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후루타 야스시 지음, 이종훈 옮김

서해문집

이 나라에는 세금이 없습니다. 학교도 병원도 전기료도 공짜입니다. 결혼하면 나라에서 방 두 칸에 거실과 부엌이 딸린 새 집을 공짜로 줍니다. 비행기를 전세 내어 해외로 쇼핑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민은 아무 일도, 심지어 밥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걸어다니지도 않습니다.

중동의 산유국 이야기냐고요? 아닙니다. 이들은 그들과 다릅니다. 몇몇 왕족이 부를 독점해 사치를 일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이익이 그대로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빈부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이 꿈같은 이야기는 나우루 공화국의 역사입니다. 이 책의 전반부죠.

예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북동쪽, 그러니까 적도 아래 남태평양의 어느 산호초에 앨버트로스들이 똥을 누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오래전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 똥이 쌓이고 쌓여 섬이 됐고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새똥은 인광석이 되었습니다. 고급 화학비료의 원료랍니다. 이곳 사람들은 당연히 이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섬을 식민지로 만든 영국, 독일이 이를 알고 캐 가기 시작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의 기지로 되기도 했던 이 섬은 1968년 드디어 독립을 합니다. 바로 나우루 공화국입니다. 인구는 2만 명도 채 안 되는데 인광석 수출로 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상낙원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20년도 더 지난 옛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인광석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나우루 사람들은 옛날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코코넛과 물고기가 주식이었던 이들이 식수로 미네랄 워터를 수입해서 마시던 생활을 포기하겠습니까? 경작지는 채광하느라 파헤쳐졌고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법도 모두 잊혀졌는데…. 일할 줄도 모르고 일할 생각도 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국민의 30%가 당뇨병 환자가 된 나라,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해외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들어먹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흘러든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대신 수용해주고 돈을 챙깁니다. 이것, 언 발에 오줌 누기입니다. 국제적으로 '검은 돈'을 세탁해 주는 일에 뛰어듭니다. 9.11테러 후 철퇴를 맞습니다. 그런데도 정국은 시끄럽기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그런데 얄팍한 분량에 천진스런 그림이 더해진 이 책은 성인동화를 보는 듯합니다. 차 한 잔이 식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운은 오래갑니다. 행복의 조건이란, 노동이란, 정치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게 됩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잃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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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구판절판


들판은 흩날리는 빛으로 온통 흰색이었고
가장 긴 풀입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발자국은 눈 위에 새겨져
언덕의 맨 끝 솔밭길까지 이어져 있다
난 그녀를 볼수 없다. 희뿌연 안개 스카프가
검은 숲과 흐릿한 오렌지빛 하늘을 흐려 놓았기에.
그러나 그녀는 초조하게 추위에 떨며 기다리겠지
초조하고 차갑게, 흐느낌 같은 것이 싸늘한 한숨에 스며들면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이 더욱 가까워질 뿐임을 정녕 알면서도
왜 그녀는 그렇게 선뜻 오고 마는 걸까
언덕길은 험하고 내 걸음은 더디다
내가 할 말을 알면서도
왜 그녀는 오는 것일까

- 겨울이야기, D.H. 로렌스-.쪽

J, 가끔 우리는 이게 절벽인 줄 알면서도 그 위에 서서 뛰어내리고 싶어 한다고 당신은 제게 말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것이 수렁인 줄 알면서도 눈 말갛게 뜬채로 천천히 걸어들어 간다고. 가끔 머리로 안다는 것이,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고, 또 이렇게 하면 그와 끝장이 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마지막 말을 하고야 만다고 그대는 제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절망적으로 만들까요?-.쪽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짧지만 강렬한 말이네요.-.쪽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집, 기형도-.쪽

J, 무엇을 잃어버리는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기억 위로 세월이 덮이면 때로는 그것이 추억이 될 테니까요. 삶은 우리에게 가끔 깨우쳐줍니다. 머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마음이 주인이라고.-.쪽

이 사랑
이토록 격렬하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하는 이사랑
대낮처럼 아름답고
나쁜 날시에는 나쁜 날씨처럼 나쁜
이토록 진실한 이 사랑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어둠 속의 어린애처럼
무서움에 떨 때에는
이토록 보잘것 없고
한밤에도 침착한 어른처럼
이토록 자신있는 이 사랑
다른 이들을 두렵게 하고
다른 이들을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을 질리게 하던
이 사랑

- 이 사랑, 자크 프레베르-.쪽

누구에게나 소주를 처음 먹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소주를 처음 먹게 한 사연도 있을 것입니다. 소주를 처음 먹고 일어났던 갖가지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의 기억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대개 한 인간이 청춘이었을 무렵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이 그리 많지 안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운 이들은 떠오르는 밝은 해나 불어가는 바람곁에도 위로를 받겠지만 마음속 고통의 압력이 몹시 높아져서 어떻게든 그것을 빼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느낄 때, 저는 자주 소주 생각을 합니다. 맥주도 아닌 와인도 아닌 위스키도 아닌 소주라는 그 투명한 액체를.

