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0일 서울 서린동의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이갈 카스피 대사를 만났다.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 공격에 이어 레바논 침공까지 벌여 국제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19일에는 이스라엘 지상군이 레바논 국경을 넘었다.

표현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이스라엘이 레바논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레바논 정부가 아니라 헤즈볼라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레바논 국경을 인정한다.레바논 정부가 헤즈볼라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대신 헤즈볼라 무장 해제에 나섰다.지상군이 들어간 이유는 국경 1km 반경 안에 있는 헤즈볼라의 요새를 파괴하기 위해서다.우리는 레바논을 점령할 생각이 없다.

무차별 공격으로 민간인 희생이 늘고 있다.어제까지 레바논 사망자가 3백명이 넘었다.

이스라엘 군은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 중이다.예를 들어 공습을 하기 전에 미리 전단을 뿌려 민간인은 해당 지역에서 퇴거할 것을 경고한다.

3백명이라는 사망자 수는 확실히 많은 인명 피해다.하지만 레바논 사람만 공격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예를 들어 며칠 전에 이스라엘 북부 도시 나사렛이 헤즈볼라의 로켓 공격을 받아 아랍계 이스라엘 주민이 죽었다.

양측의 피해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이스라엘 민간인 사상자 수보다 레바논측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은 19일 “분쟁 당사자는 모든 군사 작전 과정에서 사안의 본질과 관계없는 민간인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과잉 대응을 금하는 ‘비례 원칙’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했다.

우아한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전투 상황에 ‘비례 원칙’을 내세워 초점을 흐려서는 안 된다.문제의 핵심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적대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어떻게 하면 중동 지역에 질서를 되찾을지가 중요하지 숫자를 비교하는 것이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우리는 6년 동안 헤즈볼라의 도발을 참아왔는데, 그들이 국경을 넘어 우리 병사를 납치해간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국제 사회도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유엔 결의안 제 1559는 헤즈볼라의 즉각적인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우리는 유엔 결의안 1559가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스라엘 대사가 유엔 결의를 언급하다니 놀랍다.그동안 유엔 총회는 분리 장벽 철거나 난민 귀환, 군대 철수 등 수많은 결의안을 발표했지만 이스라엘은 늘 무시해오지 않았다.

유엔 총회 결의가 아니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말하는 것이다.안전보장이사회가 총회보다 더 공정하다.

전쟁을 끝낼 생각은 없는가?

우리의 요구 조건은 세 가지다.납치된 이스라엘 병사 두 명의 석방,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 레바논 정부 군대를 헤즈볼라가 장악했던 지역에 주둔하는 것이다.지금 군대를 철수하면 그동안 해온 작전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헤즈볼라에 그들이 승리했다는 신호를 주면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예를 들어 가자 지구에서 군대를 철수했더니 그곳 무장 세력이 우리 병사를 납치했다.

올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직접 투표로 뽑은 의회 의원을 이스라엘이 체포해 교도소에 가두고 있다.이게 민주주의인가.

어느 나라든 법을 어긴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처벌받아야 한다.그들은 테러 조직에 몸담았기 때문에 적법하게 구속된 것이다.하마스의 경우, 먼저 그들이 이스라엘을 부정했다.우리는 PLO도 처음에 테러 단체라고 규정했지만 그들이 우리를 인정하기에 협상 상대로 삼았다.하마스도 마찬가지다.

요즘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한국 시민 단체 회원들이 무차별 공격과 팔레스타인 지배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시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시민 단체 회원들은 한쪽 이야기만 듣고 균형 잡히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다.

-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언론’ ⓒ 시사저널 sisapres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신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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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7-2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썩을놈들..
 
 전출처 : balmas > 테러리스트는 어디 있는가? -정문태의 레바논 현지르포

한겨레

 

[레바논 현지르포] 폭격에 질린 ‘베이루트의 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한겨레
[관련기사]
국제분쟁 전문기자인 정문태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 23일밤(현지시각)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전란에 휩싸인 도시 한가운데서, 정문태 기자가 보내는 소식은 <한겨레>와 함께 <한겨례21>에 전문이 소개된다.

