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모크샤’는 산스크리트어로 해방(또는 해탈)을 뜻한다. <멋진 신세계>의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가 말년에 쓴 소설 <섬>에 나오는 가상의 섬의 주민들은 ‘모크샤’라는 환각제를 복용한다. 이를 통해 정신이 고양되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그렇다고 현실도피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그 약에 중독되지도 않는다. 섬의 젊은이들에게 약을 주는 의례를 할 때 인도자가 말한다. “해방이란… 슬픔의 끝. 무지했던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이 돼가는 것이다. 잠시나마 모크샤 덕분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섬>은 헉슬리가 반평생 이상을 몰두했던 연구의 결과를 쏟아부은 역작이었다. 그 연구는 인간을 해방으로 이끌 환각제에 대한 탐색이다. 헉슬리는 아버지, 형제들 가운데 천재 과학자가 수두룩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그 스스로도 대문호가 됐다. 약물 중독자가 아니었고, 중독성 약물은 물론 알코올 중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계의 발언을 해왔다. 그런 그가 왜 환각제에 관심을 가진 걸까.

<모크샤 - 환각의 문화사회사>는 헉슬리가 37살이던 1931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이 주제를 가지고 쓴 글과 연설문, 편지들을 모아 77년에 발간된 <모크샤>를 번역한 것이다. 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그 애정은 60년대 반전 세대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요절한 짐 모리슨이 이끌었던 록밴드 ‘도어스’의 명칭은 이 책에 실린 그의 54년 글 ‘인식의 문: 도어스 오브 퍼셉션’에서 따온 것이다.)

“인간은 농부 이전에 약물 중독자”

책에 실린 헉슬리의 글들은 환각과 환각제의 역사, 그 문화적·사회적 의미, 정신 질환 등을 두루 아우른다. 헉슬리에 따르면 인간은 “농부이기 이전에 약물중독자”였다. 문명 이전부터 인간이 진정제, 도취제, 환각제 등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인간에게 자아 초월 충동, 너무 친숙한 ‘나’와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은 갈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신적 변화를 일으키는 약물을 끊임 없이 찾아왔다고 헉슬리는 말한다. 자기 초월의 맥락에서 알코올을 설명할 때 표현이 따뜻하다. “단지 타락해서 인간이 술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문맹인 이들을 알코올은 문학과 심포니 콘서트가 열리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알코올에 의존한 초월은 “짧게 사라질, 독으로 전락하고 말 한 순간의 연기”라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

헉슬리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아편은 인민의 종교다”로 바꾼다. 믿음에 의해서든, 약물에 의해서든, 수련에 의해서든 정신 변화는 인간이 의지로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택은 약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약을 할 것이냐가 돼야 한다고 헉슬리는 말한다. 신체에 해가 없으면서 자유롭게 초월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약. 헉슬리는 멕시코 페요테 선인장을 그 예로 들면서 리세그르산(LSD-25)을 비교적 거기에 가까운 환각제로 꼽는다.(대마초에 대해서는 조금 유보적이다. 대마초가 페요테보다 ‘무해함이 덜하다’고 하면서도 대마초가 사회나 복용자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1944년 뉴욕시에서 행한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헉슬리가 말하는 초월은 인간의 정신 속의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 세계는 평소에 자각하는 의식의 세계와 전혀 달라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개인의 기억과도 무관하며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원형적 세계와도 또 다르다. 거기서 발견되는 형상들은 여러 민족의 설화나 종교에서 나타나는 형상과도 유사하다.

53년부터 페요테 선인장에서 추출한 메스칼린과 LSD를 몇 차례 경험한 헉슬리는 이 ‘다른 세계’의 모든 것을 ‘환각 체험’(32장)이라는 강연문에 정리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다른 세계’는 “우주가 무사하다는 느낌”, “주체화·객체화가 이뤄지지 않는 합일된 사랑”, “강렬한 미와 강렬한 진실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험을 줘 무한한 고양감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것이다.(이 ‘다른 세계’는 불교의 열반의 경지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헉슬리 스스로는 선을 긋고 있는 듯하다. “사랑과 동정심으로부터 분리된 열반은 지옥의 고통만큼 끔찍한 것”이라는 식의 표현이 여러차례 나온다.)

