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 웃음과 감동이 교차하는
고지훈 지음, 고경일 그림 / 앨피 / 2005년 12월
품절


우남 이승만 (1875-1965)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국회 및 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감사'할 대상을 열거했는데요. 첫째는 '하나님'이었고, 둘째는 미국, 셋째가 국민이었습니다. 평생 '한국의 조지 워싱턴'을 꿈꿔온 사람답죠. 자칭 '프린스' 이승만은 가는 곳마다 갈등과 풍파를 몰고 다닌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박용만, 안창호, 김구, 미군정, 한민당... 그는 동지를 적으로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변치 않는 신념은 '반공'. 이와 관련하여 '공산당은 마누라도 네 것, 내 것 없이 같이 살자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옛날에 어렸을때 이승만에 대한 위인전기를 읽은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하면 그 일화도 어쩜 꾸며낸 이야기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네요. -우남 이승만쪽

백범 김구 (1876-1949)

독립을 위해선 무력투쟁도 불사하고, 해방 이후에는 한반도에 하나의 민족.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던 백범은, "국제 정치를 모르는 테러리스트, 모험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이승만보다 김구가 더 높은 평가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두 사람이 공존했던 시절엔 모든 면에서 김구가 이승만에게 밀렸습니다. 좋게 말해서 남한 우파 진영을 이끌어가는 '투톱'이지, 언제나 이승만보다 한 치 아래쯤 서야 했던 김구의 속내를 누가 알까요? 출신성분, 가방끈, 심지어 난세의 영웅에겐 필수적이라 할 '전과 기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질적으로 뒤졌습니다. 1948년 3월 김구의 북행선언은, 김구로선 이승만에 대한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딴지 걸기'였답니다.-백범 김구쪽

죽산 조봉암 (竹山 曹奉岩 1898~1959)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사형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원조 공산주의자 조봉암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최고급 공산주의자 코스를 밟은 그는, 불과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코민테른이 승인한 '조선공산당'의 발기인이 된, 누가 뭐래도 '원조, 정통' 주의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보다 두 살 어린 '옛 동지' 박헌영에게 보낸 ?지 한 장 때문에 스타일 구길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미군정과 우익 신문의 들러리를 서게 될줄... 이승만과 로맨스를 벌일 줄... 그러나 '혹시나'했던 그의 선택은 곧 '역시나'로 판명났습니다. 그럼 그렇지. 원조 공산주의자와 이승만이 어떻게... -죽산 조봉암쪽

해공 신익희 (1892-1956)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옛날 가요를 아십니까. 공교롭게도 그 비내리는 호남선에서 극적으로 죽은 인물이 해공 신익희입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불가피론을 수용해 이승만 세력의 대한민국 건국에 일조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 임시정부 세력과 한독당 인사의 기용을 이승만에게 건의했다가 받아들여지지 ㅇ낳자 이승만과 멀어졌고, 급기야 다른 정다의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격돌합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1956년 그가 제 3대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 후보로 나와 자유당 후보 이승만을 떨게 만든 유명한 선거 구호지요. 그러나 선거 10일 전에 갑자기, 정말 갑자기 죽었습니다. 이승만의 든든한 '특공대장'이었다가 '포스트 이승만'을 꿈꾼 죄, 그것이 죄라면 죄였겠지요.-해공 신익희쪽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 1894~1960)

예전에, 술집이나 식당 등에서 손님이 없을 때 손님인 양 가장하고 분위기 잡는 사람을 '사쿠라'(벚꽃)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일본에서 벚꽃과 그 색깔이 비슷한 말고기를 '사쿠라 고기'라 했는데, 쇠고기의 인기가 높아져서 말고기를 쇠고기로 속여 팔게 되자 '사쿠라'가 '가짜'의 다른 표현이 됐다고 합니다. 이 말이 해방 이후에 겉으로는 야당 인사나 민주투사인 체하면서, 실은 권력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챙기는 사이비 야당 정치인을 가리키는 정치 용어로 바뀝니다. '야당의 거목' '반독재운동의 투사'라고 한편에서 일컫는 조병옥이 실은 전형적인 '사쿠라'였습니다. 기독교 신자이자 미국 유학파로 최종 학력이 박사라는 점에서 이승만과 유사점이 많았던 조병옥. 이승만의 '효자손'으로서 좌익 소탕작전에서 실력을 발휘했던 '열혈 반공경찰' 조병옥. 그의 변신은 너무 뒤늦은 것이었습니다.-유석 조병옥쪽

만송 이기붕 (1896-1960)

