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시대, 다른 역할모델 제시하고 싶었다"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 최근 보건복지부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의료급여 수급권자 수는 약 176만여 명. 진료비는 지난해 3조2천여억 원 수준이었다. 지금은 의료보험이 당연시되고 있지만, 불과 40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란 것은 없었다. 1968년 민간 차원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만들어진 뒤 한참 지나서야 정부는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사람은 성산 장기려 박사. 그는 한국전쟁 뒤 변변한 의료기관 하나 없을 때 무료 진료소를 차려 운영하며 평생을 사회봉사에 몸을 던진 사람이다. 큰 병원 원장이었지만 1995년 세상을 떠날 때 그의 통장에 있었던 돈은 단 1천만 원. 그마저도 간병인에게 주고 떠날 정도로 그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게다가 타의에 의해 병원을 떠나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말없이 물러났고, 그곳에서 다시 불렀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가 환자를 돌봤다. 환자치료를 위해선 자신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져도 군말 한 번 할 줄 몰랐다. 가난했지만 항상 베풀고자 노력했던 그의 삶은 국민총생산(GDP) 세계 10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약자에 인색한 요즘 우리 사회와 대비된다.

▲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를 펴낸 김은식 기자.
ⓒ2006 심은식
그래서일까 때맞춰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라는 책이 나왔다. 지은이는 김은식. <오마이뉴스>에 '맛있는 추억'을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던 시민기자다.

그는 이 책을 쓴 의도에 대해 "'성공'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 요즘, 성공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또 다른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돈과 명예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주고 싶었다는 뜻이다.

또한 대형화되고 있는 우리나라 교회에 대해서도 그는 의문을 표시한다. 무교회 운동을 펼쳤던 함석헌과 교류하고 교회 없이 선교활동을 펼친 장기려를 통해서다. 저자는 '종들의 모임'이라고 이름붙인 정체불명의 단체를 자세히 소개하며 장기려가 바란 교회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지난 4월 말 저자와 종로에서 만나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왜 갑자기 '장기려'를 쓰게 됐나. 요즘 화제가 된 인물도 아닌데.

"2004년 <우리교육>에 '예인산책'이란 시리즈를 진행했었다. 한대수·공옥진·유진규·오세영·한돌·김동원 등 우리시대 예술가들을 다룬 인터뷰 글이다. 그 글을 눈여겨 본 출판사 '봄나무' 사장이 장기려 전기를 제의했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호기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 한 번 해보겠다고 했다."

- 이 책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장기려 박사의 나이 40세 때다. 보통 다른 책의 경우 어릴 때 비범했다는 내용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부러 차별화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맞다. 전기라고 하면 너무 상투적이다. 태어날 때 용꿈을 꿨고, 비범했고,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원래 착했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사회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했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피난길 부분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 이 책을 쓴 의도에 대해 "'성공'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 요즘, 성공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또 다른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2006 심은식
- 장기려 박사는 재산을 한 푼도 모으지 않았다. 막사이사이상을 탄 뒤에는 모든 수상식 참석을 거부할 정도로 명예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욕심이 없을 수 있나.

"그가 북쪽에 가족들을 두고 온 사람이란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가 만약 명예 등에 욕심을 부려 남쪽 정부에 기울었다면 북쪽 가족들이 성치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가족들을 생각해 북쪽에 기울었다면 역시 자신이 위험했을 것이다. 모든 욕심을 버리는 것이 자신과 북의 가족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 너무 위인으로 띄운 느낌이다. 어떻게 사람이 흠이 하나도 없을 수 있나.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여러 각도에서 접근했다. 그래서 찾아낸 게 행려병자들을 병원에 자주 데리고 와서 병원 식구들이 가끔 눈살을 찌푸렸다는 것 정도다."

- 그는 사회를 위해서 일했지만 가족들은 무척 서운해 했지 않나. 거의 아들을 돌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그는 아들 한 명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왔다. 나중에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아들 부부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남쪽에 있는 자식 생각하면 북쪽 가족 생각났을 것이다. 북쪽 아들에게 못한 것 남쪽 아들에게 두 배로 잘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는 그렇게 못했다. 게다가 북쪽이 못산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으니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 억울한 옥살이를 많이 하지 않았나. 술김에라도 정부나 누군가를 비방했을 것 같은데.