“아편은 인민의 종교다”

이 ‘다른 세계’를 윌리엄 블레이크, 조지 러셀 같은 시인들은 선천적 능력으로 자주 왕래했으며, 보통 사람들은 어릴 때 잠깐 왕래할 수 있다고 헉슬리는 말한다. 그러나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교육체계 속에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점차 상실돼, 지금 이 세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인체에 무해한 환각제를, ‘다른 세계’와 왕래할 수 있는 다리로 간주했고,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약학자, 정신과 의사 등이 여러 재단에 연구기금 출연을 요청하기도 했다.

헉슬리의 말대로 환각제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약제사를 도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고, 독재자를 도와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 그의 글에서 환각제보다 더 다가오는 건 그가 위로하려고 했던 ‘고통받는 정신’이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그들이 살도록 운명지어진 우주를 - 때로는 아름답고 때때로 두려웠던 그러나 항상 인간과는 다른 것이었고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얻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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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이렇게 읽었다/고병헌 지음 <평화교육사상>

지금도 지구촌 이곳저곳에서는 민족·종교·인종간 갈등이 누군가에 의해 부추겨지고, 하루에 평균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고, 군수산업은 끝간데 없이 성장하고 있다. 물질적 생산능력이 뛰어난 나라들은 약한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한다. 미국이 이라크 어린 아이들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며 자본을 쌓아가고 있는 것처럼. 굳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정한, 허울뿐인 그 날에도 이 땅에 살고 있는 400여만 명의 장애인들은 이동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평화가 무엇인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는 물질적 탐욕에 파괴되는 인간성, 인간관계, 자연환경을 돌아보면서 갈 길을 모를 때, 이 책을 들었다.

같은 출판사에 나온 ‘교육의 역사와 철학’ 총서 중 열다섯번째 책이다. 평화교육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대학교와 여러 단체에서 강의와 평화교육 강연을 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논란이 한창일 때 나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도 된다는 ‘국익론’에 몸서리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더욱 가슴저리게 다가올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것이 평화교육의 부재, 자본주의적인 교육과 환경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평화적 삶 살기’에 초점을 맞춘다.

평화의 의미, 평화교육의 중요성, 비폭력 평화교육 등에 대해 풀어놓고 레오 톨스토이마하트마 간디, 헨리 데이빗 소로우, 존 러스킨, 마틴 루터 킹의 삶 속에서 평화적인 삶의 모습을 찾아낸다. 또한 크리슈나무르티, 몬테소리, 데이비드 힉스 등 대표적인 평화사상가들의 평화관을 정리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가치관 정립이다. 평화교육이란 “사회의 주류 가치체계의 엄청난 영향력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가치체계의 근본적 성격을 자신이 지향하는 평화의 개념과 조화시키는 일”이며 평화교육은 “학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실천”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더더욱이나 평화교육은 단순히 분쟁의 원인이나 갈등 해결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화를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평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지만 책에서는 그 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된다. 내가 소중한 것처럼 타인도 소중하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 환경이 소중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어야 하고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폭행, 전쟁과 같은 물리적인 폭력 외에도 약자와 소수자를 차별하는 사회구조적인 폭력, 지배자들에게 유리한 가치관이나 신념 체계를 정당화하는 지식인의 문화적 폭력에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자나 평화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기아, 군수산업, 불평등과 차별, 착취, 환경오염 및 파괴 등에 대해 한번이라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자신의 평화 철학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좋은 재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폭력 개념과 실제 평화교육 및 평화운동과의 접목은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듯하고, 목차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느낌도 준다. 또 대한민국의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물질적인 가치관을 강조하는 제도권 교육과정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시민운동 차원에서 평화운동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지 하는 구체적 실천문제도 좀 더 따져봤으면 좋았겠는데, 달리 보면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도 이 책의 음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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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5-2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사 잘 하셨어요? 잠깐 들어와 구경하다 퍼 갑니다.

보슬비 2006-05-2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30정도 있다가 자려구요.
 



