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품절


번역, 그것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빛을 들이는 것이요,
껍질을 깨고 알맹이를 먹게 하는 일이요,
장막을 걷고 가장 성스런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요,
우물 뚜껑을 열고 물을 얻게 하는 일甄?
-1611년판 ≪제임스 왕 성경King James Bible≫,
'독자들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마틴 발저,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에서-.쪽

아득히 먼 옛날 인류는 같은 말을 쓰고 살았다. 그 세계는 하나의 언어만이 사용되는 의사소통의 낙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때의 꿈이었다. 낙원은 사라지고 저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면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벨 이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인류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언어의 장벽이 생겼고, 그것은 인류에게 형벌이 되고 말았다. 번역은 바로 그 근원적 조건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은 가능한 것인가? 번역에 대한 원론적 이야기가 나오면 부정적 견해가 더 자주 입에 오른다. 우리 귀에 익은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은, 번역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명제이다. 볼테르는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고 말한다. 해럴드 블룸 같은 이는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이쯤 되면 마치 '번역 불가능성untranslability'이 자명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번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번역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자국어로 쓰이지 않은 인류의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텍스트들은 사장되고 말 것이다.-.쪽

초기 불교에서 '니르바나'는 '무위'로 번역되었고, 무위는 이로써 중국인에게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격의적 번역 방식의 난점은 '니르바나'라는 개념이 '무위'에 의해 변질된다는 것이다. 즉 불교의 니르바나가 무위의 의미 속으로 들어와버리는 것이다. 니르바나와 무위가 개념상 동일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개념상 차이가 나타날 때 이러한 번역은 문제가 된다. 니르바나와 무위는 인간의 도덕적 시비선악을 떠나 고통이 없는, 모종의 수련을 거쳐 도달하는 경지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제거의 대상인 고통이 개인적 측면이 강한 데 비해, 후자는 사회적 측면이 강하다. 전자는 종교적 판단에 기초하지만 후자는 심미적 판단에 기초한다. 그리고 전자는 고苦를 대상으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욕欲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변질을 두려워하는 입장에서는 '니르바나'의 원의를 고집하게 되고, 그 결과 점차 '열반'이라는 음역을 쓰게 되었다. 불교 전래 초기에 '무위'가 쓰이다가 점차 '열반'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겪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니르바나'가 '열반'으로 쓰여도 의미가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불교가 중국인에게 친숙해졌다는 사실, 즉 중국인의 도구연관 세계 속에 이미 인도인의 도구연관성이 침투했음을 반증한다.-.쪽

김용옥은 이와 같은 개념상의 변용 과정을 '버터butter' 번역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버터라는 '외국어'를 우리말처럼 친숙하게 쓰고 있지만, 만일 19세기에 이 말을 우리말로 옮기려 했다면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다. '버터'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한다. 19세기 한국인은 '버터'라는 음식물을 전혀 경험한 적이 없다. '버터'라는 의미형상이 전혀 의미를 ??않는 '문자의 나열'에 그치고 마는 19세기 상황에서 우리는 버터라는 의미를 전달할 방도가 없다. 김용옥은 이런 경우 버터에 해당하는 의미연관 구조를 한국어에서 찾자면 '된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격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이란 '문자의 옮김'이 아니라 '의미의 옮김', '문화의 옮김'이다.-.쪽

영국에서 새로운 영어사전 편찬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던 19세기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은 전 세계에 유니언 잭을 휘날리며 정치ㆍ경제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영제국이 팽창하면서 영어도 전 지구에 확대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나 에스파냐, 이탈리아 등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해 문화면에서 열세였던 영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영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위대한 인물들과 위대한 성취, 그리고 원대한 비전이 넘쳐난 낙관적인 시기였다. 이 시대는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도 웅장한 프로젝트를 벌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쪽

