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날, 와인으로 달콤한 사랑을 전하자”

오는 21일 ‘부부의 날’을 맞아 유통업체의 판촉 이벤트가 푸짐하다.

젊은 세대들이 초콜릿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면 중.장년층들은 와인으로 마음을 전한다.

그랜드마트는 일산점은 22일까지 30만 원 이상 구매고객 중 부부고객이 주사위를 던져 같은 숫자가 나오면 와인과 케이크를 증정하고, 롯데백화점 일산점은 20~21일 부부 고객을 대상으로 와인 시음회를 연다.

이처럼 와인에는 사람 사이의 향기를 전해주는 독특한 매력이 담겨있다.

보르도에서 토스타나까지 세계 최고의 와인에 담긴 문화와 역사를 전해주는 <와인견문록>(노브16.2006)은 “와인에는 서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대지의 생명력이 살아 숨 쉰다”고 말한다.

와인 칼럼니스트인 고형욱씨가 세계 500여 곳의 와이너리를 직접 다니며 발로 쓴 책은 프랑스, 이탈리아 8대 와이너리가 만들어낸 와인의 향을 은은하게 전해준다.

저자는 “와인은 때로 서양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라며 “어디서나 개성이 다른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은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대지를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부부의 날이 아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는 와인 한 잔이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면 오늘 당장 와인으로 분위기를 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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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②

웬지 모르게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러보게 되는 곳이 천안문이다.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마오쩌뚱(이하 마오로 칭한다)의 초상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지 천안문의 마오 초상 앞에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자기 손으로 일으켜 세운 나라를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시키듯이 대동란 속에 빠뜨리기도 했던 마오. 일평생 투쟁을 좋아해 “하늘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고 땅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며 인간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더더욱 무궁하다”고 설파했던 그가 저렇게 변함없이 고요히 천안문에 수십 년에 걸려 있는 것이 ‘달나라의 장난’ 같기도 하다.

“마오하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주변에 있는 아는 중국인에게 물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저는 우선 능력이 대단하고, 사상이 있으며, 그리고 문학적 재능이 빼어났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론 말년에 과오는 저질렀지만 그래도 공적이 많지요.“라는 예의 상투적인 평가. 마오에 대해 관심이 있냐는 질문에 “그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대답하리라.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사범학교 출신의 일개 반지식인(半知識人)이었던 그가 혁명에 뛰어든 지 불과 20여년 만에 그 거대한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신중국을 건설했으니 그는 참으로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마오 혼자서 한 일은 아니지만 마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처음으로 농민을 혁명의 중심으로 내세워 혁명에 성공하기도 하고, “뒤집어엎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造反有理)”라는 반항의 철학을 일생 견지했으니 그에겐 남과 다른 확실한 사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적 시인이기도 하였다. “애석하게도 진시황, 한무제는 문화가 조금 부족했고, 당태종 송태조는 시재(詩才)가 조금 무뎠더라. 일세의 영웅 징기스칸도 다만 활쏘기만 잘하였을 뿐. 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영웅을 꼽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라는 마오의 시가 언론에 실리자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일개 무장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손오공처럼 천하를 쥐락펴락

그렇지만 그야말로 이 모두가 지나간 일이 아닌가. 지금은 개혁 개방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다 되어가는,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의 시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은 왜 마오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하긴 부시도 마오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마오의 전기를 읽고 동독 출신의 독일 총리에게 추천까지 했다는 소식이 들리니 말이다. 최근엔 그 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바야흐로 마오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르곤 하는 서점에서 늘상 느끼는 일이지만 그에 관한 책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이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전혀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 ‘아큐’ 같이 생긴 분이 진지하게 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감탄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갔을 때에는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일본 관련 서적이 하나의 코너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많이 출판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 일본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동북아 정세의 미묘한 변화 등으로 중국사회는 전에 없이 일본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또 한 가지는 붉은 표지의 마오의 전기가 당당히 베스트셀러에 오른 사실. 이 책은 현재 하버드대학 아시아센터 연구원으로 있는 호주계 미국인인 로스 테릴이라는 사람이 쓴 전기였다. 이건 중국인민대학 출판부에서 마오에 관한 외국의 유명 연구서를 총서의 형태로 펴낸 시리즈 중의 하나였다. 베스트셀러를 겨냥해서 기획 출판된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미 5만부가 팔려 나갔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원래 1980년에 출판되었고 중국에서는 이미 1989년에 허베이 인민출판사에서 번역되어 12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물론 이번에 새롭게 뜬 책은 마오 이후 진행된 중국과 세계의 변화, 그리고 새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 마오에 관한 자료를 반영한 스탠포드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개정판(1999)을 새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미 120만부나 팔린 책이 다시금 출판되고 또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5만부 넘게 팔린 일은 아무리 인구가 많은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로스 테릴은 이 책에서 마오를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질(猿氣)을 동시에 지닌 매우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마오는 한때 그의 아내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에겐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운(猿氣)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모티브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호랑이의 기운을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호방하고 장중한 기세로, 원숭이의 기운을 B 지점에 도달하려는 원망(願望)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태도로 해석, 마오를 모순으로 가득한 아주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사실 마오는 어릴 적부터 <서유기>를 좋아했고 손오공을 높이 평가했다. 아무튼 이 책이 중국의 독서시장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은 마오의 열기가 새롭게 고조되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오 전기 개정판 또 베스트셀러