[한겨레] 인터뷰/‘공산당선언’ 펴낸 강유원씨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얼마전까지 인생을 바꿀 각오가 아니라면 감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들었던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1848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들이다. 세상이 변하긴 변했나 보다. 정훈이의 유머러스한 만화까지 곁들인 신판 <공산당선언>(뿌리와 이파리 펴냄)이 나왔다. ‘회사원 철학박사(헤겔의 사회철학)’로 널리 알려진 강유원(44)씨. 지난해 봄학기 한 대학 철학과 야간 강좌에서 <공산당선언>을 교재로 16주 동안 풀었던 강의내용을 정리했다. 일종의 <공산당선언> 해설서인 셈인데, 일단 총 4부 가운데 제1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만 다뤘다. 청강생 포함해서 60~70명이 그 강의를 들으러 몰려들었고, 그 3분의 1은 회사다니는 직장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마르크스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이들도 있었고 그냥 들어보긴 했다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강좌의 목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자는 것”으로 설정했다.

톡톡 튀는 어법, 걸죽한 입담, 풍부한 예시, 그러면서도 좌표설정이 분명한 그의 고전 텍스트 읽기는 경쾌하면서도 깊다.

왜 지금 마르크스냐고 물었더니, 대뜸 “지금 세상에 횡행하는 신자유주의니 뭐니 하는 말은 정치적 레토릭(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며 요컨대 지금 이 문제많은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는 체제는 결국 자본주의체제고 비록 계급환원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을 과학적 체계적으로 분석해낸 사람이 마르크스였다, 그러니 강좌 목표에 부합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적어도 그런 말로 들렸다. 그것은 일본 도쿄대 히로마쓰 와타루 교수가 현실사회주의체제 몰락 뒤 했다는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라는 말보다 훨씬 더 실천적 함의가 강한 얘기로 들렸다. 그가 수강생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오라는 걸 강의 첫 과제물로 던지고, 책 서문에서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 즉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체제에 자신의 몸과 머리를 완전히 착취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종의 약도”라고 쓴 것도 그와 상통하지 않는가. 다시 왜 하필 <공산당선언>이냐는 질문엔, “팸플렛이니 (다른 마르크스 저작들에 비해) 얇고 싼데다 비교적 쉬워서” 접근하기 용이하면서도 자본주의의 본질을 적확하게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강의 목표를 “근대적 개인의 자각과 계급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말로도 요약했는데, 알맹이 없는 보수우파 논객의 신자유주의 경제학 강의에 대학생들이 수백명씩 우루루 몰리는 “성찰없는 몰역사성의 시대”에 대한 힐난과 더불어 묘한 여운을 남겼다.

95년께부터 멀티미디어 콘텐츠 기획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공부와 <우리교육>, 인터넷 블로그 <풀로 엮은 집> <라디오21>등을 통한 대중과의 만남을 계속해온 그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새벽 4~5시부터 아침 8시께까지, 그리고 1시간 정도의 낮잠 공백을 빼고 끊임없이 읽고 쓰고 가르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등 원전읽기는 하루 한 쪽도 나가기 어려운 ‘정통독법’인데 대학시절 스승과 독대하며 익힌 이래 지금까지 고수하며 제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http://armariu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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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최성일의 찬찬히 읽기

<대한민국을 멈춰라> 장성익 지음, 환경과생명 펴냄

정말이지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 얼마 전 딸아이가 다니는 병설유치원이 있는 초등학교 후문가 아파트 담벼락에 “사유재산권 확보를 위하여” 후문 통학로를 폐쇄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다. 녹지를 조성해야 할 아파트의 사유지가 통학로로 둔갑한 것은 “사회통념으로 보나, 상식으로 보나” 맞지 않다는 주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눈을 찡긋하고 만다. 에움길로 돌아가지 뭐.

항만시설 확장으로 인한 서귀포 앞바다의 연산호 군락지 파괴를 전한 한국방송의 심층보도에는 잠시 할말을 잃는다.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연산호 10만 개체를 돌과 콘크리트 더미로 짓뭉개는 과정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었지만, 이번에는 한숨 한번 크게 쉬고 만다. 눈뜨고도 당하는 판국에 눈에 잘 안 띄는 곳은 오죽하랴.

