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선민]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

심영섭 지음, 열린박물관, 264쪽, 1만1000원

영화평론가 심영섭. 영화 팬들은 커다란 정육점용 칼로 쇠고기 근육을 끊듯 단호하게 내리치던 그의 20자평을 아직 기억한다. 그는 필명(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한)처럼 심리학(영화 치료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을 기반으로 영화 속에 숨어 있는 반여성주의적 요소에 대해 메스를 들이대왔다. 특히 김기덕 감독 영화에 대한 매서운 공격으로 '김기덕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런 그가 에세이집을 냈다. 책은 공격적이지도, 매섭지도 않다. 대신 겁나게 솔직하다. 읽고 나면 유쾌해지고 상쾌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이자 평론가로 살아가는 '인간 심영섭'의 속살이 드러난다. "남자 없는 삶은 살아봤지만, 영화 없는 삶은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 혹시나 일감 의뢰가 오지 않을까 싶어 핸드폰을 끄지 못하는 소심함,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지만 밥벌이를 위해 원고지 몇 장을 허겁지겁 메워야 하는 자괴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남완석 우석대 교수와 각기 아이들을 하나씩 데리고 재혼해 스텝 패밀리(step family)를 이룬 사연 등을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써내려간다. 책 말미에는 남편과 연애 시절 주고 받은 '닭살스러운' 연서(戀書)까지 천연덕스럽게 공개한다. 못 말리는 솔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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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5-2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솔직할 수 있는 거 누구나 못하는 장점이죠.

보슬비 2006-05-2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시고 이야기해주세요^^
 


[중앙일보 양성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1,2권)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문학동네, 1권 328쪽, 2권 336쪽, 각 8500원

이 책을 할리우드가 놓칠 리 없다. 2003년 미국에서 발간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소설은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6월말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감독이 인기 TV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의 데이빗 프랭클이라는 점은 책의 많은 것을 말해준다.

뉴욕 패션잡지에서 일하는 한 사회초년생의 고군분투기인 소설은 현대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는 욕망과 판타지의 실체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쿨 & 럭셔리 스타일'에 대한 동경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완벽한 외모 관리, 명품으로 치장하기, 뉴욕의 고급 식당과 바를 전전하며 파티에 참가하기, 스타.유명인사들과 알고 지내기….

생략된 것도 있다. 극단적인 다이어트와 잦은 성형, 게이 친구 하나쯤 반드시 사귀기, 패션면밖에 읽지 않아도 뉴욕타임스를 구독하는 척하기. 속도감 넘치는 구어체 문장으로 이어진 책은 마치 TV시트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섹스 앤 더 시티' 를 잇는 현대 여성에 대한 미시 보고서로도 흥미롭다.

소설은 패션잡지 '보그' 편집장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작가의 경험에 기초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풋내기 앤드리아가 세계적 패션잡지 '런웨이' 편집장의 어시스턴트로 취직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편집장은 크리스마스 때면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조르지오 아르마니, 모델 지젤 번천, 힐러리 클린턴 등 전세계 유명인사들에게서 수백개의 선물을 받는 거물이다. 그러나 서점에 깔리지도 않은 '해리 포터'를 개인 비행기로 파리에 공수할 것을 명령하는 악마적 상사이기도 하다.

미국 출간 당시 책의 모델이 실제 '보그'의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라는 것이 공공연히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윈투어는 세계 4대 패션 컬렉션의 스케줄을 말 한마디로 바꿔 버릴 정도로 영향력있는 인물. 그러나 독특한 개인적 스타일로 악명도 높다. 어쨌거나 소설은 톡톡 튀는 위트와 솔직함, 글과 함께 영상이 절로 펼쳐지는 영화적 글쓰기를 특징으로 한다.

진중한 무게감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너무 팔랑거린다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대중소설 시장의 존재를 입증하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더욱이 주인공의 시선에 포착된 패션비즈니스와 그 속에 투영된 현대 여성들의 욕망에 대한 가감없는 묘사는 깎아내리기 힘든 미덕이다.

여기서 패션잡지 '런웨이'는 욕망과 소비, 스타일의 왕국이다. 왕국의 존재들은 그가 입는 것, 그가 먹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한다. 앤드리아의 '런웨이' 입성기도 그가 입었던 '갭' '바나나 리퍼블릭' '나인웨스트' 등과 결별하고 '마놀라 블라닉' '지미 추 부츠' '프라다'와 '구찌'로 갈아입으며 이루어진다. 여기서 패션은, "스타일이 모든 것"이라는 한 CF의 헤드카피처럼 존재의 표식이다.