화려했던 전성기보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사람들의 뇌릿속에 더 깊게 각인된 사람이 이기붕입니다. 사실 이기붕과 이승만은 어찌어찌 해서 혈통상 손자와 할아버지쯤 된답니다. 와장창 몰락한 양반가,X꼬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가 사립학교를 거쳐 미국 유학까지 마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억척스런 홀어머니 덕이랄 밖에요. 그런데도 이기붕은 그 흔한 '박사'학위를 못 땄습니다. 대신 '박사'보다 더 대단한 '교수 부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잘난 마누라가 닦아준 출세길은, 아들가 맞바꾸면서까지 얻어낸 권력은 너무도 빨리 사라집니다. 1960년 4월 28일 새벽에 울린 네 발의 총성은 사실 상징적인 것일뿐, 이기붕 부부는 총을 맞기 전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고 합니다.-만송 이기붕쪽

박마리아 (1906-1960)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수석 졸업- 미국 스카렛 대학 0피바디 사범대학 석사학위 -이화여전 윤리학 교수.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가방끝이 길었던 박마리아는, 평생 남편이 이기붕의 든든한 '스폰서'였습니다. 유학 후 박사도 못 따고 돌아온 남편이 식료품점 등을 하며 빌빌~ 댈 때에도, 다방과 술집 등 '전공'과는 먼 직업을 전전할 때에도 박마리아는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홀로 봉양하며 남편을 밀어줬죠. 그의 '내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정계에서 '싹수'를 보이기 시작하자, 하루가 멀다 하고 돈암장을 드나들며 이승만, 프란체스카 내외와 눈을 맞춘 것도 박마리아였습니다. 그녀의 질긴 내조 인생은, 운명의 그날 이기붕 곁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같이 입에 털어넣은 걸로 마침내 끝이 납니다.-박마리아쪽

운정 김종필 (1926- )

이제 김종필 하면 충청도, 지만련, 의원내각제, 3당합당, 대통령 못해본 3김 멤버...쯤이 떠오르지만, 우리 질곡의 현대사 속에서 그의 역활과 비중은 '과소평가'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미 국무부가 "박정희를 권좌에 오르게 한 구테타의 설계사'라고 평가한 인물을, 우리는 한낱 박정희의 수족 노릇을 하다가 미국으로 쫓겨간 인물로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랬습니다. 김종필은 쿠데타세력의 '머리'였을 분만 아니라, 박정희 집권 후엔 대표적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의 설계부터 제작까지 직접 감독한, 2인자의 외양을 한 진짜 실세였습니다. 오죽하면 '빅브라더' 미국이 김종필 거세작전에 몸소 팔을 걷어붙이셨을가요. 1963년 미국이 주도하고, 박정희가 힘을 보탠 이 '작전' 이후 김종필에게 남은 것은 기나긴 내리막길뿐이었습니다. 무려 40년이나요.-운정 김종필쪽

중수 박정희(中樹 朴正熙 1917~1979)
5, 6, 7, 8, 9대… 무려 다섯 차례나 대통령에 선출 혹은 당선되는 바람에 우리의 역대 대통령 수와 대(차례) 수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을 만들어놓은 박정희는, 사실 조카사위 덕에 대통령이 됐습니다. 조카사위란 김종필입니다.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생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던 무렵, 박정희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쿠데타 계획을 짜고 있었다죠. 사실 당시에는 박정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군부대의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논의하고 있"었다는군요. 그러나 김종필 덕에 최고 권좌에 오른 박정희는, 정권의 좌경화를 우려한 미국의 '원조 중단' 운운하는 위협에 굴복하고 김종필을 거세합니다. 하지만 어디 100프로 미국의 압박 때문이었겠습니까. 쿠데타를 주도한 사실상의 1인자인 데다가 "준수한 용모에다 연설도 잘하"여 "차기 운운" 되는 김종필의 존재가 박정희로선 '부담'이었을 테죠.-중수 박정희쪽

김용무 (1894-1950)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이라고 검색창에 치면, 가인 김병로가 뜹니다. 이는 해방 직후 3년간의 미국정기를 배제했을 때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리하여 1945년 10월 미군정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된 김용무는, 엄밀히 말해 '남한 최초의 대법원장'이라 부르는 게 맞습니다. 일제 암흑기에 소위 '인권변호사'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그는, 대법원장 취임 후 인사와 행정 등에서 갈지 자 행보를 거듭 하다가, 불과 몇 달 후 젊은 판,검사들에게 사상 초유의 '대법원장 탄핵 사태'라는 철퇴를 맞습니다. 사법관의 책임은 "미군정과 건국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 김용무는, 이승만 정부 수립시 "언제든지 노력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불러주는 이가 없어 쓸쓸히 지내다 6.25 때 납북됐다죠.-김용무쪽

