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잠깐독서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냐? 고려청자 비취색의 비밀은 다 풀렸나? 무엇이 에밀레종을 그렇게 울게 만들었나? 이런 의문들은 사실 새로울 게 없다. 한국과학사에서 내세울만한 이 유명한 유물들에 대한 이런 류의 질문은 오래 전부터 되풀이 돼왔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답들이 이미 제시됐다. 그렇다면 의문은 이제 다 해소됐나?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신동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탐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참신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직접 발로 뛰어 찾아보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고, 다시 참고문헌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토론을 통해 글로 발전시켜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차츰 학생들의 글에서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전을 보면서 ‘지식의 체화’가 있어야만 남에게 읽힐 만한 글을 내놓을 수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구체성과 현장성 강화! 이 두 가지가 학생들이 콘텐츠 부족을 뛰어넘는 결정적인 비결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책은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인 지은이가 2004년 가을학기 한국과학사 수업 때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공동작업을 묶어 정리한 것이다. 지은이는 “정답을 강요하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정답에 근접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면서, “지식 확충보다는 지식을 얻는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데 더 큰 의의를 두고 싶다”고 밝혔다.

그 결과 첨성대에 대한 의문에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할 뿐”이라는 답이 나왔고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은 성분조사 결과 아기를 희생물로 넣지 않았다는 점 등 새로운 사실들을 파악했으나 여전히 “1200년 전에 만들어진 에밀레종의 복원은커녕 그 성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밖에 고려청자, 자격루, <동의보감>, 수원 화성,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얽힌 묵은 의문들에도 새로 도전한다. 각 장마다 옛 사료 번역문들과 참고사항들을 덧붙였고 끝에 ‘우리 과학 100년의 발전사’도 따로 넣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겨레] 누굴까? 뛰어난 정치감각과 민완한 활동으로 해방공간에서 ‘10년후 대통령’으로 회자됐던 인물. 보성고보를 수석입학, 수석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재학때 유진오, 허달과 함께 3대 천재로 꼽혔던 인물. 막연할 거다.

미군정 헌병사령관 베어드(대령)의 첩이자, 간첩으로 알려진 김수임의 애인. 미군정의 수배를 받자 베어드의 승용차로 38선을 넘어 월북한 자. 감 잡힐 거다. 이강국이다!

“조국과 인민을 배반한 극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과 조국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예심과 공판 심리를 통한 자기비판의 기회를 준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조국과 인민이 주는 벌을 달게 감수하겠습니다.”

박헌영과 이승엽을 미제의 간첩이라고 고발하고 스스로도 해방전부터 자원한 간첩이었음을 시인하는 재판정에서의 최후진술이다. ‘전재산 몰수 및 사형.’ 판결만큼이나 치욕적인 발언이다.

요즘 눈길을 당기는 <한국방송> 드라마 ‘서울 1945’의 등장인물 최운혁이 그를 모델로 삼은 탓일까. 해방공간의 풍운아 이강국(1906~1955)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와 관련한 책이 잇따라 나왔다. <이강국 연구>(백산서당 펴냄)와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범우사 펴냄)이 그것. 전자는 현대사 연구가 심지연 교수(경남대)의 근작으로 박헌영, 김두봉, 허헌에 이은 해방공간의 미아찾기 네번째 작업이다. 이강국의 행적과 사상을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관련자료를 붙였다. 후자는 해방직후 각종 집회에서 이강국이 한 연설과 보고, 중앙인민위원회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대표해서 발표한 성명, <조선인민보> 등 신문·잡지에 실린 그의 글을 모은 것이다. 1946년 조선인민보에서 초판이 나왔고 이번 책은 현대적 표현으로 다듬었으니 개정판인 셈이다.

왜 이강국인가?

일제 강점하 나라찾기가 주목적일 때는 망국인 사이에는 좌도 우도 없었다. 그들이 독립을 위해 찾아갔거나 놓인 자리가 북방이냐 서방이냐에 따라 그렇게 자리매김되었을 따름이다. 그러기에 이념적 대립이란 큰 의미없는 일. 그들은 모두가 동지였다. 하지만 나라만들기에 모두 떨쳐일어선 해방공간 상황은 크게 달랐다. 해방이 쟁취되었다기보다 외세에 의해 주어진 까닭.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면서 자생적인 상해 임정, 국내 인공이 부인되었다. 각각의 꼭두로 내세워진 이승만, 김일성 집단을 중심으로 권력화가 진행되면서 이데올로기가 분명한 전하를 띠게 되었다. 그러면서 극으로 갈리기를 거부하는 통합 또는 통일세력이 설 자리는 당연히 없어졌다. 하여 김구, 여운형 등은 해방공간에서 암살되고 남북을 가로지른 박헌영, 조봉암은 분단공간에서 제거되었다. 박헌영과 조봉암이 간첩혐의를 쓴 것은 백범과 몽양과 달리 나라가 분단되었기 때문.

