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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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샤이닝'은 영화와 TV드라마로도 봤는데, 정작 책으로 읽은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언젠가 책으로 읽어야지 생각만 했는데,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읽으면서 왜 진작에 이 책을 지금에야 읽었는지 후회가 될 정도로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스포라이트를 받는 신인 작가이지만, 알콜중독으로 하락의 인생을 걷고 있는 잭 토런스는 오버룩 호텔에서의 생활로 재기를 꿈꿉니다.

만약 우리부부에게도 고립된 호텔에서 겨울을 보낼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할까? 이야기 해봤는데, 신랑은 연봉의 10배를 준다고 해도 안간다고 하네요. 물론 오버룩 같이 무언가 이상한 장소 자체가 주는 섬?함도 두렵지만 실제 두려운것은 유령이 아닌, 인간이 아닌가 싶어요.

고립된 장소에서 낯선이를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장소가 없는것 같습니다.

스티븐 킹의 책을 읽으면 무조건 엽기적인 공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건디는 말초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샤이닝'에서는 폐쇄공포와 고립에서 오는 정신적 두려움을 엿볼수가 있었어요. 물론 오버룩 호텔 자체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장소이지만, 실제 두려움은 인간의 내면에서 오는것 같습니다.

모두가 떠나고 잭의 가족만 남은 오버룩 호텔에서 알콜중독자였던 잭과 어린시절 엄마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있는 웬디... 그리고 보통 또래와 달리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그들의 아들 대니에게서 하나 같이 불안한 전조가 느껴집니다. 특히나 무언가 무서운 미래를 느끼고 있는 대니의 감정을 읽다보면 대니의 지나친 걱정이 아닌 실제로 닥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다 죽은줄만 알았던 말벌의 공격, 술을 마시지 않지만 술을 마신것 처럼 행동하는 잭, 동물모양의 정원수들이 움직임들 심상치 않네요. 특히나 영화에서 없었던 동물모양의 정전 나무와 보일러실은 제 내면의 공포를 더 끌어올리는것 같아요. 그점이 이 책을 영화보다 더 좋아하게 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217호의 유령. 217호에 대한 대니의 호기심은 동화 '파란수염'의 아내와 비슷한것 같아요. 저도 옛날에 읽었던 '파란수염'을 읽었는데 참 어린이 동화치고는 잔인하다고 생각한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오버룩 호텔의 비밀과 동화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니의 지적 호기심 외에도 어쩜 오버룩 호텔의 무언가가 대니의 호기심을 부추기는건 아닌지...

점점 미쳐가는 잭과 불안감을 느끼는 웬디와 대니를 보면서 책은 어떻게 결말을 낼런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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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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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책의 제목만으로 소설보다는 정말 백수인 사람이 글을 적은 자서전, 에세이류의 책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목차만 보고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책이었답니다. 그러던차에 책에 파묻힌 주인공을 다룬 소설이있다기에 찾아보니 이 책이더군요.

매일 아침 어디론가 출근하는 고정적인 삶이 싫어 백수생활을 하고 있다는 주인공이지만 실제로는 책 읽은 시간이 아까워 일하기도 싫어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것이랍니다.

저랑 나이도 같아서인지 더(비록 만 나이로 옹졸하게 맞췄지만..^^)  시간만 나면 책을 읽고 있는 독서광 서연의 모습에서 최근 저의 모습을 발견하는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책속에 아직도 읽지 않은 책들이 많은것을 보고 기죽기도 했습니다.

일생에 책 한권만 읽는것과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것 그리고 한곳의 직장에 다니는것 중 어느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까요? 이 한문장으로 책속의 인물의 특징을 표현할수 있는것 같아요. 서연에는 일생에 책 한권만 읽는것이, 서연의 친구 채린에게는 한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유희는 한곳의 직장을 다니는것이 가장 어려운것 같습니다.

연애를 꼭 사람하고 하라는 법이 없다며 책과 사랑에 빠진 서연은 우연히 중고 서적을 구하다 만나게 된 남자와 점점 얽히게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원하는 책을 받으려고, 그러다가 그가 읽는 책이 탐나서 그후에는 그의 복수심의 조건으로 책을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점점 그에 대한 호기심이 발전됩니다.

왠지 서연과 그 남자의 미래에 대한 암시만 주어지는것이 더 맘에 들었어요. 그리고 책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던 유희는 소설가가 되고, 채린은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나지만 결과적으로 진짜 사랑으로 찾아가는것 갑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셈이네요.