첫째로 장차 새로운 사전을 만들 사람은 '선별된 어휘'가 아닌 '모든 어휘'를 수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에 '모든 어휘'가 수록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이라고나 할까.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지적이 나오게 된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1634년 리슐리에 추기경이 파리에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설립했다. 설립 목적은 표준이 될 만한 문학적 취향을 유지하고 문학 용어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회원 수는 40명으로 제한되었고 이들은 '불멸의 지성'으로 일컬어졌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출간한 ≪아카데미 사전≫에 수록된 어휘는 바로 이 40명의 회원에 의해 결정되었다(그들의 역할은 프랑스혁명 동안에만 중단되었을 뿐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트렌치 주교는, 어떤 어휘는 수록되고 어떤 어휘는 누락되어야 할지를 결정할 권리가 어느 '독재자'에게 또는 '40인'에게 독점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사전에는 표준어로 사용되는 모든 어휘가 기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영어사전은 프랑스식 사전 편찬 방침과는 차별화된 방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쪽

둘째로 그는 사전의 핵심은 한 어휘가 태어나 성장하고 사라지는 어휘의 일생을 보여주는 역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각 어휘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라지는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그 어휘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했다. 그 어휘가 언제 처음 '말'로 표현되었는지가 아니라 언제 처음 '글자'로 기록되었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휘가 처음 사용된 문장이 인용어구로 실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 어휘가 탄생한 후 어떻게 의미가 변천되었는지를 일일이 밝혀주어야 한다. 어휘란 마치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미묘한 뉘앙스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대중의 기분에 따라서 기존의 의미를 벗어던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같은 말이 여러 가지 뜻을 가지기도 하고, 그 뜻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예를 들자면, '어리다'는 말이 세종대왕 시대에는 '어리석다'는 뜻으로 쓰이다가 현대에는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로 변한 것과 같은 식이다. 이렇게 의미가 변할 때마다 변화된 의미로 쓰인 문장이 일일이 인용어구로 실려야 했다. 이른바 '역사적 원리에 입각한Based on Historical Principles' 사전 편찬 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트렌치가 요구한 것은 어휘 의미의 역사, 즉 각 어휘의 일생을 펼쳐 보이는 사전이었다. 그것은 영어로 된 '모든' 문헌들을 읽어야 함을 의미했다.-.쪽

이 어마어마한 계획은 어느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아니 사전 편집자 수십 명을 동원하더라도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영어로 쓰인 문학작품 전부를 검토하고, 런던과 뉴욕의 신문ㆍ잡지ㆍ학술지를 샅샅이 검토하는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작업을 하나로 엮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협력체제가 가동되어야 했다. 보수를 받지 않는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팀이 만들어져야 했다. 자원봉사자를 동원해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사전이 '민주적 생산물'이어야 한다는 트렌치의 소신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트렌치는 프랑스 사전 편찬자들과는 달리 사전이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 전통에 대한 긍지와 모국어인 영어에 대한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국 국민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등 대륙 국가들(특히 가톨릭 국가들)의 제도와 관습을 독재적인 것으로 치부해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쪽

영국민의 이러한 전통은 17세기 청교도 시인 존 밀턴(1608~1674)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혁명에 적극 가담한 혁명가이기도 했던 그는 영국 내의 모든 전제적인 관행들은 가톨릭교회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검열제는 가톨릭 종교재판의 연장선상에 놓인 가증스런 제도였다. 그러므로 밀턴은 ≪아레오파기티카≫에서 영국인의 모국어인 영어와 가톨릭교회의 공용어인 라틴어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늘 자유의 성취에 있어서 유명하고 으뜸이었던 사람들의 언어인 우리의 영어에서는, (로마 가톨릭 검열관들이 출판허가증에 사용한 라틴어 문장에서 볼 수 있는) 그처럼 독재적인 생각을 표현할 만한 비천한 단어를 쉽사리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자랑했다. 밀턴은 영어가 라틴어와 격이 다르다는 점을, 그리고 영국이 프랑스ㆍ이탈리아 같은 가톨릭 국가들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쪽

