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꼬맹이를 컴퓨터 앞에 앉히고
고3까지 하루 24시간 ‘과잉조직’의 삶으로 내몰고
아이들에게도 ‘속도의 포로’이길 강요하고
반교육을 교육, 정신적 위축을 성장이라고 부르니…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불균등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의 하나가 성장속도다. 인간은 느리게 자라는 동물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걷기까지 적어도 1년, 똥오줌을 가리는 데는 2년이 걸리고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가릴 줄 알기까지는 4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 세 살배기들에게 “네가 알아서 먹어”라고 음식 선택을 맡기면 녀석들은 달싹한 아이스크림만 먹다가 두 달 만에 죽든가 병원으로 실려 가야 한다. 게다가, ‘철들기’에 이르면 일은 더 난감하다. 인간 동물이 좀 철이 들어 ‘사람’ 소리를 듣자면 얼마나 많은 철이 흘러야 할까? 밥 딜란의 노래 “바람 속에 불려온다네”에 나오는 표현을 빌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들이/ 비로소 그를 인간이라 불러줄까” “얼마나 많이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그가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을까”다.

신이 인간을 왜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지는 하늘로 그를 방문해서 한 차례 되게 따져볼 문제다. 무엇보다도 시간 낭비와 경제적 비효율이 심각하다. 걷는 데 왜 1년씩 걸려야 하며 엎어지지 않고 뛰는 데 왜 7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가. 말을 배우고 가갸거겨 익히고 구구단 외고 책 읽는 데 왜 10년씩 걸리고 대학이란 델 들어가기까지 왜 18년이 걸려야 하는가. 모두 멋도 모르고 자라긴 했지만 돌이켜보건대 분통 터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듯싶다. 그 시간에 일하고 돈 벌었다면 우리 모두 지금쯤 부자가 되었을 게 아닌가. 신이 좀 더 효율적으로 인간을 설계했더라면 우리 어릴 적 동무 곰배는 뛰다가 자빠져 팔 부러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우리 동네 말숙이는 압력밥솥 같은 학교에 가기 싫어 자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 키우고 학교 보내느라 부모들이 허리 휘게 벌어야 하는 돈은 또 얼마인가. 그럴 돈으로 아파트 사고 땅 산다면 세상에 가난뱅이가 어디 있겠는가.

두뇌 연구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생후 1년 동안 아기의 뇌가 도달하는 성숙도는 40%에 불과하다. 그 뇌가 95%의 성숙 수준에 이르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인간은 머리통 큰 동물로 태어나지만 그 머리통이 다 영글자면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 침팬지의 경우는 생후 1년 안에 뇌의 70%가 성숙하고 2년 안에 성장이 완성된다. 침팬지 머리통이 2년이면 끝내는 일을 인간의 뇌는 10년 넘게 하고 있어야 한다. 이건 무슨 얘기냐면, 아이들이 열 살이 되어야 뇌의 인지적 능력이 95% 선에 이르고 나머지 5%는 열 살 이후에 발달한다는 소리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면, 여덟 살 혹은 10살까지는 소위 ‘지능지수’(IQ)라는 것이 결정되지 않고 말랑한 상태로 남아 환경의 영향에 민감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생후 10년은 인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다. 개체의 능력발달을 자극하고 돕기 위한 사회적 개입을 ‘교육’이랄 때, 그 교육이 최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생후 10년이다.

교육과 소득수준의 관계,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 등을 열심히 연구해온 시카고대학 경제학자 제임스 헤크먼은 인간 성장에 아주 중요한 시기를 ‘15세까지’로 잡는다.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을 배제했을 때, 한 인간의 지적 정서적 능력이 거의 결정되는 나이가 15세 선이라는 것이다. 그의 연구가 강조하는 것은 ‘교육의 효과’ 부분이다. 15세 이후에는 교육 등의 외적 개입이 개체의 기본적 능력 형성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고 그는 말한다. 15세 이후의 교육은 한 인간의 기술적 능력 계발은 돕지만 그의 근본적인 능력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헤크먼은 2000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그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15세까지의 연령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가 ‘8세까지’라는 주장이다. 생물학적 요인 아닌 외적 요인이 아이들의 지능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 8세까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취학 이전’의 시기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취학 이전이라면 공교육이 시작되기 전의 다섯 살, 여섯 살까지의 시기다.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가? 헤크먼의 권고는 뜻밖에도 “책 읽어주고 이야기 들려주라”는 것이다. 이 시기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즐겁고 자유로운 부모-자녀 사이의 소통활동이 필요하다?그는 주장한다. 작가, 시인, 인문학자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소리, 그러나 경영과 시장과 기술 제일주의의 시대에 사람들이 좀체 귀담아 듣고자 하지 않는 소리를 경제학자 헤크먼이 하고 있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탁월한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조생 밀감이 아니다. 신의 설계이건 자연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느림, 자유, 여유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은 동일한 속도를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시각능력이 채 안정되지도 않은 세 살짜리 꼬맹이들을 컴퓨터 앞에 앉혀 하루라도 빨리 ‘아이티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다. 초등 1년생에서 고3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하루 24시간 꽉 짜여진 ‘과잉조직’의 삶 속으로 내몰린다. 그들은 숨통이 막혀 있다. 무지하고 철딱서니 없는 어른들은 이런 양육법이 아이들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보는 일이 없다. 그들은 가장 반교육적인 것을 교육이라 부르고 정신의 기형적 위축을 성장이라 부른다.