또 패션비즈니스는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피플'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귀족들을 만들어내는 스타일 공장이다. 트렌드에 밝고 패션 브랜드간 차별성을 꿰고 있는 독자들에게 더욱 흥미로울 듯 하다. 하필 이 책의 광고문구가 눈에 띈다. "이 책이야말로 이번 시즌 지녀야 하는 필수 아이템"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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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엽 등 글.사진, 청어람미디어, 331쪽, 1만7000원

사진, 예술로 가는 길

한정식 지음, 눈빛, 231쪽, 1만2000원

누구나 알아주는 멋쟁이였던'뿌리깊은 나무'잡지사의 고(故) 한창기 발행인. 풍류 마인드와 잘 균형을 이룬 그의 댄디함은 1980년대 말 여름 호남지역 행차 때 차림새에서도 드러난다. 흰모시에 고풍스런 가방을 맨 그의 어깨에는 라이카의 명기(名器) M6가 대롱거렸다. 그게 시인 황지우의 회고인데, 알고 보니 그걸 추천한 이는 사진가 강운구다.

"어느 날 봤더니 라이카 Ⅲf라는 모델로 바뀌었어요. M6가 80년대 모델이라면 Ⅲf는 50년대 물건이거든. 그 모델의 바디(카메라 몸체)가 훨씬 클래식해서 후배와 맞교환했다는 게 그의 고백이죠."

"사진을 기술로만 아는 이들은 새 카메라에 맥을 못 춘다"는 게 '사진, 예술로 가는 길'의 저자가 던지는 일침이지만, 멋진 카메라만 보면 넋이 빠지는 호사가들이 있다. 디카(디지털 카메라)에는 없는 아우라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2'는 황홀하다. '디지털 쓰나미'에 밀려난 필름카메라들이 책 속에서 부활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카메라의 어머니'로 불리는 30년대'Fed1'(소설가 고리키의 작명이다)에서 1970년대 똑딱 카메라들이 글맛 좋은 에세이들과 함께 요모조모 정리됐다. 그점에서 2년 전 4쇄를 찍었다는 1권보다 못할 게 없다. 클래식 카메라로 통칭되는 그 세계는'느림의 미학'으로, 추억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책에 따르면 2005년 지구촌의 필름 생산량은 3억 1500만통. 5년 전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줄었다. 일본 니콘이 필름카메라 생산중지를 선언했고, 독일 아크파필름 역시 파산했다. 하지만 이변도 있다. 또 일본 코시나는 독일의 칼 자이스를 끌여들여 고풍스런 필름카메라 '자이스이콘'을 출시했다. 손님도 꼬인다. 디카에 발을 딛였던 젊은이들이 클래식 카메라로 속속 '개종'하기 때문이다.

'사진, 예술로 가는 길'의 저자는 글맛 좋기로 유명한 한정식 중앙대 명예교수. 그는 본격적인 현대사진 관련서로 '현대사진을 보는 눈'를 펴냈지만, 이번에는 이땅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위한 가이드 북을 만들기로 작심하고 이 책을 꾸며졌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나"하는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이 책이다.

"어린이 사진이면'동심', 주름진 할아버지 얼굴에는 '연륜', 왜가리가 새끼에게 먹이주는 사진에는 '모정'등이 뻔하지 않던가. 이미 질려버린 그런 사진을 보고 누가 감탄할까?"(15쪽)

이 함정을 어떻게 탈출할까. 저자는 우선 소재주의 사진을 버리라는 조언(199쪽)부터 한다. 신기한 소재(피사체)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 것, 당신의 시선으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것, 그것이 핵심 메시지다.