모국어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기쁨이다. 유려한 한글 문장을 좍좍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만한 정신적 쾌락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겨울에는 실로 모처럼 만에 모국어 독서의 즐거움을 흠뻑 누릴 수 있었다. 한동안 밀린 번역 작업 때문에 익숙지 않은 외국어에 코를 박고 작업하느라 자유분방한 모국어 독서를 즐기지 못했던 터라 그 기쁨은 더욱 컸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풍성하다고 했던가. 장정일의 말마따나 오랜만에 '폭풍처럼' 책을 읽은 셈이다. 남의 나라 글을 더듬더듬 읽는 어려움을 겪어본 자만이 모국어의 고마움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충분히 동감이 가는 대목이네요. 모국어로 책을 읽는다는 기쁨은 타지에서 살았을때 알게 되었습니다.-.쪽

대단치는 않지만,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지금까지 수십 년간 외국어로 독서를 해왔고, 몇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경험이 있어도 남의 나라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고 힘들다. 공자는 사람의 지적 능력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단계로,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지혜를 두고 생이지지生而知之라 했다. 반면에 배워서 아는 것을 학이지지學而知之라 했으며, 배워도 그냥 배워서는 잘 알 수가 없고, 고생고생해서 거듭 배워야 겨우 조금 알게 되는 것을 곤이지지困而知之라 했다. 곤이지지를 줄여서 '곤지困知'라고도 한다. 생각건대 나의 좌표는 아마도 '곤지'와 '학이지지' 사이 어드메일 것이다. 그래도 학창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늘그막에는 외국어 문장을 '우리글 읽듯' 줄줄 읽을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천명知天命을 넘기고도 그날이 오리라는 희망이 아득하기만 하니 실로 "소년이 늙기는 쉽고 배움을 이루기는 어렵다少年易老學難成"는 공자 말씀이 뼈에 사무친다. 그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내 경우에는 외국어로 나를 제대로 표현하는 게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의 20~30퍼센트밖에는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제대로 전달은커녕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다.

하지만 어디 무라카미 하루키뿐이겠는가. 서양학 연구자들 중 예컨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온 학자라 할지라도 영어로 쓰인 학술서를 우리말 버금갈 정도의 속도와 능률로 읽을 수 있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본다-.쪽

그냥 읽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더더욱 어렵다. 책을 한 권이라도 번역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외국어로 쓰인 책을 읽으며 대략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넘어가는 것과, 그것을 우리글로 정확하고 매끈하게 옮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외서를 읽다보면 제가 한국어로 정확히 옮겨 이해하는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의미만을 파악하면서 읽게 되거든요.-.쪽

번역을 하는 데는 어떤 능력이 가장 필요할까?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외국어에 대한 소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이다. 먼저 해당 외국어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소양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이중언어 사용자bilingual'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종 사전이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회화 능력이 필요하겠지만, 인문 학술서 번역의 경우는 거의 전적으로 '독해력'이 요구된다. 영어로 된 책이라고 해서 영어만 할 줄 알아서도 안 된다. 인문서는 영어로 쓰인 책이라도 라틴어ㆍ그리스어ㆍ프랑스어ㆍ독일어 등 수많은 외래어와 외국어가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채 섞여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므로 다양한 외국어에 대한 기본적 소양과 더불어 해당 외국어 사전을 골고루-좋은 것으로-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일단 번역 작업에 들어가면, 여러 종류의 영한사전(왜 여러 종류가 필요한지는 이미 '사전 이야기'에서 설명했다)과 그리스어ㆍ라틴어ㆍ프랑스어ㆍ독일어 사전 등이 서가에 비치되어 있어야 한다. 외국어 사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큼직한 우리말 사전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쪽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다. 예를 들어 전공이 서양사라 하더라도 서양사의 모든 분야를 다 번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문학자 김화영의 표현대로, '참다운 번역은 원작의 가치에 대한 이해에서 생겨난 존경과 감동'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못한 번역은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의미 없는 노동일뿐이다. 자신이 각별한 관심을 갖는 분야나 전공하는 분야의 텍스트를 선정해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다(물론 이런 경우라고 해서 번역에 따른 고통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쉬운 작품이라도 번역은 수고스러운 작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자신이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분야를 정해서, 그에 대한 전문지식을 쌓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연히 각종 참고 자료도 다량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주 관심사로 삼고 있는 분야에 국한하여 번역을 한다 하더라도 인접 학문에 대한 폭넓은 기본 소양과 자료를 갖춰야만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 모든 학문 분과들이 전문화, 세분화되었지만 그렇다고 전공과 전공 사이를 칼로 무 썰듯이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 내부만 들여다보더라도 문학ㆍ역사ㆍ철학 사이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련이 있으며, 또 그것들은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들과 영역이 서로 중첩되어 있다.-.쪽