책 속에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 같은 책을 읽고도 서로 다른 구절을 기억하고 있는 채린과 서연이었어요. 정작 전 그 책을 읽었지만 아무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모든 예술이 다 주관적인 감정으로 자신의 입장에 비교해 읽고 보고 듣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이 책 제목이 '백수생활백서'이긴 하지만 솔직히 '활자중독증생활백서'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백수생활을 꿈꾸는... 아니면 탈출하고 싶어하는 분이 읽었다면 실망스럽겠지만, 저처럼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거란 생각이 들어요. 스토리 흐름에 따라 적절히 나오는 책들과 책속의 인용구절... 책속에 등장하는 책들을 보면서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자신이 읽은 책과 책속에 등장하는 책들과 비교해서 읽어보는것도 이 책의 재미인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읽으면서 신랑에게 더 많이 감사하게 되네요. 제 생활이 서연과 비슷하지만 다른것은 결혼하고도 집안일에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을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신랑이 있다는거죠. 주부라는 공식적인 직업이 있긴하지만 직무유기하고 있는 저를 이해해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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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열린 땅 티베트.타클라마칸 기행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 1
서화동 글.사진 / 은행나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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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달라이 라마'의 책을 읽어서 티베트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중국과 티베트의 미묘한 정치적 상황 때문인지 우리나라에는 티베트에 대해서 많이 소개 되지 못한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이 책을 만났을때 무척 반가웠습니다.

해맑게 웃는 어린이의 모습... 물론 세계의 어린이들이 해맑지만 불교를 종교로 둔 티베트 사람들의 평화적인 성격을 안다면 책 표지의 사진이 얼마나 티베트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미지인지 공감하실거예요.

이 책은 자동차로 50일간 티베트를 여행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자연을 담은 여행 기행문이랍니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티베트에서 고산증세로 힘들지만, 힘든만큼 보람도 많은 여행 같습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불리우는 티베트 고원가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는 여정을 보면서 아무리 50일간의 일정이라고 티베트를 다 알기에는 짧아 무척 아쉬움이 남네요.

이 책이 좋은점중에 하나가 바로 사진인데, 사진이 많아서 좋아요. 눈이 시리도록 푸른하늘과 하늘보다 더 푸른 호수 들을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사진이 아닌 직접 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티베트인하면 불교를 빼놓을수 없는것 같습니다. 그들의 불교는 우리의 불교와 사뭇 다른데요. 예전에 드라마 '신돈'에서 살짝 보였던 그들의 종교와 풍습이 아직까지도 내려온다는것이 놀아웠습니다.

특히나 천장 또는 조장이라는 불리는 그들의 장례 문화는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사진까지 있어서 약간의 혐오감이 느껴졌지만 그드르이 문화와 생활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수용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자신의 육체의 무게마져도 버거워 모든것을 버리고 떠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티베트인들은 유목으로 생활을 의존합니다. 그런 티베트도 중국으로 인해 생활이 점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왠지 티베트의 문화를 잃어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정작 나 자신은 문명의 편함에 익숙했으면서도 그들의 빈곤과 불편함의 잃어버림을 안타까워함은 어쩜 저의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책을 읽는동안 티베트를 이해하고 배우는데 도움이 된 책이었어요. 기회가 되면 티베트의 문화를 체험하고 싶네요.

*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주문은 왠지 사파의 주문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티베트를 이해하고 나서는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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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Kafka Franz
박홍규 지음 / 미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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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법이다. 카프카에게는 법에 이르는 법정이란 무고한 사람들을 구속하고, 사람들을 억울하게 소송에 빠져들게 하는 혐오스럽고 부패한 강력한 조직일 뿐이다. 법정은 처형이며 즉결재판이다. 피고는 『소송』에서와 같이 개처럼 죽을 뿐이다. 카프카는 법정을 비판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으나, 이는 작가의 몫이 아니다.
카프카 작품에는 법이 자주 등장한다. 해석자들은 카프카 작품에 나오는 법을 신의 명령, 신적 세계질서, 인간본성, 인간내부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것, 발전된 윤리체계, 정신세계의 빛, 자연법, 처벌하고 감시하는 명령체계, 계급 이데올로기 등으로 설명한다. 또한 노장사상의 도와 일치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카프카의 법은 법에 불과하다. 이러한 법을 카프카는 찬양하지 않는다. 해석자들은 카프카가 마치 법을 대단하게 보는 것으로 착각한다.
카프카가 생전에 출판하지 않아 사후에 유고집에 수록된 단편인 「법에 대한 의문」은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논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은 당시에 풍미한 역사 법학파나 실정법학파에 대한 비판이자, 이러한 학설들을 넘어 법과 법률가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즉 법이, 권력이 그런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음을 비판한다.-.쪽