얼마나 많이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인간은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을까? 하늘에서 하늘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의 하나다. 그러나 그 능력을 발휘하자면 성장기의 정신의 확장이 필요하다. 딜란의 노래는 계속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내야/ 그는 남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죽음들이 있어야 할까?” 이런 물음들 끝에 딜란의 노래는 후렴구로 대답한다. “친구여, 그 해답은 바람 속에 불려온다네, 바람 속에 불려온다네.” 남들의 울음소리를 듣자면 인간에게는 연민과 겸손을 확장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능력을 키우는 비밀은 성장기의 아이들을 자유롭게 숨 쉬며 자랄 수 있게 하는 바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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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김동춘 - IT 강국이어서 해고도 최첨단인가

IT 강국이어서 해고도 최첨단인가
[기고-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당신이 어느 날 '해고 통보' 문자 받는다면
텍스트만보기   오마이뉴스(news)   
첨단의 통신기술이 '해고'를 알려주는 수단이 되고 있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 교수가 이런 세태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글을 16일 '다산연구소' 다산포럼(www.edasan.org)에 기고했다. <오마이뉴스>는 김 교수와 다산연구소의 양해로 기고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중인 KTX 여승무원의 휴대폰에 계약해지를 예고하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가운데 9일 여의도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중인 한 여승무원이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는 연설을 듣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만약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려고 옷을 입고 휴대폰을 챙기려던 중 "귀하는 인사 규정 OO조에 의거 O월 O일 부로 직위해제되었음을 통보함"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면 어떤 심정일까?

어떤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사람들이라면 "아, 이런 첨단기기가 해고 통지서로 활용될 수도 있구나, 역시 우리나라는 IT 분야에서는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나라야"라고 감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장 사랑하는 가족이 오늘 내일 먹어야 할 찬거리와 아이들 학원비, 주택 대출금 이자를 감당해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그 메시지는 저승사자의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죽을 죄' 졌어도 재판은 받는데, 죽음과 같은 해고통보는?

최근 파업 중인 외환카드·기륭전자 등의 사업체에서 일부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했다고 한다.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정리해고 예고·희망퇴직 신청은 물론 해고까지 통보하는 것은 이미 2~3년 전부터 서울의 여러 파견 용역회사에서 널리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철도공사의 자회사인 철도유통(구 홍익회)은 파업 중인 KTX 여승무원 70명에게 이런 방식으로 해고를 통보했다. 해고자들이 공사 측에 몰려가 항의하자 공사는 "우리 소관사항이 아니니까 철도유통에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형식상 별개의 회사이고 공사가 고용주가 아니므로 해고자들이 공사 측에 항의해 봐야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은 뻔하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해고자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은 채 부담없이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편리한 수단이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직장인에게 해고는 바로 '사형선고' 그 자체다. 영어로도 'fired'는 곧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모가지' 즉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세상에서 굶어죽을 상태에 놓이는 것과 총맞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것처럼 죽음같은 고통을 가져올 해고조치 역시 대단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죽을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전에 그의 죄를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사와 재판 절차가 마련되고 당사자의 충분한 항변은 물론 변호사의 조력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현대 민주사회 법치주의 원리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근로기준법은 정리해고시에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치도록 해 놓았고 노조가 있는 회사의 단체협약안에서는 이것을 매우 자세하게 규정해 놓았다. 근로기준법 30조에는 "정당한 근거 없이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계약직'으로 알려진 비정규직에게는 이러한 법이 사치에 속한다.

