한 여로가 담긴 세 번째 시집 ‘푸른 밤의 여로’(문학과지성사)는 푸르고 아늑하다.

“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 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이야, 이곳에 이르니 그리움이 죽고 달도 반쪽으로 죽는구나. 포구는 역시 슬픈 반달이야. 그러나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고 내 고향도 바로 여기 부근이야.”(‘푸른 밤의 여로- 강진에서 마량까지’ 부분)

푸른 밤의 끝 ‘마량’은 시인의 고향인 전남 장흥의 바닷가 포구 이름이다. 첫 시집 ‘정동진역’과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을 내면서 길게 뒤척이던 세월을 지나 고향 포구에 돌아온 시인은 이제 그리움도 죽이고 회한도 버리려 한다. 그렇지만 그가 지나온 길의 들끓는 여정이 없었다면 푸른 밤도 맞을 수 없었다. 그 여정에 대한 기록이 이 시집에 수록된 편편이요, 그 편편에 푸르게 채색된 시인의 감성이 이 시집을 환하게 빛낸다.

“비가 내린다, 비가/ 떠난 그녀가 좋아하던 봄비가 내린다./ 삼각지에 내리고, 노량진에 내리고, 내 창에도 내린다.// 내 창에 내리는 비는 지금/ 고년! 미운 년! 몹쓸 년! 하면서 내린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끌면서……길게 내린다.”(‘고년! 하면서 비가 내린다’ 부분)

길게 신음하면서 내리는 비, 그 비를 바라보며 미칠 것 같은 그리움을 달래는 시인의 고통은 짐짓 ‘고년!’이라는 속울음 같은 호통으로 미봉하려 하지만 그렇다고 쉬 평화가 찾아들지는 않는다. 그러니 “벚꽃 소리없이 피어/ 몸이 몹시 시끄러운 이런 봄날에는/ 문 닫아걸고 아침도 안 먹고 누워 있겠네”(‘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부분)라고 탄식할 수밖에. 그리움만 시인을 괴롭히는 건 아니다. 생계라는 밧줄에 목이 매인 장삼이사의 일상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현실의 고통마저 푸르디푸르게 채색하는 시인의 감성은 도심 한복판에서도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힘이다.

“잔바람이 아침 햇살을 돌리는 갈참나무숲 노래방. 이 노래방에는 밀실도 고급 음향기기도 없는데 나뭇가지 사이의 노래가 내 몸 구석구석까지 더듬는다. 더듬다가 웃옷을 벗기고 날 눕힌다. 황홀한 하늘도 보게 한다. 내 잠시 숲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떠는 사이, 어느새 뻐꾸기 마이크가 휘파람새 마이크로 바뀐다. 마치 폭스토롯풍이 발라드풍으로 바뀌듯. 새들 노래방에서는 이슬도 알몸이 되어 뒹군다.”(‘갈참나무숲 노래방으로 오라’ 부분)



‘이 세상에 없는 그리운 음악’을 듣고 ‘엄마의 분홍치마’ 속에서 잠을 청하려는 시인의 감성은 아무리 어두운 빛깔이라도 푸른 시로 승화시켜 낸다. 그리하여 시인은 짐짓 “푸른 밤을 푸르게 가야 한다는 건 또 얼마나 슬픈 거고 내가 나를 아름답게 잠재워야 하는 모습이냐”고 탄식하지만, 먼길을 돌아와 고향 항구에 서서 이렇게 귀환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허름한 유리창에선 더욱 높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 찬 바람 불면 더욱 슬프게 펄럭이는 어선의 깃발.// 난 그 풍선을 잡고 먼 나라로 가고 싶다./ 항구란 배만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 풍선을 잡고/ 더 따뜻하고 아늑한 나라로 출발하는 곳임을,/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면/ 예서부터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임을/ 배운다, 마량항 부둣가에 고동처럼 붙어서.”(‘마량항 분홍 풍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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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젊은 작가들 "우리는 친구"


한국과 해외의 젊은 작가들이 서로 친구처럼 어우러져 잔치를 벌인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006 서울, 젊은 작가들’ 페스티벌을 7일부터 13일까지 개최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일본), 야코프 하인(독일), 조엘 에글로프(프랑스) 등 외국작가 16명과 김연수, 천운영, 이만교 등 우리 작가 20명은 함께 봄나들이 가면서 문학에 대해 격의없는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동안 외국의 유명 작가를 초빙해 ‘한수 배운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행사를 ‘포럼’이 아닌 ‘페스티벌’로 명명한 이유다.

축제에 참여하는 이국의 젊은 작가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출생으로 명성보단 문학적 가능성이 돋보인다. 이번 행사의 목적은 각국의 거장이 될 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친숙하게 해 장차 우리 문학이 세계로 뻗어나갈 때 도움을 얻자는 것이다.

축제 조직위원장 박성창 교수(서울대 문학과)는 “국내외 작가들 사이의 완성도 높은 의사소통에 의의를 둔다”며 “축제기간 한국 작가와 친분을 쌓은 해외 젊은 작가들이 훗날 한국 문학의 대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막일인 8일과 9, 12일에는 한국 작가와 외국 작가 6∼7명이 섞여 원탁에 둘러앉아 ‘문학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10, 11일에는 경상도 영주와 안동에서 서예 실습, 다도, 선비촌 입주 등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부석사의 타종식을 참관한다. 마지막날 뒤풀이는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서 시인 성기완이 속한 록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가 장식한다.

초청 작가들을 한국에 알리는 행사도 동시에 진행된다.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작가 9명의 소설집 ‘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강 발행)가 이미 출간됐다. 폴란드 출신 올가 토르카축이 쓴 표제작을 비롯해 마르셀로 비르마헤르(아르헨티나), 마리오 데지아티(이탈리아) 등 다국적 단편이 실려 있다. 이 중 마르셀로 비르마헤르는 8일 첫 소설집 ‘유부남 이야기’ 국내 출간에 맞춰 기자간담회를 연다. ‘일식’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히라노 게이치로도 소설집 ‘센티멘털’(문학동네) 출시를 기념해 9일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팬 사인회를 마련한다.

한국문학번역원 윤지관(52) 원장은 “해외 작가들과 간헐적인 교류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해외 작가 2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는 처음”이라면서 “축제의 성과에 따라 매년 혹은 격년으로 정례화해 교류의 장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윤 원장은 또 “이번 축제를 계기로 교환 체류 프로그램을 더욱 활성화해 작가들 간의 유대감을 더욱 높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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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모 광고 문구처럼 사람들은 때로 모두가 동의하지만 자신은 동의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런 경우 어떤 사람들은 ‘집단’이라는 이름에 묻히는 편안한 선택을 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소신대로 자신의 ‘진실’을 말해 가시밭길을 걷기도 한다.

인권 변호사이자 고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딸인 케리 케네디의 ‘진실을 외쳐라―세상을 바꾸어가는 인권운동가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하며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진실을 부르짖는 용기 있는 51명의 인권운동가 얘기를 담았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인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 등 쉰한 명의 사연 속에는 그들이 어떻게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는지,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으로 훼손된 인권 문제 외에 살인기계가 되는 소년 병사 문제와 여성을 성노리개로 전락시키는 아프리카의 트로코시(Trocosi) 관습 등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잊고 사는 인권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특히 인권 활동을 벌이던 중 변화를 거부하는 과격파에 살해당한 디그나 오초아의 사연은 인간의 권리를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퓰리처상을 비롯해 500여개의 상을 받은 세계적인 사진작가 에디 애덤스가 2년여에 거쳐 찍은 이 인권운동가들의 사진이 각자의 사연과 함께 애잔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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