여간첩 김수임의 연인

해방 및 분단공간에서 제거된 이들에 대한 조명이 하나둘 이뤄지는 마당. 치욕스럽게 죽어 잊혀진 이들한테도 빛은 비춰져야 마땅하다. 그 가운데 이강국도 포함되지 않겠는가.

그는 누구인가.

이강국은 해방공간에서 활약했던 최고의 공산주의 이론가. 해방 직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가담하였고 해방뒤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조직부 집행위원,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등을 지내며 1년여 만에 좌파의 대표 논객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그는 해방 직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주창하며 조선공산당의 주도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한 ‘8월 테제’를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또 그는 인공의 정통성 주장, 임정과 인공의 통합 운동, 반탁에서 찬탁으로 좌파의 노선 전환, 좌우합작과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3당 합당의 논리를 주도적으로 개발했다.

특히 찬탁으로 노선을 바꿀 때 박헌영이 변명과 합리화로 일관한 반면, 이강국은 잘못 시인하는 솔직함을 보였다. “정보가 부족한 나머지 흥분한 민중에게 그대로 추수하고 말았다”면서 ”좀더 신속하게 삼상회의의 내용을 구명하여 그 태도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따라서 민중에게 일시 혼란을 일으키게 한데 대하여 삼천만 민중에게 깊이 사과”한다고…. 찬탁의 근거는 자력해방이 아니어서 자주독립에 국제적 제약이 불가피하다는 것.

1906년 경기도 양주군 태생인 그는 3살때 부친을 따라 상경하지만 집안은 파산지경에 이른다. 충남 예산 등 친척집을 떠돌다 명석한 두뇌로 보성고에 편입해 장학생으로 다녔다. 졸업뒤 경성제대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일본인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 영향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웠다. 1931년 조선사회사정연구소 만들어 조선 실정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근로대중 조직에도 힘썼다. 32년 나찌 하 베를린 대학에 유학해 독일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외국인 신분을 활용해 출판활동과 해외연락을 맡았다. 34년 미야케가 지도하는 독서회가 발각되고 그는 35년 11월 귀국해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는 처남이 운영하는 증권회사 사무원으로 있으면서 원산 적색노조운동을 지원했다. 38년 민족해방전선운동이 발각돼 체포되는 등 해방 때까지 쉬지 않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조하는 일 없이 실천운동에 나선 게 특징.

일제하에선 굽힘없는 실천가

역사의 흐름에 맞서 싸웠다가 패배하는 비극적인 행로를 밟은 그는 연인과의 관계 역시 역사와 더불어 비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점령군 헌병사령관의 품에 둔, 사랑하는 여인 김수임은 그가 쫓길 때 숨겨주었고 북으로의 피신을 도와주었다. 김수임은 남쪽에서 간첩혐의로 6·25 발발 직후 사살됐고 이강국 역시 5년 뒤 북쪽에서 간첩혐의로 사형당했다.

왜 이강국인가.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어디에서도 수용되지 않은 역사의 미아, 말을 바꾸면 정-반-합의 진실을 꿈꿨던 자. 꽃은 아니어도 진실은 드러나야 하지 않는가. 우리사회가 그만큼 성숙했음에서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겨레] 커버스토리/19세기 남영로 소설 <옥루몽> 번역 출간

새로 출간된 <옥루몽>(玉樓夢)을 단숨에 읽었다. 19세기 전반기를 산 남영로(1810~1857)가 쓴 소설을 김풍기 교수(강원대)가 다섯 권으로 번역해 펴낸 덕분이다. 시인 김구용 선생이 1950년대 번역 출간한 것이 품절된 이후 이 책은 서점가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얼마전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김구용 선생 번역본이 나와 사려고 덤볐다가 놓쳐버려 아쉬움이 남았던 터다.