근로계약서나 인사규정에 사용자가 해고할 수 있는 사유를 아무리 분명하게 적시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조치를 당하는 사람의 항변 하나 듣지 않고 징계위원회 절차도 거치지 않고 또 일정기간 예고도 거치지 않은 채 한 사람의 생명줄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조치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를 서면도 아닌 휴대폰 문자로 대신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소수를 짐승처럼 쫓아내고 다수가 잘 살 수 있나

백보 양보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기업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용자의 '의사'가 해고 결정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일터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가 이런 방식으로 그 관계를 정리한다는 것은 시장경제의 비정함과 잔인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시장경제의 최초의 주창자였던 아담 스미스가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해고조치에 대해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나의 시장경제론은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고 외칠 것이다.

기업이 살자는 것도, 경제를 살리자는 것도, 성장을 지속시키자는 것도 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다수가 좀더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업, 다수, 혹은 전체의 경제를 위해 소수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일터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소수를 그런 방식으로 물건이나 짐승처럼 취급한 다음 과연 다수가 잘 살 수 있는 경제가 만들어질 지 의문이다.

▲ 김동춘 교수
아무리 돈벌기 위한 조직이라지만, 종업원을 이렇게 대하는 기업이나 사용자가 과연 일류 기업의 일류경영자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정책을 묵인·정당화하는 국가나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동의나 헌신을 이끌어내는 선진국가가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IT강국 한국이 노동자를 대하는 데 비인간화의 최선두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만을 바란다.
2006-03-1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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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이회창  

차이가 컸다. 노무현과 이회창. 2002년 대선에서 두 사람의 말은 그랬다. 한 사람이 성장을 말할 때, 분배를 공약했다. 한-미 동맹 강화를 말할 때,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진 않겠다고 공언했다. 무릇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 하지만 역사적 가정은 새로운 상상력을 열어주기도 한다. 잠시 가정해 보자. 이회창 정권이 들어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임을 전제하고 그려보자.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부익부 빈익빈은 무장 깊어간다. 중산층이 시나브로 무너지고 아이들과 자살하는 빈민도 나타난다. 그런데 대통령 내외는 골프를 즐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줄이어 자살하는데도 모르쇠했다. 반면에 대통령은 대통령 봉급(혈세)을 꼬박꼬박 모아 재산을 불린다.

민주시민들은 대통령을 어떻게 볼까. 그뿐인가. 권력이 일부의 비리를 빌미삼아 민주·노동 운동 전반을 싸잡아 매도한다. 부자신문도 곰비임비 나팔 불며 정권을 거든다. 대책 없는 농업개방에 항의하는 농민, 칠순에 이르도록 평생 소작을 해온 농부를 공권력이란 이름 아래 국회 앞 아스팔트에서 때려죽인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빚은 이라크 침략전쟁에 반대여론을 모르쇠하고 참전한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도 전격 합의한다. 그럼에도 언죽번죽 자신들은 힘이 없고 야당과 언론 탓이라고 언구럭을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회창 정권의 운명은.

저 눈부신 민주운동의 전통을 체화한 민중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터다. 대학가와 노동현장, 한길과 들녘에서 정권 퇴진 투쟁이 여울여울 타오를 게다. 이회창 정권을 두남두며 장·차관과 국회의원이 된 먹물들은 어용 지식인으로 벅벅이 비판받을 법하다.

가정에서 다시 현실로 오기는 쉽다. 앞서 서술한 가정문에서 ‘이회창’만 ‘노무현’으로 바꾸면 된다. 그렇다. 바로 노무현 정권이 집권 3년 동안 해온 일이다. 차라리 이회창씨에겐 억울한 가정일 수 있다. 최소한 그는 우왕좌왕하거나 자기모순은 없었을지 모른다. 재벌 중심의 성장 정책과 노동 탄압, 한-미 동맹을 강화하면서 생뚱한 말로 본질을 흐리진 않을 성싶다.