국경도시 아안잘 ‘유령바람’…북쪽 자흘라도 공습 상흔
꼬리문 피란민 “전쟁 멈춰라”

길, 그 길을 달렸다. 역사가 바뀔 때마다 침략자와 피난민을 교차시켰던 ‘다마스쿠스-베이루트’ 길. 외신이 전하는 것처럼 난민행렬까지는 아니지만, 여느 때보다 서너 배 많은 차량들이 그 길을 통해 시리아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국경 황무지에서 일하던 이들도 손을 놓고 차량 행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리아 국경 검문소 알즈데덴을 지날 즈음,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 말이 라디오 잡음을 타고 흘렀다. “침략이 아니다. ‘테러리스트’ 헤즈볼라의 거점을 궤멸시키기 위한 한시적 점령이다.” 7월22일, 이스라엘 지상군이 레바논 남동부 마룬 알-라스를 점령한 뒤였다.

24년 전 1982년6월21일, ‘테러리스트’ 팔레스타인 박멸을 내걸고 레바논을 침략했던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도 똑같이 말했다. “침략 아니다. 레바논을 점령하거나 합병할 뜻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테러리스트’는 없었다. 레바논 국경검문소 마스나아를 통해 시리아 쪽으로 쏟아져 나오는 이들은 피난민들일 뿐이었다. 베이루트에서 탈출한 시민 아부 에이헴(48)은 기자를 보자마자 “전쟁을 멈추라! 전쟁을 멈추라!”고 핏대를 올렸다. 이스라엘까지 들릴 리 없겠지만.

레바논 국경도시 아안잘엔 유령바람만 휘몰아쳤다. 살아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이스라엘군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1번 고속도로를 피해 곁길로 빠져나오는 피난 차량들만 숨죽여 움직일 뿐이었다. 보통 때라면 베이루트까지 1시간에 닿던 1번 고속도로, 피난민들이 달리고 긴급 구호물자들이 지나야 할 그 길을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 박멸을 외치며 가장 먼저 폭격했다.




그리하여, 피난민들 사이에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져 온 북쪽 자흘라로 올라가 비크화야를 거치는 먼길을 돌아 베이루트로 향했다. 그러나 자흘라 언덕길에는 이스라엘군 공습을 받아 뼈대만 남은 구호물자 수송트럭과 승용차가 엎어져 있었다. 레바논엔 이스라엘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헤즈볼라 궤멸…침략 아니다”
24년전 똑같은 이스라엘 나팔

그렇게, 이스라엘은 피난민도, 길도, 자동차도 모두 ‘테러리스트’라 불러왔던 모양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달린 2시간20분, 베이루트 시가지가 발아래 밀려왔다.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두 곳이 화염에 휩싸인 베이루트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그리고 베이루트에 밤이 내렸다. 이스라엘군은 그 밤을 노려 무슬림 거주지역인 남부 베이루트에 거대한 폭격을 해댔다.

24년 전, 이스라엘군으로부터 당한 그 학살의 기억을 안은 구급차 사이렌이 다시 2006년 7월23일 밤을 내달렸다. 베이루트는 숨이 넘어가고 있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베이루트는 폭음에 흔들리고 있다.

‘철수할 의지를 지닌 공격은 침략이 아니다!’

1982년 7월9일치 이스라엘 극우신문 <에디엇 아흐로놋>이 베이루트 침략에 광분했듯이, 2006년7월23일 오늘 이스라엘 신문 <아루츠 쉬바>는 ‘이스라엘은 유대의 땅을 모두 지배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공격해야 한다.’고 확전 나팔을 불어댄다.

베이루트, 공포에 질린 도시는 묻고 있다. ‘테러리스트’는 어디에 있는가?

