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내가 나를 못말린다/정병례 지음/184쪽·1만 원·푸르름

아름답다. 돌과 나무에 새긴 글과 그림의 세계가. 슬프다. 생모와 누이들의 이름조차 모른 채 전남 나주 개펄에서 자란 촌놈의 삶이. 뜨겁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도 도장 속 작은 세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 정신이.

전각예술가 고암 정병례의 자전적 글들과 그의 전각예술 작품들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이 책은 전각예술이 21세기 미디어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전각예술?’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은 ‘풍경소리’라는 지하철 포스터 연작과 베스트셀러 ‘미쳐야 미친다’의 표제어를 떠올리면 된다. 고암의 말처럼 전각은 글과 그림과 조각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특히 17, 18세기 중국 청대에 눈부시게 꽃핀 예술 장르다.

이 책은 근대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 ‘도장 파는 기술’로 전락한 전각의 전통을 부활시키면서 창의적 멀티아트로 재탄생시킨 한 예술가의 고군분투기다. 또한 비주류로서 받아야 했던 상처와 설움을 삶의 지혜로 전환시키고자 몸부림친 고독한 영혼의 기록이다. 조금은 자기 연민이 섞이고 조금은 투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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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재스퍼 리들리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3년 12월
절판


발칸반도 지역의 여석개 공화국(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마케도니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은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연방으로 구성.

6개의 공화국, 5개의 민족, 4개의 언어, 3개의 종교, 2개의 알파벳사용(동슬라브와 남슬라브 일부(불가리아인과 세르비아인)는 비잔틴과 동방정교회의 권내(圈內)에 들어가 키릴문자를 사용하였고, 나머지 남슬라브(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서슬라브는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교 세력권 내에서 라틴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쪽

로마 카톨릭을 신봉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달미치야는 그레고리력을 택했으나, 러시아나 그리스처럼 정교회를 믿고 있던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본테네그로와 불가리아는 율리우스력의 사용을 고집했다. 율리우스력은 16세기에는 그레고리력보다 10일이나 늦었으나 20세기 들어서는 3일 더 늦어졌다.-.쪽

지금은 베오그라드의 외곽 지대가 된 다뉴브 강 건너편의 소도시 제문(Zemun)은 여전히 크로아티아에 속한 오스트리아 영토로 남아 있었다. 지금도 제문의 사람들은 이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유럽은 제문에서부터 시작한다."-.쪽

프라하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가 팔라츠키가 슬라브족의 자유 회복을 목표로 '범슬라브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으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움직임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목표가 무엇이든 실질적으로는 권위적인 러시아 황제를 돕기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러시아의 채찍'이라고 꼬집었다.

=>프라하에 살게 되어서인지 이제는 프라하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관심이 생깁니다.-.쪽

1878년 베를린에서 열린 강대국 회의는 발칸 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회환을 남겼다.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는 독립 국가로 인정했으나, 불가리아는 불가리아와 루멜리아(Rumelia :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등 구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분리시킨 뒤 터키의 지배를 원칙으로 하되 자치권만 허용하자고 합의했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터키의 영도로 인정하지만 치안이 안정될 때까지는 오스트리아가 다스리도록 했다. 알바니아 또한 터키의 속국이 되었으나, 몬테네그로는 522년간 그랬던 것처럼 독립 국가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쪽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비해 타종족간의 불화가 훨씬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서 타종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 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결혼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의 종족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비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엇다. 타종족간에 전투가 벌어지면 아내는 자연스럽게 남편의 종족 편에 서서 자기 종족에 대한 증오심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다민족과 살면서 생기는 독특한 문화네요.-.쪽

"울음을 그치고 잠자지 않으면 '체사르그라드의 검은여왕(Black Queen of Cesargrad)'이 잠아간다"

