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문장은 ‘Fact(정보)’로 넘실댄다.

10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 사람, 사물 역시, ‘Fact(정보)’로 가득 찬 집요한 묘사력에 의해 구체화 된다.

“재벌회사가 의료산업에 처음으로 지은 종합병원이었다. 진료과목이 내과 외과 소아과처럼 전공의들의 전문 분야에 따라 나뉘어 있지 않고 신체부위와 장기별 질환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 세워진 안내판이 신체 부위별로 가야 할 층수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자궁 유방 검진실은 일층이었고 간 센터와 심장센터는 이층, 신장 폐 방광 척추는 삼층이었다. 자궁유방검진실 앞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초정밀 레이저 검진설비가 가동되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여자들이 소파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8편의 단편 중 마지막 작품 ‘강산무진’의 초입이다.

주인공이 목적지인 이층 간 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목격하는 안내판과 현수막, 사람들, 과거의 병원 정보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하다못해 검진설비 목록까지 적혀 있다.

육체의 서글픔과 쇠락을 은유하는 ‘묘사’

주목할 점은 김훈의 이 같은 묘사력이 기자출신으로부터 오는 근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훈은 팩트 위주로 쓰는 기사체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서글픔과 쇠락을 은유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묘사한다.

컴퓨터가 아닌 원고지로 글을 쓰고,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로 땅을 밟는 김훈에게 ‘육체’란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늙다 못해 망가져 가는 육체, ‘강산무진’의 주인공 강창수는 지금, 건강검진의 결과를 보러 가는 중이다.

김훈은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섬세하고 살가운 표현이 아닌 ‘사물’과 ‘사람’을 통해 묘사하기를 원한다. 강창수의 시야에 잡히는 병원은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게 될 지도 모를 공포의 공간이다. 전공의의 분야가 아닌, 장기별 질환으로 나뉘어 있는 진료과목, 신체부위별로 가야할 층수를 묵묵히 표시하고 있는 안내판, 자궁유방검진실 앞에서 검사를 기다리는 여자들은 강창수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사물이거나, 함께 죽음의 대열에 오르게 될 지도 모를 동지로 묘사된다.

간암선고를 받은 강창수는 주변정리를 시작한다. 중저가 의류생산업체에서 상무직을 맡고 있던 그는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주식을 처분하고 적금을 해약한다. 4년 전 이혼한 아내에게 주지 못한 위자료 잔금도 챙긴다. 강창수는 울지도 오열하지도 않는다. 김훈은 눈물과 비통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형국와 사람을 통해 주인공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리를 드러낸다.

무생물인 동시에, 강인한 인간인 화자

“이혼한 영세민의 어린 아들이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살다가 기르던 도사견에 물려 죽었다는 TV뉴스를 보면서 아내는 울었다. 아내는 뉴스를 보다 말고 옆방으로 건너가서 울었다. 아내의 울음소리는 내장이 타는 듯이 맹렬하고 다급했다. 울음사이에 아버지를 불렀다. 아내의 울음은 질기고 길었다. 미군 전투기들이 바그다드를 폭격할 때, 폴리스라인을 쳐부수는 노동자 시위대들이 쇠파이프로 전경을 마구 때릴 때,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을 때, 화성 연쇄살인범이 여섯 번째 살인을 저질렀을 때,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에서 구조대들이 옆구리가 터진 시체들을 끌어 낼 때,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사건으로 수백 명이 죽었을 때, 아흔 살이 넘은 종군 위안부 할머니가 자연사했을 때, 아내는 불에 덴 아이처럼 울었다. 아내의 울음은 속수무책의 울음이었다. 아내는 마치 울어야 할 소재를 일삼아 찾는 것처럼 TV채널을 돌려가며 뉴스를 보았다. 아내는 이 세상에서 모진 매를 계속 맞는 사람 같았다”

‘세상에서 모진 매를 계속 맞는 듯’ 질기게 아내가 울어댈 때도 그는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아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우기(雨期)에는 두 번씩, 욕조와 싱크대 물구멍에 살충제를 붓는 것뿐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며칠씩 아내가 집을 비우고 기도원에 들어갔다 목이 쉬어 나올 때도, 기도원에 가는 횟수가 점점 잦아 질 때도 교회 목사를 찾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던 것은 강창수가 아니라 딸이었다. 그는 언제나 무기력한 존재였던 것이다.