베이루트/정문태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기사등록 : 2006-07-24 오후 06:45:47 기사수정 : 2006-07-24 오후 07: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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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근대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마도 "중독"의 개념이 제일 알맞을 것입니다. 중독이란 물신화된 대상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본인의 의지력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사회적 맥락이 은근히 (간접적으로) 강요한 욕망을 의미하는 것인데, 개인 욕망의 노예화, 특정 대상들의 물신화야말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주춧돌이지요. 근대적 "중독"의 세계는 그야말로 무한한 것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론 일 중독, 즉 장시간의 노동에 대한 일종의 마조키스트적 애착 같은 것입니다. 이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일제 식의 병영형 직장 문화와 얼키고 설켜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성"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낳은 모양인데, 사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여가 시간의 "(유사) 근무시간화"라는 것은 또 최근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정이더랍니다. PC, 휴대폰이 보급되어서 일 중독자들에게 그 중독에 빠지기가 더 쉬워진 것이지요. 그 다음에 속도와 편리함에의 중독, 예컨대 자동차 중독인데, 국내에서는 이게 집을 사지 못하는 중산층 하부 구성원들의 한과 어우러져 유럽에 비해 약간 광적인 형태를 취한 것 같아요. 요즘 같은 계통의 "애어컨 중독"이 맹위를 떨치는데, 저로서는 아주 이해 안되는 현상이에요. 습하고 더우면 선풍기를 틀어도 좀 나아지고, 참을 만하면 여름에 당연히 더워야 하니까 그냥 참아도 되고... 물론 대형 강의실, 회의실에서는 애어컨이 필요하다는 게 이해되지만, 병균을 마구 살포하고 감기 증세를 일으키는 이 기계를 우리가 왜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지요? 미국의 남부가 "애어컨 중독"이 한국 이상으로 심하다던데, 유럽은 좀 덜 하는 것 같아요. 위에서 말한 자동차 중독이나 애어컨 중독은, 그 경제적 효과가 엄청 크기에 관련 업계로서 그걸 유지시키는 게 사활의 문제일 걸요.

근대에 접어들어 생활 속에서의 폭력은 사실 많이 줄어들었지만 일 중독으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를 대개 시각적 폭력에 대한 중독으로 풀어주는 현상이 생기더랍니다. 돈 계산에 지쳐 기진맥진하는 투자 신탁 회사의 화이트 칼러들이 저녁이면 이종격투기를 생으로 보여주는 레스토랑에 가서 빈민 출신의 젊은이들이 서로를 아프게, 더 아프게 하여 결국 실신시키는,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포르노 그 이상으로 잘 소비하더랍니다. 빈민 출신의 선수라는 일명의 "타인"이 맞고 또 맞고 결국 쓰러지면, 본인을 PC의 노예, 돈의 노예로 만든 그 커다란 "타인", 즉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리 복수"가 이루어진다는 일종의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인지요? 아니면 주먹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에 대한 자신의 우월한 위치도 아울러 확인하는 것인지요? 아니면 성적 욕망이 변태적 "정복 욕망"으로 변질돼, 싸움의 장면을 일종의 섹스로 무의식적으로 파악하여 은근히 흥분하면서 "줄기는" 것인지요? 난 모르겠는데, 우리 사회의 주목 받을 만한 중독 현상임에 틀림없지요. 그리고 서구에서의 젊은이 마약 중독에 해당되는 국내 현상은 게임 중독일 걸요. 국가와 자본으로서 참 좋은 것이지요. 마약 중독이 대중화되면 범죄 문제 등이 생기는데, 게임 중독은 1조원 이상의 게임 시장을 유지시키면서도 어떤 가시적인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잖아요. 10여만 명의 청소년, 청년들이 PC방에서 게임으로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고 게임 안하면 못사는 정신적 불구자가 돼도 그건 국가와 자본으로서 관심 밖의 일이지요. 중독의 왕국이여, 영원하라! 노예들에게 이 정도의 눈요기 기회를 주어야 공연히 스파르타쿠스나 예수 크리스토 같은 불온 분자들이 안생기고 조용하고 좋지요.... 낭떠라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 속에서의 태평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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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들 다 핑핑 에어콘 바람 쐬며 펜대 굴리고 있을 때 우리 남편은 뙤약볕에서 10시간씩 일했다. 니들이 그러면 안 된다!”