이 검은 여왕은 1573년 농민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체사르그라드 성에 살고 있던 바르바라 에로디(Barbara Erdy) 백작부인이었다. 폭동을 주도했던 구베츠의 추종자들은 체사르그라드 성에 쳐들어가 집달관을 목매달아 죽이고 성을 불질러 버렸다. 티토가 살았던 동네의 언덕 위에서 성의 잔해를 훤히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끔 친구들과 폐허가 된 성에 가서 불을 질렀던 농민들의 흉내를 내면서 놀곤 했다. 티토는 폭동의 비극적인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구베츠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거둔 이야기나, 그의 추종자 6,000여 명이 쿰로베츠의 동네 어귀에서 효수당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었다..-.쪽

그 이후에도 쿰로베츠에서는 또 다른 폭동이 일어났다. 부다페스트의 헝가리인들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통치하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1848년 혁명 때 혁명 진압에 공헌한 대가를 헝가리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그의 각료들은 헝가리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헝가리의 모든 특혜를 크로아티아인들은 철저히 배제한 채 헝가리인들에게만 부여했다. 크로아티아 총독을 헝가리 수상이 임명했기 때문에 헝가리 정부의 크로아티아인들에 대한 통치는 날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슬로베니아는 이런 분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00년 스코틀랜드 고지의 많은 젊은이들은 1692년에 일어났던 글렌코 학살(Massacre of Glencoe), 1746년의 컬로든(Culloden) 만행, 그리고 19세기 초 고원 개척지로부터 소작인들을 축출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적 과오에 대한 보복보다 목전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자리가 급했다. 미국이란 신천지를 찾아가는 길 밖에 없었다. 티토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쪽

무정부주의자들은 절대군주나 왕실 가족들의 안위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수세기에 걸쳐 최고 통치자의 암살은 정치적인 무기가 되었고, 19세기 말에는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정말 그 당시 최고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지요. -.쪽

레닌은 애초부터 의회민주주의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역사는 우리에게 일정 기간의 독재 체제 없이는 무산 대중이 집권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착취자들이 그랬듯이 끈질긴 저항과 어떤 종류의 강압적 수단이라도 서슴지 말아야 하낟. 기득권을 양보할 뜻이 전혀 없었고, 특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착취자들에게 협력의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649년의 영국이나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보았듯이 혁명의 중심 세력의 부르주아지는 외세를 통해 반혁명을 도모했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조금의 협상통로로 령어 주지 않았다."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당 독재를 뜻했으며, 볼셰비키가 점령한 지역 내에서는 이런 행태들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쪽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Moravia)에 더불어 헝가리 통치하의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Ruthenia: 카르파티아 산맥과 우크라이나 일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의 면모를 갖췄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연합에 오스트리아 제국에 편입되어 있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영토에 포함시켰다. 헝가리 남쪽 보이보디나도 유고슬라비아가 차지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트리에스테와 이스트라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쪽

세르비아 페타르 1세의 아들이자 왕세자로서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을 지휘했던 알렉산다르 1세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즉 유고슬라비아의 왕이 되었다.
1918년 12월 1일 새로운 왕국이 출번했다.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세 나라는 후에 '소삼국협약(The Little Entente)'을 맺기도 했다.-.쪽

세르비아가 새로운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고, 연합국의 의지이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은 전쟁중에 보여준 세르비아인들의 용맹을 높이 샀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침공을 잘 막아냈고, 독일이 오스트리아 지원에 나서자 눈 덮인 산을 넘어 아드리아 해안까지 후퇴한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영웅적으로 저항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쪽

1920년 여름 볼셰비키 지지자들은 시민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러시아 전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국 정부들은 하는 수 없이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을 현실로 받아들였다.-.쪽

몬테네그로 출신으로서 베오그라드대학에 다녔던 밀로반 질라스는 공산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 뒤 당시의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상주의자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피해를 당해서라기보다는 사회의 부조리로 많은 사람들이 억압을 받고 있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컸지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해방시켜 보다 편안한 생활을 보장해 주고, 평등과 형제애를 진작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서 모두 혁명가가 된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초기에는 야망을 품거나 사리사욕을 탐하여 공산주의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지요."-.쪽

여러가지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티토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1962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민족적인 과제를 해결했다."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공산당이 집권하여 유고슬라비아연방을 결성하기 이전인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세르비아 체트니크, 이슬람교도 파시스트들이 살육전을 벌여 100만 명에 가까운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이슬람교도들을 서로 죽였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소망이 소수 민족이란 개념을 뛰어넘어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냈다. 정부의 홍보 담당 기관들도 이제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이슬람교도를 유고슬라비아인으로 한데 묶는 데 힘을 기울였다.-.쪽

