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김윤덕기자]

이문구의 골수 팬이 아니어도, 그 리듬과 글맛에 누구라도 흠뻑 빠져들겠다. ‘이문구전집’의 일환으로 그가 2003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썼던 동시 230여 편을 묶었다.

“이마에 땀방울/송알송알/손에는 땟국이/반질반질/맨발에 흙먼지/얼룩덜룩/봄볕에 그을려/가무잡잡/멍멍이가 보고/엉아야 하겠네/까마귀가 보고/아찌야 하겠네.” 이문구 동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개구쟁이 산복이’는 다시 읽어도 웃음이 난다.

‘할아버지’ 이문구는 아기에게 특히 ‘집착’했던 것 같다. 코흘리개 아기들이 등장하는 시가 유난히 많은 걸 보면. “아기 보던 엄마/딴전 보다가/마당이 조용해서/돌아다보니/아기가 냠냠/강아지밥 먹네/엄마가 없어도/맛있게 먹네/강아지는 옆에서/꼬리만 흔드네.” “눈은 큰데/눈썹이 없고//입은 웃지만/볼이 부었네//성긴 곱슬머리에/귀는 짝귀//아기가 그린/아빠 얼굴.”

정 많고 바지런했던 토종 조선할머니들에 대한 연민도 가득가득 묻어난다. “고사리처럼 굽어서도/고사리를 꺾어/오나가나 별명/고사리 할매//단옷날은 산쑥/중굿날은 구절초/이고 지고 장에 가는/고사리 할매//비 오면 버섯 따고/바람 불면 도토리 줍고/무슨 때가 되면/친손자 외손자/신발 위에 신발 벗고 모여/명일날도/허리를 못펴는/고사리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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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한국인의 자서전/김열규 지음/280쪽·1만2000원·웅진지식하우스

옛적 아기를 갖지 못한 우리 여인네들은 ‘부암을 했다’. 부암(付巖)은 바위에 붙인다, 바위에 부합시킨다는 뜻이다. 바위에 무얼 붙인다는 것일까?

부녀자들은 커다란 바위의 표면에 모가 나지 않은 둥근 돌(몽돌)을 비벼댔다. 자근자근, 우직우직 갈아 댔다. 드디어 바위 결이 움푹 팬다. 거기다 몽돌을 꽂듯이, 박아 넣듯이, 쑤셔 민다. 구멍과 돌은 서로 꼭 들어맞는다.

“합궁(合宮)이다! 찹쌀 궁합 뺨치는 바위 궁합, 돌 궁합이다. 이래서 한때 한국인의 사내 이름 가운데 ‘바위’가 제법 많았다. ‘돌쇠’라는 이름은 또 어떻고!”

한데 얼마나 비벼 대야 하는 걸까? 몇 날 며칠로는 어림도 없다. 몇 달, 아니 몇 해를 비비고 갈고 또 비비고 해야 한다. 후벼 파듯이, 깎아내듯이, 도려내듯이 하면서 맞비벼야 한다. 말이 쉽지, 바위를 돌로 문질러서 구멍이 나게 하기까지 그 정성, 그 노력, 그 세월은 오죽했을꼬!

기자(祈子)라고 일컬어 온 ‘아기 빌이’는 아기 낳기를 비는 일이다. 달에 빌고 샘에 빌고 산신령과 서낭당에 빌고 또 빌었다. 바위에도 빌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기 빌이’ 하다가 손바닥 다 닳고 무릎뼈에 금이 갔다. 그 쓰라림, 그 동통(疼痛), 그 아림은 이 땅에서 살다 간 여성들이 겪은 또 다른 산고(産苦)였다.

태아도 아픔을 겪으면서 태어났다.

산모가 아등바등 죽을 고생을 하는데도 아기가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옛사람들은 온 집안의 구멍이란 구멍,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젖혔다. 문과 구멍은 여성의 상징이다. 아기가 나올 문이다. 그래서 문과 아궁이, 심지어 솥뚜껑, 요강 덮개도 열었다. ‘유사 법칙의 주술’이다.

그런데도 아기가 나오지 않으면 산모를 상복으로 감쌌다. 난산으로 초주검인 산모를 상복으로 똘똘 말다니? 바야흐로 새로운 생명이 축복을 받으며 태어날 찰나에 산모에게 죽음의 옷을 입히다니?

이건 ‘역(逆)하는 주술’이다. ‘반대 법칙의 주술’이다. 상복을 입음으로써 죽음의 반대이자 그 거꾸로인 생명의 탄생을 촉진하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무서운 이야기다. 소름 돋는 사연이다. 탄생은 그리도 엄숙하다.