국경일인 제헌절, 포스코 본사 앞이다. 〈민중의 소리〉가 생생하게 전한 중년 아낙의 울부짖음이다. 농성 중인 포항건설노조의 남편에게 건네려 싸 온 음식을 경찰이 가로막아서다. 굵은 눈물 쏟는 아내의 얼굴에도 무심한 장대비는 사정없이 꽂혔다. 장마에 흠뻑 젖은 300여 지어미들은 손수 만든 음식을 결국 경찰에 내던졌다. 갇힌 채 그 모습을 지켜본 지아비들의 굶주린 가슴엔 무엇이 일렁였을까.

그뿐인가. 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머리를 찍힌 40대 노동자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노무현 정권 아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은 무장 커져갔다. 해고된 고속철도 여승무원의 절규에도 차라리 한나라당 검사 출신 의원은 화답할지언정 사장인 ‘사형수 이철’은 살천스레 생먹는다.

노 정권의 야만은 예서 그치지 않는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또 철창에 갇혔다. 올 들어 두 번째다. 대추리 미군기지로 가는 평화행진단에 몽둥이 휘두른 사건을 모르쇠한 평택 경찰서를 찾아가 항의한 ‘죄’다.

반면에 미군기지 이전은 착착 강행되고 있다. 집행을 위해 군까지 동원했다. 민간인에 폭력을 휘둘렀다. 평택으로 옮겨가는 미군기지가 여기저기 싸질러 놓은 기름덩이도 노 정권의 ‘양보’로 고스란히 우리가 맡았다. 국민에 대한 기만이요, 혈세에 대한 오만이다.

노 정권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일방 강행에 항의하는 시민단체의 기자회견까지 폭력으로 ‘진압’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수구언론에 밀려 인도적 지원을 거부했다. 가장 대화가 절박한 시점에 남북 사이는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보라. 참으로 생게망게하다. 수구언론은 노 정권을 겨눠 여전히 언구럭부린다. 친미사대 언론에 나타난 노 정권은 한-미동맹을 뒤흔든다. 대통령 참모들은 반미주의자다. 부자신문 말로는 노 정권의 경제정책은 좌파다. 노동운동에 우호적이다. 친북이다.

그렇다. 저들의 어루꾐에 더는 착시를 일으킬 때가 아니다. 찬찬히 톺아보자. 한나라당에 정권이양 운운하며 대연정을 제안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당시 그의 제의는 거부당했다. 하지만 거부당한 것은 노무현이지 대연정은 아니었다. ‘대연정’은 성공했다. 다만 주모자가 노무현이 아닐 따름이다.

공연한 은유가 아니다. 보라. 저 신자유주의 대연정을. 저 한-미 동맹의 외길을. 신자유주의 독재정권, 한나라당과 미국이 튼튼한 ‘배후’다. 엄연한 현실을 거꾸로 호도하는 ‘임무’는 언론이 맡았다. 얼마나 치밀한 전략인가. 메부수수한 노무현을 전면에 세우고, 수사적 차원에서 그와 격한 말다툼을 벌이며, 실제로는 저들만의 공화국으로 대한민국을 끌어가고 있다. ‘대연정 정권’의 출현, 성공한 쿠데타다.

그래서다. 오늘 거리에서 우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정권은 저 뜨거웠던 2002년 12월에 서민들이 뽑은 정권이 아니다. 정치인 노무현은 수구세력의 ‘문문한 앞잡이’가 된 지 오래다. 수구언론 탓에 대통령부터 착시를 빚을 뿐이다. 여론을 묵살하며 혈세를 ‘정권 홍보’에 쏟아붓는 저들이 끝내 한-미 자유무역을 강행하겠다면, 민중이 벅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대연정 정권’을 교체할 전망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민중의 고통과 민족 위기가 커질 수밖에 없는 데 있다. 바로 그래서다. 참된 민주세력과 진보세력이 단결해야 할 까닭은. 바로 그래서다. 새삼 먹먹한 가슴에 파고드는 까닭은. 저 장대비 꽂힌 아낙의 절규가.