책을 구해 보기 어려운 것만 봐도 <옥루몽>은 비슷한 성격의 고전 소설 <구운몽>과는 처지가 사뭇 다르다. <구운몽>은 지금껏 많은 종류의 책이 거듭 출간돼 널리 읽히는 반면, <옥루몽>은 독자의 관심밖에 놓여 있었다. 그 이름조차도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팽개쳐도 좋을 만큼 그저 명성만 드높은 고전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흥미롭게 읽을 만한 소설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읽을 만한 고전을 새로 찾은 느낌이다.

<옥루몽>은 주인공 양창곡이 다섯 명이나 되는 처첩과 누리는 환상적이고 화려한 인생을 묘사한 장편소설이다.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양창곡은 과거에 장원급제해 조정의 고관이 되고, 남방과 북방의 전쟁에 대원수로 참여해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그 과정에서 다섯명의 여성과 인연을 맺는다. 이렇게 양창곡이 중심이 되어 여성들이 인연을 맺는 구도를 놓고 볼 때, <구운몽>의 남성 중심적 세계를 확장시킨 작품으로, 가부장제 사회의 한 집안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과장해 묘사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다섯 명이나 되는 처첩을 당당하게 데리고 으스대며 살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허구이다. 그렇더라도 남성위주의 세계를 묘사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소설의 전개를 보면, 이 작품이야말로 여성의 사랑과 활약상을 그린 여성소설이라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 듯하다. 겉으로는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소설이지만 실제로는 봉건적 사회의 약자인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욕구와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강남홍·벽성선·일지련 이 세 여성 주인공은 양창곡과의 사랑에서도, 남방과 북방의 전투에서도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다. 그 가운데 강남홍은 역동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 사랑도 쟁취하고, 부원수의 지위도 쟁취한다. 여성이라는, 기생이라는 겹겹의 장애와 박해를 넘어서 가정에서도 국가에서도 그녀는 난관을 극복하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획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은 양창곡이 아니라 강남홍이다. 미모의 어린 여성이 장군복을 입고 전쟁을 주도하고 복잡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한다. 지금 읽어도 아슬아슬한 느낌이 전해오는데, 백여년 전의 독자가 느꼈을 통쾌함과 스릴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비현실적 세계 흥미 고조

그런 흥미를 주는 데는 세 여성이 모두 기생 신분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양반 출신으로 정실부인이 된 윤소저·황소저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강남홍은 자유연애를 성사시키고, 봉건사회의 완강한 틀을 헤집고 남성에게만 주어지는 장수와 고관의 지위를 차지하는 등 온갖 장면에서 활약한다.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 귀족 부인 아니라 기생이, 장년의 어른이 아니라 10대의 소년이 거대한 위험과 음모에 맞서서 싸우는 많은 장면은 긴장과 흥분을 느끼며 소설을 읽게 만든다. 현실과는 반대로 설정된 인물의 활약, 그것이 독자의 시선을 붙들고, 흥미를 돋운다.

예전에 읽은 경험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녀간의 만남이나 사건의 전개, 전투장면 등에서 수시로 만나게 되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것이 읽는 흥미를 떨어뜨렸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런 요소가 이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 그런 것들이 오히려 흥미를 더하고, 그것이 풍부한 상상의 세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독서태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들이 천상에서 내려와 비와 바람을 부르며, 분신을 보내 전투를 하는 등 갖은 도술을 펼치는 장면이 적지 않게 나온다. 여기에 사건을 암시하는 꿈과 여러 비상한 인물들, 도사와 정령들이 흔하게 등장하는 것도 흥미를 더하였다. 현실적인 사실, 합리적 사고와는 다르게 전개된다는 것이 오히려 이 소설의 장점일 것이다.

<옥루몽>이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시기 이 소설은 빠른 속도감의 문체, 스펙터클한 장면묘사, 환상적인 사건전개로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자아냈었다. 20세기 들어서서 서구 소설의 도래로 그러한 작품은 빛을 잃고 설 자리를 잃었었다. 소설을 창작하고 읽는 관점이 다양해진 현재에는 사정이 어떨까? <옥루몽>의 고유한 소설적 특징을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감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판타지 소설이 성행하는 현재의 상황도 이 소설을 새롭게 평가하는 적기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을 <서유기>나 최근 소설인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와 더불어 읽어본다면 그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여성, 선 굵은 열혈 협객의 풍모