“생명은 그만큼 무서운 것, 늠렬(凜烈)한 것! 옷깃 여미고 또 여미고, 간수하고 다듬어야 하는 것! 해서 짜디짠 데다 맵디매운 게 인간 목숨이란 것을 상복 입은 산모는 온몸으로, 온 몸짓으로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반만 년 우리 신화와 전설에서 길어 올린 한국인의 집단 자서전이다. 우리 겨레의 집단 무의식과 민족 심상의 정수를 가늠하게 하는 신화적 기호에 대한 해독서다. 상징들로 꿰고 또 엮어진 옛이야기들은 우리네 삶과 사랑, 죽음을 관통하며 때로는 아픔으로 비트적대고 때로는 비참으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끝내는 눈물로 범벅이 된다.

한국인의 질박한 삶과 정신세계를 찾아 50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저자. 그의 이야기 그물은 넓고도 깊다. 그만의 이야기 속에는 혹독하고 애절한, 순박하고 해학이 넘치는 한국인의 숨결이 스며 있다.

‘이고 메고 지고 업고’ 가는 우리 인생길 자체가 굽이굽이 고생길이라고 했던가. 선조들은 삶 자체가 고생바가지라고 일러왔다. ‘고생문이 훤하다’고 했다. 전통적인 한국인들에게 삶이란 짐바리, 짐 보따리였다. 삶을 지는 것, 그게 살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만큼 모질게 독하게 세상을 살아갔다. 그토록 짜게 맵게 살아들 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인생도, 세상도 소금 단지 같았던 것은 아닐까? 거기에 살림 담고 목숨 담아서 우리들 생명 부지해 온 것은 아닐까?

“우리 한국인의 인생은 김칫독 같은 것./우리 목숨들!/소금 뿌려지고 고추 흩뿌려져서/거꾸로 생기 되살아나는 김장 배추와 무들!”

짠지 인생을 땀범벅으로 살아온 한국인들. 짜디짠 짠지들의 땀방울은 눈물로 얼룩지고 피로 물들여졌다. 거기엔 우리 민족의 집단적 상흔과 그 아문 딱지들이 있다.

목숨 줄! 목숨 부지! 목숨 붙인다! 이거야말로 한국인의 존재론의 핵심이었다. 우리 ‘영혼의 동아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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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유석재기자]

푸른 이끼 촘촘히 깔린 거대한 고성(古城)은 침울한 하늘을 배경으로 버티고 섰다. 근처 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들이 어지럽게 떠도는 강변에서 몇 블럭 올라가면, 스모키 화장법으로 눈 주위를 어둡게 칠한 청소년들이 클럽 앞에 줄지어 서 있다. 폐광(廢鑛)과 첨단 줄기세포 연구가 공존하는 곳. 만약 천사가 인간이 사는 지상을 찾아온다면, 영국 북동부 도시 뉴캐슬(Newcastle)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으리라.

그곳에서 작가 데이비드 알몬드(David Almond·55·사진)는 관절염에 걸린 천사가 낡은 창고로 떨어지는 소설 ‘스켈리그’를 썼다. 영국 카네기 상과 휘트브레드 상 같은 주요 문학상을 휩쓸고 청소년 문학계의 신성(新星)으로 떠오른 작가다. 그의 작품 ‘푸른 황무지’(비룡소 刊, 원제 Kit’s Wilderness)의 국내 출간을 계기로 그를 만났다. 천사 스켈리그가 입었다고 묘사된 검은 가죽재킷을 걸친 그는 여전히 동심을 간직한 듯 붉게 상기된 뺨을 구레나룻으로 감추고 있었다.

“‘푸른 황무지’는 성장에 관한 소설입니다. 배경이 된 광산은 과거 뉴캐슬의 중요 산업이었고, 아이들이 벌이는 ‘데스 게임(death game)’은 실제로 제가 어렸을 때 했던 놀이였죠.” 그러니까 퇴락한 광산 마을의 황무지에서 두 사춘기 소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 이야기는 작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술래로 뽑힌 아이가 ‘죽음’을 선고 받고 동굴 속에 남겨지는 ‘데스 게임’은 죽음의 과정을 거친 부활, 즉 청소년의 성장을 상징한다. ‘스켈리그’에 이어 이번에도 등장하는 병든 아기 여동생의 이야기는 실제로 어렸을 때 누이를 여의었던 아픔에서 비롯됐다.

“아이들은 혼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죠. 주인공인 키트와 할아버지와의 관계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마을의 옛 이야기를 잘 아는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 전 갱이 무너져 숨진 사람들을 적어놓은 추모비를 키트에게 보여준다. 그 뒤 키트는 탄광의 어둠 속에서 죽은 사람들의 생전 모습을 보게 된다. 친구 애스큐와 함께 한 기나긴 일탈 끝에 이른 곳은 ‘부활’, 그리고 ‘가족의 복원’이다.