그러나 모든 곳에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동류 의식이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슬람교도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알렉산다르 1세와 파울 왕자가 통치했을 당시의 세르비아인들의 위세가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연방 수도, 중앙 정부의 주요 기관, 국영기업, 노조, 은행 등 모든 조직들이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세르비아 시대의 도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우려한 티토도 소공화국에 자치권을 주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연방 헌법을 만들었다. 중앙 정부의 견제와 함께 소공화국의 자율권 확대를 위해 헌법이 자주 바뀌었다. 1946년 이후 개정된 모든 헌법들이 이런 취지를 확실하게 담고 있었으며, 티토 또한 공산당이 지배하는 한 소공화국들끼리의 충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항상 문제를 야기하는 세력은 지식인, 학생, 작가, 젊은이들이었다. 티토나 카르델즈가 모색하고 있던 새로운 길과 방향이 전혀 다른 노선을 내세워 혼란을 야기했던 질라스 같은 사람들을 통제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지 기반이 확실한 민족주의 이론을 앞세운 작가들을 다스리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1967년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은 1840년대 크로아티아가 문예부흥 시기를 맞았을 당시 결성되었던 '크로아티아 문화연합회'를 부활시켰다.

여느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운동은 늘 언어 문제에서 시작한다.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 차이는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에서의 지방 사투리나 남부 독일과 북부 독일에서 사용하는 독일어 차이만큼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150년 동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지식인들은 두 개 언어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펼쳤다. 1850년 세르비아의 사전 편집자 부크 카라드지치(Vuk Karadi)가 크로아티아의 지식인들을 비엔나에서 만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는 하나의 언어이지만, 두 개의 알파벳으로 사용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후 크로아티아에서는 라틴 알파벳을, 세르비아에서는 키릴 문자를 공식 문자로 사용하다가 104년이 지난 1954년 노비사드에서 다시 한번 확인 절차를 밟았다.-.쪽

혁명의 해인 1968년을 맞아 새로운 균열 현상이 다시 나타났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반스탈린 현상이 가장 늦게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이다. 1965년 강경파 스탈린주의자 안토닌 노보트니가 권자에서 쫓겨나자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슬란스키 시대 때 재판을 통해 티토주의자라는 혐의로 처형되었던 인사들이 사후 복권이 되면서 '자유'라는 이름의 산소가 상당량 유입되었다.
1968년 1월 5일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개방운동을 선보였다. 전국이 감정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공산주의자였던 두브체크와 동료들은 소련에 대한 공격을 삼갔으나,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던 문인들이 소련과 사회주의를 공격하는데 질라스만큼이나 앞질러 갔다.-.쪽

8월20일 밤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쳐들어갔다. 소수의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군들이 동참하고 있었다. 수천명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나 소련군의 탱크를 막는것은 불가항력이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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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다종교·다문화의 나라

- 유고슬라비아 -

김상헌(한국외대 유고어과 강사

 

