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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언뜻 이 책의 제목만 읽고 시베리아의 한 장소의 이름인줄 알았어요. 추위를 싫어하는 저이지만 겨울을 좋아하기도 해서인지 왠지 시베리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이 책을 의심없이 선택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왠지 100년전의 시베리아의 모습에서 태고적의 원시적인 모습을 엿볼수 있을것 같은 기대감도 이 책을 선택하는데 한몫을 한것 같습니다. 원시적이다는 느낌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것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싶어요.
하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데르수 우잘라'는 지명이 아닌 러시아의 원주민인 고리고족의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의 삶과 함께 아르세니에프의 러시아 일대를 탐사하는 여정을 다룬 논픽션 책이더군요. 그렇다고 이 책이 절대 실망스럽지 않아요. 오히려 더 마음에 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로도 많들었다니 그동안 왜 이 책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꼭 한번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년전의 탐사 이야기에 함께 동행하는 기분은 참 묘했습니다. 안개속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책 표지 디자인은 그런 기분을 한층 더 고조 시키네요.
데르수 우잘라는 50대의 고리고족의 사냥꾼입니다. 아르세니에프를 도와 탐사의 길라잡이가 되지요. 타고난 사냥꾼 기질로 발자국만 읽고 사람이나 동물들의 동태를 정확히 살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원주민 답게 자연에 대한 미신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많은것들을 본받게 했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 사냥하고, 사냥물에 대해서는 욕심내지 않고 함께 나누려는 태도. 그것이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동식물에 대해서도 말이지요.즐기기 위해서 필요도 없는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지탄을 받아야겠지만, 생계를 위해서 지혜롭게 사냥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것들을 배워야할 것 같아요.
사냥뿐만 아니라 기상학을 공부한 대장보다 하늘을 읽고 기상의 변화를 더 정확히 예측해내는데 데르수 뿐만 아니라 장바오와 원주민들도 그런면을 엿볼수 있었는데, 자연과 함께 하면서 얻게 된 생활의 지혜겠지요.
종종 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르수의 모습에서 예전에 읽었던, 멕시코의 원주민의 대변인이기도 했더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자연을 자신에게 맞추기 보다는 자신이 자연에 맞추어 생활하는 데르수와 원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지리적, 생태학적 탐사다보니 세세한 설명을 통해 저 역시 함께 탐사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운것은 그런 모습을 담은 사진이 없다는것과 여러 동식물에 대한 주석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탐사중에 만나는것이 비단 자연뿐만 아닙니다. 탐사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하나의 탐사 과정이지요.
하지만 시베리아를 탐사하면서 시베리아에서 살고 있는 토착민들의 생활고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밀려오는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잃고, 아니 생활터전만 잃으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노예가 되어 가족과 헤어지고, 반항하면 죽임마져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떠올랐어요. 어딜가나 문명이라는 이름아래 학살되고, 짓밟히는 원주민과 자연이 있게 되는것 같습니다. 조선인이 나왔을때는 그래도 우리의 조상이 나와 반가웠지만 농경문화에 익숙한 우리 조상의 풍습은 농터를 얻기 위해 숲에 불을 지르는 모습에서 사냥을 상대로 생활하는 토착민들에게 위험한 존재인것 같아 미안하더군요.
그렇지만 나쁜사람들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탐사원들을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래도 세상이 그리 비관적이지 않은것 같습니다. 여러 인물들 중에 저는 고향을 등지고 떠났던 라춘빈이라는 중국 노인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어쩔수 없이 고향을 버리고 타지에서 고독하게 생활했지만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고향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애잔함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전부터 데르수와 알고 지내던 구신도의 할아버지가 데르수를 가르켜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는 표현에 아르세니에프는 화를 내지만 정작 글을 읽다보면 그 역시 데르수를 표현할때 종종 야만인이라고 부르는것을 보면서 모순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번역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줄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왠지 자신이 인간들이 '문명'이라는 불리는 그 속에 있다는 이유로 지성인이 되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 칭하는것 같아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세니에프는 데르수를 대할때 되도록 그를 이해하고 함께 하려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는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그들의 탐사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광할한 자연입니다.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자칫 물살에 떠내려갈 뻔하기도 하고 갑자기 몰려드는 안개로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떨어지는 기온과 맹수들의 출연은 대원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데르수의 올바른 판단으로 위기사항을 잘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눈이 나빠져 더 이상 혼자서 사냥을 할수 없는 데르수를 아르세니에프는 자신의 생활속으로 함께 살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데르수는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며 문명인으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야만인이 되고자 떠납니다. 그에게 자유를 잃은 생활보다는 목숨을 걸고 자유를 선택하는것이 진정한 사냥꾼의 모습이었던거지요.
아르세니에프의 불안대로 데르수는 몇푼의 돈과 총 때문에 러시아인들에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마지막 진정한 사냥꾼을 잃는것 같아 마음이 아프더군요. 만약 데르수가 사냥을 하다가 맹수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면 덜 슬펐을것입니다.
책을 덮은 후 한동안 애잔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수 없었습니다. 원시적인 낭만만 ?아 이곳에 오게 된 저로써는 누군가에게는 시베리아의 광활한 자연은 삶의 투쟁지였습니다. 데르수는 저에게 문명의 이기로 편리해진 점도 많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들도 많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