그는 “10대 청소년기가 되면 인생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말로 ‘질풍노도(疾風怒濤)’의 본질을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그것을 깨닫고 어른이 되는 동시에 그들의 부모인 어른들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죠. 세상은 물론 위험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걸 기쁨으로 바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몬드의 최근작은 ‘진흙(Clay)’. 소년이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생명을 얻는 이야기로, 역시 성장소설이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런 신비로운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천사는 어디에서 나타나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건… 저도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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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차 한 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강판권 지음/360쪽·1만8000원·지호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

차나무는 열매와 꽃이 서로 만난다. 차나무의 열매는 차나무의 꽃, ‘운화(雲華)’가 영롱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익어 간다. 대개 나무는 꽃이 핀 뒤 열매를 맺는 법이니 독특한 습성이다.

10, 11월에야 느지막이 피어나는 꽃은 같은 차나뭇과에 속하는 동백을 빼닮았다. 흰빛을 띤 다섯 장의 꽃잎은 군자의 지조와 여인의 정절을 상징했으니, 뿌리가 곧게 내리는 ‘직근(直根)’의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쉬 죽고 만다.

이 다섯 장의 꽃잎은 녹차가 지닌 고(苦) 감(甘) 산(酸) 신(辛) 삽(澁)의 다섯 가지 맛을 드러내는데, 선인들은 이를 인생에 비유해 너무 힘들게도(澁), 너무 티나게도(酸), 너무 복잡하게도(辛), 너무 편하게도(甘), 그리고 너무 어렵게도(苦) 살지 말라고 일러 준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차 한 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다. 아니,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오롯이 담겨 있는 차의 역사, 차의 문화사다. 고대 하은주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수천 년의 중국 역사가 차향을 품고 바람결을 따라 흐른다.

일찍이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읽겠다고 선언해 온 저자. 그가 맨 처음 점지한(?) 나무가 차나무다. 그에게 차나무는 곧 중국인의 삶이자 역사였다.

은나라 때부터 재배되었던 차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수 문제였다. 심한 두통에 시달렸던 황제가 산중의 차나무 잎을 달여 먹고 효험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당송대는 바야흐로 차 문화의 전성기다.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라고 할 ‘차경(茶經)’이 나와 다도(茶道)가 성립되었고 중국인들은 차를 즐기다 못해 탐닉했다. 그 사랑이 지나쳐 매점매석이 횡행하기도 했다.

“차 한 잔 하게나!” 조주선사의 저 유명한 화두 ‘끽다거(喫茶去)’가 나온 게 이때다. 차를 마시는 일상의 행위가 곧 도(道)임을, 삼라만상이 스승이며 삶 자체가 공부라는 깨우침이다. 당송대에 차 문화가 얼마나 생활 속 깊이 스며들고 있는지 그 현주소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차선일미(茶禪一味)! 중국인들에게 차는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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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대니얼 L 샥터 지음·박미자 옮김/373쪽·1만5000원·한승

기억에 죄를 묻는다면 그 죄명은 무엇일까. 가장 큰 죄명은 망각일 것이다. 기억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 보면 기억의 왜곡도 큰 죄다.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메멘토’를 보자. 주인공은 10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죄’만 저지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을 교묘히 조작해 악한 자신을 선한 존재로 포장한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망각과 왜곡 등 인간의 기억이 갖는 문제를 성경의 일곱 가지 대죄에 비유해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그가 명명한 기억의 7대 대죄는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귀인(誤歸認),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이다.

소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흐려지거나 손실되는 가장 익숙한 현상이다. 우리는 최초 학습한 내용의 과반수를 대략 하루만 지나도 잊어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런 급속한 망각률은 둔화된다.

정신없음은 주의와 기억 간의 접촉에 이상이 생긴 경우를 말한다. 우리가 주의력을 다른 곳에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기억할 것을 깜빡하는 경우가 생긴다. 1999년 전미 기억대회 우승자가 일상에서는 형편없는 기억력으로 포스트잇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막힘은 저자가 세계에서 가장 시적으로 표현됐다고 꼽은 한국어 표현 ‘혀끝에서 맴돌다’에 기막히게 표현돼 있다. 누군가의 이름과 지명을 떠올리려 할 때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개념적 표상과 어휘적 표상을 일치시키는 뇌 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오귀인은 기억의 번지수를 잘못 찾는 것을 말한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게 실제 기억이 아니라 환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피암시성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의 유도신문에 없던 기억을 만들어 내는 목격자들을 떠올리면 된다.

편향은 현재의 믿음이나 관점에서 과거의 기억을 덧칠하는 경우다. 지속성은 망각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경우다. 지워 버리고 싶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일곱 가지 죄라고 표현했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결국 ‘대사면령’을 내려 준다. “그것은 인간 진화의 부산물이며 우리 뇌의 기능이 제대로 실현되고 처리되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이기 때문이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빌 클린턴의 청문회 증언 등 풍부한 사례를 분석해 가며 기억의 실체를 파고드는 저자의 필력도 돋보인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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