1. 다민족성

지금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SFRJ, 이하 '구(舊) 유고연방'으로 칭함)만큼 하나의 국가라는 틀 안에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교,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나라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과 같은 유사한 국가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구 유고연방과 아메리카합중국의 가장 큰 차이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적 주체들'이 하나의 전체로써의 '다양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이 '개별적 주체들'을 동일한 조건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극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메리카합중국의 경우에는 개별적 주체들과 다양성간의 관계가 비교적 원활한 것이었다면, 구 유고연방은 그렇지 못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구 유고연방이 현재의 국가형태로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주요한 원인은, 각각의 공화국들이 갖고 있는 개별적인 특성과 이들이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명으로 합체했을 때 나타나게 되는 전체적인 하나로써의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칸반도 지역의 여섯 개 공화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은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남슬라브인의 나라'라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연방을 구성하긴 했지만, 이는 그 시작부터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결합된 구 유고연방의 민족들은 남슬라브어 계통에 속하는 비교적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구 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각 공화국들은 나름대로의 민족적 정체성과 서로 다른 개별적 역사경험들을 지니고 있었다. '남슬라브 민족 공동의 국가건설'이라는 목표 하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에 의해 주도된 그와 같은 인위적인 민족결합은, 어찌 보면 그의 사후(1980년 5월 4일)에 벌어지게 되는 처절한 내전과 각 민족들의 독립의지를 낳게 하는 자연스러운 전제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제는 엄연한 독립국가인 슬로베니아 공화국, 크로아티아 공화국,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민족구성은 각각 약 91%, 약 80%, 약 65%로 해당 민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연합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벌어진 보스니아내전은,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연방제가 실시될 때 다른 공화국들이 다수민족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반면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의 경우에는 '보스니아(Bosnia)'와 '헤르쩨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공화국이 구성되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민족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여타 공화국들과는 달리,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의 경우에는 슬라브계 이슬람교도가 약 38%, 세르비아계가 약 40%, 크로아티아계가 약 22%를 차지함으로써 특정한 민족을 중심으로 한 구심점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2. 다종교성

구 유고연방에 속해 있던 민족들은 남슬라브 민족이라는 커다란 민족갈래 분류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또한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이질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주요한 종교는 로마 가톨릭인 반면, 마케도니아 공화국,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연합,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 공화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동방정교의 신자들이다. 또한 약 500년 동안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로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 지역에는 다수의 슬라브계 이슬람교도가 거주하고 있다.

395년 서로마와 동로마로 해체된 로마제국은 구 유고연방의 공화국들을 종교적으로 양분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민족적 대립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구 유고연방을 종교적으로 살펴보면,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 공화국이 서로마제국(로마 가톨릭)과 동로마제국(동방정교)의 경계가 되는 셈이다.

중세보편종교의 기본적인 사상은 현세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의 민간신앙에서는 다른 세계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면서도 현세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중세의 종교는 현세를 부정하고 오히려 내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과 같은 중세보편종교들은 구 유고연방 지역에서 기독교화 혹은 이슬람화 될 때까지 민중들에 의해 믿어졌던 민간신앙들을 적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 변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민중들의 삶 속에 여전히 다양한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남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중세보편종교 이전부터 행해졌던 세시풍속이나 주술적 행위들에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의 관념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원주민은 일리리아 민족으로, 이미 기원전 3세기에 해안지역에서는 로마와, 내륙지역에서는 켈트족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7세기에 슬라브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 왔지만, 사회·정치적인 통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원후 9세기경에 '크로아티아(Hrvatska)'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문헌상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미 이 지역은 7-9세기에 걸쳐 북부지역은 프랑크왕국, 동부지역은 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925년 크로아티아의 토미슬라브(Tomislav) 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크로아티아의 통일이 이룩되었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기원후 6세기경에 사바(Sava) 강 유역을 중심으로 남슬라브 민족의 하나인 슬로베니아 민족이 발칸반도에 정착하였으며, 이들은 627년 슬로베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프랑크왕국 지배 하에서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서유럽문화권에 편입되게 되었다. 이후 슬로베니아는 10세기경에는 신성로마제국, 14세기에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슬로베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 유고연방의 한 공화국을 구성하게 된다.

세르비아 지역 역시 원래 일리리아 민족의 영토였지만, 6∼7세기에 슬라브 민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9세기경에는 로마의 가톨릭교회콘스탄티노플정교회 사이에서 고민했던 세르비아는, 9-10세기경에 불가리아중세왕국에 그리고 11-12세기경에는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1219년 성(聖) 사바(Sv. Sava)가 세르비아의 독립 대주교가 된 이후 비로소 세르비아는 동방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교회로 정리되었다.