판타지 소설로서 <옥루몽>이 지닌 특징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활동을 보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인공인 양창곡이 장원급제한 나이가 16세요, 전장에 나가서는 대원수요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다가 연왕에 봉해져 은퇴한 나이가 26세다. 도전해야 할 난관과 시련을 10대에 거의 겪었고, 20대에는 인생에서 얻을 있는 모든 욕망을 완벽하게 획득했다. 그 꿈에 동참한 다섯의 여성 또한 양창곡과 비슷한 나이다. 강남홍이 나탁과의 전쟁에서 부원수로 활약한 나이 역시 17세이다. 주요한 등장인물이 10대와 20대로서 혈기 왕성한 청소년이 활약하는 문학이다. 나이가 젊은 연소한 주인공들은 감정의 분출이 폭발적이고 행동의 선이 굵으며 열혈 협객의 풍모를 드러낸다. 지기(知己)를 만나면 적도 바로 친구가 된다. 더구나 능력은 있으나 신분이 천한 여성들은 거침없이 행동한다. 소설 전체가 매우 역동적이다.

주인공들이 엮어가는 사랑도 그렇고 그들이 얻는 성공도 신화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소설의 배경인 중국이나 조선 어디에서도 불가능한 현실로서 인간의 꿈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소설의 첫 회에서 인간의 세계를 “망망한 괴로움의 바다에 욕망의 물결이 하늘에 닿도록 넘실거리고, 쓸쓸한 먼지 가득한 세상이 취한 듯 꿈꾸는 듯 몽롱하다.”라고 묘사했다. 인간의 세계는 그렇게 욕망의 세계이다. 그런 세계에서 마음껏 활개치며 영웅이 되어 지상에서 허용된 최상의 욕망을 성취하고픈 것이 인간의 소망이다. <옥루몽>은 그런 소망을 주인공들에게 투사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기에 소성리 아니고는 소망을 한번 펼쳐보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불가능한 꿈을 성취하는 소설의 전개는 현실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 민중들에게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는 꿈은 아예 꾸어서도 안 되는 금지된 것이다. 더구나 여자는 말할 나위 없다. 그런 금지된 꿈을 천한 기생 출신의 세 여성이 하나하나 성취하면서 현실로 만들어간다. 기생들은 걸핏하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주가 진흙 속에 묻혀 있고 이름난 꽃이 측간 속으로 떨어져 있는 것은 옛사람들이 애석하여 탄식한 바입니다. 제가 일지련을 잠깐 보니 진주요, 이름난 꽃입니다.”(4권) 이렇게 신분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해 출세의 기회가 막힌 사람들에게 <옥루몽>은 그들의 꿈을 통쾌하게 꾸어준 소설로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진주가 진흙 속에 묻혀 있구나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조설근이 쓴 청대의 중국 소설 <홍루몽>(紅樓夢)이 떠오른다. 대학을 다니던 20대에 그 소설에 빠져서 네 시간만 자면서 나흘 낮밤을 읽은 일이 있다. 읽고 나서는 임대옥의 잔영이 눈앞에 어른거려 오랫동안 그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했었다. <옥루몽>을 읽고 난 지금에는 임대옥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강남홍의 잔영이 깊게 남는다. 둘 다 매혹적인 여성이다. 두 소설은 백여 년의 차이가 나는 한중의 소설이고, 내용도 상당히 다르지만 함께 읽어볼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겨레]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식민지성·종속성에 대한 반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좀체 진전이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보편성〉(한울아카데미 펴냄)은 더디더라도 중요한 진전을 계속 밀고 나가려는 분투의 산물이다. 상지대·성공회대·한신대가 공동으로 설립한 민주사회정책연구원과 진보학술운동을 대표해온 학술단체협의회가 함께 펴냈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12명의 공동 필자는 의미심장한 지평 하나를 잡았다. 민족경제론, 분단체제론 등 그동안 우리 학문의 주체성을 대표해온 담론들은 서구적 보편성을 한국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적용’한 결실이었다. 반면 〈우리 안의 보편성〉은 ‘보편성’의 잣대를 한국의 현실 안에서 찾자고 제안한다.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우리의 현실 속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온갖 비밀이 농축돼 있고, 보석으로 다듬어질 수 있는 광물이 널려 있다”며 “우리 사회의 특수성으로 간주되는 것 속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을 읽어내자”고 제안한다.