번역하는 데 외국어 이해력과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했다. 이 두 가지는 물론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에서 이 두 가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역시 우리말, 즉 모국어 구사 능력이다. 알기 쉽게 수치로 표현하자면, 번역에 필요한 자질 중에 '외국어 실력'과 '전문지식'이 각각 30퍼센트의 비중을 점한다면, '우리말 구사 능력'은 40퍼센트 정도 차지한다고 본다. 번역가에 따라 각각의 수치가 20퍼센트나 50퍼센트 등으로 달라질 여지는 있겠지만, 우리말 표현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국내 최고 수준의 번역가로 꼽히는 이윤기ㆍ안정효ㆍ김석희 등이 번역가인 동시에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것은 번역에서 우리말 표현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다.

=>정말 번역하시는 분중에 일반 작가들도 많은것을 알수 있어요.-.쪽

유럽에는 지리적 특성상 이중언어 사용자가 흔한 편이다. 잘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야말로 완벽한 이중언어 사용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이중언어 사용자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모국어'는 하나뿐이다. 번역가 율리아 타르디 마르쿠스Julia Tardy-Marcus는 부모가 독일인이지만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1905년생인 그녀는 스위스에서 자랐기 때문에 두 나라 말-독일어와 프랑스어-을 함께 사용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모국어는 역시 독일어이다. 그녀는 1933년부터 60년이 넘도록(1995년 현재) 프랑스에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프랑스어에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해도, 그 반대의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미묘한 뉘앙스를 옮겨야 하는 문학작품의 경우는 어림도 없다고 한다. 모국어는 인간 영혼의 뿌리에 맞닿아 있는 것일까?-.쪽

스위스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독일어ㆍ프랑스어의 이중언어 사용자였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이중언어 사용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귀착되는 언어는 그중의 어느 한쪽 언어일 것이다. ……모국어는 역시 모국어이다. 생각하는 것, 쓰는 것, 읽는 것을 모국어로 배웠기 때문이다.

율리아 타르디 마르쿠스는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번역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은 해마다 노벨문학상 선정 시기가 되면 언론에서 논란이 되곤 하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는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유능한 외국인 번역자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는가에 달려 있다. 제아무리 외국어 구사 능력이 탁월하다 해도, 한국 사람이 영어ㆍ프랑스어ㆍ독일어 등으로 번역을 해서는 그 문학성을 외국인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쪽

나는 '옮긴이의 글'이 없는 번역서에 대해서는 더욱 큰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자신이 번역한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번역자로서 그 책이 우리 독자들에게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해제解題 성격을 곁들인 글-길건 짧건 간에-을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안 들 수 있단 말인가. 참다운 번역이란 원작의 가치에 대한 존경과 감동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번역자에게서 냉대를 받은 책이 일반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옮긴이의 글'을 원칙적으로 책의 맨 앞에 둔다. 많은 번역자들이 겸양의 뜻으로 '옮긴이의 글'을 '역자 후기' 형식으로 맨 뒤에 두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관행에 동의하지 않는다. '옮긴이의 글'은 그 책을 한국 독자에게 처음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한 번역자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을 표명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번역자의 손길을 거치지 않을 경우, 수많은 외국 서적들은 (극소수의 전문가들을 제외한) 일반 독서 대중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번역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직무에 종사하는 자로서 어찌 자긍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쪽