1389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이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대패한 것을 계기로 약 500여년에 이르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오랜 통치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민족은 동방정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믿음과 정신을 잘 보존하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 지역은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일리리아 민족의 영토였으나, 로마제국에 정복당한 이후에 이 지역의 대부분은 달마치아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보스니아 지역과 헤르쩨고비나 지역은 15세기 말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병합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16-17세기를 걸치며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 합스부르그,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결의 장소로 변모하였으며,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지속된 보스니아내전은 그러한 대결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 유고연방을 구성했던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지역적으로는 고대 알렉산더 대왕이 통치했던 왕국의 일부에 속하지만, 현재 이 지역에 거주하는 마케도니아 민족은 그리스계통이 아니라 6-7세기경에 이 지역으로 이주한 남슬라브 민족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 동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을 당시에 이곳의 민중들은 동방정교로 개종하였다. 9세기경에는 불가리아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1세기경에는 다시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후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가리아왕국과 세르비아중세왕국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았고, 1355년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정복되어 약 500여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민족의 영향권 하에 있어야만 했다.

3. 다문화성

다민족성과 다종교성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구 유고연방은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이념과 체제 하에 각기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하지만 1980년 5월 4일 대통령 티토의 사망 이후에,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독일이 통일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해체되는 등의 사회적 변혁 속에서 1990년대 이후에 구 유고연방의 각 민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한 노력들은 각 공화국들의 독립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개별적인 국가로써의 독립을 이룬 이후에는 자신들만의 문화적 정체성 찾기에도 범민족적·범정부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 어휘인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를 그대로 번역한 말로써, 본래는 '경작'이나 '재배'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교양'이나 '예술' 등의 다양한 의미로 확대되었다.

영국의 인류학자 타일러의 저서 "Primitive Culture"에 따르면, 문화란 '지식·신앙·예술·도덕·법률·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이다. 이들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구 유고연방에서 가장 두르러진 특징을 보이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더불어 어떤 민족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유럽에 속해 있는 문명권에서는 종교의 역할이 사회적·문화적 특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해당 민족의 문화적 특질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 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국가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서유럽문명권에 속해 있으면서 이들 문화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반면, 동방정교를 국교로 삼으며 동로마제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종교수용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비잔틴문화권을 벗어날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문화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 가운데 '언어'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언어는 외적인 영향들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상징화를 통해 민중들 사이에서 학습되고 전달된다는 특징을 보인다. 구 유고연방 각 공화국들의 경우처럼, 수세기에 걸쳐 외세의 지배 하에 있었던 민족들이 자신들만의 언어를 지켜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 유고연방의 각 공화국 민족들은 현재 고유한 언어문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이들 민족들이 지니고 있는 언어문화적인 저력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물론 오랜 세월의 이민족 지배와 유럽권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현지어에 적지 않은 외래어가 포함되어 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추상적인 개념의 언어문화 이외에 물질문화의 측면에서도 구 유고연방의 각 공화국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지켜내고 있다. 추상적인 것이든 혹은 물질적인 것이든, 개별 민족의 문화를 구성하는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독자적인 기능과 작용을 가지면서 내부적으로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적·기능적으로도 통합적인 전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인류학자인 크로버는 문화를 지역이나 집단에 따라 특유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지역적인 분포로 보아 비슷한 문화패턴을 지닌 것을 '문화영역' 또는 '문화권'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러한 패턴들 가운데 어느 정도까지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민족성'이나 '국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질성 내지 독자성을 전제로 하는 패턴은 장기간에 걸쳐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외세에 지배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던 구 유고연방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의 여러 문화적 요소가 지니고 있는 상관관계에 어떤 모순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확대되면, 그러한 통합성은 쉽게 무너지고 변화하게 마련이며, 또 다른 새로운 통합형태가 형성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 유고연방 각 공화국의 문화의 양상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들이 외부 요소들에 의해 도전받고, 확대되거나 다소간의 변형을 이루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통합성의 형태는 구조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 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각 민족이 진고 있는 또 하나의 문화적 저력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니는 '민족성' 내지 '국민성'도 보다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면 변화하게 마련이다. 문화적 양상이 쉽게 변화하기 어려운 것이라고는 할지라도, 물질적인 여러 문화적 요소들의 변화는 지각할 수 있는 반면에 의식과 관련된 문화적 요소들은 우리가 쉽게 변화의 정도나 양상을 깨닫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구 유고연방을 구성했었던 각 공화국들을 종교적인 구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 차이가 현저함을 알 수 있다. 즉 슬로베니아 공화국이나 크로아티아 공화국 같은 로마 가톨릭 문화권에 속해 있는 지역의 민족들이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민족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세르비아 공화국이나 몬테네그로 공화국, 보스니아 공화국의 일부, 마케도니아 공화국 같은 동방정교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의 민족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보다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을 서양과 동양문화권의 차이점이라고 인정한다면, 구 유고연방이 위치해 있는 발칸반도는 서양과 동양문화권이 혼재해 있는 지역이라고 감히 정의할 수 있겠다.

