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연 참 오랜만에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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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편작 - 소설 의인열전 1
이수광 지음 / 청어 / 2003년 6월
품절


동양의술의 기원은 황제내경으로 시작되고, 한의학의 시조는 춘추시대의 신의 편작으로 불린다. 더불어 화타는 중국에서 의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들이 한의학의 시조와 의성으로 추앙 받는 것은 단순하게 명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치병제중, 병을 다스리고 중생을 구원하려고 한 불세출의 의원들이기 때문이다. 편작과 화타에 대해서는 구전이나 전설로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변변한 평전이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 없는 실정이다.-.쪽

편작의 성명은 진완(秦緩), 자는 진월인(秦越人)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의원이다. 여관에서 사환으로 있을 때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신비한 노인에게 금방(禁方)의 구전과 의서를 전수 받아 전설적인 명의가 되어 편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천하를 편력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병자들을 치료하여 신의라는 명성을 듣게 되었다. 편작 진완은 죽은 것으로 알려진 괵나라 태자를 살리는가하면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는 제환공의 죽음을 예언하여 화타와 함께 동양 의술의 쌍벽을 이루는 대가가 되었다. 오늘날의 진맥법은 편작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진맥에 능통했고 불치병을 집대성한 난경을 집필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진나라 시의 이혜의 질투로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지만 그가 남긴 의서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동양의 학의 기초가 되었다.
편작의 사적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이르고 있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전기(傳記)는 여러 명의의 일화가 편작에게 흡수된 것이 태반이다. 당시의 중국에서는 의료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 병이 생기면 무당의 주술로 치료하려고 했는데, 편작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의(醫)가 무당의 주술에서 분리되어 확립된다. 편작은 의료 체계를 확립하여 진보적인 지식인이 되었고 이에 반발하는 보수적인 의원 그룹의 일원인 이혜가 편작을 암살한 것으로 보여진다.-.쪽

1) 편작은 중국 고대로부터 명의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2) 편작의 이름은 사기열전(史記列傳)에는 진월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에는 진월인은 자고 이름은 완으로 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는 동주열국지의 기록을 취하여 이름을 진완, 자를 진월인으로 사용한다.
3) 진완이 편작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은 진(晉)나라에서 조간자를 치료하고 나서부터의 일이다. -.쪽

1) 버드나무껍질이 해열에 특효가 있다는 것은 서양에서 히포크라테스가 최초로 발견했고, 영국의 사제 스톤도 민간에서 전해 오는 이 사실을 영국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화학자 피리아는 버드나무껍질에서 살리신을 분리하는데 성공했고 독일의 바이엘사는 이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해열제 아스피린을 탄생시킨다-.쪽

1) 굿은 편작 진완에 의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진완이 가난한 농부의 소를 잡아 굿을 하게 한 것은 심리요법으로 평가된다.-.쪽

이혜가 진목공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목소리가 표나게 떨리고 있었다.
"하늘이 보고 땅이 보고 여러 대부들이 보았다. 편작 진완은 공호와 제영의 심장을 바꾸는 수술에 성공했다. 나는 그를 신의(神醫)라고 부를 것이다. 그에게 황금 백일(百鎰)을 하사하라!"
진목공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하고 내궁으로 돌아갔다. 진나라의 대부들은 일제히 공호와 제영에게 다가와 살피며 탄성을 내뱉었다. 많은 의원들도 공호와 제영의 맥을 잡아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완은 제자들을 시켜 공호와 제영에게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안정을 취하게 했다. 공호와 제영은 사흘 동안이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진완은 사흘 동안 내내 공호와 제영의 옆에서 멎으려는 맥을 되살리고 양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공호와 제영의 명이 경각에 달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진완이 침으로 되살리고는 했다.
사흘이 지나자 공호와 제영은 의식이 돌아오고 이레가 지나자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고 두 달이 지나자 간신히 걸을 수 있었다. 세 달이 지났을 때는 병이 완전히 나은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1년을 살지 못할 것이다.'
진완은 공호와 제영의 맥을 잡아보고 비감했다. 심장을 바꾸는 일은 아직 그의 의술로 이룰 수 없었다.
이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인간이 결코 이룰 수 없는 경지, 심장을 바꾸는 것으로 진완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던 이혜의 계책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무서운 놈이다. 저놈은 이미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이혜는 진완의 신기에 가까운 의술에 몸서리를 쳤다.
-.쪽

1) 편작 진완이 공호와 제영의 심장 이식 수술을 했다는 것은 열자(列子)의 기록에 있다.
2) 중국 의학의 맥법은 황제 내경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편작 진완에 의해 학문적 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이 사마천의 평가다. 편작은 맥법 이외에도 중국 의학을 체계화시킨 의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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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보이는 베이컨...