=>소주를 처음 먹던 날은 기억에 나지 않아요. 술이라는 것을 처음 먹던 것이 폭탄주였으니깐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던 그날... 그렇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날이네요.-.쪽

꽃 사이 한병 술,
친구 없이 혼자 든다
술잔 들어 달님을 청하니
그림자랑 세 사람이 된다
달님은 마실 줄을 모르고
그림자는 흉내만 내는구나
잠깐 달님이랑 그림자랑 함께
즐기자 이 봄이 가기 전에.
내 노래에 달님은 서성거리고
내 춤에 그림자는 흐늘거린다
취하기 전에 함께 즐겁지만
취한 다음엔 각각 흩어지리
영원히 맺은 담담한 우정
우리의 기약은 아득한 은하수

-월하독작, 이백

=>제목이 마음에 드네요. '월하독작'이라...
정말 저 말처럼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고 싶어요.-.쪽

둘이서 대작하는데 산꽃이 피네
한잔 한잔 또 한잔을 마시다 보니
나는 취하여 잠이 오니 자네는 가게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다시 오게

-산중대작, 이백

=>정말 못 말리는 술꾼이십니다..^^-.쪽

J, 가끔씩 내가 아직도 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끔은 그렇고 가끔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가슴이 무너져내릴 때 나는 내게 아직 젊음이 남아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생각합니다. 벌써 너무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독재자들이 저지르는 만행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을 영영 젊거나 처음부터 속수무책으로 늙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생을 바쳐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미덕 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사람이 참 슬프고 사람이 참 좋다는 것을 가르쳐주는데 있지 않을까요?
J, 언젠가 당신이 물으셨습니다만, 저는 저의 젊은 날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때 그토록 젊은 친구들을 가졌기 때문입니다.-.쪽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쪽

그렇게도 당신은 레몬을 쥐고 있었어
쓸쓸하고도 하얗고 밝은 병상에서
내 손에서 넘겨받은 레몬 한 조각을
당신의 단정한 이로 꼭 깨물어
토파즈 색으로 향기가 일고

그 몇 방울 안 되는 레몬 즙에
당신은 의식을 되찾았지

당신의 맑고 파아란 눈이 희미하게 웃고
내 손을 쥔 당신의 손엔 힘이 넘쳤어

당신의 목에서는 거친 바람이 불었어도
그처럼 위대한 생의 한가운데에서

치에코는 원래의 치에코가 되어
일생의 사랑을 한순간에 부어넣었지
그리고 한동안
그 옛날 산정(山頂)에서처럼 심호흡 한 번 하고
당신의 기관은 그대로 멈추었어

사진 앞에 꽂은 벚꽃 그늘에
차갑게 반짝이는 레몬을 한 개 놓아야지

- 「레몬 애가(哀歌)」,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레몬의 향이 느껴지는 글이네요.-.쪽

그이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고
길은 여느 때처럼 고요한데
그이가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불쌍한 눈이여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신사꽃이 피었다
노래가 지나간다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해안에서
그이는 그 사람에게 입을 맞추었다
레몬의 달이
물결 사이에서 미소지었다
바다는 내 피로 붉게 물드는 일 없이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감미로운 하늘이 있다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 「발라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쪽

우울에 잠기며, 홀로 외로이 육교를 건너간다. 일찍이 그 무엇에도 타협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안이하지 않던 이 하나의 감정은 어디로 가야 하나. 석양은 지평에 나직하고, 환경은 분노에 타고 있다. 모든 것을 증오하고, 분쇄하고, 반역하고, 조소하고, 참간(斬奸)하고 적개하는, 이하나의 검은 그림자를 망토에 감싼 채, 홀로 외로이 육교를 건너간다. 저 높은 가공의 다리를 건너, 아득한 환등의 시가지까지.