“니들이 그러면 안 된다.”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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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나
[서평]미국 예외주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미국 정치, 미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꼭 참조해야 할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S. M. 립셋이 쓴 <미국 예외주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문지영외 옮김, 후마니타스, 2006)가 그것이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거나 아니면 정치학 개론이라도 수강했던 사람에게 립셋은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20대에 <농업사회주의>와 <유니언사회주의>라는 책으로 주목받은 그는 30대에 쓴 <정치적 인간>이란 책을 통해 세계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정치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론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말 슈타인 로칸과 함께 쓴 논문은 정당과 사회갈등 분야의 한 패러다임을 개척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뤘던 2004년의 책 <민주주의의 세기>의 완성을 못보고 쓰러질 때까지(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제자 래킨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가 쓰거나 편집한 100권 가까운 책 대부분은 학자로서의 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미국의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사람일 정도로 그는 미국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힐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학자로서의 그의 업적 때문이었다.

   
 
립셋의 평생 연구는 크게 두 주제 분야를 갖는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논거를 적절히 활용한 1959년의 논문(“민주주의를 위한 몇 가지 사회적 조건”)이 대표적으로, 이 논문을 통해 그는 이른바 ‘근대화론’을 대표하는 정치학자가 되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주로 제3세계 후발국가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 다른 연구 분야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핵심은 민주주의가 왜 여러 다른 유형과 경로로 발전하게 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왜 다르고 유럽의 민주주의는 또 왜 다르며 일본과 캐나다의 민주주의는 왜 다른가를 묻는 것이다. 이 주제를 집약하는 주제가 바로 ‘미국 예외주의’이다.

사회주의 없는 민주주의의 모델, 미국

미국 민주주의의 예외성은 여러 내용을 갖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왜 미국만이 사회주의 없는 모델을 갖게 되었나 하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 예외주의라고 하면 대체로 사회주의 없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로 이해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립셋은 미국 예외주의를 훨씬 넓게 다루고 있다.

사회당, 노동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 명칭은 다르더라도 진보적 이념이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이 해당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유독 미국만이 매우 다른 정치체제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선진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시장의 절대적 역할을 숭배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부정적이며 개인의 거의 무제한적 권리에 기반을 둔 물신화된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정도에 있어서도 미국은 독보적인 나라이다.

저자인 립셋도 예를 들고 있듯이, 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한 클린턴의 복지정책조차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대체 왜 미국은 다른 것인가? 어떻게 이런 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존립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대부터 사회주의자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강한 노동운동을 가진 미국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맨 선두에 설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메이데이’가 1886년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듯이 19세기 후반까지 미국의 노동운동은 매우 강력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미국의 사회주의로의 발전 경로에 대한 확신에 찬 언급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메이데이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시위를 묘사한 당시 그림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계급의식의 징후들을 지속적으로 탐색하였으며, 엥겔스는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이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베른슈타인은 “우리는 곧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시작되어 뿌리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했고, 카우츠키 역시 “미국은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으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힌드만은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베벨 역시 “미국은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도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고,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대표적 사회주의자였던 라파르그 역시 “가장 선진적 산업발전 수준을 가진 미국이 역사발전의 사다리를 맨 먼저 오를 것”이라 말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미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적어도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실패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된 20세기 초까지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이 빗나가면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깊은 회의가 뒤따르게 되었으며,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왜 사회주의가 실패했는가? 미국은 왜 예외적 경로를 발전시키게 되었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에 대해 알고 싶거나, 그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면서 21세기 오늘 척박한 역사적·지적 풍토를 지닌 이 땅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와 진보정당 실현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깊고 넓은 사색을 위한 좋은 소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나, 립셋의 설명