돌이켜보면 마오 사후에 세 번의 마오 열기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86년에 열기가 일기 시작하여 88년에는 상당한 기세를 이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979년에 번역된 스튜어트 슈람이 쓴 <마오쩌뚱>이 내부자료로 번역된 것이 바로 이 해였다. 로스 테릴의 마오 전기가 처음 번역된 것도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해엔 처음으로 마오를 신이 아닌 보통의 인간으로 묘사한 취엔옌츠(權延赤)의 <신단(神壇)에서 내려온 마오쩌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두 번째 마오 열기는 마오 탄생 100주년(1993년)을 즈음한 시기에 불었는데 이번에는 마오에 대한 찬송가라고 할 수 있는 ‘홍태양(紅太陽)’이라는 카세트 테이프가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무려 100만개가 팔렸는데 이 기록은 현재까지 그 어떤 가수도 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택시 안에 무사고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마오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마오에 관한 영화도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역설적인 것은 마오가 농민들과 택시 기사들 사이에서 다시금 신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마오 탄생 110주년이 되는 2003년에 달아오른 세 번째 마오 열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일어났다. 상업적 측면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특기한 만한 일이다. 순금으로 된 마오의 시집이 출간되기도 하고 수천만 원에 달하는 마오의 금상이 주조되어 수집가들의 애장품으로 혹은 뇌물로 환영을 받기도 했었다.

마침 올해는 마오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중국의 언론은 이 굵직하고도 중량감이 있는 마오 전기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이 또 다른 마오 열기의 징조가 아닐까 주목하고 있다. 최근 급속히 불거지고 있는 빈부격차가 마오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생전 단지 두 사람 반(충성스런 기밀담당 비서 두 명과 장칭의 반)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농담반 진담반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었던 마오. 그런 마오가 사후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록새록 주목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오에 관한 책을 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회고하기 위해서 읽고 젊은이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다고 한다. 그들은 마오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거나 혹은 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각자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은 소망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마오의 열기는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기상도(氣象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여전히 마오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신체에 스며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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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광주의 작가 문순태(65)씨가 아홉 번째 소설집 <울타리>(이룸)를 펴냈다. 2002년의 <된장> 이후 4년 만이다.

책에는 중편 둘과 단편 일곱이 묶였는데, 늙은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 <은행나무 아래서> <느티나무와 어머니> 등 앞쪽에 배치된 세 단편이 나란히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다.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는 팔순 노모에게서 풍기는 악취를 소재 삼았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냄새가 너무 좋아 잠시도 떨어져 있기가 싫었”던 ‘나’였지만, 이제 “내 코에 어머니의 냄새는 오래된 신 김치에서 나는 군내 같기도 하고, 쿠리한 된장 냄새, 시지근한 땀 냄새, 고리착지근한 발가락 고린내, 생고등어 비린내, 시금털털, 고리탑탑, 쓰고 시고 짜고 매운 냄새 등이 적당한 비율로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서 나는 이런 냄새를 못마땅해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에미한테서 나는 냄새는 에미가 자식 놈들을 위해서 알탕갈탕 살아온, 길고도 쓰디쓴 세월의 냄샌겨.”