매일 반복되던 아내의 질긴 울음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린 강창수의 무기력과 극적으로 대조된다. 우는 방법조차 잃어버린 강창수에게 세상의 비극 앞에서 자지러질듯 울어재끼던 아내의 오열은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혼한지 삼년 후에 기도원 전도사와 재혼한 아내의 이야기를 던지는 순간에도 강창수의 감정은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마치, 기자가 사건을 보도하는 것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전할 뿐이다.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2)가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 문단은 “쉽게 읽히지 않는 김훈의 소설이 인기를 끄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는 의견을 쏟아냈다. 이는 이처럼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화자의 시야에 잡히는 사물 혹은 사람의 상태와 행위를 통해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독자는 김훈의 촘촘한 문장을 읽어 내는 동시에 “그가 왜 이처럼 질기게 묘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도 찾아내야 한다. 말이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분노하지 않는 김훈의 화자는 무생물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말해, 어떤 비극과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단단한 살갗과 두터운 핏줄을 지닌 강인한 인간이기도 하다.

쇠락을 거친 육체의 최후

김훈은 토기와 유물에 관심을 둔다. ‘강산무진도’를 발견하는 조선후기 회화 특별전은 ‘가야 토기 특별전 - AD2~4세기’에서 출발한 것이며, 단편 ‘뼈’에서는 유적을 발굴하는 지방대학 사학과 교수와 늙은 조교가 등장한다.

과거의 인간이 사용한 도구와 흔적을 통해 김훈은 그들의 몸놀림과 노동행위를 추적한다. 맨손과 발로 부딪힌 흔적을 통해 육체를 추측하기도 한다. 사라졌던 ‘강산무진’의 가야토기전은 강창수가 어머니의 산소를 없애는 과정에서 복원된다. 인부들이 삭은 염포를 걷어내자 어머니의 탈육 된 시신이 토기처럼 드러난다. 이는 ‘뼈’에 나오는 사학과 교수와 같은 관찰자적 시점에서 묘사된다.

“백골에도 감정 같은 것이 살아있었다. 두개골은 노여움을 띤듯한 표정으로 이가 숭숭 빠진 듯 한 턱을 벌리고 있었고, 머리맡에 바스락 거린 머리카락이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생시에 어깨가 둥글었는데 육탈된 어깨뼈는 완강한 직각이었다. 허벅지 뼈는 골반 뼈에서 분리된 채 앙상한 두 줄기로 가지런했고 손가락뼈와 발가락뼈는 마디가 분해되어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사학자처럼 묘사 하는 김훈. 그의 화자는 노모의 두개골을 봐도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집요한 관찰력으로 이를 자세히 묘사할 뿐이다.

어머니의 산소를 없애는 이유는 더 이상 돌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사후를 떠올려 보기 위해서다. 그는 둥글던 어깨가 직각으로 육탈되고 허벅지 뼈와 골반 뼈가 분리된 어머니의 유골을 ‘가까운 미래’처럼 느낀다.

유골을 불태워 가루로 만들고 뼛가루를 뿌리면서도 감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묘지 값을 치르고 임대보증금의 잔금을 받아 넣는다. 파기를 약속하는 임대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영수증을 첨부한다. 이는 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가족에게 돈을 분배하고, 주식을 처분하던 행위와 흡사하다.

‘화장’의 뇌종양으로 마모되어가던 아내를 바라보던 남편의 시선, ‘언니의 폐경’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폐경기를 맞는 언니를 바라보던 동생의 시선이 ‘강산무진’에 와서는 스스로에게 전이되어 망가져 가는 육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노모의 유골을 목격하게 된다는 시점의 전환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강산무진도, 죽음을 은유하는 비현실의 세계

표제에도 인용된 ‘강산무진도’는 강창수가 조선후기 회화 특별전에서 만난 산수화다. 들어본 적 없는 화가 이인문의 작품, 가로 길이가 팔 미터가 넘는 긴 그림 강산무진도. 강창수는 화폭 안에 끝없이 펼쳐진 강산과 바다를 바라본다.