애산 이인 (1896-1979)

1946년 미군정기의 세 번째 검사총장에 임명된 이인 역시 일제시대 때 알아주는 '인권변호사'였습니다. 그러나 총독부 시절 인권변호사로서 악법보다는 사상의 자유와 정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받들던 그는, 검사총장 재직시 '정판사 위폐사건'등의 수사를 지휘하는 등 좌익세력의 근절에 노력했습니다. 20여년간 유지해오던 그의 인권옹호론은, 오로지 국가와 정부를 수립(혹은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던 거죠. 정부(수립)을 위해서라면,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이건 '박멸'해야 한다는 이 검찰총수의 멘탈리티는 이후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삼는 검찰 조직 내로 고스란히 흡수됩니다.-애산 이인쪽

이정 박헌영 (1900-1956)

20세기의 첫해에 충청도의 그저 그런 장사꾼의 서자로 태어난 박헌영이 우리 현대사를 대표하는 공산주의자가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언더우드에게 직접 배운 영어 실력 빼곤 뭐 하나 특출난 게 없었던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사회주의를 택합니다. 고려공산청년단,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을 거치며 그는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최고 기관인 코민테른이 인정한 '조선 공산주의자 대표'로 우뚝 섰습니다. 김일성만 없었다면.. 분명한 건 그는 북으로 가선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월북하는 순간, 그의 미래는 결정난 거나 다름 없다.-이정 박헌영쪽

벽초 홍명희 (1888-1968)

홍명희 하면 뭐니뭐니 해도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해방 직후 발간된 장편소설 '임꺽정'이죠. 조선시대 최하층 계층인 백정 출신의 주인공이 의적의 괴수가 되어 펼치는 활약상은 첫 발표 후의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담긴 계급의시과 세계관은, 소설의 작가 홍명희의 월북을 설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이유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홍명희는 북으로 갈 당시 어디까지나 '중도', 즉 왼쪽과 오른쪽에 모두 발을 담근 상태였습니다. 그가 북으로 가고, 그곳에 눌러앉은 것은 전적으로 이 '수백만 독자를 거느린 인기 작가이자, 순국선열의 직계자손'이 너무나도 필요했던 김일성의 적극적인 구애 때문이었답니다.-벽초 홍명희쪽

늦봄 문익환 (1918-1994)

그가 세상을 버린 지도 벌서 1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살아 생전,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가슴 찡하고 소름 돋는 '선동'을 잘한 것으로 유명했죠. 남한에서 손꼽히는 구약신학 전문가이자 시인으로 조용히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에 묻혀 지내던 그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낸 것은, 전태일 등 당시 제 몸을 살라 시대의 어둠을 밝히려 한 수많은 '불꽃'들이었습니다. 일단 세상 속에 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그 불꽃이 되려 했습니다. 비록 1989년 그가 '기어코' 북에 가서 김일성을 끌어안는 바람에 남한에 '공안한파'가 몰아닥쳤지만, 방북이후 '찬양고무죄'로 구속된 그가 담당 검사에게 했다는 말은 진짜 입니다. "통일 통일 함녀서도 상대방을 욕하면서 어떻게 통일이 되는가? 우린 가능한 고무, 찬양을 해줘야 해. 안 그래 검사양반?"-늦봄 묵인환쪽

김주열 (1943-1960)

1960년 4월11일. 위태롭던 이승만정권의 운명은 이날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시신 한 구로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3.15부정선거가 일어난 지 꼭 27일째 되는 날이었죠. 가엾게도,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열여섯 살 소년. 한장 남은 그 역사적인 사진을 오래 응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그의 죽음은, 그 역사적 중요성이나 '유명도'만큼 그 내막이 깊이 알려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주열이 얼마나 똑똑한 학생이었는지, 왜 남원 소년이 마산까지 가서 일을 당했는지, 시위대 속에서 얼마나 형의 손을 꽉 잡고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대학생이 되고 싶어했는지...-김주열쪽

전태일 (1948-1970)

1995년 11월께 개봉된 영화 <아름다워 청년 전태일>의 영어 제목은 'A Single Spark'였습니다. 영어사전에서 'Single'의 뜻을 찾아보신 적이 있는지. '단 하나, 홀로, 고독'한데, 옛날에는 '성실한, 일편단심, 순수한'을 뜻했답니다. 딱하지 않습니까. 전태일에게 어울리는 형용사들만 한데 모아놓은 듯합니다. 그는 홀로 외로운 불꽃이었습니다. 그가 불사른 것은 사리사욕이엇습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은 "배가 고프다."였습니다. 왜 우리는 태일의 아버지가 태일에게 물려준 가난을, 태일이 죽은지 30여 년이나 흐른 지금에도 수많은 태일들에게 상속하고 있을가요..-전태일쪽