「법 앞에서」처럼 우리는 그것에 가까이 갈 수 없다 (『변신』, 554쪽). 그러나 사람들은 소수를 인정한다. 따라서 이 글은 국가권력에 대한 신봉과 정치적 미숙에 대한 풍자이자, 자신들의 지배를 합법화시킬 수 없는 권력을 공격하는 글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소설 『소송』을 문자 그대로 소송이 상징하는 권력에 대한 소설로 본다.
물론 법이란 카프카에게 권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법은 사회, 체제, 질서 자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카프카는 권력에 절망하고 그것을 투명하게 묘사하여 전복을 꿈꾸었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법정이 자주 등장한다.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부자관계를 소송에 비유한다. 여러 단편이나 편지에서도 그런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흔히 카프카의 장편소설 『소송』, 『실종자Der Verschollene』, 『성』을 카프카의 '고독의 3부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법의 3부작', '권력의 3부작' 또는 '저항의 3부작', 아니 '권력에 대한 투쟁의 3부작'이라고 부른다. 카프카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카프카의 삶을 그렇게 부른다.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라고.-.쪽

소수적인 문학
'소수적인 문학'이란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 문학에 붙인 것이나 더 광범하게는 프라하에서의 유태인 문학을 말한다(들뢰즈,『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43쪽). 그 특징은 첫째, '높은 탈영토화에 의한 언어의 변용'이라고 한다. 탈영토화란 기왕의 어떤 영토를 떠나는 것으로서 프라하의 유태인들은 프라하의 다수 사회에서 떠난 상태로 역시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뜻한다(같은 책, 44쪽).
둘째 특징은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즉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나는 가족 삼각형(부-모-자)이 그 의미를 규정하는 상업적, 경제적, 관료적, 법적, 민족적(독일인-체코인-유태인) 등의 다른 삼각형과 결부되어 정치성을 갖는다는 것이다(같은 책, 45쪽).
마지막 세 번째 특징은 모든 것이 집합적 또는 혁명적인 가치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카프카는 "문학이란 문학사의 문제라기 보다도 민중의 문제이다"라고 말했다(1911년 12월 25일 일기, 같은 책, 46쪽 재인용). 그래서 카프카 작품에는 언제나 개별 주체가 아닌 집단이 등장한다고 본다(같은 책, 47쪽).
이런 상황에서 쓰여지는 '소수적 문학'은 마이링크나 브로트처럼 독일어를 인위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방법인 상징주의, 몽환주의, 신비주의 등을 택하기도 하나 이는 "민중과의 절연을 더욱 강화했고, 오직 '시온의 꿈'으로서 시오니즘 안에서만 정치적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고 들뢰즈는 설명한다.-.쪽

반면 카프카는 "독일어를 있는 그대로, 심지어 그 빈곤한 그대로 선택한다"고 한다. "간결함을 통해서 탈영토화를 향해 언제나 더욱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같은 책, 49쪽)"라는 점에서 들뢰즈는 앞의 바겐바하와 달리 카프카의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탈영토화가 카프카의 동시대인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우주에 대한 표상의 탈영토화, 쉔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 빈 악파의 12음주의, 표현주의 영화, 정신분석학, 프라하 언어학 등에도 나타난다고 지적한다(같은 책, 63쪽).
이어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적이지 않은 위대한 문학이나 혁명적 문학은 없다"고 하며(같은 책, 67쪽), 민중문학,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모범으로 카프카를 제시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최근 모레티는 카프카가 표준 독일어를 사용했다는 이유 등으로 카프카가 결코 '소수적이지'않았다고 말하나, 이는 카프카를 전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리라.-.쪽