“화가가 이 세상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먹을 찍어서 그림을 그린 것인지 종이 위에 숨결을 뿜어 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

쓰일 대로 쓰여 낡을 모서리조차 남아있지 않은 강창수의 육체는 강산무진도를 보며 ‘자연’ 을 발견한다.

아내가 목이 쉬도록 울음을 쏟아 낼 때도, 아내가 전도사와 결혼 할 때도, 자신이 암 선고를 받을 때도 아무 말이 없던 그가 강산무진도를 보며 꺼낸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라는 말은 목까지 따끔 거리게 만드는 슬픔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홀로 가야 할 세상과 시간을 발견한 강창수의 목적지는 ‘꿈에 본 강산’ ‘꿈에도 보지 못한 강산’이다. 이는 죽음을 은유하는 비현실의 세계다.

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강창수는 가족들에게 일생을 노동해 번 돈을 고스란히 분배한다. 헤어진 아내에게는 위자료 잔금을, 아파트와 주식을 처분한 돈은 딸과 LA에서 세탁소를 하며 ‘쪼들리게’ 살고 있는 큰아들의 몫으로 남는다. LA에 있는 요양시설을 선택하면 그 돈이 전부 큰아들에게 돌아갈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LA행을 택한다. 서울에서 입원하면 간병부를 고용해도 결혼 한 딸이 자신의 남은 시간을 힘들어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입국시킨다는 이유만으로 4억이라는 돈을 받는 아들이 요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한 달 아니 일 년에 몇 번이나 돌아볼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이 돌아보기 전 꿈에 그리던 ‘강산무진도’를 찾아 떠날 수도 있는 그는 연약한 생명이다. 강창수는 4억짜리 티켓 값을 지불하고 LA행 비행기에 오른다.

무기력 했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 LA 역시, 자신을 버거워 할 딸과 아버지의 유산을 기대하는 아들의 요청 때문이라는 사실은 서글프다. ‘강산무진도’에서 봤던 산과 바다를 내려다보며 유리창의 덧문을 내리는 강창수는 김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50대 중년 남성의 마지막 초상 같은 인물이다.

소설은, 강창수가 LA에 도착했는지의 여부를 말해주지 않는다. 기상이변으로 착륙이 1시간 쯤 지연될 것이라는 기내방송이 소설의 마지막 ‘말’이다. 김훈은 강창수가 세상 어느 곳에도 착륙하길 원치 않는다. 강창수의 마지막이 죽음의 순간까지 계산해야 했던 지긋지긋한 돈과 무관한, 그가 그리도 바랬던 ‘강산무진도’의 강산과 바다를 닮은 ‘하늘’ 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강산무진’은 돈벌이와 노동으로 지친 김훈의 인물들이 “허허롭다”고 느끼던 삶의 마지막 순간이다. 김훈은 장엄한 자연 밑에 앉아 자신만의 소리를 내던 우륵(<현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4)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최후의 보루를 산수화 속 `자연`으로 선택한 김훈.

그에게 세상이란 돈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일해야 하는 힘겹고 사나운 고비길이다. 그의 소설이 서글픈 건, 우리 모두가 그네들처럼 돈 냄새로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아가며 달음박질 하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누군가는 아내처럼 ‘질긴’ 울음을 울어댈 것이고 누군가는 강창수처럼 ‘침묵’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과 고통의 무게가 다른 것은 아니다. 김훈이 자전거를 타며 느낀 육지의 굴곡처럼, 삶이란 누구에게나 참으로 거칠고 험난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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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인터넷 검색으로 원하는 정보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자료를 얻어 낼 수 있는 정보화 시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구별해 낼 것인가’라는 문제다. 정보의 원천, 신문에서 얻는 자료만 해도 엄청나다. 중앙 일간지를 포함해 출근길에 놓여 있는 무가지, 인터넷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정보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신문활용교육(NIE)은 신문에 실린 정보를 활용해 교육 효과를 높여 인재양성에 힘쓰는 과정이다. 정확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하는 학습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향신문 신문활용교육(NIE) 전문기자인 최상희(38)씨는 최근 출간한 <신문스크랩의 기술>(넥서스. 2006)에서 ‘몇 배로 읽는 신문 독법’ ‘신문스크랩 방법’ ‘신선한 정보’를 얻는 스크랩 포인트’ ‘기사 유형별 스크랩 기법’ 등 그간 현장에서 쌓은 실속 있는 노하우를 공개 했다.