다름아닌 상처날때 붙이는 밴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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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6-06-03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게 진짜 보라빛 소겠네요... ㅋㅋㅋ
 
달력과 권력 - 달력을 둘러싼 과학과 권력의 이중주
이정모 지음 / 부키 / 2001년 1월
구판절판


하루의 길이가 길어지는 추세는 관찰 또는 계산한 시대에 따라 다른데, 100년당 5밀리 초에서 1만 년당 86.4초 사이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런 숫자는 달력을 만들 때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아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시ㆍ분ㆍ초의 개념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하루를 24시간, 1440분, 그리고 86,400초로 쪼개놓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하루의 길이가 매일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실제적인 하루의 길이와는 상관없는 길이를 1초로 정하였다. 세슘(Cs)이 방출하는 파장의 진동수를 따라서 1초를 정한 것이다. 현재의 기술로는 1조 분의 1초까지 측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하루가 실제로는 86,400초가 아님에도 하루를 86,400초로 나누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지구의 하루와 맞추어 주기 위해서 사람들은 대략 3년마다 2초의 윤초를 두고 있다. 윤초는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시간국(Bureau International de I?eure, BIH)에서 결정한다.-.쪽

다음은 이 윤초 실시를 알려 주는 신문 기사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고 흘려 버리는 기사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윤초가 달력에 미치는 영향은 없기 때문이다.

천문대는 국제지구자전국(IERS)의 통보에 따라 우리나라 시간으로 내년 1월 1일 오전 9시에 기존 시간에 1초를 더해 넣는 양의 윤초를 시작한다고 15일 밝혔다.
양의 윤초를 실시하는 방법은 99년 1월 1일 오전 8시 59분 59초와 9시 0분 0초 사이에 8시 59분 60초를 삽입하는 것으로 윤초를 실시하기 전의 9시 1초는 윤초 실시 후 9시 정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날 오전 8시 59분과 9시 정각 사이의 1분은 61초가 되는 것이다.
윤초는 국제적으로 사용 중인 지구 자전에 기본을 둔 세계협정시(UTC)가 자전 속도에 따라 조금씩 느려지거나 빨라지면서 세슘-133 원자의 진동수를 기준으로 해 항상 일정한 세계시(UT1)와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없애 주는 것이다.
윤초는 세계시 1972년 1월 1일 0시가 세계협정시의 기준으로 정해진 뒤 지금까지 모두 21번 실시됐으며 이번 윤초는 지난 97년 7월 1일(한국 시간) 이후 1년 6개월만에 실시되는 것이다.
『중앙일보』 1998년 10월 15일-.쪽

인위적인 단위-일주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 2장 2절

지난 밀레니엄 동안 인류는 꾸준히 새로운 달력 체계를 모색하여 왔다. 좀더 정확한 달력을 만들고자 새로운 계산법을 고안하여 내놓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가도 혼란이 일어나면 곧바로 원상회복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달력 체계들과 그 시행에 따른 혼란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된 것이 있는데, 바로 주일이란 단위이다. 그렇다면 주일은 왜 달력 체계가 변화 무쌍한 와중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주일이 자연 현상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사용한 시간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일은 하루보다는 커다란 시공간이다. 주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달의 모양이 변화하는 것에서 주일이 기원한 것은 아닐까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믐달(어둠) ⇒ 상현달(커지는 반달) ⇒ 보름달 ⇒ 하현달(작아지는 반달) ⇒ 그믐달(어둠), 이렇게 한 달을 약 4개의 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일은 7일 주일보다 5일 주일이 먼저 사용되었다. 5일은 한 손의 손가락을 사용하여 셀 수 있으므로 매우 편리했다. 기원전 30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는 60진법이 사용되고 있었다. 바빌로니아 인들에게 3, 5, 6과 60은 신성한 숫자였다. 이들에게는 2달에 5일 주일이 12번 있었으며, 1년은 모두 72주로서 360일이었다. 세대를 거듭하여 1년이 365일임을 알았을 때는 1년이 73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5일 주일은 이집트 문명에서도 나타난다.-.쪽

그러면 7일 주일은 언제 도입되었을까? 7일 주일은 칼데아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사람들이 기록한 창세기가 그 사실을 보여 준다. 7일 주일은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미 로마 인들 사이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곧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에도 도입되었다. 중앙 유럽에 도입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려서 고트 족은 4세기경에, 게르만 족은 5세기경에나 사용하기 시작한다.
한편 5일 주일과 7일 주일 외에 한국ㆍ중국ㆍ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10일 주일(순, 旬, decade)이, 또 중앙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20일 주일과 30일 주일이 사용되기도 하였다(6장 '마야와 아즈텍 달력'참조).
그렇다면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등과 같은 요일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요일 이름은 옛 사람들이 맨눈으로 관찰할 수 있던 별들의 이름에서 왔다(표 2).
왜 이렇게 요일의 순서가 정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별에서 따온 요일 이름은 기원전 1세기경에는 로마에서 이미 일반적이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별의 이름을 딴 요일 이름이 이교도적이라고 생각해서 이 방식에 반대하였으나,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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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웃긴 제품이지만 경기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할수 있겠네요^^

좀 용기가 필요할지 모르지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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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6-03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저 아저씨.. 선구리 쓴 사진.. 넘 귀여워요. ㅋㅋ

보슬비 2006-06-04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