번역이든 저술이든 자신의 책을 정신적 분신으로 생각할 정도로 글쓰기 작업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실수를 지적받는다는 것은 당혹스럽고 쓰라린 일일 것이다. 대학원생들에게 번역 작업을 분담시켜놓고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주섬주섬 원고를 모아 출판사에 던져주는 파렴치한 지식 사기꾼들-안정효 식으로 말하자면 '매춘 교수'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고귀한 수치심'이다. 사기꾼에게 수치심을 기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쪽

오역을 지적당하는 '수치'를 당하고도 비판을 기꺼이 수용하여 좀 더 나은 번역으로 향상시키는 아름다운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가 쓰고 이윤기가 번역한 ≪장미의 이름≫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윤기는 1986년 이 책을 처음 번역ㆍ출간했다. 그 후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장미의 이름≫ 관련 서적을 구입, 약 5백 개에 이르는 각주도 달아 1992년에 개역판을 냈다. 이윤기는 '오금 저린'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잡초(오역) 없는 풀이 어디 있으랴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8년을 보냈다고 했다.
그는 2000년 3월 무려 60쪽에 달하는 원고를 받았다. 철학박사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고쳐 읽기>라는 제목이 달린 원고였다. 강유원은 대학에서 철학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미의 이름≫을 읽어주면서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가르쳤고, 이때 작성한 메모를 이윤기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 원고는 3백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 및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강유원의 지적은 정확하고도 친절했다. 이윤기는 자신이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움베르토 에코의 해박한 중세 철학 지식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쪽

이윤기는 2000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강유원의 지적을 검토하고, 3백 가지 지적 중 260군데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강유원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7월에 세 번째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다. 이윤기는 강유원에게 이렇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강 박사에게 한없이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또 오금 저리는 세월을 오래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강 박사같이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주고 있는 것은 우리 번역계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다시 한번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강유원 박사, 고맙습니다."

번역자가 겸허하게 오역을 사과하고 번역물의 질을 확 끌어올린 행복한 사례를 여기에서 본다. 이 정도면 '해피 엔딩'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모든 오역 비판이 이렇게 행복한 결말로 귀착되지는 않는 것 같다. -.쪽

번역에서는 원작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충실성'과 번역문의 '가독성'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앞서 언급된 강유원과 이재호의 이윤기 비판은 '심리적 해석' 여부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날조ㆍ탈락 등에 대한 지적이므로, 지금 논의되는 '충실성'ㆍ'가독성' 논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실제 번역에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다. 충실성을 희생하여 가독성을 높이느냐, 아니면 가독성을 희생하더라도 충실성을 기해야 하느냐의 기로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경우에는 이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그렇다면 어떤 번역이 좋은 번역인가. 번역에 대한 논의는 이 문제로 좁혀질 수밖에 없고, 또 이 문제는 번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사보리T. H. Savory는 번역에 관한 이율배반적인 명제들을 쌍으로 묶어 제시하고 있다.

1. 번역은 원문의 단어를 드러내야 한다.
2. 번역은 원문의 사상을 드러내야 한다.
3. 번역은 원작처럼 읽어야 한다.
4. 번역은 번역처럼 읽어야 한다.
5. 번역은 원작의 문체를 반영해야 한다.
6. 번역은 번역의 문체를 가져야 한다.
7. 번역은 원작과 동시대의 것으로 읽어야 한다.
8. 번역은 번역과 동시대의 것으로 읽어야 한다.
9. 번역은 원문에 덧붙이거나 생략해도 상관없다.
10. 번역은 원문에 덧붙이거나 생략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11. 운문의 번역은 산문이어야 한다.
12. 운문의 번역은 운문이어야 한다.