- 「육교를 건너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쪽

날은 어둡고 쓸쓸하다
비 내리고 바람은 쉬지도 않고
넝쿨은 아직 무너져 가는 벽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붙어 있건만
모진 바람 불 때마다 죽은 잎새 떨어지며
날은 어둡고 쓸쓸하다

내 인생 춥고 어둡고 쓸쓸하다
비 내리고 쉬지도 않고
내 생각 아직 무너지는 옛날을
놓지 아니하려고 부둥키건만
지붕 속에서 청춘의 희망은 우수수 떨어지고
나날은 어둡고 쓸쓸하다

조용하거라. 슬픈 마음들이여!
그리고 한탄일랑 말지어다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 비치고
그대의 운명은 뭇사람의 운명이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

- 「비오는 날」,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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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지영님의 글이 자주 눈에 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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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그늘 2
김하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3월
품절


정신의학(Psychiatry)은 정신(Psych)과 치료(iatry)의 합성어이다. 정신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두 가지 말 모두 어원은 그리스 신화다. '정신(Psych)'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의미를 가진 프시케에서 그리고 '치료'라는 뜻은 육체적인 사랑의 신인 에로스에서 왔다. 그런 점에서 신화에서 따온 이 말의 상징은 현대를 사는 오늘의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매우 깊다. 인간의 모든 정신질환은 젊은 아름다움과 사랑, 그 두 요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거나 그것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이미 수천 년 전 정신병의 정체로 파악된 것일 테니까.-.쪽

현대의학의 신경정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정신과 신체를 하나라고 본다. '정신'과 '신체'가 각기 다른 별개의 요소라는 이원론이 아니라 분리되지 않았다는 일원론이 정신의학의 기본이다. 까닭에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고, 마음이 병들면 몸도 따라 병든다. 이런 관점에서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병을 무슨 괴기스럽고 끔찍스러울 만큼 대단한 게 아닌, 그 모든 발단이 스트레스로 시작되는 심인성 질병으로 파악한다. 우리가 정신병 하면 대단히 위험하다고 인식하게 된 데에는 그 병을 극단적이고 엽기적으로 다루는 많은 영화나 드라마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이 보는 정신병은 아주 일상적인 현실 안에서 누구나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출발한다.
스트레스란 생명체가 어떤 종류이건 자극을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추운 날씨, 소음, 대학입시 실패, 부부 불화, 성적 욕구불만, 시집살이, 돈 떼임, 사업 실패, 승진 탈락, 가난도 해당되고, 이혼과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도 큰 스트레스다. 이런 자극을 받으면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은 경계 상태에 들어간다. 이어 스트레스에 대항하는 투쟁 상태로 들어가고 그 결과 피로 상태가 된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장기화되면, 즉 경계, 투쟁, 피로 상태가 오래 끌게 되면 그것이 누적되어 결국 인체가 부담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로 정신과 마음이 고장나 버린다. 몸과 마음이 함께 아픈 정신병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쪽

실크나비였다.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에 서식하는 나비로서 날개가 유난히 빛나고 투명했다. 몸에 비해 날개가 아주 컸다. 사진 밑에 기록된 실크나비의 특이한 습성은 고치에서 부화하면서부터 주둥이가 없게, 원천적으로 주둥이 없이 태어난다라고 적혀 있었다.
분명 생명체이고 동물인데…… 입이 없다니.
신기하고 특별한 나비였다. 날개를 가지고 날아다니는 동안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도록 태어나는 나비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인영이에게 실크나비의 존재는 매우 소중한데, 실크나비라는 것이 있었네요.-.쪽

사랑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신경정신과 닥터들에겐 일종의 아름다운 정신병이라고 분석된다. 사랑은 현실에서 이탈된 감정과 행동으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든다면 돈 한 푼 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연인에게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쓴다. 그러면서도 전혀 아깝지가 않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고 없이 오래 살려고 자동차를 비롯한 온갖 위험에서 끊임없이 몸을 사리지만 사랑이 잘못되면 그만 콱 죽고 싶어진다. 목숨이 하잘 것 없이 느껴지고 만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죽자고 말하면 기꺼이 같이 죽어버릴 수도 있다. 사랑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일으키기 때문에 신경정신과 계통의 학부생들은 사랑을 정신병적인 질병이라고 치부하거나 단정 짓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은 헤어지거나 연인이 죽어버렸을 때 푸른 불꽃을 강렬하게 일으킨다. 사랑의 아이러니가 그렇다. 만일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한다면 같이 살수록 상대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사랑한 사람과 헤어져 다른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된다면 옛사랑은 사랑으로, 추억으로 살아남는다. 그 남자가 손을 잡아주었던 것, 자전거를 탈 때 그 사람 뒤에 앉아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부둥켜안은 사랑의 기쁨은 영원한 그리움으로 살아 있다. 평생을 가도,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도 헤어진 사랑과의 사랑은 영원한 가슴 떨림으로 미소짓게 만들고 눈물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사랑한다면 절대로 같이 결혼해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생활이란 사랑에 하루하루 때가 끼고 먼지가 앉아 사랑을 완전히 죽게 만들만큼의 지독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쪽