현실을 직시할 때다. 말과 행동도 구별해 읽어야 옳다. 냉철히 톺아보라. 노무현 정권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거사법이나 사학법이 상징하듯이 분명 한나라당과 다른 치적은 있다. 하지만 민중 생존권에 이르면 전혀 아니다. 양극화가 더는 덮어둘 수 없는 문제로 떠오르자 대통령은 생색을 낸다. “지지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문제를 회피하지 않기로 하고 양극화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제기”한단다. 회피하지 않는다며 겨우 ‘의제로 제기’다. 실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남은 임기 ‘전력투구’다. 양극화 해소를 다짐한 직후에 비정규직 확대 법안을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배짱을 보라. 집권 3년 동안 3억5천만원을 불린 대통령 일가에게 불우이웃 돕기도 하지 않느냐고 묻는 누리꾼의 비난은 그저 비아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시민단체들은 고요하다. 이회창이 아니라 노무현이 대통령인 까닭이다. 정권의 실정을 옳게 비판해도 궁딴다. ‘민주노동당 시각’이라며 정파적 해석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그래서다. 정권은 자신의 무능과 불성실을 야당과 부자신문 탓으로 지청구삼는다. 노동자와 농민의 외마디 절규를 생먹는 대통령이 ‘야당 하고 싶다’고 투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이회창 정권이라면 더 늦기 전에 민심을 수습하라고 건의하는 참모라도 있지 않았을까. 노 정권의 참모들은 정반대다. 국민에게 도와주지 않았다고 되술래잡는다. 그렇다. 노무현과 이회창. 차이는 크다.

손석춘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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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필자에게는 한 가지 헷갈리는 일이 있었다. 늘 선생님들은 부모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말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의 청소년이 존경해야 할 사람인 카를 마르크스의 평전을 읽었을 때 그의 삶은 ‘착한 아이’의 모습과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들도 ‘잘나가는’ 법률가가 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린 채 젊은날을 ‘쓸모없는’ 철학 공부로 보냈다가 빚더미에 앉은 망명객이 돼버린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자본론〉을 쓰고도 자신의 자본은 못 만들었다”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마르크스의 그러한 ‘탕아 행각’도 만만치 않았지만 부모의 허락도 없이 급진파 유대인과 약혼함으로써 집안에 ‘불명예’를 안겨준 그 부인 예니의 행동 또한 불효막심이 아니었던가? 예니의 이복오빠가 독일 내무장관이 되었어도 예니는 망명지 런던에서 태어난 아이의 요람을 살 돈이 없었고, 아이가 일찍 죽어도 관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탕아들끼리 평생 그렇게도 행복했다는 것이었다.

150년 전의 유럽 유산층에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길로 가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일처럼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옛날 사람들은 월인천강, 하나의 달 그림자가 천 개의 강에 비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인 경쟁주의·출세주의는 부모의 마음에 내면화해 가정마다 ‘학업 장려’와 같은 미명 아래 자행되는 폭력의 원동력이 된다. 아이에게는 자기 스스로의 꿈을 꾸어볼 여유도 없이 부모의 꿈은 곧 아이의 꿈이 되고 만다. 입시 전쟁에서 패배하면 ‘불쌍한 무능아’ 아니면 ‘부모의 은혜에 보답 못하는 배신자’가 되는 줄 알고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전쟁 준비’에 몇 해를 허비하는 것은 기본이다.

꼭 그걸로 끝나지도 않는다. 서양음악을 아이에게 시켜야 상류층이 된다는 ‘통념’을 익힌 부모들이 “신분 상승을 도모하라”는 사회의 절대명령대로 음악과 별 인연도 없는 자녀에게 악기 공부를 무리하게 시키는가 하면, “조기 유학을 안 보내면 안 된다”는 새로운 ‘상식’대로 부모 곁을 떠날 마음도 없는 불안한 아이들을 억지로 이역으로 떼어 보낸다.

사회가 강권하는 이런 폭력의 결과는 무엇일까? 평생토록 부모에 대한 원망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아이의 심신을 파괴시킬 수도 있으며, 또 나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찾아내 사고하거나 표현할 줄 모르고 남을 따르기만 하는 세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고 싶지 않은 아이가 작은 개발독재와 같은 ‘가국’(家國)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인격을 지키고 싶다면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능하겠는가? 뜻이 굳건한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겠지만 그에게는, 효도를 아직도 엄숙한 최고 덕목으로 주입시키는 사회에서 150년 전에 카를과 예니가 겪은 고뇌보다 한층 더 심각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역설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내세우는 부모라 해도 자신의 자녀가 마르크스처럼 행동할 경우 마르크스의 아버지보다 더 강경하게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수능날에 시험장에서 벽이나 문에 기대어 열심히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볼 때 필자는 감동되기는커녕 답답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내 아이가 암기 경쟁에서 남을 잘 눌러 올라서서 승리하기를”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 기도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하셨듯이 (부모의 의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도록 기도하는 것이 진정 종교가 아닌가.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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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8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민들에게 부도덕한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 마쓰시다와 혼다의 창업주들
삼성가나 LG가가 아무리 기를 써도 그들같은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이 비교될 때 언급되는 한 현상이 있다. 일본의 중간층이나 서민들은 대개 ‘재벌’ 내지 ‘부자’를 존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좌파 진영은 물론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다소 보수적인 사람도 재벌에 대해 냉소적으로 “사기 쳐서 성공한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그렇다고 내 자식이 그 회사에 취직돼 일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냉소주의 시각에서 보면 사기를 치지 않고서는 어차피 이 사회에서 한몫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이고, 성공한 사기꾼 밑에서라도 내 아이가 넉넉한 월급을 받고 안정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뭔가 얻어먹고자 한다 해도 그를 김구나 이순신처럼 마음으로 깊이 모시지는 않는다. 보수적인 사람의 경우라도 ‘조국 근대화’의 공로를 박정희에게 돌릴지언정 이병철(1910~87)이나 정주영(1915~2001), 구인회(1907~69), 신격호(1922년생)에게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필요할 땐 정부와 각을 세우다