그 냄새의 출처는 어머니의 반닫이 속에 보관되어 있던 색 바랜 무명천 보따리 속의 물건들인 것으로 밝혀진다. 녹슨 호미와 오래된 손저울, 함석 젓 주걱, 판자로 짠 손때 묻은 되, 때에 전 돈주머니, 나일론 머플러, 땟국에 전 앞치마 따위들. 거기에다가 네 귀퉁이가 닳고 빛이 바랜 외상 장부까지가 더해져 새삼스레 일깨워 주는 것은 어머니가 도붓장사를 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던 지난 시절이다. 이제 장성한 아들이 맡았던 역겨운 냄새와 어머니가 역설하던 세월의 냄새는 하나의 종합을 이룬다: “그것은 어머니가 살아온 신산한 세월이 발효하면서 풍겨져 나온 짙은 사람의 향기였다. 고통스러웠던 긴 세월의 더께 같은 것. 어머니의 냄새는 팔십 평생 동안 푹 곰삭은 삶의 냄새이며, 희로애락의 기나긴 시간에 의해 분해되는 유기체의 냄새가 분명했다.”

<은행나무 아래서>에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웠던 세월의 한 자락을 회고하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하늘에서는 뙤약볕이 이글이글 내리쬐고 땅에서는 뜨거운 지열이 푹푹 솟구치는 한여름에 비석거리 콩밭을 매고 있었는디, 아 클씨 뽀짝 눈앞 당산나무 그늘에서 느그 아부지랑 난초 년이 덩더궁 덩더궁 북장고 쳐 감시로 노래를 부르고 자빠졌지 않겄냐. 어찌나 천불이 나던지 참다 참다가 호맹이를 치켜들고 맨발로 헐레벌떡 당산으로 뛰어갔는디….”

“그만 쓰려해도 결국 역사 속으로”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아내가 힘들게 일하는 눈앞에서 첩과 어울려 노래 부르며 신선 놀음을 즐기던 아버지는 그에 대해 항의하러 온 어머니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마구 짓밟는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까. “콩밭이고 지랄이고 나 몰라라 허고 머리 싸매고 누워 있다가, 다음 날에 다시 눈 질끈 감고 콩밭을 맸제. 그 후로는 느그 아부지 난초 년이랑 북장구 치건 말건 눈감고 귀 막음시로 낮에는 뙤약볕에서 억척스럽게 콩밭만 매고 밤이면 새벽꺼정 길쌈을 했단다.”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에서, 화분의 꽃을 뽑고 대신 가지와 고추 모종을 심었던 일화와 함께 <은행나무 아래서>의 ‘콩밭과 북장구 사건’은 작가 어머니의 경험을 그대로 소설로 옮긴 것이다. 소설집 출간에 맞추어 서울에 온 작가 문씨는 “가장 궁핍하고 고통스러운 시련의 한복판에서 가족들을 건사했던 어머니의 강인한 생명력이 바로 내 소설의 뿌리에 해당한다”며 “저출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머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집 <울타리>의 또 다른 축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다. 작가는 미완의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이라든가 <징소리> <철쭉제> <그들의 새벽> 같은 작품들에서 줄기차게 역사와 현실을 상대로 대결을 펼쳐 왔다. “이제 역사적인 소재는 그만 다루려 해도 쓰다 보면 결국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작가는 말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두 중편 <울타리>와 <감로탱화>는 전쟁 당시의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월북 및 탈북 등 묵직한 소재를 건드린다. 우선 작가 스스로 “역점을 둔 작품”이라 말한 표제작 <울타리>를 보자. 기자인 ‘나’가 취재 대상으로서 만나는 두 노인이 있다. 탈북자 김기두와 비전향 장기수 최동수가 그들이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어린 시절 고향 친구이자 나란히 소년 빨치산이 되었다가 함께 월북했던 사이였다. 그 시절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한 사람은 먹을 것을 찾아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고 다른 한 사람은 이념을 좇아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고자 한다. 극단적으로 갈리는 두 사람의 행로를 지켜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이들 모두는 경계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삶과 죽음의 경계, 갈등과 이념의 경계, 암컷과 수컷의 경계,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 생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감로탱화>는 우연한 계기에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자들의 유골을 발견하면서 삶의 경로가 바뀌게 된 고교 졸업반 학생들을 등장시킨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고 싶”어서 유골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세상에 공표한 이들의 행위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천도해 주기 위해 감로탱화에 매달리는 스님의 그림 작업과 같은 궤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8월 정년퇴임…고향서 글쓰기 전념