결국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우는" 딜레마에 귀착되고 만다. 번역자란 가급적 둘을 다 만족시켜야 하는 고난도의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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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에서 리네아의 이야기 1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지음, 레나 안데르손 그림, 김석희 옮김 / 미래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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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이 동화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어요.

어른이라고 어린이 동화책을 읽지 말라는 법 없잖아요? ^^

그러던차에 운이 좋게 외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번역본과 그대로여서 더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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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소녀 리네아는 그리 이쁜 소녀는 아니예요.
하지만 리네아는 꽃을 좋아하고 모네의 그림을 좋아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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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냥 상상만 했어요.
하지만 모네의 그림 속에 빠질수록 특히나 모네가 그린 일본식 다리를 보는 순간
리네아는 모네의 정원이 존재하는지 궁금했는데, 존재한다는 불룸할아버지의 말에
그곳에 가길 꿈을 꿉니다. 그리고 리네아와 불룸 할아버지는 모네의 정원에 방문하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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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도착한 리네아와 불룸 할아버지.
이 책의 재미는 스토리도 있지만 그림 곳곳을 꼼꼼히 살펴봐야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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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아는 모네의 박물관에서 모네의 가장 유명한 수련을 그린 그림을 봅니다.
멀리서 볼때는 너무 아름다운 수련이지만 가까이서 다가가면 수련은 없어지고 그곳엔 거칠은
물감의 패턴만 있을 뿐이랍니다. 모네는 그릴때 멀리서 바라보는것까지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린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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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박물관에서 그림을 살펴보던 리네아는 그림속 배를 모네의 정원에서 볼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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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에 가게 된 리네아.
리네아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정원이 기다리고 있어요.
일러스트 외에도 진짜 모네의 집을 구경할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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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표지를 장식한 디자인이지요. 리네아가 모네의 그림 일본식 다리에 직접 가게 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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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그린 일본식 다리예요. 그릴때마다 다른 풍경을 가진 그림들이 인상적이지요.
가장 붉은 그림은 그 당시 모네가 시력에 문제가 있었는데, 모네에게는 세상이 붉게만 보였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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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 사진이예요. 리네아가 본 그림 속 배도  그대로 있네요.
정말 이 책을 통해 모네의 정원을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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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앉았던 벤치에 불룸할아버지가 같은 포즈를 취하고 리네아와 함께 앉아 있네요.

모네의 그림을 알고 보면 좋지만, 모르고 본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동화책이랍니다.
리네아와 함께한 모네의 정원은 참 아름답고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게 만드네요.

이런 동화책 때문에 전 어린이 서적이 너무 좋아요^^
참고로 영어도 쉽게 되어 있어서 읽기 좋았고, 아무래도 일러스트로 인해 이해하는데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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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6-1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참 좋아해요..근데 아이들은 글짜가 넘 작다고 읽으려구 하지 않아서 제가끼구 그림을 보여줬던 기억이 나네요.저두 리네아처럼 앉아서 기나긴 수련그림을 감상한 기분이 들었어요.이책 판형을 다르게해서 다시 출판된다면 우리아이들도 재밌게 볼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보슬비 2006-06-1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이들 입장에서 글이 작은것이 좀 흠일수도 있겠네요. 보니깐 외서와 똑같이 출판했더라구요.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
 
모네의 정원에서 리네아의 이야기 1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지음, 레나 안데르손 그림, 김석희 옮김 / 미래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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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올린 서적은 외서랍니다.
하지만 일러스트는 똑같아요.
책 겉표지예요.

왼편의 모네의 정원에 있는 두 여성이 작가와 일러스트가예요.

책 첫장
주인공 소녀인 리네아와 정원사였던 불룸할아버지.
그리고 사진은 모네의 모습이랍니다.