"그 사람의 특성인 것 같다. 그래서 '바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재산을 챙길 줄도 모르고 싸움을 할 줄도 몰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의료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 사실 은폐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무척 미안해하면서 생활비를 계속 보탰다. 나중에 집도 얻어줬다. 게다가 순진할 정도로 솔직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동급생 남자 친구에게 동성애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70년대는 성적으로 지금보다 엄격했고, 속한 교회도 보수 교단이라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일간지에 기고했다."

장기려는 바보, 그러나 할 말 하는 바보

- 싸움을 회피한 것은 비겁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상처입기를 두려워하는….

"그렇진 않다. 자신이 손해 보는 일에 대해선 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요할 땐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종교계 인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두둔했던 게 대표적인 예다."

- 그는 '바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한 상인과의 대화를 보면 몰랐던 바보는 아닌 듯하다. 물건값을 흥정하는 상인에게 제 값을 준 뒤, 의아해하는 직원에게 "그래야 믿는 사회가 된다"라고 한 것을 보면….

"실제 바보는 아니었다. 이런 예가 있다. 지금 양산 삼성병원 이사장을 지낸 손동길씨에게 장기려 박사가 '너는 돈 있어야 된다. 돈 없으면 불쌍해진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부산이 항구도시라서 물류가 중요하다. 물이 찰랑찰랑 들어오는 땅을 사놓으면 돈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손동길씨가 다음날 자전거 타고 가서 산 땅이 지금의 삼성병원 자리다. 그 땅이 몇 년 사이 100배가 뛰어 100억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그는 북한 최초의 박사이자 김일성 주치의를 지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발적 남하했다는 점은 뭔가 의심스럽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 점은 참 확인하기 힘들다. 그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는 말을 한 적도 없다. 아마 북한에 가족이 있기 때문에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누군가는(정보기관) 계속 그를 '빨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공 패러다임 대신 베푸는 패러다임 필요하다

- 박사의 뜻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나.

 
ⓒ2006 심은식
"그가 세웠던 청십자병원이나 복음병원은 매각되거나 부도났다. 경영상태가 좋지 않아 못 가진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의료생협이 그의 뜻을 이어받고 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그의 뜻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 종들의 모임에 대해서 궁금하다. 책 내용을 보면 무교회주의자들로 보이는데, 도대체 어떤 집단인가.

"무교회주의자인들인 것은 맞다. 그들은 교회나 십자가를 세우지 않았다. 모임 이름을 따로 만들지도 않고, 교세 확장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 대해 장기려 박사도 처음엔 이단시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의 삶에 감화돼 세례를 받았다. 사실 성경에도 교회를 짓고 십자가를 세우라는 것은 나오지 않지 않나."

- 종들의 모임 회원은 만나봤나

"선교사들을 만나지 못했다. 단 손동길 선생이 그곳 회원이다. 그들에 대한 일화는 들었다. 그들은 장기려 박사 장례식 때도 부담주지 않기 위해 도시락 싸갖고 와서 먹고, 멀찍이서 행사를 바라보다가 갔다고 하더라."

- 이 책은 한 인물의 전기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가 역할 모델이 되기는 힘들다고 느꼈다. 본받기에 그는 너무나 완벽하고 높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나는 안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역할 모델을 이렇게 생각한다. 꼭 따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사람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 나는 이순신을 존경하는 우리나라와 장기려를 존경하는 우리나라의 미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이순신은 수십 년간 존경하는 인물 1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들은 모두 구국의 영웅들이다.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 등. 아니면 비천한 신분에서 신분이 상승한 사람들이거나…. 그들은 온갖 역경을 이기고 대단한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다. 나는 그런 '성공 패러다임' 대신 베푸는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순신은 훌륭한 인물이지만, 그 인기가 과도하다. 이순신의 압도적인 지지율이 좀 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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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유성호 기자]
 
ⓒ2006 문학동네
푸른색으로 시작해 푸른색으로 끝을 맺는 함정임의 단편집 <네 마음의 푸른 눈>은 색이 주는 묘함 때문에 몽롱하다. 지극히 세속적인 듯하지만 읽고 나면 어느새 뒤통수부터 저릿해지면서 텅 비어버린다. 그녀의 글 궤적을 좇다보면 시나브로 색채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환상이 느껴진다.