사회주의 없는 미국의 발전경로에는 과연 어떤 힘들이 작동하고 있었을까? 1851년 엥겔스가 강조하고 그 이후 40년간 반복적으로 지적된 조건, 즉 노동운동의 등장을 방해하는 미국의 특수한 조건은, “부르주아적 조건을 마치 자신의 멋진 이상인 양 생각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필연적으로 급속한 그리고 빠르게 증가하게 있는 번영”(106쪽)이며, “미국적 신조로서의 (개인적) 성취와 기회 균등 및 능력주의에 대한 강조”(109-110쪽) 등이 그 배경에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즉 상대적 풍요로움의 효과가 부르주아 계급의 자산 증대를 넘어 노동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립셋은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실패에 대한 기존 설명들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이를 상호배제적이지 않은 두 범주, 즉 사회적인 변수와 관련된 것과 정치체계의 내재적인 변수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가 지적하는 사회적 요인은 다음 여덟 가지이다:

① 새로운 사회로서의 미국, 즉 계급 구분에 따라 정치를 구조화하는 봉건적 전통의 계급 관계 부재(‘봉건주의 없이는 사회주의도 없다’ /No feudalism, no socialism ), ② 사회주의의 대용물로서 미국주의 그리고/또는 지배적인 공공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 전통, ③ 미국 프로테스탄트의 종파주의적 과거와 혁명적 가치로부터 파생된 개인주의와 반국가주의 가치에 대한 강조 ④ 생활수준, 특히 노동자 계층이 영위하는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이 미친 영향―좀바르트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는 구운 쇠고기와 애플파이 앞에서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 ⑤ 주변화된 집단의 정치적 고립화와 낮은 투표율, ⑥ 생산성이 증가하고 교육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계층 상승의 기회가 증대, ⑦ 계급의식 형성의 방해 요인으로서 지리적 이동 성향과 안정된 공동체적 기반의 결여, ⑧ 다민족·다인종·다문화적 이주민 사회 형성에 따른 결과 등이다.

이에 덧붙여 정치적 요인으로 다음 네 가지를 지적한다: ① 거저 얻은 선물로서의 투표권―이와 관련해 레닌은 “사회주의는 선거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언급한다 ② 행정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만 부여되고 그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연합적인 양당 구도로 전개되도록 만든 헌정 및 선거체계, ③ 대체로 대중운동 그리고/또는 제3의 정당 형태로 명백하게 표출되는 만연된 불만을 흡수하거나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연합적인 야당체계의 유연성, ④ 급진적 운동에 대한 정치적 탄압 등이다.

미국 예외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19세기 말 이래로 사회주의자들을 괴롭혔던 이 수수께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회의와 곤혹스러움은 ‘미국의 특이성’과 그 차이의 속성이라는 문제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인도한다. 이 영역은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이른바 ‘예외주의 미국’의 실체와 관련된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는 그동안 두 가지 코드로 읽혀왔다. 앞서 본 사회주의 운동의 부재와 관련된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이 그 독특한 기원과 국가적 신조, 역사 발전과정, 정치 및 종교 제도로 인해 다른 서구 선진국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관념으로서의 미국 예외주의이다.

립셋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도 이 후자의 영역이며,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운동의 부재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립셋은 미국 예외주의를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다양한 측면을 통해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덜 복지 지향적이고, 덜 국가주의적이며, 더 방임주의적이고, 더 권리지향적이고 더 애국적이며, 더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는 이러한 특성이 ‘미국적 신조’라고 불리는 미국인의 가치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미국적 신조란 자유, 평등주의, 개인주의, 포퓰리즘, 자유방임주의 등 다섯 개념으로 압축되며, 이러한 미국인의 가치체계는 미국의 독특한 기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미국은 무엇보다 “혁명적 사건으로 출발한, 그리하여 독립에 성공한 최초의 식민지, 최초의 신생국가”라는 점에서 ‘예외적’인 나라이며, 결국 미국 예외주의는 새로운 사회로서 미국이 봉건적 구조, 군주제 및 귀족주의 문화, 사회적 위계를 유산으로 물려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예외주의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미국적 가치는 매우 복합적이라는 진단과 함께 립셋이 그것을 ‘양날의 칼’과 같다고 거듭 강조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예외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낫다거나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단지 다른 나라들과 질적으로 ‘다르게’ 발전해왔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4부 8장 결론).

