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문장은 ‘Fact(정보)’로 넘실댄다.
10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 사람, 사물 역시, ‘Fact(정보)’로 가득 찬 집요한 묘사력에 의해 구체화 된다.
“재벌회사가 의료산업에 처음으로 지은 종합병원이었다. 진료과목이 내과 외과 소아과처럼 전공의들의 전문 분야에 따라 나뉘어 있지 않고 신체부위와 장기별 질환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 세워진 안내판이 신체 부위별로 가야 할 층수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자궁 유방 검진실은 일층이었고 간 센터와 심장센터는 이층, 신장 폐 방광 척추는 삼층이었다. 자궁유방검진실 앞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초정밀 레이저 검진설비가 가동되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여자들이 소파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8편의 단편 중 마지막 작품 ‘강산무진’의 초입이다.
주인공이 목적지인 이층 간 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목격하는 안내판과 현수막, 사람들, 과거의 병원 정보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하다못해 검진설비 목록까지 적혀 있다.
육체의 서글픔과 쇠락을 은유하는 ‘묘사’
주목할 점은 김훈의 이 같은 묘사력이 기자출신으로부터 오는 근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훈은 팩트 위주로 쓰는 기사체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서글픔과 쇠락을 은유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묘사한다.
컴퓨터가 아닌 원고지로 글을 쓰고,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로 땅을 밟는 김훈에게 ‘육체’란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늙다 못해 망가져 가는 육체, ‘강산무진’의 주인공 강창수는 지금, 건강검진의 결과를 보러 가는 중이다.
김훈은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섬세하고 살가운 표현이 아닌 ‘사물’과 ‘사람’을 통해 묘사하기를 원한다. 강창수의 시야에 잡히는 병원은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게 될 지도 모를 공포의 공간이다. 전공의의 분야가 아닌, 장기별 질환으로 나뉘어 있는 진료과목, 신체부위별로 가야할 층수를 묵묵히 표시하고 있는 안내판, 자궁유방검진실 앞에서 검사를 기다리는 여자들은 강창수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사물이거나, 함께 죽음의 대열에 오르게 될 지도 모를 동지로 묘사된다.
간암선고를 받은 강창수는 주변정리를 시작한다. 중저가 의류생산업체에서 상무직을 맡고 있던 그는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주식을 처분하고 적금을 해약한다. 4년 전 이혼한 아내에게 주지 못한 위자료 잔금도 챙긴다. 강창수는 울지도 오열하지도 않는다. 김훈은 눈물과 비통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형국와 사람을 통해 주인공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리를 드러낸다.
무생물인 동시에, 강인한 인간인 화자
“이혼한 영세민의 어린 아들이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살다가 기르던 도사견에 물려 죽었다는 TV뉴스를 보면서 아내는 울었다. 아내는 뉴스를 보다 말고 옆방으로 건너가서 울었다. 아내의 울음소리는 내장이 타는 듯이 맹렬하고 다급했다. 울음사이에 아버지를 불렀다. 아내의 울음은 질기고 길었다. 미군 전투기들이 바그다드를 폭격할 때, 폴리스라인을 쳐부수는 노동자 시위대들이 쇠파이프로 전경을 마구 때릴 때,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을 때, 화성 연쇄살인범이 여섯 번째 살인을 저질렀을 때,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에서 구조대들이 옆구리가 터진 시체들을 끌어 낼 때,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사건으로 수백 명이 죽었을 때, 아흔 살이 넘은 종군 위안부 할머니가 자연사했을 때, 아내는 불에 덴 아이처럼 울었다. 아내의 울음은 속수무책의 울음이었다. 아내는 마치 울어야 할 소재를 일삼아 찾는 것처럼 TV채널을 돌려가며 뉴스를 보았다. 아내는 이 세상에서 모진 매를 계속 맞는 사람 같았다”
‘세상에서 모진 매를 계속 맞는 듯’ 질기게 아내가 울어댈 때도 그는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아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우기(雨期)에는 두 번씩, 욕조와 싱크대 물구멍에 살충제를 붓는 것뿐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며칠씩 아내가 집을 비우고 기도원에 들어갔다 목이 쉬어 나올 때도, 기도원에 가는 횟수가 점점 잦아 질 때도 교회 목사를 찾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던 것은 강창수가 아니라 딸이었다. 그는 언제나 무기력한 존재였던 것이다.