책에 따르면 신문스크랩이란 첫째, ‘가치 있는 정보’를 골라내는 과정이며, 둘째, ‘수집된 자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분류-정리-버리기를 일정한 규칙을 갖고 반복하는 과정이고, 셋째, 축적된 정보를 기본으로 아이디어 포착을 위한 바탕을 마련하는 과정이다.

저자가 소개한 ‘당일 신문 읽기와 정리’ 부분이 눈길을 끈다.

▲1단계 : 신문 제목, 주요 기사, 사진, 광고만 빨리 훑고 내려간다. 중요 하다고 판단되는 곳은 눈에 띄는 대로 색연필로 체크해둔다(신문 한 부에 소요되는 시간은 3분이면 충분하다).

▲2단계 : 표시해 둔 곳을 중심으로 시간을 할애 해 한 번 더 본다. 이때 스크랩 할 부분에 대한 표시를 따로 해둔다. 체크해두지 못한 부분이라도 제목과 첫 문장 정도는 살핀다(소요시간 20분 내외).

▲3단계 : 스크랩할 부분을 오려서 출처, 날짜, 수집용도 등을 간단히 기입한다(소요시간 20분 내외).

▲4단계 : 스크랩해 둔 것을 확인 한 후 임시 보관함(또는 1호 봉투)에 넣어둔다(소요시간 5분 내외).

스크랩북, 1호 봉투(대봉투, 서류봉투), 파일 또는 폴더가 준비 됐다면 이제 본격적인 자신만의 스크랩 기술을 갖춰야 한다.

스크랩에서 효율적인 분류와 정리를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침도 숙지하는 것이 좋다.

▲스크랩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조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다고 성공적인 신문 스크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정리해야 한다. 틈만 나면 분류,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내 몸에 맞는 스크랩 방법(스타일)을 찾아라. 다른 사람의 스크랩 방법은 참고만 하는 것이 좋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서 만이 자신만의 스크랩 방법을 찾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 주제부터 시작한다. 스크랩북은 5권 내외, 주제는 3개 내외로 시작한다든지 스크랩북 3권과 대봉투 10장으로 시작한다든지 처음에는 조금 쉽게 출발하는 것이 좋다.

▲분류, 정리하는 시간을 최소화 한다. 분류, 정리는 어찌 보면 자신의 자리의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들거나 어지럽게 만든다. 다양한 도구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시간을 가급적 줄인다.

▲지나친 분류, 정리는 오히려 해가 된다. 스크랩의 주(主)는 정보력 향상에 있고 부(副)는 효율적인 수집, 분류, 정리에 있다. 분류, 정리를 잘해둘 수록 정보력을 높일 수 있다.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매일 쏟아지는 방대한 정보들을 솎아 ‘내 것’ 으로 만들고 싶은 이라면 눈여겨 읽을 만한 실용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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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형준 기자] 세상 살기 어려울 때,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옴짝달싹도 못할 때, 말 못할 고민이 있을 때. 이런 일들은 나열만 해도 마음이 다 갑갑해진다. 이렇게 마음이 갑갑해지면, 우리는 이따금씩 용하다고 소문난 '도령님'이나 '도사님', 아니면 '보살님'을 찾아갈 때가 있다. 어떤 도사님은 얼굴만 보고도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아맞히는 도력을 발휘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들을 찾아가보기에 앞서, 먼저 확인하는 뭔가가 있다. 그게 뭘까? 그건 바로 '손금'이다.