<버스, 지나가다>를 내고 3년 동안 그녀는 낯선 곳을 떠돌며 그곳에서 만난 운명(작가의 말로는 운명이려다 만 것)을 엮었기 때문이다. 미완의 운명에서 완성된 운명보다 뚜렷한 푸른색을 얻어 냈다는 그녀는 이번 작품을 통해 현실과 환각적 몽환이 겹치는 경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11편의 작품이 실린 이번 단편집은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문학동네> <세계문학> <현대문학> <작가세계>와 같은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을 모은 것이다. 특히 장편연재를 제외하고 지난해만 중단편을 무려 여덟 편을 발표하는 다작을 했다.

그녀는 '소설'에게 빚 갚음을 위해 쓰고 또 썼다고 한다. 그러나 쓰기는 마음먹기로 되지 않고 언제나 독기를 요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던 것은 한 가지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내가 진 이 빚은 정녕 무엇인가? 소설가로 데뷔한 이래 나는 늘 소설에게 미안했다."

표제작인 <네 마음의 푸른 눈>에 등장하는 '일산 아이'는 외국 생활에 따른 이중 언어습득 과정에서 오는 유사자폐를 가지고 있다. 그는 말하지 않았고 언어장애를 치료받고 있었다. 생각과 삶의 이중구조는 가끔 현실에서 달아나기 좋은 재료다. 작가는 일산 아이의 입을 빌어 이번 단편집의 주제를 말하고 있다.

"Nothing is real"

주제가 주는 몽롱함과 더불어 단편을 엮은 단편집을 평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 작가의 의도된 주제를 한참 비켜가는 결례를 범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의도된 공통의 주제가 없는 것을 억지로 짜내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오류를 피해가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작가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말에서 대부분 작가가 관통하는 세계를 엿볼 수 있지만 이번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작가가 숨겨놓은 '몽환의 덫'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단편집에 대한 평은 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 주제와 작가의 근황을 엮는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함정임은 누구?

 
1990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로 등단. 소설집 <이야기, 덜어지는 가면> <밤은 말한다> <동행> <당신의 물고기> <버스, 지나가다>, 중편 <아주 사소한 중독>, 장편 <행복> <춘하추동> 등이 있다.

서양 최초의 여성 화가의 일생을 그린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에릭 바튀의 아름다운 일러스트 동화집 등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여행과 일상을 아우르는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프랑스 기행서인 <인생의 사용>, 유럽 묘지 기행서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 미술에세이 <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 등을 펴내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1964 전북 김제생. 이대 불문과 졸. 한신대 대학원 문창과 졸(2006). 현 동아대 문창과 교수.
- 지난해는 소설에게 진 빚이 정량적으로 단편 여덟 편 정도인 듯하다. 아니면 더 많을지도. 늘 소설에게 미안한 이유에 대해 말해 달라(책 말미 '작가의 말'과 달리).

"소설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에게 온 어떤 것이다. 생애 첫 단편으로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까지 소설가를 꿈꿔본 적이 없다(믿기에 어렵겠지만!). 데뷔 이래 늘 소설과 낯가림을 해왔고, 매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심정이었다. 데뷔 때부터 직장생활(문학사상 기자, 작가세계 편집장, 솔출판사 편집부장)과 병행하면서 창작해온 관계로 늘 부족한 시간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전업 작가 생활을 하면서 중·장편도 시도하고, 소설을 본업으로 인접 장르에 대한 글도 쓰게 되었는데,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창작할 당시에는 유럽예술묘지기행서인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와 파리기행서 <인생의 사용>, 미술 에세이 <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 등 에세이 작업이 몰려 있어서 소설을 위한 시간을 온전히 내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작품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문예지의 소설 청탁을 다음호로 미루고, 미루고 하면서 갖게 된 안타까움, 아쉬움의 표출이다. 늘 마음속에는, 언제 한번 제대로 소설을 써보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소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소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인간)로 섬길 때 가능한 표현이다. 나는 소설 이상의 애인을 둔 적이 없다. "

- 푸른색이 주는 이미지가 여행(또는 여정) 속에서 만난 미지의 인연들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설명해 달라.