우리에게 재벌은 교활, 부정부패, 돈세탁 등으로 얼룩진, 서민들에게 멸시적이고 부도덕한 이미지로 떠오르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다르다. 일본 극우들이 최근에 도조 히데키와 같은 전범들을 영웅화한다 해도, 진보 성향이 아닌 다수의 보통 일본인들의 ‘존경스러운 현대사 인물’들은 전후에 수많은 가구들이 애용한 가전제품을 생산한 마쓰시타 재벌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나, 전후 소비 붐의 상징이 된 자동차를 만들어준 혼다 소이치로(1906~91), 1965년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에 부품을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한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1932년생, 교세라 회장) 등이다. 일각의 기업인들이 ‘국민 스타’가 되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복잡한 요인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폐허로 만든 전쟁 시절의 군부, 관료들이나 그 계통을 이은 전후 관료, 정치인들에 비해 ‘모두의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것처럼 보였던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이 비교적 더 양호한 지도자로 비쳐진 측면도 있었다.


△ 일본의 재별 마쓰시타 고노스케(왼쪽)나 (사진/ AFP 연합) 혼다 소이치로(오른쪽)는 '국민스타'다. 반면에 우리나라 재벌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사진/ EPA)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한때 전투적이었던 노조를 무력화하고 여성·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주변화하는 과정이 언론에 의해 은폐되기도 했다. 그들과 일본 관벌의 유착이 잘 노출되지 않는 성공적인 언론 플레이 탓도 있지만 그들이 관료 자본주의의 수혜자이기보다는 정부의 ‘동등한 파트너’로 보였던 것이고, 또 그렇게 보일 만큼 필요할 때 관계와 각을 세울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 따르기로 유명한 한국 기업인들은 아무리 드라마까지 이용하면서 자신들을 ‘애국자’로 부각시키고 그들이 말하는 ‘반기업 정서’를 해소하려 노력해도 그들이 ‘한국의 마쓰시타’나 ‘한국의 혼다’가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전후 일본인들이 생산과 소비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다고 하지만 자본주의적 인식 내면화의 측면에서 한국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개천을 벗어나 계급 사회의 ‘용’으로 날아가게 된 성공한 인물에게 부러움과 존경을 느낄 것이다. 최근에 산산이 부서진 황우석 신화 만들기에는 국가주의적 ‘국위 선양’에 대한 욕망도 기여했지만, 명문고·명문대·일본의 대학까지 자신의 노력으로 간 부여 시골 농민의 아들 황우석의 인간승리적인 자수성가에 대한 존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만약 어려운 시절을 지낸 빈농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박정희 신드롬이 지금처럼 극성 부릴 수 있었겠는가? 상당수 한국인들이 일본 군대나 국내외의 학벌 카스트 시스템을 통한 박정희·황우석의 신분 상승을 볼 때 일제나 학벌주의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 힘’을 흠모하게 된다. ‘생존, 성장, 성공’의 ‘3S 이데올로기’가 그만큼 압축 성장의 사회에서 도전하기 어려운 상식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영웅’을 이 정도 갈망하는 사회에서 아무리 삼성가나 LG가가 자기 홍보에 돈을 들인다 해도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민 출신이 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상층부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유일한 예외라면 현대-한라 창업주인 빈농의 아들 정주영·정인영을 들 수 있지만 이것은 미군과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에 형 정주영을 위해 미군의 수주를 따주었던 동생 정인영의 영어 실력 덕분이다. 한국 자본주의를 흔히 천민자본주의로 부르고 한국 자본가들의 노무관리·과시적 과소비에 대해 이 말은 틀리지도 않겠지만, 막상 한국 자본의 최상부에는 천민 출신이 거의 없다. 한국적 재벌의 상징이라 할 삼성가의 이병철 같으면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천석꾼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지역 토호인 그 조상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 지주가 소작인에게 거둬들인 곡물이 인천, 군산 같은 항구도시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됐다. 보부상 중 일본 자본과 유착한 극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와 지연과 혼맥상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LG가의 구인회나, 일제시대 재벌의 상징이었던 <동아일보>-경성방직의 김성수(1891~1955), 김연수(1896~1979) 일가도 자신들의 지위를 자신의 힘으로 획득했다기보다는 ‘유생 토호’라는 전근대적 신분을 ‘자본가’라는 근대적 신분으로 성공적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런데 신분을 지주에서 자본가로 탈바꿈했다 해도, 농장 소유와 소작인에 대한 살인적 착취는 이 한국 대자본 ‘선구자’들의 일제 때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 재벌들은 지금도 각종 자연농원, 연수원, 훈련소 등의 명목으로 부동산을 마구 사재기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소작료가 수확의 60~70% 정도이던 일제시대에는 돈을 은행에 맡기는 것보다는 은행 대부금으로 땅을 사들여 소작을 주는 것이 몇 배 더 큰 소득을 보장했다.