그에 따르면 미국 예외주의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모두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특성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미국은 최선이 되기도 하고 최악이 되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 다양한 가치관들, 최선과 최악의 공존과 갈등을 통해 오늘의 미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립셋은 미국적 가치의 다양하고 이중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오히려 국민적 ․ 국가적 합의를 강조하는 것은 갈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가령 소득불평등, 높은 범죄율, 낮은 수준의 선거참여, 모든 것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강력한 경향들, 그리하여 때로 정치적 · 윤리적 소수자들에게 거의 관용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경향과 같이 오늘날 미국사회를 특징짓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개방적인 민주사회의 규범 및 행태와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7쪽)이며,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정치적 분위기와 자유로운 시장질서에 기반한 경제적 풍요는 미국적 신조를 기반으로 성취된 미국적 예외주의의 가장 밝은 면모라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예외주의는 높은 수준의 개인적 책임감, 독립적인 진취성, 자원봉사 문화를 함양하는 반면에, 이기적인 행동과 원자론적 분열, 공동선에 대한 경시와 전통적인 형식의 공동체적 도덕에 대한 위협 역시 조장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립셋의 신보수주의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이중적 접근은 그것이, “미국인의 강한 자민족 중심주의의 표현이자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도 우월하다는 노골적인 정치선전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이다.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강조가 미국 엘리트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미국 우월주의로 나타나 미국 패권주의와 긴밀히 연결되곤 했기 때문이다. 즉 세계 최초의 순수한 민주주의 혁명을 거쳐 탄생한 국가이자 자유세계의 수호자로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전파’라는 세계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우월적 의식 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났던 것이다.

   
 ▲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이와 관련해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19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 이래 미국 공화당의 대내외 정책 기조로 알려진 신보수주의에 대한 그의 진단이다. 저자는 신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실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립셋은 이른바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의 제1세대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신보수주의 지식인으로서 립셋은 급진적인 트로츠키주의자에서 반공적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책에는 이러한 그의 지적 편력이 잘 반영되어 있다. (네오콘의 사상적 대부라고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도 한때는 극좌파 지식인이었다가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의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전향한다. 네오콘의 1세대라고할 수 있는 네이던 글래이저, 다니엘 벨 등도 모두 트로츠키주의에서 우파로 전향한 인물들이다.)

“야만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자연의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스트라우스를 사상의 기원으로 삼는 신보수주의라는 용어는, 흔히 “국내 쟁점에서는 고전 자유주의적 반국가주의를, 외교정책에서는 강경노선을 견지하는 미국 내외의 광범위한 범위의 전통적 보수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립셋은 이러한 용어 사용이 오류라고 말한다. 즉 “하이에크, 프리드만, 레이건, 대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 자유지상주의자들이지 신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종파주의에 기반을 둔 신보수주의의 기본 입장은, 정치적인 쟁점에서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경제적으로는 사회보장 및 복지정책의 확대를 지지하며, 사회․문화 분야에서 전통과 권위를 존중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보존과 전파를 위해 외교·군사적으로는 개입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리드만적인 자유시장경제를 계속 거부하는 것이며(297쪽), 공화당 내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이 립셋의 설명이다.