매일 반복되던 아내의 질긴 울음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린 강창수의 무기력과 극적으로 대조된다. 우는 방법조차 잃어버린 강창수에게 세상의 비극 앞에서 자지러질듯 울어재끼던 아내의 오열은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혼한지 삼년 후에 기도원 전도사와 재혼한 아내의 이야기를 던지는 순간에도 강창수의 감정은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마치, 기자가 사건을 보도하는 것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전할 뿐이다.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2)가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 문단은 “쉽게 읽히지 않는 김훈의 소설이 인기를 끄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는 의견을 쏟아냈다. 이는 이처럼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화자의 시야에 잡히는 사물 혹은 사람의 상태와 행위를 통해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독자는 김훈의 촘촘한 문장을 읽어 내는 동시에 “그가 왜 이처럼 질기게 묘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도 찾아내야 한다. 말이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분노하지 않는 김훈의 화자는 무생물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말해, 어떤 비극과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단단한 살갗과 두터운 핏줄을 지닌 강인한 인간이기도 하다.
쇠락을 거친 육체의 최후
김훈은 토기와 유물에 관심을 둔다. ‘강산무진도’를 발견하는 조선후기 회화 특별전은 ‘가야 토기 특별전 - AD2~4세기’에서 출발한 것이며, 단편 ‘뼈’에서는 유적을 발굴하는 지방대학 사학과 교수와 늙은 조교가 등장한다.
과거의 인간이 사용한 도구와 흔적을 통해 김훈은 그들의 몸놀림과 노동행위를 추적한다. 맨손과 발로 부딪힌 흔적을 통해 육체를 추측하기도 한다. 사라졌던 ‘강산무진’의 가야토기전은 강창수가 어머니의 산소를 없애는 과정에서 복원된다. 인부들이 삭은 염포를 걷어내자 어머니의 탈육 된 시신이 토기처럼 드러난다. 이는 ‘뼈’에 나오는 사학과 교수와 같은 관찰자적 시점에서 묘사된다.
“백골에도 감정 같은 것이 살아있었다. 두개골은 노여움을 띤듯한 표정으로 이가 숭숭 빠진 듯 한 턱을 벌리고 있었고, 머리맡에 바스락 거린 머리카락이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생시에 어깨가 둥글었는데 육탈된 어깨뼈는 완강한 직각이었다. 허벅지 뼈는 골반 뼈에서 분리된 채 앙상한 두 줄기로 가지런했고 손가락뼈와 발가락뼈는 마디가 분해되어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사학자처럼 묘사 하는 김훈. 그의 화자는 노모의 두개골을 봐도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집요한 관찰력으로 이를 자세히 묘사할 뿐이다.
어머니의 산소를 없애는 이유는 더 이상 돌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사후를 떠올려 보기 위해서다. 그는 둥글던 어깨가 직각으로 육탈되고 허벅지 뼈와 골반 뼈가 분리된 어머니의 유골을 ‘가까운 미래’처럼 느낀다.
유골을 불태워 가루로 만들고 뼛가루를 뿌리면서도 감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묘지 값을 치르고 임대보증금의 잔금을 받아 넣는다. 파기를 약속하는 임대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영수증을 첨부한다. 이는 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가족에게 돈을 분배하고, 주식을 처분하던 행위와 흡사하다.