모네와 그의 부인 알리스 그리고 8명의 아이들.
그리고 모네가 그린 일본식 다리

리네아와 볼룸할아버지는 모네의 정원에 가기 위해 파리에 가게 됩니다.

파리에서 묶데 된 숙소 안에서 바라본 바깥풍경이에요.
이 동화책은 이야기 외에도 책 속 곳곳에 숨어있는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답니다.

모네의 가장 유명한 수련이예요.

멀리서 바라본 그림은 아름다운 수련을 표현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그림은 물감만 덧칠해진 모습이죠.

인상파 화가로 불리었던 모네.
리네아는 내일이면 그림속의 배를 보러 갈거예요.

리네아와 불룸 할아버지는 모네의 정원에 가기 위해 여러가지 음식들을 준비합니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바게뜨도 빠질수 없지요.

모네의 정원에 도착한 리네아.
너무 아름다운 정원에 리네아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네요.

이 책의 재미는 그림과 사진이 함께 하는거죠.
모네의 정원에 있는 꽃들...

모네의 집이랍니다.
파란색톤으로 꾸며진 주방이예요.

책 겉표지가 되었던 그림이지요.
리네아는 자신의 꿈인 모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네가 그린 일본식 다리예요.
그릴때마다 다른 그림이 되지요.
우측 하단의 붉은 그림은 모네가 시력이 점차 잃어갈때 그려진 그림이랍니다.그 당시 모네가 볼때 모든것이 붉게만 보였나봅니다.

모네가 그린 수련.
리네아도 모네처럼 그림을 그려봅니다.

모네의 정원의 사진이예요.

모네가 앉았던 벤치에 불룸 할아버지도 같은 포즈로...

리네아와 볼룸할아버지가 준비한 피크닉

모네의 박물관에서 만난 모네의 걸작...

모네의 가족 사진

모네의 그림

모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가족들..

세느강의 전경입니다. 모네도 세느강의 전경을 그렸지요.

리네아가 여행에서 도착해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요.

책 뒷장에 그려진 모네의 수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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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왠지 제목 때문에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제목도 눈길을 끓었지만 단편형식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어 마음에 들었거든요.

제목이 되기도 한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의 주인공들은 초반부터 좀 쇼킹했습니다.

55킬로밖에 안되면서 탐식증에 걸린 마와 너무 지저분한 아내 돈경숙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데다가,
마의 전부인을 대하는 돈경숙의 태도는 너무 황당하더군요.

돈이 없으면 먹고 싶은것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마와 돈은 전부인에게 돈을 받아 먹고 싶었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스키야키를 먹으러 갑니다.

소양을 넣은 만두 에피소드에서 트럭에 치인 마가 소양만두를 게워내는 장면은
왠지 이토 준지의 만화가 생각나는 호러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전반적으로 마에게 풍기는 분위기는 딱 이토 준지의 만화 주인공 같았어요.
아니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그런것 같네요.

특별한 주인공도 없고, 그렇다고 큰 사건들도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얽혀있고, 스키야키 식당과도 어느정도 인연을 갖고 있을뿐이예요.

기대를 했던 탓인지... 아님 읽는동안 불편해서인지.. 약간 실망스러운 단편집이었어요.

솔직히 스키야키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지만, 먹어보고 싶지도 않게 한 책이었습니다.

음식이야기가 나오는 책 치곤, 음식이 먹고 싶지 않게 만드는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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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 3 -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사랑에 대한 다섯 가지 감각 레시피
음악도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외줄을 타는 남자의 모습은 무척 위태롭지만 매력적이게 보입니다.

그건 아마도 위태롭지만 매력적인 감정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아름다운 몸짓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에 관한 다섯가지 감각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주제로
감각적이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어요.

이야기 속 중간 중간 삽입된 일러스트는 사랑에 대한 감정을 잘 표현했으며,
그남자, 그녀자의 같은 시간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한편의 시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남자 그 여자 2보다 3편이 더 마음에 듭니다.

가볍게 읽을수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한번 빠져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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