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메타피지컬 클럽/루이스 메넌드 지음·정주연 옮김/648쪽·2만2000원·민음사

187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하나의 모임이 있었다. 윌리엄 제임스와 올리버 웬들 홈스, 찰스 샌더스 퍼스가 거기에 속하였다.

‘메타피지컬 클럽’으로 불렸던 이 비공식 토론 모임은 고작 9개월 정도 지속되었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나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하나의 사상이 태어났다. 그것은 교육, 민주주의, 자유, 정의, 포용에 관한 미국인의 관점을 바꾸어 놓았으며 학문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문화적 다원주의를 ‘현대 미국’에 선물했다.

법학자 홈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제임스, 화려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 기호학의 창시자 퍼스. 그리고 제임스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철학자 겸 교육학자 존 듀이.

이들 네 사람은 사상이 ‘저 멀리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포크와 나이프 또는 마이크로칩과 같이 사람들이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해 낸 도구라고 생각했다. 사상은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는 게 아니라 세균처럼 인간이라는 매개체와 환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상은 단지 실재에 대한 일시적 반응이었다. ‘사상과 신념을 신성한 제단에서 끌어내려 인간적 수준으로 타락시켰다.’

이 책은 미국의 사상을 현대로 옮겨 놓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네 사람의 삶을 관통하며 오늘날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으로 불리는 ‘미국의 정신’이 그 선조들의 강렬한 삶으로부터 형성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다. 네 사람에 대한 전기이자 동시에 남북전쟁 이후 100년에 걸친 ‘현대 미국’의 탄생의 역사다.

저자는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책을 통해 미국 지성사의 네 거인에게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위대한 반대자’로 불리는 홈스의 취미는 독서를 빼고 연애밖에 없었다든지, 제임스는 연애에 관한 한 이미 다른 사람의 화살이 꽂힌 목표물만을 고르는 안타까운 버릇이 있었다든지, 말년을 모르핀에 기대었던 퍼스는 친구들이 거두어 준 돈으로 연명했다든지….

프래그머티즘의 면도날로 이 세계와 형이상학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도려내고자 했던 제임스. 그는 진리는 ‘유익한 것이라고 입증된 믿음’에 붙이는 이름이라고 공식화했다.

“예컨대 우리가 인과관계를 믿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이익이라고 우리의 경험이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는 현금 가치가 있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다.”

듀이도 생각과 신념이 항상 이익을 위해 작용한다고 믿었다. 생각은 행위를 따라가는 사후의 ‘감언이설’ 같은 것이었다.

홈스 역시 철학과 논리학이 사람들의 실제 선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판결을 내리고 이후에 원칙으로 정하는 것이 바로 관습법의 장점이다.” 퍼스에게는 생각은 물론 사물조차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 그 행위들의 합이었다.

네 사람의 사상은 연방주의의 지적 성공을 대표한다.

“우주는 다원적이다. 실재는 제각각이다. 사물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것과 함께 있고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없다. 다원주의적 세계는 제국이나 왕국보다 연방공화국에 가깝다.”

그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사상의 근본 가치는 바로 관용이었다. 그들은 오류가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한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류에 대해 더 큰 사회적 여지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 19세기적 사고방식은 일방주의의 독단으로 흐르는 듯한 21세기의 미국에서도 살아남을 것인가?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필리핀 제도를 차지했을 때 일찍이 미국의 현대정신이 확장, 집적, 거대화를 향한 까닭 없는 충동에 휘말리고 있음을 우려한 것은 제임스였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모든 형태의 큰 것과 힘 있는 것에 반대하며, 수많은 연약한 실뿌리 혹은 작은 물줄기처럼 세계의 갈라진 틈새로 몰래 흘러나오는 개체에서부터 개체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분자 같은 도덕적 힘의 편에 서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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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빠빠/저우궈핑 지음·문현선 옮김/352쪽·9800원·아고라

니체를 전공한 중국의 한 철학 박사가 45세의 나이에 귀여운 딸을 얻었다. 예쁜 늦둥이를 품에 안은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감에 젖었다.

‘뉴뉴’(oo·계집아이)라는 아명의 딸은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졌다. 그런데 생후 한 달 무렵부터 아이의 눈이 차츰 고양이 눈처럼 변했다. 검사 결과 양쪽 눈이 망막모세포증이란 일종의 암에 걸려 있었다. 엄마가 임신 5개월 때 의사의 무리한 권유로 X선 촬영을 한 탓이었을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가장 비참한 순간으로 변했다.

중국의 인기 에세이스트이기도 한 저자는 딸이 숨지기까지 1년 반 동안의 시간을 글로 담았다. 아기를 가슴에 묻어야 했던 한 아버지의 슬픔의 기록 곳곳에 안락사에 대한 고민, 환자를 인간답게 대하지 않는 의료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 등이 담겨 있다. 감정을 쏟아내지 않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여 주는 저자의 담담함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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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죽음, 또 하나의 세계/최준식 지음/320쪽·1만5000원·동아시아

“삶은 영원한 것/사랑은 죽지 않는 것/죽음은 다만 하나의 지평선에 불과한 것/그리고 지평선이란 우리 시야의 한계일 뿐….”(R W 레이먼드)

사후생(死後生)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여기’ 머물러야 할 테니 말이다. 다만 근사(近死)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죽음 저 너머, 또 하나의 세계를 엿볼 뿐이다.