예술로서의 사진을 하려한다면 어린이.할머니 사진을 찍을 생각을 아예 버리라는 충고도 던진다. 굳이 찍으려면 '천진난만 어린이'대신 '교활한 어린이'이미지에 도전하라는 역설도 던진다. 실기 중심의 사진론이지만, 아무래도 철학적 권면으로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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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채인택] 한국사의 천재들

김병기·신정일.이덕일 지음

생각의 나무, 349쪽, 1만4000원

역사를 살펴보면 기막힌 재능과 번득이는 재치를 갖춘 천재라고 해서 모두 떵떵거리고 산 건 아니다. 사실 천재라고 해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도 소수에 불과하다. 재주는 삶의 씨줄일 뿐이어서 존경받는 인생이라는 베를 짜려면 별도의 날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역사저술가로 이름을 알린 세 명의 지은이들은 한국 역사에서 천재로 불렸던 여러 사람의 삶을 되새김질하면서 그 날줄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바로 '시대를 뛰어넘는 정신'이다. 현실의 모순을 누구보다 먼저 깨치고 이에 맞서 용기있게 싸운 이들이 진정한 천재라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해 배를 불리는 데만 재주를 쓴다면 천재가 무슨 소용이냐는 게 지은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당나라 유학 8년 만에 과거에 붙었으나 고국인 신라에서는 골품제의 한계로 뜻을 펴지 못한 최치원을 비롯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개인적으로는 힘든 인생을 살았다. 27세에 성균관 관장을 지냈으나 을사조약으로 잃은 국권을 찾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지닌 재주로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한국 천재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셈이다.

세계 최초로 사제나 전도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믿음을 받아들인 한국 가톨릭의 힘도 이런 의지와 신념의 인물들에서 나왔다는 부분은 자못 흥미롭다. 선비 이승훈이 베이징의 천주교당에서 한국인 최초로 가톨릭 영세를 받은 것은 이벽이라는 혜안의 선비가 뒤에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책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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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리스 신화요정 사이렌(Siren)일지도 모른다. 소통불능의 언어를 구사하거나 다른 주파수로 통신하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할 것이다. 고대 신화를 떠올린 건 요정의 저주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전설 말이다. 소설을 읽고난 지금, 다시 말해 저주에 걸린 지금. 온몸은 허물어지고 있다. 침몰이라기 보단 침전이다. 용 한번 못쓰고 맥없이 가라앉는다.

요정의 이름은 한유주다. 갓 첫 소설집 '달로'(문학과지성사)를 낸 1982년생 신예다. 80년생 김애란과 함께 문단에서 막내뻘이다. 하나, 둘은 한참 떨어져 있다. 색깔로 가름하자면 김애란은 밝은 노랑, 한유주는 짙은 잿빛이다. 그러니까 '한유주 본색'은 불길한 징조나 서늘한 조짐, 자꾸만 끌어내리는 듯한 기운에 있다. 징조나 조짐 따위의 삽삽한 표현을 쓴 까닭이 있다. 그의 소설엔 줄거리가 없다. 혹자는 아예 서사를 포기한 작가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누구도 명쾌하게 정의 내리진 못한다. 사이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인성과 배수아의 계보를 잇는다고, 소위 '자폐적 소설'의 21세기형 버전이라고 겨우 말할 뿐이다.

사이렌의 언어는 특히 문장에서 두드러진다. 파격(破格)이 아니라 '배격(排格)'의 문장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일주일 전 국경을 넘을 때 우리는 애써 가짜 여권을 내밀지 않는다.'(124쪽) 부러 시제를 불일치한 문장이다. 스무 줄이나 띄어쓰기를 무시한 대목도 있다. '나는 여자가난자당해죽어있는것을보았습니다나는초소안으로…그래서이번 임무에 나는 자원했습니다.'(83~84쪽) 가장 난감했던 건 '오후 다섯 시, 누군가의 사랑이 패하는 시각'(211쪽)이란 구절에 각주를 달아놓고는, 막상 각주에선 '……'만 달랑 적은 부분이다.

작가에게 물었더니 기대보다 친절한 답을 줬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이유를 그는 "말의 덩어리를 뱉어낸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고, '……'로 대신한 각주에 대해선 "독자가 채워넣게 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작가의 말'의 마지막 두 문장 '사랑니 세 개를 뺐다. 카메라를 샀다'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사랑니 세 개를 뺐고 카메라를 샀어요. 그런데 여기에 배치했더니 일상의 느낌이 안 나네요."

작가는 '배치'라고 말했다. 계산된 결과란 얘기다. 그러니까, 생각 흐르는 대로 써내려 간 게 아니란 말이다. 순간, 섬뜩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가 못 알아들었을 뿐이다. 그녀는 사이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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