그리고, 짧고 이색적인 단편 <영웅전>에서 작가는 결국 ‘5월 광주’를 재론한다. 소설은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음에도 참회하거나 깨우친 것 같지가 않”은 전직 대통령을 ‘당신’이라 부르며, 그의 행적과 임진왜란 때 제대로 된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을 비교하면서 5월 광주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역설한다. 작가는 “5월이 되고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광주 사람들은 일종의 집단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로 5월 광주의 아픔과 슬픔이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작가는 오는 8월 대학에서 정년퇴임하게 된다. 소설집과 함께 세 번째 산문집 <꿈>을 낸 것은 이 일을 기념하는 의미도 지니는 셈이다. “정년 이후에는 고향 담양에 마련한 집에 내려가 글쓰기에 전념하면서 지역 문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문학의 집’을 꾸려 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7권으로 중단된 상태인 <타오르는 강>을 3권 정도 더 써서 완성하는 게 당장의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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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임정연(39)씨가 첫 소설집 <스끼다시 내 인생>(문이당)을 묶어 냈다.

‘쓰키다시’란 일본 요리에서 주 메뉴에 앞서 나오는 곁가지 음식을 가리킨다. 임정연 소설집의 표제작에서 주인공인 청소년은 자신의 인생이 쓰키다시와 같다고 느낀다. 소설집 <스끼다시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아도, 스스로 그렇게 여기든 그렇지 않든, 쓰키다시에 가까운 인물들이 다수를 이룬다. 메인 메뉴가 하나인 데 반해 쓰키다시는 여러 가지인 것처럼, 삶에서도 주인공은 한 사람인 반면 조역이나 엑스트라는 여러 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작가가 유독 쓰키다시 인생들에 관심을 쏟는 것은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표제작의 주인공들은 학교가 아닌 독서실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열일곱 살 지누와 ‘나’다. 독서실 총무인 서른네 살짜리 고시생과 어울려 이들은 하릴없이 세월을 탕진한다. “세상을 인터넷으로 배웠다”는 이 아이들은 채팅에서 알게 된 여자아이와 ‘번개팅’을 하거나 음란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지리멸렬한 시간을 죽인다. <달빛>의 주인공인 필수와 영재는 집을 나온 여고생 미경을 내세워 원조교제를 유도하고 걸려 든 남자들에게서 돈을 뜯어 내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한다. 빈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려다가 화장실 변기에 앉은 채 죽어 있는 노인을 발견하기도 하고, 미경을 성폭행했던 ‘담탱이’(담임 선생님)를 인적 드문 장소로 유인해서 각목으로 때리다가 결국 칼로 찌르기까지 한다.

이밖에도 <바나나펀> <아빠가 허락하지 않을 일> <팬터마임, 여름> 등 대부분의 수록작들에서 주인공들은 기성 사회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곽을 배회하거나 자기 안의 어둠 속으로 침잠해 버린다. 작가는 곳곳에 배치된 비속어와 은어, 그리고 툭툭 내뱉는 듯한 문체를 통해 반항적이고 일탈적인 청소년들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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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맑스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자본>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자본 읽기>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자본>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초고>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1844년 초고>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맑스를 위하여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 백의 펴냄(1997)

아미엥에서의 주장

알튀세르 지음, 김동수 옮김, 솔 펴냄(1998)

(알튀세르의 사상 전반에 접근하기에 좋은 책. 쉽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돌베개 펴냄(1994)

(부인을 죽인 뒤 금치산자로서 유폐된 상태에서 씌어진 알튀세르의 자서전)

◇ Mjspinaza(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리뷰)=“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 익명=“프랑스 공산당에 속해 있었던 알튀세르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사태에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맑스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 전체를 비판의 도마 위해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논장=“이 책에 내포된 세적, 정치적 담화들은 시대의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 시기 새롭게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갖는 탁월한 인식론적 가치 때문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국사신론>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책속으로]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켜

“당에 들어왔던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정치적 행동주의나 적어도 순수한 행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지게 된 상상적 채무를 변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또한 우리 사회 역사의 한 특징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동류들 속에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자를 갖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대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들은 …언젠가는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 내지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킬 수밖에 없었다.”(<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22~23쪽)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신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층위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은 그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층위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규정적인 동시에 규정받고 있고, 자신이 추동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수준들과 다양한 층위들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순은 원리상 중층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116~17쪽)

“인간사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호흡하는데 필수적인, 역사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나 공기인 것처럼 분비한다.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관만이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들을 상상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의해 대체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덕이건 예술이건 ‘세계의 표상’이건 간에 역사유물론에서는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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