근사체험자들은 거개가 체외 이탈을 경험한다고 한다. 정신은 더욱 또렷해져 자신의 과거가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며 어떤 초월적인 평화감에 젖어 든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사람들은 놀라운 삶의 변화를 겪는다. 일상 속의 삶은 한껏 고양되고 작고 사소한 데서 큰 기쁨을 느낀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영적인 인간으로 변해 간다.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 더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서다. 저자는 서구에서 활발하게 연구돼 온 ‘죽음학’을 통해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웰빙(참살이) 못지않게 중요한 ‘웰 엔딩(well ending)’의 길로 인도하고자 한다.

“죽음을 삶과 따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죽음에 대한 연구, 그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진지한 고민이다. 실제적인 학문이다.”

과학자들은 근사체험이 산소 결핍이나 특정 신경물질의 분비로 인한 환각, 즉 ‘뇌내(腦內)현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과학은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후세계를 부정한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체외 이탈 체험을 한 뒤 보았던 것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정신을 잃은 사람이 나중에 병원에서 깨어나 구급차량의 번호까지 기억하는 경우는?

“초현실적인 현상은 그것을 믿고 싶은 사람한테는 항상 충분한 증거가 있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충분한 모호함이 있다”(윌리엄 제임스)고 했던가.

저자는 한사코 죽음을 배척하려 드는 현대인들에게 이슬람 신비주의자 루미의 말을 들려준다.

“죽음이 너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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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클림트/엘리자베스 히키 지음·송은주 옮김/440쪽·1만 원·예담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키스’. 유명한 이 그림의 모델은 클림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던 에밀리 플뢰게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예술적 명성만큼이나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잘 알려진 화가 클림트와 에밀리의 관계를 상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에밀리가 열두 살 때 미술 과외교사로 만난 클림트와의 인연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뛰어난 미술선생님에게 배운다고만 생각했는데 열여덟 살 무렵 사랑에 눈뜬 에밀리. 그렇지만 영리한 에밀리는 클림트가 자신만의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는다.

작가는 분방하게 연애하는 클림트 때문에 상처 받으면서도 에밀리가 그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를 예술에 대한 사랑에서 찾아낸다. 클림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재능에 탄복하고 그의 여린 심성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곁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섬세한 여성 심리 묘사와 술술 읽히는 문장이 돋보이는 책이다. 원제 ‘The Painted Kiss’(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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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우연의 법칙/슈테판 클라인 지음·유영미 옮김/352쪽·1만3000원·웅진 지식하우스

2001년 9월 10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한 은행에서 일하던 펠릭스 산체스는 독립의 꿈을 안고 사표를 냈다. 다음 날 9·11테러로 폐허가 된 무역센터 빌딩의 잔해를 보며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10주 후인 11월 12일 산체스는 뉴욕에서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이 비행기는 이륙 직후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이것은 그의 섬뜩한 운명이었을까. 그 어떤 우연에도 좌우되지 않는 인생의 경로라는 게 과연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우연이 빚은 비극이었을까.

70여 년 전 비슷한 의문을 가졌던 미국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은 지능지수(IQ)가 135 이상이며 도시 중상류층의 자녀인 아이들 1500명의 일생을 추적했다.

그 결과 ‘인생의 경로는 예측 가능한 것’이길 바랐던 터먼의 꿈은 날아갔다. 타일공 청소부 등 특별히 영재성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의 삶뿐 아니라 물질의 운동, 생명체의 진화를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우연’이다. 독일 물리학자이자 과학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생물학 물리학 철학 뇌과학 등 방대한 영역을 훑어가며 우연이 물질의 운동에서부터 개인의 머릿속에 이르기까지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준다.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로 우리가 놀라는 까닭은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 속에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산을 갖고 오지 않은 날마다 비가 내리면 우리는 ‘이상하네…’ 하고 생각하게 된다. ‘숨겨진 계획’을 찾는 것은 두뇌의 본능이다. 기억은 질서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두뇌는 본능적으로 주변의 사건에서 어떤 틀이나 연관을 찾아내려 한다. 불행한 사건에는 종종 이유가 없지만, 두뇌는 대답 없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이유를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여 주는 풍성한 사례들을 좇다 보면 어느덧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이르게 된다. 물질의 운동원리에서부터 삶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으로 가로지르는 시각의 넓이가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는 “조망할 수 없는 상황에선 때로 실수를 저지르고자 하는 용기가 도움이 된다”면서 맨 처음 떠오르는 방안으로 결정하기, 해결책을 잘게 쪼개는 작은 걸음 원칙, 분산 전략 등을 제시한다.

확신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지나치면 많은 기회를 잃는다. 영국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신문 한 부에 사진이 몇 개 실렸는지를 세어보게 했다. 참가자들이 사진을 세는 데에는 최소 2분이 걸렸다. 그러나 와이즈먼이 신문 둘째 면에 ‘세는 것을 중단하시오. 이 신문엔 43개의 사진이 실렸습니다’라고 엄지손가락만한 글씨로 써 놓은 것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예기치 않은 우연에 더 많은 여지를 허락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신중함을 가르치고 현재에 민감하게 만든다. 우연히 이 서평을 접하고 책을 읽은 이가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것도 우연이 가져다주는 즐거운 선물이리라. 원제 ‘Alles Zufall’(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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