‘화장’의 뇌종양으로 마모되어가던 아내를 바라보던 남편의 시선, ‘언니의 폐경’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폐경기를 맞는 언니를 바라보던 동생의 시선이 ‘강산무진’에 와서는 스스로에게 전이되어 망가져 가는 육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노모의 유골을 목격하게 된다는 시점의 전환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강산무진도, 죽음을 은유하는 비현실의 세계
표제에도 인용된 ‘강산무진도’는 강창수가 조선후기 회화 특별전에서 만난 산수화다. 들어본 적 없는 화가 이인문의 작품, 가로 길이가 팔 미터가 넘는 긴 그림 강산무진도. 강창수는 화폭 안에 끝없이 펼쳐진 강산과 바다를 바라본다.
“화가가 이 세상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먹을 찍어서 그림을 그린 것인지 종이 위에 숨결을 뿜어 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
쓰일 대로 쓰여 낡을 모서리조차 남아있지 않은 강창수의 육체는 강산무진도를 보며 ‘자연’ 을 발견한다.
아내가 목이 쉬도록 울음을 쏟아 낼 때도, 아내가 전도사와 결혼 할 때도, 자신이 암 선고를 받을 때도 아무 말이 없던 그가 강산무진도를 보며 꺼낸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라는 말은 목까지 따끔 거리게 만드는 슬픔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홀로 가야 할 세상과 시간을 발견한 강창수의 목적지는 ‘꿈에 본 강산’ ‘꿈에도 보지 못한 강산’이다. 이는 죽음을 은유하는 비현실의 세계다.
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강창수는 가족들에게 일생을 노동해 번 돈을 고스란히 분배한다. 헤어진 아내에게는 위자료 잔금을, 아파트와 주식을 처분한 돈은 딸과 LA에서 세탁소를 하며 ‘쪼들리게’ 살고 있는 큰아들의 몫으로 남는다. LA에 있는 요양시설을 선택하면 그 돈이 전부 큰아들에게 돌아갈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LA행을 택한다. 서울에서 입원하면 간병부를 고용해도 결혼 한 딸이 자신의 남은 시간을 힘들어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입국시킨다는 이유만으로 4억이라는 돈을 받는 아들이 요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한 달 아니 일 년에 몇 번이나 돌아볼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이 돌아보기 전 꿈에 그리던 ‘강산무진도’를 찾아 떠날 수도 있는 그는 연약한 생명이다. 강창수는 4억짜리 티켓 값을 지불하고 LA행 비행기에 오른다.
무기력 했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 LA 역시, 자신을 버거워 할 딸과 아버지의 유산을 기대하는 아들의 요청 때문이라는 사실은 서글프다. ‘강산무진도’에서 봤던 산과 바다를 내려다보며 유리창의 덧문을 내리는 강창수는 김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50대 중년 남성의 마지막 초상 같은 인물이다.
소설은, 강창수가 LA에 도착했는지의 여부를 말해주지 않는다. 기상이변으로 착륙이 1시간 쯤 지연될 것이라는 기내방송이 소설의 마지막 ‘말’이다. 김훈은 강창수가 세상 어느 곳에도 착륙하길 원치 않는다. 강창수의 마지막이 죽음의 순간까지 계산해야 했던 지긋지긋한 돈과 무관한, 그가 그리도 바랬던 ‘강산무진도’의 강산과 바다를 닮은 ‘하늘’ 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강산무진’은 돈벌이와 노동으로 지친 김훈의 인물들이 “허허롭다”고 느끼던 삶의 마지막 순간이다. 김훈은 장엄한 자연 밑에 앉아 자신만의 소리를 내던 우륵(<현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4)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최후의 보루를 산수화 속 `자연`으로 선택한 김훈.
그에게 세상이란 돈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일해야 하는 힘겹고 사나운 고비길이다. 그의 소설이 서글픈 건, 우리 모두가 그네들처럼 돈 냄새로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아가며 달음박질 하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누군가는 아내처럼 ‘질긴’ 울음을 울어댈 것이고 누군가는 강창수처럼 ‘침묵’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과 고통의 무게가 다른 것은 아니다. 김훈이 자전거를 타며 느낀 육지의 굴곡처럼, 삶이란 누구에게나 참으로 거칠고 험난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