'손금(Flexion crease), 국어사전에는 "손바닥의 살결이 줄무늬를 이룬 금"이라고 설명돼 있다. 우리는 그렇듯 손바닥에 새겨진 눈에 잘 띄는 3개의 주름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사소한 주름까지 살펴보면서 그 사람의 운명을 짐작해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정확하게 이야기할 때가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더 놀라운 것은 '손금'은 주기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

전세훈과 전인호의 만화 <손금>은 '손금' 때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주인공을 이야기하면서 손금의 모든 것을 그려나간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보든, 심각하게 보든, 어쨌든 흥미롭기 그지없는 손금. 그 심오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들어는 봤나, 천경전수상
 
 

 
▲ 전세훈&전인호의 만화 <손금>의 표지. 전 26권이며, 성인판 외전도 3권이 출시돼 있다.
ⓒ2006 삼양출판사
만화 <손금>은 하릴없이 시간만 죽치던 한심한 군상 '나동태'가 주인공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선천적으로 손금이 없는 '천경전수상(天鏡傳手相)'을 타고난 인물이라는 것.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미친개에게 물려 죽을 운명의 '손금'과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운명의 '손금'이 동시에 나타나 급살을 맞으면서 만화는 탄탄하게 이야기를 연결하기 시작한다.

무당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급살 맞은 손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드디어 금단의 주술을 그에게 불어넣게 된다. 다시 살아난 그는 이제 100명의 운명을 바꿔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면서, 다른 사람의 손이 닿으면 손금이 그대로 옮겨져,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해 운명을 바꿔놔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세상 살기 참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손금>은 그런 '나동태'가 다양한 사람들의 손금이 옮겨져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을 살게 되는 이야기들을 그려나간다. 아이들에게 무시당하는 여고 수학 선생님은 기본이고, 살인범의 손금이 복사돼 경찰의 추격을 받을 때도 있으며, 기가 막힌 사기극을 벌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돼 수백억원의 당첨금을 탄 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때도 있다.

이 만화의 주인공 '나동태'는 다른 사람의 기구한 운명을 바꿔놔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사명을 견딜 수 있게끔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일은 어떤 상황이든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끈기, 순간순간의 재치가 중요한 법이다. 한편으로는 남의 인생을 대신 살면서 그 사람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돼, 많은 것을 깨닫는다는 것도 중요한 설정. 하지만 '나동태'가 기적적으로 그 기구한 운명을 바꿔놓을 때쯤에, 다시 원래의 인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가끔씩 안타까울 때도 있다.

만화 <손금>은 구체적으로 손금을 보는 방법과, 그 손금에 대한 자세한 풀이가 인상적이다. 에피소드마다 부록으로 유명 인사들의 손금을 그려놓고, 그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보장하며, 이 만화가 연재될 당시에는 독자들의 손금을 편지로 전달받아 앞으로의 운명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때도 있었다. 이 만화를 보면, 새삼스레 손금을 바라보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랑이 변하니? '손금'도 변해

<손금>의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손금이 설명해주는 그대로 그려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손금은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틈틈이 이야기한다. 주인공 '나동태'가 그렇듯 기구한 남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도 결국에는 '손금은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듯하다.

손금이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미리 내다본 운명을 절대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에게 손금을 편지로 보내준 독자들에게도 '노력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간만이 간직하고 있는 불굴의 투지와 끈기는 정해진 운명도 언제든 뒤바꿀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제 아무리 손금이 좋으면 뭐하나? 그것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좋은 손금은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 만화에 수록된 성공한 이들의 손금도, 성공을 위해 기울인 그 사람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손금'은 그저 '맛보기'일 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화려한 성공을 보장하는 손금도, 혹은 비참한 실패를 암시하는 손금도, 결국에는 그 사람의 각성과 전환을 요구하는 운명의 잠언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손금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노력하는 삶을 산다면 언제든 빛을 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작가가 손금에 대해 펼쳐놓는 해박한 지식과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정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건강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현실이 답답하다면, 이따금씩 손금에 대해 풀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은 확실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각성의 계기로만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좋겠다. 손금뿐만 아니라 '도령님'이나 '도사님', '보살님'의 기가 막힌 점괘도 마찬가지다. 운명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의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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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은미 기자]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말했다. "결혼하기로 했든 하지 않기로 했든 상관없다. 그 어느 쪽이든 당신은 후회하게 될 테니까." 최근 나온 두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와 <햇빛 찬란한 나날>(조선희)은 '웬수 같은 결혼'에 대한 재미있는 우화다.
 