하지만 ‘녹색’ 계간지 <환경과생명>의 장성익 주간은 몰상식하다 못해 몰염치한 세태를 묵과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차게 선언한다. 폭주기관차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을 멈춰라>. 이 책은 지은이의 생태환경비평 모음으로 각종 매체 기고문과 환경관련 모임에서의 발표문을 엮었다. 머리말에서 밝힌 애당초 염두에 둔 책제목인 ‘사다리와 그물’은 이 책의 내용을 함축한다. ‘사다리’가 경쟁·폭력·탐욕·오만 따위를 가리킨다면, ‘그물’은 연대·평화·공존·상생 같은 걸 상징한다. “이제 그러한 죽음(임)의 사다리는 걷어차 버리고 새로운 생명의 그물을 펼치자는 얘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반적인 이 책의 기조는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목청을 높여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식의 비난과는 거리를 둔다. 비판 대상에 대해 역지사지의 태도를 취한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비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지구 전체를 규율하는” 자본의 독재를 보는 눈길이 매섭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 문명은 전쟁과 같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그 유지가 가능한 ‘괴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부자가 되어 잘 살아 보자거나 이제 우리도 선진국 대열로 진입하자는 것 자체는 그리 잘못된 것도, 나쁜 것도 아닐지 모른다”며 한발 물러서기도 한다. 하지만 지은이의 자본주의 비판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다. “문제의 뿌리는 무한정한 탐욕과 오만에 기초한 물신숭배의 자본주의 체제와 그 체제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우리 모두의 소비와 소유 지상주의 생활양식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에 비하면,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은 약간 물렁하다. “비판은 언제나 두렵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이 속한 분야를 향한 비판은 더욱 그래서일 것이다. 또한 “다른 운동에 비해 환경운동은 그 본질에 있어 유독 세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독려하는 것이 중요”해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지은이의 환경운동 비판은 애정이 어려 있고, 귀에 담을 내용이 적잖다. 장성익 주간은 환경운동 진영이 위기적 상황을 뼈아프게 인식하지 못하고,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에 무감각해서 환경운동에 위기가 왔다고 본다. 따라서 “환경운동은 이제 언론을 통해 ‘보여주는 운동’이 아니라 시민 대중과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결합과 소통을 통해 풀뿌리와 현장과 생활속으로 ‘스며드는 운동’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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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잠깐독서

예금통장, 전자우편, 블로그 등 개인적인 것은 물론 회사나 아파트 등 공공시설도 비밀번호를 알아야 접근이나 출입이 가능하다. 암호는 우리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암호이야기>(북로드 펴냄)는 암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다시 구성한 책이다.

수메르의 쐐기문자, 페니키아 문자, 마야·잉카의 문자 등 고대문명으로 통하는 패스워드. 로제타스톤, 페르세폴리스 비문은 현대인에게 일종의 암호가 아니겠는가. 전쟁과 살인 음모 등 역사의 중대한 국면에서는 힘과 더불어 암호가 판친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화약과 칼 이면에 뜨거운 암호전쟁이 숨어 있었다. 미국은 소수언어인 나바호 인디언의 말을 암호로 사용했으며 일본은 자신의 암호를 과신하는 바람에 전쟁에서 패했다. 카이사르의 살해, 최초의 여간첩 마타 하리, 마술사 후디니 이야기에도 암호가 숨어 있다. 마야의 버려진 도시에도 52년마다 한번씩 세상이 끝난다는 마야인의 믿음이 숨겨져 있다.

우리나라 얘기도 재밌다.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匣) 설화에 나오는 “이 편지를 열면 두 사람이,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란 편지문을 최초의 암호통신문으로, ‘즌데’를 여성성기로 보아 백제가요 ‘정읍사’를 암호로 풀어쓴 속마음이라고 본다.

“주민등록번호의 마지막 숫자는 검증번호다. 앞의 숫자들이 정상적으로 조합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암호다. 앞의 12자리 숫자들에 각각 지정된 숫자를 곱해서 더한 수를 N이라고 하면, N을 11로 나눈 다음 그 나머지를 11에서 뺀 수가 마지막 자릿수와 일치하면 정상적인 번호다.”(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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