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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철(jcstar21) 기자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을 맞아 방한한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의 인터뷰가 15일 오후 서울 장충동 엠버서더 호텔에서 진행됐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valign=top "스크린쿼터 축소는 매우 슬픈 일" / 문경미 기자
valign=top "북한 위기, 남한의 평화적 해결 입장 지지" / 문경미 기자

"FTA(자유무역협정)라는 것이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죠. 하지만 경제적 이익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이익을 전제합니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가까워질 때 언제나 희생당하는 것은 바로 약자입니다."

그의 생각은 분명했다. 그리고 단호했다.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겸 사장. 세계화와 미국식 문화 패권주의에 맞서 날카로운 논평으로 프랑스 당대의 최고의 논객으로 꼽히는 그가 한국을 방문했다.

작년 문화다양성 행사와 관련해 한국을 방문한 이후 두 번째다. 이번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창간 때문이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장충동 엠버서더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검정색 수트에 연한 핑크빛 셔츠로 취재진을 맞이한 라모네 사장은 때론 강한 어투로, 때론 부드럽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였다.

최근 한국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FTA에 대해선, "미국의 전략은 (다자간 협상은 놔두고) 개별국가와 양자간 FTA를 좀 더 많이 맺으려는 것"이라면서 "이 과정에서 (미국은) 국제 규약이나 규범들을 무시할 때가 많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미FTA도 미국의 그와 같은 전략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으며, (한국) 농업 등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한국의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해서도, "매우 슬픈 일"이라면서 "한국 영화의 위상은 크게 위축될 것이며, 향후 한국 문화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디어 전문가이기도 한 라모네 사장은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언론이 보수화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이유로 언론이 대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언론이 과거의 비판이나 반항정신이 퇴색한 지 오래"라면서 "미디어 스스로 권력에 봉사하고, 권력을 갖으려고 하다보니 보수화 되는 경향이 더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오마이뉴스>와 같은 참여저널리즘에 큰 관심을 내보이면서, "<오마이뉴스>는 하나의 실험이며, 세계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오마이뉴스>의 영향력과 지분구조, 수익성 등에 대해 묻기도 했다.

다음은 라모네 사장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해 이어 올해 한국 두 번째 방문인데, 어떤가.
"특별히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작년보다 정치적 상황이 좀 긴장돼 있는 것 같다. 북한의 6자회담 등으로 정치적으로 무거운 것 같고, 경제적 상황도 과거보단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전세계적으로 단기간내 급격한 발전을 이룬 나라로서의 모델이다. 그런 활발하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느낄수 있어 좋다."

- 현재 한국은 미국과 FTA를 두고 찬반이 뜨겁다. FTA에 대한 발행인의 견해를 듣고 싶다.
"일단 한미FTA의 내용은 잘 모른다. 하지만 FTA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했을 때 작은나라에 좋은 게 없다. 미국은 전반적으로 개별국가와 FTA를 좀 더 많이 맺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FTA를 맺으면서, 국제규약이나 규범들을 무시할 때가 많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FTA를 체결하면서 했던 과정을 보면 그렇다."

"미국과 FTA체결하는 작은 국가는 희생당 할 것"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달라.
"나프타(NAFTA)의 경우를 봐도 나프타가 실질적으로 예상했던 것처럼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 남미쪽 국가들은 나프타로의 편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칠레와 살바도르, 콜롬비아 등과 개별적으로 FTA를 맺었다. 우회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미국 전략은 많은 수의 개별국가들과 FTA를 체결하는 것이다. 한국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FTA 전략의 일환이다."

- 유독 미국이 양자간 FTA체결에 적극적인 진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물론 양자간 FTA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이익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이익을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가까워질 때 언제나 희생당하는 것은 바로 약자다. FTA 경우에서는 미국과 FTA를 체결하는 작은 국가들은 희생될 것이다. 한미간 FTA자세한 부분은 모르겠지만, 미국식 FTA 조약으로 한국 농업은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 쪽에선 농업을 보호하기위해 싸울 것으로 생각한다."

- 한국은 이번 FTA를 추진하면서 미국에 스크린쿼터 축소를 약속했고, 지난 7월부터 축소된 스크린 쿼터가 시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국내에서 반대도 심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스크린쿼터를 축소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소식이다. 한국영화가 지금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앞으로 그 같은 자리는 약화될 것이 불보듯 뻔하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이탈리아 영화가 그 예다. 베르니스쿠니 총리가 취임한 후 첫 임기때 영화보호장치가 모두 사라졌다. 그 후 실질적으로 이탈리아 영화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축소는 매우 슬픈 소식"

▲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일부에선 한국영화의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쿼터를 줄이더라도 별 영향이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쿼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스크린쿼터는 하나의 상징적인 조치일 뿐이다. 스크린쿼터를 줄이더라도 영화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다른 지원 방안이 있다면 생존할 수도 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화처럼 문화 부문에 보호장치나 지원이 없다면 곧 사라질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스크린쿼터 시스템과 보조금 제도때문이다. 프랑스에선 영화 표의 금액 일정 부분을 프랑스 국내 영화 제작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결국 미국영화가 프랑스 영화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문화는 보호받지 않으면 결국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9·11 테러가 일어난 지 5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이라크전쟁 등 미국의 대테러전쟁을 두고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평가하나.
"미국을 비롯해 지구촌 전체는 9·11 이전 보다 훨씬 더 위험해졌다고 생각한다. 부시와 미국 정부는 대테러 전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 등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또 테러와의 전쟁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 자체도 부시의 수사법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가 기자가 될 수 있는 세상"