 

"결혼이란 것이 무엇을 바꿔주나?"고 물었던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두 소설은 묻는다. 결혼이 뭐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지금 '결혼'은 고래도 미치게 하지 않나? 왜 꼭 한 남자, 한 여자와 살아야 하는데?

아내는 결혼하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은 왜?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상한 부부 이야기다. 아니 결혼 이야기다. 일 때문에 만나 사랑에 빠진 '나'는 결혼이 싫다는 인아에게 애걸복걸해 겨우 결혼했다. 그녀의 사생활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겠다, 맹세까지 했다. 다른 남자와 자는 것도 존중하겠단 맹세였다.

 
ⓒ2006 문이당
어려울 거 없을 줄 알았다. 연애 기간에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녀 없이 사느니, 그게 낫다고 마음 정리 끝났으니까.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가끔씩 아내의 늦은 귀가가 뜻하는 바 때문에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내가 어느 날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거기까지 참을 수 있었다. 잤다는 말도 참을 수 있었다. 아내가 또 말했다.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그렇다고 '나' 하고 이혼하고 싶지도 않다나? 결국 아내는 '나'와 이혼하지도 않고, 그 놈과 결혼했다. 아내는 행복했다. 주인공 '나'는? 질투에 부글부글 끓었지만, 칼을 들고 그놈의 배를 '푸욱' 쑤실 만치 미치지도 않았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결국 일부일처제가 일처다부제에 귀의한 남자 이야기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나는 어떻게 마누라가 오쟁이 진 남편이 됐나, 나는 어떻게 두 집 살림하는 마누라의 남편으로 살아남았나,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나, 이러며 '결혼'이란 샌드백을 툭툭 친다. 온갖 사회학자와 온갖 사회적 근거를 들어 뚝심 있게 말한다. 축구 이야길 하며, 축구 선수 공 놀리듯이 결혼제도에 대해 조롱한다. '일부일처제'에 대해 조롱한다. 농담처럼 도발한다.

"왜 꼭 다른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는 정상이라며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중략) 구성원이 덜 있건 더 있건 가정이면 그냥 다 가정인 거야"라는 인아의 말은 의미가 심장을 콕 찌르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가 동의하여 결정한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라면 오히려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같이 살아가는 수많은 부부들이다"고 말하며 묻는다. 뭐가 문제인가? 왜 안 되는가? 왜 꼭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는 결혼이어야만 하는가?

▲ 역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 영화 <쥴 앤 짐>(1962년). 셋은 행복했다.
ⓒ2006 쥴 앤 짐
 
결국 소설 속 '나'는 생각한다. "세 명 이상이 동시에 결혼을 하고 함께 살면서 성관계 및 자녀 양육까지 공유하는 집단혼"을 이루며 산다는 폴리아모리스트들에 대하여. 이들이 꿈꾸는 "성적 평등, 소유욕 없는 관계 그리고 배우자 간의 친밀성과 진정한 사랑을 모두 아우른다"는 집단혼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하지만 유토피아는 무슨 유토피아? 현실은 말했다. 미국에서 집단혼에 대한 연구 결과, 겨우 7퍼센트만이 5년 이상 지속되었다. 당시 일반적인 결혼 생활은 되레 평균 5년이었다. 역시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나?