카프카의 독서 편력
여하튼 우리는 카프카에게 미쳤던 중요한 영향으로 독서를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바겐바하 같은 이들이 전혀 주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홀로 문학을 한 카프카에게는 독서 이상의 스승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점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고 본다.
카프카는 책을 사랑했다. 손으로 책을 만지는 것은 물론, 책방에서 책 구경을 하는 것도 즐겼다(『사랑의 형이상학』, 79쪽(1910년 9월 3일자 일기)). 카프카는 독서 클럽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적은 없으나 골목의 구석진 서점 찾기를 가장 좋아했고 언제나 도서 목록을 뒤져 사치스러울 정도로 많은 책을 사서 읽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책 선물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수집가로서 진귀한 책을 찾는 취미는 질색이었다. 독서에 대한 카프카의 철학을 알기 위해 앞에서도 인용한 카프카의 편지글을 다시 읽어보자.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각성시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겠는가? 자네 말대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도록? 맙소사. 책을 읽어 행복할 수 있다면 책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책이라면 아쉬운 대로 우리 자신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해주는 불행처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이어야만 한다(바겐바하,『카프카』, 51-52쪽 재인용).
-.쪽

앞에서도 말했듯이 카프카의 독서 편력은 유년시대의 동화로 시작되어 곧 이어 아동문학의 고전, 즉 파란만장한 모험소설과 탐정소설 및 탐험기로 코난 도일의 홈즈, 제임스 쿠버, 줄 베르느 그리고 농민소설 함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끝없이 넓어졌다.
그러나 카프카의 독서는 흔히 나이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카프카는 열 일곱 살에 니체를 읽고 마흔 살이 되어서도 동화나 소년 잡지를 읽었다. 카프카에게 독서는 마약이었다. 평생에 걸쳐 고뇌의 해독제로 복용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아편과도 같은 독서에 열중은 카프카만의 일이 아니라, 당대 유태인 청소년이나 지식인의 일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결국 그런 지적 분위기에서 카프카 문학은 탄생한 것이었다. 그런 지적 분위기가 없는 사회에서는 어떤 문학도, 예술도, 학문도 있을 수 없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젊은 시절 좋아한 작가들을 열거한 바 있다. 즉 괴테, 토마스 만, 헤세, 플로베르, 그리고 19세기 독일의 헵벨, 폰타네, 슈딥터였다. 물론 이는 브로트가 나이가 들어 기억한 것이니 부정확할 수 있다. 대체로 카프카는 초기에 플로베르, 호프만슈탈,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이어 후기에 괴테, 클라이스트,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했다.-.쪽

1924년 6월 3일, 카프카는 죽었다. 카프카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를 죽여다오, 아니면 너는 살인자다."-.쪽

. 나는 카프카를 아나키스트 작가라고 규정한다. 카프카는 예술의 사회적 의의와 국가의 포위를 명백하게 인식했다. 야누흐에게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간에게 다른 눈을 주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란 본래 국가의 위험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들은 변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그의 모든 충복들은 그대로의 지속만을 원하고 있지요(『카프카와의 대화』, 183쪽).-.쪽

. 나는 카프카를 아나키스트 작가라고 규정한다. 카프카는 예술의 사회적 의의와 국가의 포위를 명백하게 인식했다. 야누흐에게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간에게 다른 눈을 주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란 본래 국가의 위험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들은 변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그의 모든 충복들은 그대로의 지속만을 원하고 있지요(『카프카와의 대화』, 183쪽).

카프카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으면서도 사회주의자들을 믿지는 않았다. 혁명이 일어나도 결국은 국가에 관료제에 지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카프카의 모든 작품은 거대한 국가에 짓눌린 인간의 고뇌를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카프카는 인간이란 병들고 힘없는 존재로 그런 인간을 둘러싼 세계는 두렵고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허무주의를 견지했다. 카프카는 인간성의 타락, 이성의 말살, 보편적 진보에 대한 부정을 공감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변신』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아메리카』와 같은 작품에서 권력자와 권력자에 복종하는 하층민을 대비하고, 하층민에게 지지를 보였다. 『아메리카』를 쓸 무렵 카프카는 자신이 고용된 보험회사에 임금을 인상해 달라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노사분쟁은 그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사회현상이기도 했다.-.쪽