"<네 마음의 푸른 눈>에서의 푸른 눈은 심안(心眼)의 빛이다. 그것은 순간적인 찰나의 빛으로 영원한 소통이 가능한, 그러니까 훼손된 자아의 치유, 또는 소외된 자아의 만남(환원)의 순간을 의미한다. <푸른 모래>에서의 그는 소설의 여정이 작가의 여정을 이끄는 신비로운, 초월적 인연을 선사하고 있다.

지금 나는 소설처럼 일산에서 부산 청사포 바닷가에 살고 있다. 청사포는 푸른 모래의 모티브가 된 지명이다. 실제 청사포의 청은 맑을 청이지만, 이곳 해운대 청사포 사람들은 도로 표지판에서 한자의 '淸'자에서 물 수(水) 변을 지우고 푸를 청(靑) 자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맑은 모래, 푸른 모래, 푸른 뱀(靑蛇)…. 소설을 정밀하게 읽어보면 이러한 이미지와 의미의 변주가 가능할 것이다."

- 작품 속에 참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의 분신으로 숨어 있음직한 등장인물에 대해 귀띔해 줄 수 있는지. 또는 가장 연민을 갖는 인물이 있다면 이유를 설명해 달라.

"<문어에게 물어봐>는 <문학동네> 젊은 작가 특집의 '자전소설'란에 들어간 작품이다. 소설가의 소설치고 자전 소설 아닌 것이 있으랴마는, 자전이라는 타이틀을 비석처럼 거느리고 있으니 가장 흡사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푸른 모래> 또한 그렇다. 가장 연민을 갖는 인물은 <네 마음의 푸른 눈>의 일산 아이다."

- 많은 작품 중에서 11편을 묶은 의도된 주제(또는 의도한 바)가 있으면 설명해 달라.

"의도는 없다. 나는 새로움을 중요시하는 작품 스타일을 갖는 작가지만, 또한 무엇보다 자연스런 흐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이기도 하다. 의도라고 하자면, 원래는 10편으로 마무리가 되었던 것인데, 나중에 <푸른 모래>를 넣었다.

<푸른 모래>와 더불어 같은 시기 발표한 작품은 다음 작품집에 수록할 예정인데, 그러고 보니 딱히 열한 편의 의도라기보다 책 한권의 형상을 위한 의도가 없지 않다. <네 마음의 푸른 눈>에서 <푸른 모래>로의 이행, 그러면서 푸른 빛, 환각의 현상학적 환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 지난해처럼 중·단편 다작인지 아니면 장편인지, 번역을 준비하고 있는지 등 앞으로 작품 활동에 대해 말해 달라.

"그동안 소설집을 6권 출간했다. 그러니 중단편(거의 단편)을 50편 이상 창작한 셈이다. 장편은 두 권이고, 올해 출간 예정인 연재한 장편이 한 권이니 단편에 상당히 치중된 편이다. 처음에는 시 또는 시적인 것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도 있지만, 호흡 면에서 나는 단편에 적합한 작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스토리(서사)보다는 의미(시적 이미지)의 창출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현재는 서사와 이미지의 강한 결합을 꿈꾼다. 장편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계간 <작가세계>에 <내 남자의 책>을 연재 중이며 프랑스의 현대 작가 브누아 뒤퇴르트르의 경장편들을 번역중이다. "

- 그간 독자나 문단에 펼쳐 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해달라.