주인공 '나'는 말한다. "어쩌면 문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결혼 자체인지도 모른다. 모노가미건, 폴리가미건, 심지어 수양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폴리피델리티에서조차 결혼 생활을 통해 유토피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이 책은 오도독 뼈가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농담으로 묻는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은 왜 죽을 때까지 행복하지 않나? 이들은 왜 계속 미친 듯이 사랑하지 않나? 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 돼버리나? 혹시 '일부일처제' 자체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닌가? 리콜이 필요한 건 아닌가?

집단혼 시절은 햇빛 찬란한 나날이었나?

조선희의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에 실린 표제작 단편 '햇빛 찬란한 나날'은 '집단혼'을 경험한 여자 이야기다. <아내와 결혼했다>가 막 시작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노드라마라면, <햇빛 찬란한 나날>은 오래 전 한 번 해봤던 이가 보여주는 흑백 드라마다. 그리고 이번엔 '본게마인샤프트'다. 독일에 있다는 주거공동체. 한 여자가 젊은 날을 여기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2006 실천문학사
주인공 '나'가 우연히 만난 여자는, 젊어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는 대신" 훌쩍 서울을 떠났다. 독일로 간 그녀가 만난 게 '본게마인샤프트'였다. 그곳은 별세계였다. 호기심으로 갔던 그녀는 거기서 남자를 만나고 결혼한다.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그곳은 모든 것이 공동인 데였다. 특히 "섹스가 그 모든 공유의 근원이자 핵심"이었다. 그곳에서 그녀 역시 남편을 공유하며 17년을 살았다.

그녀가 그곳에 대해 쓴 회고담에서 주인공 '나'는 "내 이상의 주소 하나를 발견했다.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버젓이 현실의 세계에 문패를 내걸고 있는 주소"였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주말이면 다 같이 행복한 축제를 벌이는 곳. 소유를 놓고 싸우지 않는 곳. "사랑은 즉흥성이 생명"이라고 믿으며 그걸 실천하는 곳.

하지만 '나'가 들여다본 현실은 아름답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번엔 공유하지 않는 한 남자와 재혼했다. 하지만 역시 실패였다.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는 모든 걸 정리하고 독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본게마인샤프트에서 그녀의 실패에 대해 '나'는 말한다. "질투는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는 늘 남편의 애인에 대한 질투 때문에 괴로워했고 결국 그의 자존심도 결혼생활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욕망은 논리로 재단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게마인샤프트라는 것도 논리로 설계한 이상의 공간이었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농담처럼 판타지를 꿈꾼다면, <햇빛 찬란한 나날>은 진담처럼 이상을 슬퍼한다. 이상이 실현된 현실의 몰락을 슬퍼한다. "이념이나 명분이란 것도 문서 위의 판타지일 뿐"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상적인 결혼생활이란 뭘까. 있기나 한 걸까? 아니, 정말 없는 걸까?

<햇빛 찬란한 나날>은 말한다. "누구에게나 이상으로 빛나는 청춘이 있는 건 아니다. 이상을 품는 것도 재능이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지만, 누구나 꿈을 꾸는 건 아니다. 결혼의 이상을 품는 것도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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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2006 문학동네
허무. 김훈의 <강산무진>에 흐르는 기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허무'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니면 공허가 있을 정도. 어째서일까? 제목만 본다면, 또한 표제작에서 이인문의 대형산수화 '강산무진도'가 크게 쓰인 것을 생각한다면 웅장한 것을 기대해볼 만도 한데 무슨 까닭으로 현기증이 일 정도로 현란한 문체는 모두 허무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것일까?

<강산무진>에 실린 작품은 8개다. 작품 목록만 본다면 단연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화장'과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인 '언니의 폐경'이 눈에 띄지만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수상작의 의미가 퇴색하고 만다. 8개의 작품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해질녘 노을의 쓸쓸한 마지막을 담아냈기 때문인가. 8개의 작품들 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강산무진>을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강산무진>에 실린 작품들은 꼭 있어야 할 것들만 있다는 말이다.