구 유고연방, 특히 이 지역의 모든 종교문화들이 혼재해 있는 보스니아 공화국은 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보스니아 공화국은 여러 문화 분야에 걸쳐 종교적인 영향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보 안드리치라는 문학 작가이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인 '드리나 강의 다리'는 보스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종교적 문제와 그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란 평화로운 시기에는 서로 화합하고 도움내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일단 갈등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반목과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만다. 비록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티토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주의 시절에는 이 지역의 모든 민족들의 각기 다른 문화가 조화를 이루었다. 문화적 조화라는 것이 강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러한 강제적인 문화적 조화는 결국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임이 구 유고연방의 해체를 통해 증명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문화적인 다름이 구 유고연방을 해체로 이르게 한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고대 일리리아 민족의 문화적 흔적으로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모두를 포함), 합스부르크 제국과 슬라브 민족의 문화,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외부의 문화적 영향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 바로 구 유고연방 지역이다.

내용출처 : [기타] http://segero.hufs.ac.kr/scripts/article_view.asp?JNAME=IANR&ISSUEID=133&SECID=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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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 읽은 책들을 정리하면서 저의 취향도 점점 변하고 있다는것을 느꼈습니다.

26권중에 소설 4권 , 비소설 15권, 만화 7권

예전같으면 소설을 더 많이 선호했는데,
요즘은 일반상식을 넓히려는 의미에서 비소설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비소설을 통해서 몰랐던 부분들을 많이 배우게 되는것 같아요.
물론 소설은 제 상상력과 대리만족을 더 충족시켜주고요.

2006년 5월 첫째주에 읽은 책들 -> 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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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재스퍼 리들리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3년 12월
절판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횡포도 싫지만 스탄린과 소련의 만행에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공산주의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티토가 냉전을 초래했던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비동맹, 제3세계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했던 배경이다.
-.쪽

"처칠은 세계 공산주의의 적이자 우리의 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파트너를 가져야 한다면 처칠이 단연 으뜸이다. 나는 그를 여러 번 상대해봤다. 훌륭한 정치가임에 틀림없다."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을 뽑으라면 처칠과 티토인것 같네요.-.쪽

1980년 티토는 88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간했다.거인의 마지막 길을 마거릿 대처 수상이 끝까지 지켜봤다. 두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헌 양복 한 벌이 유품으로 전해졌으나 다섯번째 부인 요반카에게는 그것조차 없었다. 공산주의자의 마지막다웠다.

=>아름다운 죽음이네요.-.쪽

1792년,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혁명의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경제 현상으로까지 확산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사회가 이분화되는 것을 막고, 모든 재화를 공동 소유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 이후 5년에 걸쳐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는 여러가지 비전의 제시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이 구체화되어 갔다.-.쪽