"함께 소설가의 길을 걸으며, 또 그 소설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동지감을 느낀다. 소설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치고, 오직 그것에 전념함으로써 자유로워지고 싶다. 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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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 빠진 한국문학에 봄바람 공지영을 만나다



[중앙일보 손민호.최승식] 며칠 전 서울의 한 지하철역. 작가 공지영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들여다 보니 가판대의 잡지 표지였다. 잡지 상단엔 '이 시대 리더들의 이야기'라고, 사진 아래엔 '소설 시장 살리는 작가 공지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386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도 아니고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도 아니었다. '시대의 리더' 공지영이었다.

올 봄 한국문학에 '공지영 바람'이 불고 있다. 깊은 겨울잠에 빠진 한국문학을 깨우는 봄바람이다. 지난해 4월 펴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서 꼼짝 않고 있다. 지난달 30만 부를 돌파했다. 지난 연말 일본작가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펴낸 '사랑 후에 오는 것들'도 20만 부를 훌쩍 넘겼다. 한국작가 한 명이 쓴 소설 두 권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6개월째 동반 점령한 건, 요즘 같은 형편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 공지영이 말하는 '공지영 바람'

그러나 정작 자신은 말을 아낀다. 공지영 소설이 유독 인기인 이유에 대해 그는 에둘러 답할 뿐이다. 가령 "열렬한 에너지로 쓴다는 소릴 들었다"거나 "작가의 상처가 시대의 상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정도다.

애써 몸을 낮추는 이유가 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잘 읽히는 작가는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문단 일부의 시각 때문이다. 실제로 그에 대한 비평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여성운동을 핫도그처럼 판다는 악평마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발표할 때 후일담 문학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도 그러한 기미는 감지됐던 터였다. 두 소설 모두 청춘남녀의 건강한 사랑 이야기다. 공지영 바람은 바로 여기서 불어온다. 작가는 "한국 젊은이가 요즘 일본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사랑 이야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들의 감성을 헤아리는 한국문학이 여태 드물었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문장이 거칠다는 지적도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기보다는 이야기의 전체 덩어리가 더 중요하다"며 "나는 글을 쓸 때 폭풍처럼 쓴다. 원고지 100매 정도 단편은 하루 만에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사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문장 한 줄에 매달리다 이야기 흐름이 끊기는 게 싫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문법적으로 엄격하지 못한 문장이 나올 수 있다. 대신 탄력이 붙는다. 골치 아픈 독서를 꺼리는 인터넷 세대의 독서습관을 고려한다면 공지영 문장은 외려 장점이 될 수 있다.

공지영의 성공은 자극적인 소재에서 비롯됐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의 소설은 주로 논쟁적인 이슈를 다뤄왔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호기심을 자극할 법한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취재에 열심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준비할 때는 1년 6개월간 사형수를 만나고 다녔고,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기획할 때는 일본작가와 1200통이 넘는 e-메일을 주고받았다. 둘은 혈액형.키.몸무게.가계도까지 교환했다.

# 나는 혼자였다, 빗방울처럼

최근 여세를 몰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공지영은 8일 신작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황금나침반)를 발표했다. 다시 화제가 될 만하다. 10년 만에 발표한 에세이인데다, 작정하고 펴낸 문학에세이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꿈은 원래 시인이었다. 그래서 문장은 촉촉하고 달곰하다.

그러나 산문집은 다른 이유로 화제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의 상처를 처음으로 드러낸 저작이기 때문이다. 산문집은 시 한 수 인용하고, 감상을 이어붙이는 문학에세이 형식이다. 그러나 차분히 읽어보면 행과 행 사이에서 개인 공지영의 상처가 만져진다. 그러니까 산문집은 시를 읽고 느낀 감상을 적은 게 아니라, 작가가 상처를 입었을 때 위무해주었던 시 한 수 한 수를 불러모은 것이다. D H 로렌스의 '겨울이야기' 뒤에 이어진 작가의 말이다.

'나를 버리고 … 가버렸던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가 나를 모욕하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제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저의 진실이었습니다.'

지난해 두 번째 남편이 암으로 숨졌을 때 얘기다. 그때 심정을 처음으로 공개한 문장이다. 자칫 잘못하면 작가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속내를, 그는 왜 굳이 드러냈을까.