카프카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소외를 가장 절실하게 그려낸 작가로 이해하는 데에는 누구나 찬성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법을 비롯한 모든 외계와 단절되고 얼굴 없는 관료적 메커니즘의 지배를 받는다. 카프카는 야누흐에게 산업의 능률주의와 분업제는 노예화 이상의 문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폭력적인 불법을 행하게 되면 결국에는 악에 의한 노예화밖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모든 창조물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범해서는 안 되는 부분인 시간이 불순한 기업적 이해의 그물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창조물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창조물의 구성요소가 되는 인간이 멸시와 욕을 보게 됩니다. 이런 능률화된 생활이란 소름이 끼치는 저주로서 여기서는 갈망했던 부와 이득 대신에 기아와 비참만이 생겨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멸망으로의 진전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적어도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확신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저 소리나 지르고, 더듬거리고, 헐떡거릴 수 있을 뿐입니다. 생활의 무한궤도가 인간을 어딘가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은 생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물이고 물건인 것입니다 (『카프카와의 대화』 , 150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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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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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민족이란 코드로 읽고 그에 맞추어 얼개를 짠다면, 민족이란 코드에 걸려들지 않는 무한한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장구한 시간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추상화시켜버린다면, 양반/남성의 목소리에 가려 있던 상놈과 노비와 여성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줄 것이며, 서북 사람의 억울한 사연은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 실제 우리 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들은 과연 나날을 살면서 한국 민족임을 의식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상놈으로 종놈으로 여성으로 살았을 뿐이다. 이렇듯 민족이란 이름으로 모두를 뭉뚱그리는 순간 개똥이, 말똥이, 소똥이는 사라진다. 존재했던 모든 것들의 구체성과 다양성이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족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던, 혹은 '민족'과 공존했던 '근대'와 '민중'이라는 코드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와 민중 역시 민족과 동일한 왜곡과 배제의 폭력을 휘둘렀음은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존재했던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대상을 왜곡시킴으로써 애써 중심을 닮게 하는 권력이야말로 중심적 담론의 독재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정치독재보다 더 근원적인, 정치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독재의 기원이 아닐까? 민족이나 근대, 민중 등 거대하고 중심적인 코드를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쪽

역사를 정의한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지만, 나의 아마추어적 견해로는 인간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들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유전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존재다. 다만 그 변화가 매우 더디거나 혹은 돌연적일 뿐이다. 한편 인간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는 존재다. 현재의 인간은 시간적 변화의 산물이며, 역사학은 바로 변화하는 인간을 해명하는 학문이다. 나는 어떤 교훈적, 목적의식적, 기념비적 역사관도 믿지 않는다.
시간 속의 인간을 읽는 코드는 무수한 복수다. 예컨대 한국의 역사학은 성(性)에 관한 담론을 배제하지만, 나는 성이야말로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코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녀'를 예로 들어보자. 열녀 담론은 도덕적 담론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남성이 여성의 성을 독점하기 위해 제출한 책략이다. 열녀의 문제는 곧 섹스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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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영웅되는 사회 양산박(梁山泊)의 군도를 그린 <수호전(水滸傳)>은 지금도 읽히며 영화나 비디오로도 가공된다. <홍길동>은 조선시대에 이미 소설화되었고, '임꺽정'은 일제시대에, '장길산'은 해방 이후에 모두 소설화되었다. 소설이 아닌 실제의 홍길동과 임꺽정, 장길산은 과연 의적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탐관오리만을 응징하는 그런 도둑이었을까? 사료를 보건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아름답게 남는다. 부정직한 체제와 지배자에 대한 저항만으로도 그들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도둑을 영웅시하는 사회는 어딘가 곪아 있는 병든 사회다. 병든 체제에 대한 저항이 군도가 형성한 이미지인 것이다. 임꺽정 부대가 활동할 당시 사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 도적이 생긴 것은, 도적질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부득이 도적이 되어 하루라도 연명하려고 하는 자가 많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백성을 도적으로 만든 자가 과연 누구인가. 권세가의 문전이 시장을 이루어 공공연히 벼슬을 팔아, 무뢰한 자제들을 주군(州郡)에 나열하여 백성들을 약탈하게 하니 백성이 어디로 간들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 《명조실록》 16년 10월 17일

그리고 구체적으로 윤원형(尹元衡)과 심통원(沈通源)을 두고 "물욕을 한없이 부려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데도 못하는 짓이 없는" 대도(大盜)라 하였다(《명종실록》 16년 1월 3일). 조정에 있는 권세가가 대도란다. 신문이며 방송에 나날이 나는 소식을 보니, 과거 군도가 설치던 시대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땡추와 김 진사가 사뭇 그립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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