다만 이 작업은 ‘주워 담는’ 게 아니라 ‘캐내는’ 과정이다. 주체적 학문의 소재와 가능성이 우리 현실에 널려 있긴 한데, 서구적 학문이라는 지층 아래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이 작업을 “우리 속에 내재한 보편성을 ‘발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600여쪽의 이 책은 그 가능성을 실제로 모색했다. 우선 독일의 경제학자 리스트,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 중국의 철학자 왕후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언론인 막스 두 프레즈 등이 어떻게 ‘주체적 학문’의 지평을 닦았는지 검토했다. 주로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이 선진 서구 담론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우리에겐 ‘보편성’의 잣대로 다가오는 이들의 담론이 한때는 외세의 지배 담론을 비판하는 ‘특수성’에 주목한 결실이었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우리 안의 보편성〉은 또 내재적 발전론, 분단시대론, 민중담론 등 ‘주체적 학문’을 대표하는 담론 체계를 돌아본다. 신정완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 담론은 “학문의 종속성 탈피보다는 그 토대가 되는 정치경제적 종속성을 극복하는 사회변혁에 관심을 둔” 시대의 산물이다. 국가 또는 민족의 경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한계도 있다.

공동 저자들은 국민국가적 지평을 넘어 한국의 현실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을 읽어내려는 몇가지 이론적 시도를 소개한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의 ‘개발자본주의론’이 대표적인데, 동아시아 후발국가의 자본주의 발전 양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세계 자본주의 발전사의 주류 담론에 올려놓으려는 시도다. 조희연 교수가 한국의 운동정치를 분석하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한국 노동자 운동의 윤리적 동기를 개념화한 것도 좋은 사례다. “소재, 개념, 이론, 방법의 주체화”라는 학문적 주체성 회복의 방법론을 적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 진보개혁 세력의 위기는 학문의 식민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희연 교수는 “세계 12대 무역대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철저히 서구에 종속된 수입상에 머물고 있다”며 그 결과 “시민사회운동 진영 역시 의제와 지식 생산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수찬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앙일보 문경란] 한국여성근현대사 1~3 (정치사회사.문화사.인물사)

전경옥 외 지음,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각권 1만5000원

왜 여성사인가

거다 러너 지음, 강정하 옮김, 푸른역사, 1만8000원

역사면 역사지 굳이 여성사가 필요한가?

일반인은 물론 역사학자 또한 수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저자들은 기존의 역사(history)는 남성중심의 역사(his story)라고 잘라 말한다. 사실 기존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격동기 해방 이후를 보자. 광복과 전쟁 발발, 혁명과 군사정변, 그리고 경제개발 계획 등 굵직굵직한 역사무대에 등장하는 이들은 100% 남성이다.

여성은 그동안 무얼 하며 살았지? 한국 근.현대 100년간 여성의 삶을 다룬 첫 통사 '한국여성근현대사'시리즈는 이에 대한 답이다. 별도의 여성사(her story)가 왜 필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이 책은 광복을 위해, 또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위해 40세 미만의 미망인들은 1인당 2.07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그들은 무너진 가정의 가장으로서 떡장사.삯바느질.행상 등으로 식솔을 거느렸다. 이들 일부는 '주인없는 여자'로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농부의 딸은 도시로 상경해 '식모'로,'공순이'로 오빠와 남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시대는 도시 중산층 여성에게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주부상으로 권장했다. '한국여성근현대사'시리즈는 평범한 여성들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미시사의 접근법을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성잡지와 신문기사, 일상생활용품과 영화포스터, 대중가요와 사적인 사진 등을 사료로 끌어들였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접근 때문이다. 숙명여대 전경옥 교수 등 10여명 연구자들이 꼬박 3년을 매달렸던 이 시리즈는 1권 '개화기~1945년', 2권 '1945년~1980년', 3권 '1980년~현재'등 지난 100년을 3기로 나눴다.

또 각 권마다 정치사회.문화.인물사로 분류해 집필했다. 2004년부터 해마다 3권씩 출간해 최근 완간했다.

때맞춰 출간된 '왜 여성사인가'는 여성사라는 황무지를 개척한 미 여성사학자 거다 러너의 연구논문.연설 등을 모은 책이다. 저자는 역사 속에서 여성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이다. 책은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다. 하지만 작가이기도 한 저자의 글맛 덕분에 읽다 보면 '왜 여성사인가'를 쉽게 알게된다. 여성 퀘이커 교도의 비폭력 저항정신이 이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과 같은 반노예 운동에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연구 등은 여성사의 전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