전두환 (1931- )

살인교사죄, 내란죄, 시민의 정당한 저항권을 말살한 죄... 이 모든 죄들이 백담사 유배와 남은 재산의 국고반환으로 사해졌을까요. 이상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이 어마어마한 범죄행위에 대한 언론과 시민들의 태도가 점점 무감각한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것입니다. 어차피 단죄하지 못할 거, 사람들은 그렇게 '80년 광주'를 묻어버릴 구실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냉담했던 우리들이 분노한 건, 분노해서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게 된 건, 1995년 거액이 입금돼 있는 그의 차명계좌를 발견한 뒤였습니다.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민망한 표어는 핑계일 뿐, 과거로 묻어버리려던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여론에 불을 지른 것은 결국 돈 문제였습니다.-전두환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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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 웃음과 감동이 교차하는
고지훈 지음, 고경일 그림 / 앨피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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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권력의 맞수 되기
이승만의 라이벌, 김구.조봉암.신익희.조병옥

절대권력과 맞짱을 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용기도 있어야 하고 머리도 있어야 하고 또 능렬도 갖춰야 한다.
김구, 신익희, 조봉암, 조병옥 이 네 사람은 모두
이승만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중에는 이승만이 진정 죽어줬으면 하고 바랐을 인물도 있겠지만,
꼭 죽일 것까지는 없었던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죽었다.
브레이크 없는 초고속 권력열차 '이승만호'에
동승했다가 내팽개쳐진 네 사람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쪽

<위임통치안>과 신채호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미국 대통령 월슨에게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건의해볼 생각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은 정한경과 함께 '장차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아래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둠으로써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시켜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안>을 백악관에 제출한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단재 신채호 ㅡㅇ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조선 민족의 이름을 걸고 위임통치를 청한 것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큰 누를 끼친 것이라며, 이승만에게 이를 사과하고 청원서를 취소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승만은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단재는 이 일을 들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에 격렬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정권 시절 신채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쪽

얼굴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이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쪽

조봉암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의 전력 때문이 아니라 당시 조봉암의 활동 때문이었는데, 문제가 된 것은 조봉암의 '통일관'이었다. 이를 위해 우린 잠시 이승만의 통일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학자는 이승만의 통일론 혹은 제1공화국의 통일정책을 "통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통일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즉, 통일, 통일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사실상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게 그의 통일론이란 것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승만의 통일론은 다소 '이율배반적' 측면이 있었다. 우리가 굳이 '정복conquest', '합병annexation'이란 말 대신 '통일unification'이란 말을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저 무지몽매한 중세인들의 '정복통일'과 달리 오늘날의 남북통일은 평화적이고, 상호 유익하며, 또 동등한 입장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일 테다. 한데 이승만은 앞서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듯, 매우 '중세적' 멘탈리티를 갖고 계셨다. 그에게 남북통일이란 천 년 전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삼국통일'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오죽했으면 6ㆍ25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주한 미대사에게 "이건 우리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요, 기회!"라며 철없는 소릴 하셨겠는가.
어찌 되었건 간에 이런 이승만의 '시대착오적 통일관'에 붙여진 이름은 바로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었다. '북진'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짜릿짜릿해지는 일부 '변태'분들은 엑스터시를 느끼실지 모르지만, 사실 가능성을 따진다면 '0'에 가까운 통일론이다. 미국 관리들조차 이승만의 이런 통일론에 대해 "이승만에게 통일이란 남한 정부의 통제권을 북으로 확장하는 것"(1954년 2월 14일, 미국무부 정보조사국 작성)이라며 그 가능성을 매우 낮게 평가했으니 말이다. 원래 이승만의 정치-외교 스타일이 '가능성' 따위는 중시하지 않았다 -.쪽

조병옥은 이걸 몰랐던 것이다.
민권운동이란, 민주주의란, 명망가 몇몇이 인민의 이름을 도용하기 위해 동원하는 레토릭이 아니다. 무능해 보이는 저 인민들이 떼로 뭉치면 없던 능력이 생길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설탕도 한꺼번에 서너 포대 먹이면 사람을 죽게 만드는 법이니까.-.쪽