그녀들이 진단하기엔 인영은 미라 증후군의 일종이었다. 죽은 자의 몸을 방부 처리해 오래도록 썩지 않게 함으로써 죽은 자의 영혼이 그 몸 안에서 불멸한다고 믿었듯이 그녀는 자신의 살아 있는 몸속에 그와의 추억과 기억을 완전히 가두어 사랑을 영원케 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미경은 또한 한인영이 나타내는 증상이 팬텀 현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팬텀은 유령이란 뜻이다. 이것은 외과병원에서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으로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거나 절제해도 그 신체는 여전히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이다. 다리를 절단했음에도 없는 그 다리의 종아리가 저린다거나 발가락 사이가 가려워 실제로 침대 시트를 손톱으로 벅벅 긁기도 한다-.쪽

마지막 목 밑 단추를 끌러 그대 가슴에 제 다섯 손가락을
살포시 갖다댑니다. 호닥거리는 숨결과
파득거리는 심장의 떨림이 가득합니다.
속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새벽안개 풀리듯 드러나는 그대 가슴 세계……
스물세 개의 봄과 항아리 속에 담긴 목소리
버드나무처럼 날리는 머리카락
속으로 머금어진 눈물과 햇빛 같은 기쁨이
강을 낀 언덕처럼 푸르고 눈부십니다.
이 삶 다 살 때까지 가슴에 뺨 묻어 그대 마음이 전하는
슬픔과 웃음소리로
제가 붉고 푸르게 물들 수 있다면.
그대 가슴 안에서 제 아침과 저녁을 꺼낼 수 있다면.
부드럽고 따스한 내 전 생애의 이불로
그대 걱정과 아픔을 덮어
잠재우고 아늑하게 다독거려줄 수 있다면……
사랑합니다.
먼저 그대 세상 떠나시더라도 제 눈물로
그대 가슴 정갈히 씻겨
제 가슴으로 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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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그늘 1
김하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목련꽃 그늘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이 노래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고보니 전 김하인씨의 책을 한번도 읽어본적이 없더군요.

솔직히 왠지 피하고 싶었던류의 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제목 때문에 선택한 책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이런류의 소설이 유치하게 느껴지는건..
사랑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없어서인지... 아님 책속의 내용에 그냥 동감이 안되는건지 모르겠네요.

중학생인 재민인 대학생인 누나를 좋아하게 되고,
앞으로 5년뒤에 의대에 들어가면 누나를 사귈수 있다는 말에 공부에 전념합니다.

그리고 인영과의 연인이었던 기석은 군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런 사실도 모른채 의대에 합격 통지서를 인영에게 내밀며 나타난 재민...

아직 2권은 읽지 않았는데, 왠지 재민과 인영의 관계를 읽어보지 않아도 알것 같아요.

그래도 이 책속에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은 책 제목이 되기도 했겠지만,
목련꽃의 피고 짐에 대한 느낌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엔딩이 제 예상과 같을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겠어요.

목련은 잎 없이 먼저 꽃을 피운다.
다른 나무나 꽃나무들은 거의 다 잎새가 먼저 피어나고, 수많은 잎들이 바람결과 햇빛의 온도를 감지해 본 뒤 숨겨놓은 꽃순의 문을 노크해 나오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마치 공주의 행차를 알리는 시녀들처럼.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서로의 어여쁨과 아름다움을 시샘이라도 하듯 앞 다투어 꽃 봉우리는 꽃망울을 터뜨린다. 순식간에 나무 하나를 소란스러운 화색으로 가득 채운다.
앙상하지만 깨끗한 벗은 몸매 같은 맨가지에서 하나 둘 탐스럽게 피어나는 목련의 모습은 고고하고 정결하다. 재잘거리는, 수다스런 잎들과는 결코 같이 피거나 나무에 함께 매달리지 않는 목련꽃의 습성은 가히 결백적이다. 흰색과 미색의 중간색, 혹은 티 하나 묻지 않은 흰색으로 꽃이 핀 모습은 처음 흰 블라우스를 입고 외출하는 턱선 고운 처녀의 우아한 자태와 미소를 보는 거 같다.그러나 잎 없는, 번잡과 소란을 싫어하는 목련이어서 그런지 그 순결한 꽃잎이 떨어질 때는 더없이 참혹하다. 검은 사신(死神)이 그 동안 시샘하기라도 했듯이 무참하게 짓밟아 그 희고 빛나던 꽃의 살결을 검게 물들인다.
기껏해야 꽃나무인 주제에 뭐 그리 순결하고 깨끗하냐고 냉소를 퍼붓듯 바닥에 떨어진 두툼하고 커다란 흰 꽃잎을 순식간에 완전히 거무튀튀한 검은색으로 만들어버린다. 목련나무는 그 꽃들이 다 떨어져서야 잎을 피운다. 지나간 사랑을 푸른 가슴으로 노래하듯이 잎들을 가슴빛으로 돋궈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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