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선민] 한국인의 자서전

김열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78쪽, 1만2000원

"토머스 불핀치그리스 로마 신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면, 한국 신화의 열쇠는 김열규 교수에게 있다." '한국인의 자서전'에 실린 소설가 이청준씨의 추천사다. '한국인은 누구인가'를 화두 삼아 일평생을 국문학과 민속학 연구에 바쳐온 김열규(74) 서강대 명예교수에게 이처럼 걸맞는 평가도 없을 터다. 그는 이 책에서도 한국 신화의 너른 바다를 헤엄쳐간다. 거기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황홀한 경험이다.

물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한국인의 신화' 등 전작들을 읽은 이들에게는 동어반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장기이기도 한 유려한 문장으로 안내하는 한국 신화의 세계는 참으로 넓고도 깊은 까닭에, 몇 번을 되풀이해 초대받아도 크게 싫증이 나지 않는다.

왜 신화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한 민족공동체 전 구성원의 속내, 즉 웅숭깊은 마음속"을 들여다봄으로써 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설이나 신화는 "주어진 시대의 최고의 이데아를 담고 있으므로" 그 시절 그 사람들이 무엇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는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자서전'이 '한국인의 (인생) 참고서'로 읽힐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 눈으로 본 한국인의 삶은 "눈물 범벅 땀 범벅된 짠지 인생"이다. 웅녀가 백일 동안 그 독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머니가 되기 위해 겪는 통과의례였다. 피투성이 손으로 단단한 바위에 수도 없이 돌을 부딪쳐야 했던 불임 여성들의 '아기빌이', 난산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산모에게 송장에 입히는 수의나 상복을 둘러씌웠던 풍습, 액땜을 한다고 강보에 싼 젖먹이 아기를 동구 밖에 내다버리는 '바리데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맵고 짠' 우리 조상들의 삶은 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몸부림이었다.

특히 저자는 가혹한 운명이 주어졌기에 더더욱 잡초처럼 강인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낸다. 신라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 설화를 새롭게 해석해 여자아이에 대한 할례가 자행됐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할머니들의 팔자 걸음에서 순하게 견디고 참은 나머지 시나브로 가꿔진 악바리 근성을 엿보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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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조우석] 국민참여 시대의 한국정당

이원종 지음, 나남출판, 386쪽, 2만원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최근 호 특집'오늘은 있지만, 내일은 없는 것'에서 2040년쯤 사라질 제도 1순위로 정당부터 꼽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미래보고서 역시 정당 소멸을 예견했다. 정치가 수명을 다해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UN미래보고서'45쪽, 박영숙.제롬 글렌 등 지음, 교보문고). 기존의 이념.계층.성별의 구분 자체가 증발하는 이 시대에 신간 '국민참여 시대의 한국정당' 은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현재 정치와 정당은 여전히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 변화를 선도하기보다는 비생산적 논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으며, 과거의 관행과 기득권에 안주해 국민참여의 문을 닫아놓고 있다. 국민은 정치적 의사를 정당보다는 시민단체.언론을 통해 표출하고 있으며, 정치와 정당은 이미 '무용한 것'이 됐다."(359쪽)

저자는 정치학자가 아니다. 김영삼 정부시절의 정무수석을 역임했고 현재는 명지대 초빙교수. 저자는 머리말에서 자기가 현실정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늦깎이 학문을 했기 때문에 외려 구체성을 평가받고 싶다는 소망을 숨기지 않고 있다. 서구에서는 정당 소멸론을 말하지만, 이 땅에서 정치.정당은 여전히 한국 호(號)의 향방에 결정적이라는 호소다.

그가 볼 때 한국의 초기 정당들은 설립 과정에서부터 기형적 발전을 해왔다. 이후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을 보이더니, 민주화 시기 이후에는 지역주의의 고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세계화.정보화 시대인 지금의 급격한 탈정치 분위기에서 정당제도는 뿌리째 휘청거린다. 저자가 내놓는 정당 발전론의 으뜸은 이념에 앞서 이슈지향으로 변신해야 한다고 제언이다.