신보수주의에 대한 립셋의 이러한 설명은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해 따지는 것을 잠시 멈춘다면, 광적인 냉전반공주의와 개발독재의 향수에 깊게 물든 사이비 보수만 판을 칠 뿐 진정한 보수주의가 실종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인 상황에서, 보수의 실체가 여전히 모호한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뉴라이트 역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보수주의의 출현 배경과 의미, 그 갈등과 타협의 궤적을 미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추적하는 립셋의 시도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의 제자리 찾기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미국 중심적 사고의 문제

한편 립셋의 글 내용 가운데는 헌팅턴과 같이 노골적으로 미국을 편드는 식의 오만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헌팅턴에 따르면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은 민주화의 중요한 촉진자였는데,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기여는 미국의 힘과 영향력의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행사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전세계 민주주의 운동들은 미국이라는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고 이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미국이 앞으로도 이러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지 여부는 미국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모델로서 매력을 미국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Samuel P. Huntington의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Norman and Londo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1).

   
 ▲ <자유의 여신상> 너머로 보이는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빌딩
 
그러나 헌팅턴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의 민주주의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까지의 미국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또끄빌(Tocqueville)이 보았던 미국, ‘제국’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미국이다. 그런데 오늘 미국 내의 양심세력과 유럽과 미국 외의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보는 미국은 그런 미국이 아니다”(김동춘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2004). 이런 점에서 헌팅턴이 보여주는 것은 세계적 명망성과 학자로서의 양심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지적 진지함 등에 비춰볼 때, 립셋은 헌팅턴류의 사람들과는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미국식 도덕주의’와 ‘교리적 열정’에 근거한 미국적 신조, 이른바 “평등과 자유의 이상에 뿌리박고 있는 미국 사회의 강력한 도덕체계”를 미국 예외주의의 뿌리로 인정하며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립셋 역시도 미국적 신보수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식 가치와 질서를 기준으로 ‘악의 축’을 설정하고, 이라크 침공을 하느님과 악마 간의 싸움으로 평가하면서 일종의 ‘성전’으로 정당화하는 미국 행정부의 일방적 태도가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 립셋의 결론은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한다.

보편성에 대한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 여타 나라들에 미국식 도덕주의의 잣대를 강압적으로 들이밀며 미국의 ‘신성한’ 임무의 범위를 확장할 때, 미국 예외주의는 일방적인 미국 우월주의이자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억압적 기능을 행사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그의 언명에도 불구하고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경각심을 늦출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립셋의 이 책이 비교정치학적 연구를 통해 미국 예외주의를 미국의 특성으로 분석하고 입증할 뿐, 그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성찰은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의 예외적 특성이 갖는 억압성과 배타성, 그로 인한 고통과 피해에 대한 고민이 함께 진행되었더라면 립셋의 노작은 그 의미를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이 책은 미국의 신경제가 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1990년대 중반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적 모델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문제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소득양극화, 빈부격차의 확대, 사회적 이동성의 하락 등은 신경제 10년 이후 미국사회의 초라한 목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세계체제의 정점에 위치하여 ‘게임의 규칙’마저 변경할 수 있는 ‘패권’국가이자,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갖고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배타적인 특권적 지위와 그로부터 비롯된 ‘오만과 편견’을 분석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예외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국제정치경제적 이면의 동학을 간과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과 미국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훌륭한 참고서인 이 책의 가치와 함의를 떨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을 넘는 문제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야만의 물결이 미국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미 FTA의 국가적 추진 등을 통해 미국 사회를 따라가기 위해 질주하는 한편에서 그것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적 군사주의가 세계를 반(反)평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국이 여전히 한반도 위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실체라는 점에서 ‘미국 바로 보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과거 로마제국보다도 더 막강한 제국으로 떠오른 미국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어쩌면 미국보다 더 심한 미국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사회를 되돌아보고, 전 세계에 확산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 대안을 함께 고민하자”는 김동춘 교수의 지적(2004)에 대해 립셋의 이 책은 일정하게 응답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책의 독해에는 “불완전한 사회가 주도하는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민족과 인류의 미래상을 설계하고 전망하기 위해서는 자기도취된 현실주도세력의 세계인식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것과 언제나 지적 긴장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삼성 교수의 지적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1995)

2006년 07월 13일 (목) 09:04:34 조현연 /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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