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틈새/이혜경 지음/256쪽·9500원·창비

이혜경(46) 씨는 ‘마음의 무늬를 말로 다듬어 전할 줄 아는 드문 작가’(평론가 우찬제)다. 물 흐르듯 읽히지만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공들여 만들어졌고, 차분하고 오랜 감동을 주는 ‘웰메이드 소설’이다. 새 소설집에는 그녀의 소설 미학이 무르익은 작품 9편이 담겼다.

가전제품 애프터서비스 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표제작 ‘틈새’. 어느 날 기사의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단란주점을 차리겠다고 선언하더니 급기야 이혼을 하겠다고 나선다.

자그마한 틈새들이 있지만 그럭저럭 꾸려갈 만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틈새는 말할 수 없이 깊었던 것.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중년 남성에게도 어김없이 닥치는 인생의 가혹함을 작가는 담담하게 전달한다.

이수문학상 수상작인 ‘피아간(彼我間)’은 결혼 7년 만에 아이를 가진 경은이 부친상을 당하고는 장례식장에서 맞닥뜨리는 인생의 차가움을 묘사한 작품이다.

밤샘하는 사람들이 화투 칠 돈 10만 원만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데, 상주인 큰오빠가 돈 없다며 고개를 젓는 모습, 못 사는 이모가 찾아오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엄마를 때렸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사람살이는 이토록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하다. 차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오히려 쓸쓸함을 돋운다.

삶에 대한 시선만큼이나 소설 속 언어 쓰임새도 섬세하고 단정하다. ‘감때사납다’ ‘뻐세다’ ‘시드럭부드럭’ 같은 귀한 우리말을 만나는 기쁨도 크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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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씨앗은 힘이 세다/강분석 지음/240쪽·9000원·푸르메

광고회사와 외국기업에서 20년 가까이 커리어 우먼으로 능력을 발휘하던 저자는 1997년 봄, 덜컥 시골행을 결정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마흔이 되면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겠노라 노래를 부르던 터였고 저자 역시 서울에서 더 붙잡을 것이 없어 그러마라고 해 결정된 일이었다.

이듬해 봄 400평의 밭에 들깨와 두릅을 심는 것으로 시골 생활이 시작됐다. 저자가 농사를 지으며 운영해 온 인터넷 사이트 ‘앙성닷컴’에 쓴 글을 책으로 엮었다.

‘농사는 남편이 짓고 나는 책이나 실컷 읽고 심심하면 텃밭이나 매야지’ 하는 생각으로 내려간 저자는 들일을 시작한 지 며칠도 안 지나 농사는 함께 짓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들에 엎드려 일하면서부터 풀 꽃 하늘 구름과 작은 생명이 사방에서 말을 걸기 시작하고 그 존재들과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경이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저자의 마음이 수려한 문장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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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통일은 없다/남주홍 지음/276쪽·1만5000원·랜덤하우스중앙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가 펴낸 통일론이다. 한마디로 ‘빠른 통일’이 아닌 ‘바른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제언이다.

저자는 통일 독일이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가 제2의 분단을 가져올 것이라는 독일 지식인들의 경고에 주목하면서 우리 통일 정책도 냉철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시각에서만 북한을 대할 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과 공동 안보 차원에서 통일을 향한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제목은 도발적이지만, 감정적인 통일론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해 주는 책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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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도박/거다 리스 지음·김영선 옮김/376쪽·1만8000원·꿈엔들

“도박 행위는 수음(手淫)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 둘을 묶어 주는 연결 고리는 ‘강박’에 사로잡힌 손동작이다. 그 열정적인 손놀림을 보라. 자위라는 악이 도박에의 탐닉으로 대체된 것이다….”(프로이트)

인류의 역사에서 도박은 오랫동안 죄악이었다. 중세의 교회는 도박을 신성 모독으로 간주했고, 근대의 부르주아에게 도박은 부의 창출을 우연의 농간에 맡기는 범죄 행위였다. 20세기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도박을 정신 질환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복권을 사고, 경마장에서 베팅을 하고, 사무실에서 사다리 타기를 한다. 우리는 ‘호모 알레아토르(homo aleator)’, 도박적 인간인 것이다!

이 책은 로마제국에서 라스베이거스에 이르기까지 우연과 확률, 그리고 기회의 역사를 다룬다. 특히나 수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도박이라는 우연의 세계가 갖고 있는 외적, 내적 풍부함을 한껏 드러낸다.

일찍이 카지노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은 보들레르였다. “기억하라! 지칠 줄 모르는 도박자들아. 시간이 룰렛의 판에서 항상 승리한다.”

오웰은 도박의 사회적 마취 효과에 대해 우려했다. “복권은 프롤레타리아가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대중 이벤트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즐거움이고, 어리석음이고, 진통제이고, 지적 자극이다.”

우연의 매혹, 그 불평등한 변덕을 갈파한 것은 고골리였다. “게임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카드 앞에서 평등하다.”

저자는 21세기를 우연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위험사회’로 진단한다. 위험과 투기, 변동성과 비결정성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며, 사회는 갈수록 더욱 공개적으로 무질서해지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는 도박을 포용한다. ‘위험’은 후기 산업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데 매우 친숙한 개념이다. 세계 경제가 갈수록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필요로 하면서 서구의 금융 시스템이 급속하게 거대한 카지노를 닮아가고 있다.

외환 딜러들은 이렇게 탄식한다. “이것은 도박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사코 그것을 경제 지식으로 치장하려 든다. 필요한 것은 단지 동물적 감각이다. 달러가 오른다, 파운드가 내린다. 베팅하라!”

투기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본성이었다. 17세기 이래 자본주의 확산의 동력은 ‘카지노’에 있었다. 이유는 분명하다.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석유를 캐는 사람들이 아니다. 석유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다. 원제 ‘The Age of Chance’(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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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종이 한 장의 마법, 지도/류재명 글·신명환 그림/160쪽·8500원·길벗어린이(초등 4년 이상)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교수인 저자는 대입 수험생들을 면접할 때 세계지도를 걸어 놓고 묻곤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이 어디 있죠?” 그 유명한 나일 강을 끝내 못 찾고 머리를 긁적이는 ‘지리교육학’ 지망생이 있다. 놀라고 실망한 저자가 하는 말.

“나일 강을 탐험해 세계지도에 그려 넣는 사람도 있는데 지도에서 찾지 못한다는 건 민망한 일 아닌가요.”

이 책은 “집이 어디니?” “이번 휴가는 어디로 가지?”와 같은 ‘지리적’ 대화에 익숙하면서도 지도 보기를 골치 아파하는 어린이들에게 지도와 친해지는 법을 가르쳐준다. 지도의 역사와 활용법 등 지도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귤로 지구본 만들기는 꼭 따라해 볼 것! 귤 표면에 위치를 표시한 뒤 가로세로 줄을 긋고 잘라 지도를 만들면 위도 경도 축척과 같은 평평한 지도 개념이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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