당의 구조 또한 당원 중심에서 국민과 지지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활이 걸린 국민참여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시민교육 강화는 물론 공직후보자 추천과정에서부터 국민참여 시스템을 풀가동시켜야 옳다. 이 경우 기득권을 빼앗길 정치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서는 정당법 개정 등도 필요하다는 '뜨거운 제언'도 눈여겨 볼 만하다. 꽤나 빡빡하게 읽히지만, 진지함으로 승부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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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적 보편성'이란 말이 있다. 어려워 보이지만 풀이하면 쉽다. 가령 여성의 가슴엔 당대적 보편성이 없다.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의 가슴은 미의 척도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여성전사가 모여 산다는 아마존 정글에서 여성의 가슴은 거추장스런 존재다. 2006년 5월, 당대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 있다면, 역시 축구일 터이고.

최근 문단에서도 당대적 보편성을 실감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2006, 젊은 작가들'이란 행사 얘기다. 번역원은 외국의 젊은 작가 16명을 초청해 국내 또래 작가들과 일주일 동안 어울리게 했다. 당대적 보편성은, 윤지관 번역원장이 행사 소개 자리에서 썼던 말이다. 인종.문화.언어가 달라도 문학이 재현하는 오늘과, 추구하는 가치는 한가지라는 취지였다.

당대적 보편성을 몸소 증명하는 소설도 출간됐다. 이번에 방한한 아르헨티나 작가 마르셀로 비르마헤르(40)의 '유부남 이야기'(문학동네)란 단편집이다. 소설은 아르헨티나에 사는 유부남의 속내를 치명적일 만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지구 반대편 얘기로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문제다. 아르헨티나 유부남과 대한민국 유부남은 끔찍이도 닮아있었다. 단편 '마차'의 한 토막이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된 후부터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은 기대 반, 괴로움 반이 되어버렸다. 기대 반이라는 것은 한번이라도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네 살짜리 우리 아들이 얌전히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괴로움 반이라는 것은 악을 쓰고 쿵쾅거리는 것도 모자라 물을 쏟고 소스를 천장과 바닥으로 부양과 낙하를 반복시키는 아들 녀석의 재롱 잔치 한가운데서 음식을 한 숟가락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이 유부남도 한때는 '아들의 출생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던 남자다. 그러나 세월이 그를 유부남으로 만들었다. 이 말고도 예의 익숙한 유부남들이 출연한다. 아내 몰래 옛 애인에게 수작 걸다 망신당하는 유부남부터 아들의 유치원 친구 엄마와 불륜을 도모하다 홍역을 치르는 유부남까지. 소설을 읽고서 알았다. 유부남은, 축구보다도 당대적 보편성을 띈 존재다.

영어에 'childproof'란 단어가 있다. '아이들이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또는 어린이에게 안전한'이란 뜻이다. 같은 맥락으로 소설은 'wifeproof'다. 아니 'wifeproof'가 되도록 조치해야 한다. 아내가 소설을 읽을 경우 바가지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아내에게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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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아이헬 지음, 송소민 옮김, 갤리온, 314쪽, 9500원

클림트

엘리자베스 히키 지음, 송은주 옮김, 예담, 440쪽, 9000원

키스만으로도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다. ‘키스’란 제목의 그림과 조각이 제법 되지만, 키스가 시들해질 나이에도 이상하게 그 그림은 ‘약발’이 받는다. 에로틱 무드와 관능이 꿀처럼 흐르는 현란한 그림에서 눈을 감고 황홀경에 취해 있는 여자는 관음증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저토록 환상적인 키스를 받고 있는 여자는 누구인가?

14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전해지며, 수많은 모델이나 사교계 여자들과 자유분방한 섹스를 즐겼으나 절대 결혼은 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 그의 전기적 사실의 틈새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쓴 '클림트'란 제목의 소설이 동시에 나왔다. 그 중 엘리자베스 히키의 장편소설은 '키스'의 여주인공이 누굴까라는 호기심에서 싹이 텄다.