"이제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일, 성씨가 다른 세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나는 이 땅에 행복해지려고 태어났지 이혼하려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이 결혼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습니다."

내년이면 공지영은 작가인생 20년이 된다. 그러고 보니, 공지영은 얼추 십 년 단위로 문학적 전환점을 맞았다. 88년 등단했고 97년 대표적인 페미니즘 소설 '착한 여자'를 발표했다. 그리고 오늘. 작가 공지영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나'후일담' 등으로 형용이 불가능한 작가가 돼버렸다. '소설 시장을 살리는 시대의 리더'가 돼버렸다. 무엇보다 공지영은 삶의 상처도 문학으로 발언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올 연말쯤 공지영은 성씨 다른 네 식구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을 발표할 계획이다. 엄마는 공씨고 첫 딸은 위씨고 첫 아들은 오씨고 막내 아들은 이씨인, 그러나 아빠는 없는, 행복한 한 가족을 말할 것이다.

■ 공지영은

▶1963년 서울 출생 ▶85년 연세대 영문학과 졸업 ▶85년 무크 '문학의 시대'에 시 '이태원의 하늘' 발표 ▶87년 공장에 위장취업했다가 한 달 만에 발각돼 강제 퇴사, 서울 구로구청 점거사건으로 열흘간 구류 ▶88년 '창작과비평'에 중편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 ▶주요 작품:'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93) '고등어'(94) '착한 여자'(97) '봉순이 언니'(98)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 '사랑 후에 오는 것들'(200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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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5-1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 퍼갈게요. 감사해요..

보슬비 2006-05-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만물상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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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책도 좀 동했더랬습니다.

보슬비 2006-05-1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으면 알려드릴께요
 
티토 -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재스퍼 리들리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솔직히 '티토'에 대해서 전혀 아는것이 없었던 저로써는 이 책을 만난것 자체가 기적인것 같습니다.

그냥 인물평전이겠거니 생각하고 읽었던 책인데
500여페이지가 전혀 지루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을만큼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점점 유럽역사에 관심이 생기던차에 티토를 통해
발칸반도의 역사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티토는 요시프 브론즈가 사용하던 여러개의 가명중 본명보다 더 잘 알려진 가명입니다.

유고슬라비아만큼 하나의 국가라는 틀 안에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교,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나라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만큼 피로 얼룰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없었구요.

6개의 공화국, 5개의 민족, 4개의 언어, 3개의 종교, 2개의 알파벳을 사용한 민족을
티토는 하나의 연방으로 통일하고 45년동안 유고슬라비안인들에게 평화와 공존을 깨우쳐준 사람입니다.

이 책을 읽는동안 발칸반도의 민족적, 종교적 학살(인종청소)에 가까운 비극을 보면서
참을수 없는 구토증세가 느껴졌습니다.

공산주의 패망으로 인류의 번영과 평화가 공존될거라 생각하지만
지금도 이권과 종교적인 다툼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티토는 공산주의면서도  스탈린이 티토와 유고슬라비아 공상당에게 맹목적이 충성을 강요함으로써
티토와 스탈린과의 관계는 끝이 납니다.

결국 그는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횡포도 싫지만 스탄린과 소련의 만행에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공산주의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는 자신의 강한 신념으로 냉전을 초래했던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제3세계", "비동맹"주의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동구권에서 외톨이가 되기도 했지만,
절대로 비굴한 자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는 티토의 통치 기간인 35년이었습니다.

인위적인 티토의 민족결합은 그의 하수에 처절한 내전과
각 민족들의 독립의지를 낳게 하느 자연스러운 전제였을지도 모르지만
시민들은 자유가 없을지언정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싸워야하는 현상황보다는
그때의 그 시절을 더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쩜 그들의 내전은 민족간의 다툼외에도 강대국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방치하고 더나아가 종교간 민족간의 치열한 다툼을 부추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자각하고 깨우쳐 스스로가 풀어야할 숙제인것 같아요.

암튼, 이 책을 통해 티토에 대해서 알게 되고
유럽의 전반적인 정치적 민족적 역사에 대해서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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