1848년 1월 브뤼셀에 살고 있던 중산층 젊은이 두 사람이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란 간단한 팸플릿을 찍어냈다. 라인란트(Rhineland : 라인강 서쪽 지역)의 진보적인 신문에 기사를 쓰고 있던 29살의 언론인 카를 마르크스와 맨체스터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독일 사람의 아들인 28살의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자기들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쪽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를 선보였다. 일찍이 여러 사람들이 제안했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아닌 과학적 사회주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호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인 필연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인류는 원시적인 공산 사회의 형태로 집단 생활을 시작했고 모든 재화 또한 공동 소유였으나, 노동이 분화되는 과정을 거쳐 소수가 주인이 되고 다수가 노예가 되는 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공동 소유에 종말을 고했다고 말했다. 노예 제도를 대체했던 봉건주의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가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상인들도 근세에는 주로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 정치권에서 자본가들을 지칭하던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은어를 그대로 이용했다. 이와 같이 한 단어의 뜻이 논란의 와중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 의미를 바꾸어 버린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쪽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산업을 발전시키고 봉건주의를 대체한 부르주아지의 업적을 한껏 찬양했으나, 이제 산업의 최선봉에 서 있는 공장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에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논리도 빠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거 어떤 지배 계층도 자진해서 자신들의 힘과 이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과격한 정치적인 변혁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영국의 시민전쟁과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부르주아지도 왕이나 봉건 영주들이 독점하?있던 권력을 나눠 가지기 위한 방편으로 폭력을 이용했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또한 부르주아지와 권력을 양분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여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층이 되면 사회주의가 터전을 잡게 되고, 계급 없는 공산주의로 순조로운 발전을 할 수 있어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쪽

파리코뮌, 국제노동자협회 그리고 마르크스의 원리는 티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두 가지 요인 중 하나였고, 또 다른 하나는 발칸 반도를 수놓았던 격동의 역사이다.-.쪽

17세기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모든아이들의 생년월일이 등재되어 있는 교회의 신생아 기록부에는 티토의 생일이 1892년 5월 7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1913년 티토가 오스트리아군에 징발되었을 때 그의 병적부는 생일을 1892년 3월 5일로 기록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경찰은 그의 신상면세서에 그의 생년월일을 1892년 3월 12일이라고 적었으나 1943년 독일의 점령 당국은 3월 7일로 정정햇다. 그러나 티토가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자 5월 25일이 그의 공식적인 생일이 되어 버렸다. 파르티잔들이 처음에 그의 생일을 잘못 알고 그날 파티를 연 후 관행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별다른 동기가 있어서 그렇게 사용했던것은 아닌것 같습니다.생일이 여러날이네요. 선물 많이 받겠어요. ^^;;-.쪽

"한 번은 예배가 끝난 후 뚱뚱하고 큰 몸집을 가진 신부의 집전 의상을 빨리 벗기지 못했지. 그랬더니 신부가 화를 내면서 나의 뺨을 갈기더군. 그 뒤로 나는 교회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네."
이런 씁쓸한 기억이 티토를 공산주의자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그가 가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이 어린 시절 신부가 자기에게 했던 부당한 행동을 기억나게 만들었을 뿐이다.

=>때론 어른들은 부당하게 어린이들을 대합니다. 그들이 약하고 무지하다고 말이죠. 하물면 종교인이 그런행동을 보였다는 것이 부끄럽네요. -.쪽

8일 동안 감옥에 감금된 다음 장례식에서 소란을 야기했다는 죄목으로 지방 법원에 기소되었다. 마침 담당 국선 변호사가 가톨릭을 증오하는 동방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그들을 고발한 신부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을 털어놓은 뒤 최선의 방어책을 알려주었다. 지방 법원이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르는 법, 이 일련의 사건이 티토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6년에 걸친 포로 생활과 여행 그리고 모험과 역경을 이겨낸 티토는 크로아티아로 돌아가 좋은 일자리를 찾은 뒤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 조용한 보금자리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다음부터는 간헐적으로 홍보 전단을 배포하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는 파업에 관여하기도 했다.-.쪽

이런 과정에서 그는 흔들리는 당 지도부와 투쟁이라는 부질없는 환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동료들이 파업을 하다가 직업을 잃고, 데모 군중들이 거리에서 곤봉에 실컷 두들겨 맞는 대가로 크렘린의 소수 지배층이 러시아의 국익만 챙기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 도대체 어떤 가치 기준으로 이런 현실을 이해했을까? 그는 당을 떠나 가족, 아내, 일에만 몰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티토는 벨리코트로이스트보에서 좋은 고용주를 만나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구했었다. 그러나 이때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었다면 그가 파경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에 도착하자마자 아내 폴카가 낳은 첫아이가 죽었다. 다음해 낳은 둘째 사내아이도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이질로 죽었다. 또 그 다음해에 낳은 셋째 사내아이 힌코(Hinko)도 낳은 지 며칠 만에 저세상으로 갔다. 1923년에 태어난 넷째 여자아이 즈라티차(Zlatica)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오래 살았으나 역시 디프테리아로 2살을 넘기지 못했다. 아이들의 운명이 하나같이 티토의 형제나 누이, 크로아티아의 오지 마을에 사는 농부의 자식들과 다를 바 없었다.-.쪽