고약한 사회학자들의 경우, 이 고맙고도 필수적인 경찰ㆍ군대 등의 '억압적 국가기구'를 견犬과에 비교하기도 한다.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좀 심하다. 아무튼 이렇게 밥그릇에 따라 일제히 군복을 갈아입은 대한민국 건군의 주역들은 크게 세 종種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품종은, 정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비교적 순종에 가까운 혈통들이다. 100퍼센트 순수혈통 일본인 졸업자에 비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에 가장 가깝다. 이 출신들 가운데에는 조선인으로는 가장 높은 계급에까지 올랐던 홍사익(洪思翊, 1889~1946) 중장(필리핀 포로수용소장) 같은 인물도 있는데, 불행히도 홍사익은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니, 이 품종들이 얼마나 순종에 가까웠는지 알 만하다.-.쪽

두 번째는 일본이 만주라는 괴뢰국에 세운 사관학교 졸업자들이다.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만주군사관학교) 졸업자들이 그들이다. 바로 5ㆍ16의 주축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육종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순수혈통 일본인보다 더 일본적인 개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특별히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기도 하고, 일본육군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정일권(丁一權, 1917~1994)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세 번째는 지원병(학병, 징병)으로 군대에 간 부류들인데, 수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5ㆍ16 직후 내각 수반에 올라 쿠데타의 '얼굴마담' 역을 맡았던 장도영(張都暎, 1923~ )이나 박정희의 최후를 코앞에서 목격한 김계원(金桂元, 1922~ ) 같은 사람들이 지원병 출신이다. 이 가운데는 돌연변이들도 꽤 있어서 전혀 다른 종으로 진화한 경우도 있다. 장준하(張俊河, 1918~1975)처럼 광복군에 투신한 경우가 그렇다.
이상의 종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인 광복군 역시 건군 과정에 참여했다. 이범석(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과 송호성(宋虎聲, 초대 국방경비대 사령관. 6ㆍ25 중 월북) 등이 그들인데, 그레샴의 법칙(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이든가? 같은 군인이라지만 이들이 어찌 한 무리에서 놀 수 있으랴. 북한으로 쫓겨가든지 옷을 벗든지 해서 이들 광복군 대부분은 대한민국 국군과는 멀어졌다.

1948년 2월 10일. 바야흐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 실시를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경교장에서 분을 삭이고 있던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발표한다.

나의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安逸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원비怨卑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의 이 성명은 한여름 더위를 싹 가시게 할 만큼, 소름 돋는 명문이다. 성명 발표 두 달 뒤, 김구는 김일성을 만나려고 38선을 넘었다.
물론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사람은 김구 외에도 많았다. 김구가 38선을 넘은 지 하루 만에 홍명희가 그를 따라나섰고, 또 하루 뒤 김규식이 그 뒤를 이었다. 박헌영은 그 1년 반 전 38선을 넘었는데, 그는 요란한 성명 따위는 남기지 않았다. 박헌영의 월북은 한동안 '비공식'적이었다.-.쪽

이들과 달리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을 통과하지 않고 에둘러서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부류들을 전자와 구분하기 위해 발명해낸 용어가 '밀입북'이다. 임수경과 문익환, 그리고 여기서 다루지는 않지만 황석영이나 오익제 천도교 교령 등은 모두 3국을 통해 북한에 입국했다. 북한 영역 내로 들어가는 행위의 동기를 묻지 않고 모두 범죄시하는 듯한 '밀입북'이라는 용어의 개발자는 모르긴 해도 안기부일 것이다.
역사에서 이처럼 특정 공간에 대한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사례는 종종 있었는데, 대부분 종교적 이유였거나 공중보건정책(?)상의 필요 때문이었다. 한데 20세기 이후에는 조금 특이한 양상을 띤다.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접근금지구역'이 형성된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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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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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저편 5
히가와 쿄오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이번편은 다른편보다 훨씬 재미가 있었습니다.

지나의 특별한 능력(?)과 이자크의 힘이 함께해 마의 괴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역시 지나가 괜히 자각은 아닌것 같아요.

하지만 지나를 끊질기게 공격하려는 나쁜 악려으로 부터 지나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쓰던 이자크가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하고 천상귀로 변하게 됩니다.

항상 자신이 괴물이라고 여겼던 이자크는 그의 변한 모습을 지나에게 보이기 싫어하지만.
지나는 그의 변한 모습까지도 감싸않고 그에게 키스를 하게 되어요. ^^;;

그리고 깨어나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합니다.

이번 편에서는 이자크의 외전이 수록 되었는데, 어떻게 가야와 만나게 되었는지를 담았답니다.

이자크의 과거를 한편을 알수 있게하는 에피소드라 이번편이 더 재미있었던것 같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창이 닫힙니다

[이자크와 가야의 만남이 수록된 외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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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귀여워요. 한국에 있었더라면 하나 장만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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