그러기에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챙긴 이병철이 대규모의 이윤이 나자마자 소출 1만 석의 김해평야의 알짜배기 농토 약 200만 평을 사들여, 전쟁으로 통제 경제로 넘어가기 전까지 소작인들이 내놓는 쌀을 일본으로 수출해 폭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병철이 나중에 “하루 밤에 마산의 모든 기생을 한꺼번에 다 예약하는 풍류를 즐겼다”고 자랑스럽게(?) 회고했지만, 논 한 마지기에 소작료 15원을 내야 했던 소작인들은 과연 하얀 밥을 한 달에 몇 번이나 먹을 수 있었을까? 그가 1927년 도일 유학해 와세다대학에서 최신의 학문을 배웠을 때까지도 그의 고향집에서는 머슴들이 조선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종살이를 했다는 것이 당시의 반봉건적 현실이었다. 중세적인 토지 소유의 불평등이나 봉건적 인습들을 이용해 농촌의 자원을 독점하고, 식민 모국 일본의 은행에서 빌린 돈을 이용하고 일본 시장에 쌀 등 조선의 자원을 내다파는 대지주 계통의 예속 부르주아를 과연 무일푼의 식민지 백성의 대다수가 “개천에서 난 우리 민족의 용”으로 볼 수 있었겠는가?

암흑의 식민지 시대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이 있지만 부정한 정권들과의 유착, 부정 특혜에 의한 기업 성장, 부동산의 무분별한 사재기와 지역적 인맥이나 혼맥에 의한 자기들만의 ‘이너 서클’(외부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 사회) 형성은 그 뒤에도 일반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한국 재벌의 특징으로 남아 있었다. 선택받은 극소수의 눈부신 ‘성공’은 관벌과 재벌의 ‘개발주의적 연합’에서 배제당해온 대다수 영세·하청기업인들에게 기회의 차단으로만 이어졌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재벌기업인들에 대해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들이 클수록 우리는 그들 앞에서 더 작아지고 클 수 있는 기회마저도 놓치고 만다는 의식 때문인 것이다.

그들이 클수록 우리는 더 작아지고…

이러한 상황에서 요즘 정권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지려면 다수의 희생으로 축적된 재벌의 재산은 어떤 형태로든 일단 그 다수에게 먼저 환원돼야 한다. 부유세가 철저히 부과돼 부자들에게서 거둬지는 세금으로 무상 교육·의료 등 사회보장제도가 실행되고 삼성에서 노조가 만들어질 뿐 아니라 경영 참여까지 할 수 있다면 우리와 그들 사이의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상이라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사회적 대타협’이란 말은 그저 있는 자들의 “빈자여, 서민이여, 희생하라!”는 요구일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홍하상, <이병철 경영대전>, 바다출판사, 2004

유인학, <한국 재벌의 해부>, 풀빛, 1991

김윤태, <재벌과 권력>, 새로운사람들, 2000

이종재, <재벌이력서>, 한국일보,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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