<강산무진>에서 처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직업이나 전문적인 행위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 하다못해 <개>에서까지 선과 악을 넘어선 '장인정신'을 보여준 작가이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하지만 이게 그렇게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전에는 작품 속 인물들의 장인정신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면 이번에는 그 경계가 작품 밖까지 밀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첫 작품 '배웅'에서 취기가 넘실거리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택시운전사의 속내를 엿보고 있노라면 글을 읽는 것인지 택시운전사가 보는 풍경을 보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항로표지'의 등대장은 물론이고 불도저를 미는 송곤수의 행위는 어떤가. 가로로 다섯 번 밀고 세로로 다섯 번 미는 그 행위가 숭고하다 여겨질 만큼 작가는 전문적인 행위의 치열함을, 흡사 독자가 그것을 하는 것처럼 아찔함을 느낄 정도로 글 속에 담아냈다. 기실 장인정신을 운운하기도 어려울정도로 그것은 오롯이 독자의 것이 되고 만다. 감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강산무진>의 큰 틀에서 보자면 이것의 공은 정말 부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허무를 향한 다급하고도 치열한 내달리기가 내뿜는 기운이다. 다들 왜 이렇게 허무할까 싶을 정도로 <강산무진>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쓸쓸하다. 인생의 마지막 고개를 넘어섰기 때문일까? 보이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나이, 혹은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그리 공허해보이지는 않는다.

'강산무진'의 주인공은 암을 선고받는다. 사실상의 죽음을 선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과 아주 다르게 그린다. 살아 온 시간에 후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을 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러려니, 한다고 해야 할까? 굳이 말하자면 '강산무진'의 주인공은 우리가 흔히 '혼'이라고 하는 것이 빠져나간 사람 같다. '내일 죽는다!'는 말을 들어도 그러려니 하는, 희로애락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 같은 넋 나간 사람이다.

이런 사람, 몸뚱이로 허무함을 부르짖는 이는 위험하다. 삶에 대한 무엇도 없기에 정말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산무진'에서, 또한 다른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에 속세와 끈을 맺게 해주는 것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돈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했던가? 희로애락이 모두 빠져나가도 돈이 문제가 된다. '강산무진'의 그는 자신이 없어지면 맡아야 할 어머니 묘를 화장하는 순간까지도 돈을 떠올린다. 딸에게 자신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도 돈이 만든 것이고 아내와 연락이 되는 것도 돈 덕분이고 미국에서 아들이 오라고 기별하는 것도 실상은 돈의 힘이 만든 것이다.

돈은 허무한 '그'를 속세와 손을 잡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허무하게 만든다. 인생사 마지막에 겨우 돈이라니! <강산무진>를 흐르는 기류는 가슴 시리게 서럽다. 너무 서러워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그런데 <강산무진>의 마지막에 자리 잡은 표제작의 마지막에 심상치 않은 기색이 보인다. 몰릴 데까지 몰렸건만, 더 이상 무슨 암초가 있나 싶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암초가 아니라 등대다.

살려주는 기적적인 등대가 아니라 그저 길을 밝혀주는, 지금 이곳이 아니라 저 먼 곳을 알려주는, 강산무진도의 적막함을 담아낸 등대다. 등골 시리도록 무서운, 서럽도록 고마운 그것이 마지막 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추락할 만큼 추락하고 보니 바닥에 도달했음을 자각한 것인가?

추락은 두렵지만 막상 멈추고 나면 그 순간이 고맙게 여겨지기도 하는데 <강산무진>의 마지막이 바로 그것을 느끼게 만든다. 또한 이것은 앞의 작품들까지도 그렇게 보게 만드는 독한 기운을 지녔다. 그 과정을 거친다면 <강산무진>의 뼛속 깊은 허무는 지독하게 시린 감동으로 둔갑한다. 소설 속 불도저처럼 아주 앙큼하게.

김훈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후퇴하지 않는 모습을 줄곧 지켜왔다. 설사 앞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더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강산무진>에서도 마찬가지. 김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제자리를 지키고 선 것도 아니다. 몇 걸음을 내달려나갔다. 아주 멀리까지. 김훈의 첫 소설집 <강산무진>, 김훈 소설의 한 '절정'이라 말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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