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덕수 시인이 주도한 1960년대 시동인지 ‘시단’(위)과 56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펴낸 시집과 시선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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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등단했으니 반세기 이상을 문학에 바쳤다. 시의 역사주의와 형식주의 사이에서, 그리고 문학 창작과 연구의 경계에서 항상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올해 일흔여덟의 노시인 심산(心汕)
문덕수씨(홍익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가 ‘젊은 문덕수, 전성기의 문덕수, 그리고 황혼기의 문덕수’를 직접 정리해 ‘문덕수 시선집’(시문학사)을 펴냈다. 꼬박 3년에 걸쳐 곱씹어 읽고, 다듬고, 엮은 것이다.
“정리의 의미입니다. 정본(正本) 시집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제 갈 때가 가까이 왔으니까…. 써온 시 되돌아보고 오자·오시·탈자, 부적절한 표현을 바로잡았습니다. 손을 대고 보니 무척 힘든 작업이었지만 마치고 나니 뿌듯하네요.”
시선집에는 등단 이듬해인 56년 발표한 첫 시집 ‘황홀’에서부터 제12시집 ‘
꽃잎세기’(2002)까지 12권의 시집과 6권의 시선집, 여기에 미발표 근작 시까지 더해 총 700여편의 시가 실렸다. 문덕수 시세계의 흐름을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도록 주제별이 아닌, 시대별로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연보, 자료사진, 찾아보기 등도 꼼꼼하게 담았다. 수정을 가한 시에는 특별히 ※표를 해 구별했다. 매끄러운 종이질에 표지는 가죽으로 장정했다.
시선집 정리는 인생 반세기를 반추하는 일이기도 했다. 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군에 입대한 시인은 격전지 ‘
철의 삼각지대’(철원, 김화)에서 부상하고 오랫동안 육군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젊은 나이에 사선을 넘나들며 인생의 비애와 절망을 맛보다 보니 자연스레 외면보다 내면 세계에 시선을 돌리게 됐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초현실주의 시경향은 60년대까지 이어져 이후 무의미시나 무대상시 같은 전위시 운동에의 교량 역할을 했다. 이 때의 대표적 시가 ‘꽃과 언어’ ‘섬’ ‘공간’ 등이다.
70년대 들어서는 문명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속 경제성장과 함께 자동차, 비행기, 빌딩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시인은 문명사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문명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비판을 가했다. 76년 출간된 시집 ‘새벽바다’에서부터 두드러진 경향이다.
80년대는 누구에게나 그랬지만, 특히 시인들에게 더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시기였다.
“문단, 시단이 좌우 이데올로기로 분열됐습니다. 관념과 이데올로기를 중시한 민중시, 그리고 정치성을 배제한 예술 그 자체로의 순수시가 팽팽히 맞서면서 양극으로 갈렸지요.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어느 한 쪽은 맞고, 다른 쪽은 그르다’는 식이 아니라 시의 본질적 차원에서 통합돼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들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문화예술진흥원장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문씨는 90년대 말 갑상선암이 발병했다. 한 쪽 성대를 잘라내고 오랜 기간 요양해야 했다.
2000년대 병중에도 그는 시를 썼다. 이 시기에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새롭게 완성했다. 쉽게 말하자면 관념어가 아닌 구체성을 띤 체험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근작에서 이러한 명제를 실천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 호, 두레박으로 물 길어 올려 벌컥벌컥 마시다 한여름의 불볕을 안고
모하비 사막을 앗 뜨거 앗 뜨거 맨발로 메뚜기처럼 뛰다 알몸으로
갠지스 강을 건너
녹야원 보리수 꽃숲 속에서 알거지 부처님을 만나다 이런 것 저런 것 보고 듣고 먹고 다 거두어들여도 나는 항상 빈 자배기다.//늙어 바스러진 등에 곶감 한 접 지고/대관령 아흔아홉 굽이/한 알씩 빼 먹는 일밖에,”(작품⑴ 전문)
어디에도 ‘외롭다, 허무하다’는 관념어는 없다. 그러나 인생무상의 정서가 가득 배어 있음을 느낀다.
요즘 시인은 71년부터 35년째 부인 김규화 시인과 함께 운영해 온 시문학사에 출퇴근하듯 나와 책 읽고 산책하며 하루를 보낸다.
“시는 계속 쓰시냐?”는 질문에 “늙어서 이제 안 된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럼 요즘 매일 쓰는 것은 무엇이냐?”는 부인 김씨의 지적을 받고야 조심스레 입을 연다.
“사실은 민초(民草)를 주인공으로 한 장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 등 혼란의 시기에 나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위인들에게 끌려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위인은 안 보이고 이름 없이 죽어간 보통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대한민국을 지켜낸 사람은 돌쇠, 떡쇠, 마당쇠라는 천한 이름으로 죽어간 그들입니다.”
머지 않아 ‘문덕수 제13시집’ 또는 ‘문덕수 시선집 개정판’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