즈라티차의 죽음이 티토를 매우 힘들게 했다. 위안을 받을 만한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최후의 승리를 믿고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 발전의 신이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후에 데디예르에게 금발머리를 한 귀여운 어린 딸 즈라티차의 죽음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의 관을 가지고 공동묘지로 갔지. 내 손으로 묻었어."
여윳돈이 생기자 티토는 아이들 무덤에 묘비를 하나씩 세웠다. 1924년에 태어난 다섯번째 사내아이 자르코(arko)가 티토와 폴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중 유일한 생존자다.
좋은 직업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결혼 생활까지 순탄하고 아이들 모두가 잘 자랐다 하더라도 티토는 무미건조하고 조용한 생활에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험심이 강한데다 특출한 지도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료의 장례식에서 한 연설과 8일간의 구금이 그에게 공산주의 선동가를 딱지를 붙였다.-.쪽

티토가 33살의 나이에 혁명전사의 길을 걷게 만들어 준 마지막 사람은 오스카 로젠버그다. 그는 유대교를 능멸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해 버리는 공산당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1942년 폴란드에서 그를 독가스실로 데려가 죽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다.-.쪽

"우리는 오랫동안 낮에는 강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독이 엄습하는 숨막히는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때 우리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과 우정이 충만하며, 성실성이 인정받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 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궁의 시계 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죽어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 부당한 처우, 고독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훗날 소련에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죽어 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류의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협잡꾼 아니면 파시즘의 정보원이라고 속삭이면서 위안을 삼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기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사회주의의 모국 소련은 천당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티토는 럭스 호텔에서 음흉한 밤의 행사가 진행되기 이전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티토에게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가 중요한 임무를 맡으라는 명령이 내린 지 6개월이 지난 1937년 봄까지 코민테른 관계자들의 숙청은 없었다.-.쪽

지금까지 만나 봤던 정치인들 중에서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는지도 물어봤다. 티토의 대답은 이랬다.
"당연 처칠이지. 그는 위대한 정치가야. 물론 우리의 적이고 오랜 세월 공산주의의 적이기도 했어.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적이야. 정치가라면 아마 모든 사람이 그런 적을 갖기를 원할 거야."-.쪽

미소간의 냉전이 도를 넘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달려가는듯 하자 티토는 중립 노선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3세계(Third World)'라고 알려진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는 물론 유럽의 좌파,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평화주의자들 수백만 명이 이 노선에 줄을 섰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미 제국주의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소련을 가능성 있는 나라로 본 것도 아니었다.-.쪽

여러가지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티토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1962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민족적인 과제를 해결했다."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공산당이 집권하여 유고슬라비아연방을 결성하기 이전인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세르비아 체트니크, 이슬람교도 파시스트들이 살육전을 벌여 100만 명에 가까운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이슬람교도들을 서로 죽였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소망이 소수 민족이란 개념을 뛰어넘어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냈다. 정부의 홍보 담당 기관들도 이제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이슬람교도를 유고슬라비아인으로 한데 묶는 데 힘을 기울였다.-.쪽

1943년 학살극과 198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인종 청소는 티토라는 걸출한 인물이 없었던 시대의 비극이다. 이 45년 동안 유고슬라비아연방을 만들어 유고슬라비아인들에게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깨우쳐 줄 수 있는 사람은 티토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쪽

몇 년전에 비해 지금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티토에게 굉장히 높은 점수를 주고 잇다. 역사의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와 모스타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몇 년 사이에 30만면이 넘는 사람들이 도륙당하는 나라에 사는 것보다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몇몇 정치인들이 구속당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다고는 하나 무차별 포격과 저격수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집 밖에 함부로 나갈 수도 없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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