작가는 그 주인공이 평생 결혼하지 않고 클림트 곁을 지킨 에밀리 플뢰게라고 상상하며 그녀의 시점에서 소설을 풀어나간다. 그녀는 클림트의 애정행각에서 상처도 받지만 사랑의 방정식과 줄다리기를 이해한 영리한 여성이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의 요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순수연애소설이다.

"자신만 사랑하고 찬양받기만 좋아하는" 예술가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이란 어쩔 수 없이 "종양처럼 가슴속에 의심을 품고 그 의심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스런 관계라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싶은 걸까. 관계의 영속성은 욕망과 결혼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절제와 거리두기를 담보할 때 얻을 수 있는 듯 보인다. 모델들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에밀리의 사랑에 대한 균형감과 심리가 탁월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책 사이에 사실적인 초상화들을 끼워 넣어 모델 면면을 보는 즐거움도 제공하고 있다.

또 한 권의 '클림트'는 독일 작가 크리스티네 아이헬이 예술영화의 거장 라울 루이즈 감독의 시나리오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클림트의 생애와 연애담을 친절하게 보여주는 서술구조가 아니라 세기 전환기의 혼란스런 분위기와 클림트의 작가 의식에 초점을 맞췄다. 어느 날 클림트는 파리에서 거울 속에 나타난 한 남자의 소개로 클레오 레아라는 관능적인 여인을 만나 정사를 치르게 되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에서 클레오 레아, 혹은 클레오 레아의 복제품, 또는 클레오 레아의 패러디인 여인을 찾아 헤맨다. 클레오 레아는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정점이 된다. 기억과 환상 속에서 그의 의식은 분열되고 현실의 시공간도 모호해진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의 이런 혼미한 다층적 의식구조를 불러오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답을 고민하면서 읽으면 한층 더 가독성이 있다. 이 소설은 영화를 모방한 소설처럼 장면 전환이 빠르다. 소설 중에 클림트는 에곤 실레에게 말한다. "예술에는 창조자가 존재하지 않소. 우리는 다만 모방할 뿐이오." 두 소설은 색깔이 다르다. 하지만, 창조와 모방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 시대에 새로운 소설 모델로 일독할 만하다.

권지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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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신은진] 배고픔의 자서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219쪽, 8500원

당신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아멜리 노통브는 이 질문에 한 단어로 답한다. '배고픔'. 책은 이 답에 대한 200여 쪽짜리 부연 설명이다. 오세아니아의 섬 바누아투를 '배고픔이 없는 나라'로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식량과 자원이 사방에 널려있는 이 나라에서 생산은 필요없다. 손만 뻗으면 탐스러운 야자열매와 바나나가 쥐어지고, 바다에서는 원하거나 말거나 기막힌 맛의 생선을 그러모을 수 있다.

아무런 노력 없이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나라다. 노통브는 바누아투인의 입을 빌려 이곳을 "끔찍하다"고 말한다. 결핍에서 비롯된 욕구가 지워진 삶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신의 배고픔을 풀어놓는다. 그가 말하는 배고픔은 단순한 허기를 넘어선다. "존재 전체의 끔찍한 결핍, 옥죄는 공허함"이요,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동력"이다. 자신을 "육화된 배고픔"이라 단언하고는 그 증거로 유년 시절부터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집착한 대상들을 나열한다. 달디단 과자, 알코올, 물에서부터 여성적 아름다움, 애정, 환락, 책, 극단의 배고픔을 위한 거식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종착역으로 '글쓰기'를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배고픔의 자서전'의 주인공은 내가 모델이다. 나는 항상 배가 고프다. 모든 것은 사실이며, 모두 내게 일어난 일들"이라 밝힌 것처럼, 책은 소설보다 자서전에 가깝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일본.중국.뉴욕.방글라데시로 유랑하듯 옮겨다닌 노통브 자신의 성장기다. 그의 대표작인 '살인자의 건강법'이나 '적의 화장법'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허를 찌르는 기발한 스토리와 언어로 벌이는 결투 같은 대화체는 맛볼 수 없다. 대신 이 책은 노통브가 자신과 같은 부류, 즉 '배고픔'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신(神)적인 음식", 초콜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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