- 지금 한국사회는 인터넷이나 매체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 종이신문들의 위기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런 미디어 위기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라고 진단하는가?
"종이신문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좀 더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일간 신문 중에서도 무료신문의 경우는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다. 흔히 종이신문의 위기라면 유료 일간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유료일간지의 위기는 먼저 무료신문의 등장과 인터넷의 등장으로 위기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신문뿐만 아니라 저널리즘 자체도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폭발적인 인터넷의 발전에 기인하는 것이다. 요즘 기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기자라고 말할 수 있다. 기자를 구분짓던 특징들이 사라진 것이다. 인터넷이 급격하게 발달함에 따라서 개인 블로그를 만들고, 아니면 사진을 널리 퍼뜨리면서 누구나 다 기자처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고유한 기자의 의미가 많이 희석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오마이뉴스>도 시민기자제를 도입하면서, 참여저널리즘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를 하면 어떤가.
"지금은 모두가 기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분명히 저널리즘이라는 것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저는 그것이 정보의 질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진실을 보장하는 것이다. 인터넷 매체를 보면 실시간으로 바로 정보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것은 무척 흥미롭고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열광적인 인터넷의 시대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다시 언론 매체들이 진실을 담보해줄 것을 요구할 것으로 본다.

지금 현재 신문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일간지(유료)의 위기이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월간지는 일간지보다는 위기의 정도가 약간 적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한 즉각적인 정보도 필요로 하지만, 깊이 있는 분석과 오랜 기간의 치열한 고민으로 나온 기사들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
ⓒ 오마이뉴스 권우성

"미디어 자체가 권력화되면서 보수화"

- 미디어의 위기, 신뢰성의 위기라고 하셨는데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많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돈이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정당이나 정치단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어떤 정보가 사실이라고 확인된 그 순간에 정보를 기사화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공정하게 정보를 다뤄야 한다. 그리고, 정보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 혹시 나중에 오보로 밝혀졌을 때엔 과감히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차근차근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요즘 같은 때 언론인이 갖춰야할 자세라고 한다면.
"과거보다 언론인의 자질은 높아졌다. 언론이이라면 신뢰성과 정직이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과 합의된 사실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느냐다. 모두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에 의심을 하고 저항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에 그동안 우리는 이견을 제시하거나 이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 한국 미디어업계는 <한겨레>나 <오마이뉴스> 같은 진보매체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보수적 매체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 매체의 보수적 경향도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한국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미디어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들이 대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커지고, 과거의 비판이나 반항정신이 퇴색한 지 오래다. 언론은 과거에 제4의 권력이라고 했다. 여론을 보호하고, 정치-경제권력과 맞섰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미디어 자체가 권력이 됐다. 시민들로부터 (미디어가) 불신을 받는 것도 (미디어가) 이미 권력화됐기 때문이다. 미디어 스스로 권력에 봉사하고, 권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보수화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DJ, 부시와 네오콘이 한반도 긴장 조성"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창간호가 나왔는데, 신문은 봤는지. 불어판과 비교해서 어떤가.
"보기는 했는데, 한국어 능력이 부족해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한국쪽 편집진에서 자세히 설명해줘 도움이 됐다. 관심있게 본 부분은 불어판을 번역해서 실은 기사들이었다. 제 생각엔 아주 세심하게 잘 나온 것 같고, 오히려 불어판보다 편집이 더 좋은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창간호의 김대중 전 대통령 인터뷰 기사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았다. 지난 13일에 김 전 대통령을 따로 만나셨는데,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김 전 대통령을 만났을때의 느낌은 아주 지혜롭고, 명철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현 부시 행정부와 신보수주의자인 네오콘들이 북한 핵을 핑계로 한반도에 긴장상황을 조성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클린턴 행정부 때의 평화적 해결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 전세계에서 22번째로 발행됐다. 한국어판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있었나.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문화다양성을 위해 일하는 한국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여러 곳과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세 군데 정도의 언론사에서 한국어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 얘기를 듣고 우선 언론사들에게 심사숙고 할 것을 이야기했다. 이후 처음에 관심을 표명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 중에 박승흡 대표가 파리까지 와서 나를 찾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

- 좀 전에 말씀하신 언론사 3곳은 어디였는지.
"솔직히 어떤곳들이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러 곳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현재의 경영진이 내놓은 것이 가장 충실했고, 진실성이 있었다."

-디플로마티크가 한국에서도 이제 창간이 되었는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나.
"현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61개국에서 발행되고 있다. 40여개국에서 종이신문이 나오고, 나머지 20여 개 국가에서는 인터넷으로 만날수 있다. 아시아 지역에선 한국이 처음으로 신문으로 나오게 된다. 한국판의 경우 70%의 프랑스 번역기사와 30%의 국내 기사를 혼합해서 싣는 독특한 편집을 가질 예정이다. 따라서 현재 미국적 시각이 팽배한 한국사회에 또 다른 시각을 선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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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발족한 한미FTA반대범국민서명운동본부는 특별한 의미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명운동본부의 캐치프레이즈는 ‘12014277+1’이다. 처음에 나는 이 숫자가 뭔가 했다. 돈의 액수여도 천이백만이 넘으면 거액인데, 12014277은 사람의 수라고 한다.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찍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숫자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득표수 12014277를 보며 새삼스런 통증이 지나갔다.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씨는 지금의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다. 정치계에서 오래 밥 먹고 산 이들보다 그의 정치력, 행정력, 실무 능력이 탁월할 거라고 믿어 그를 뽑은 게 아니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말로는 하나같이 ‘국민을 위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정치인들의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정치사에 신물이 나버린 우리는 정말이지 민중의 소리에 진심으로 마음 기울일 수 있는 정치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고, 거칠지만 순수해 보이는 노무현씨에게 그 가능성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열망이 컸으므로 배신감의 체감지표가 상대적으로 클 수도 있겠지만, 체감지표를 떠나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는 그를 당선시킨 민중의 열망에 반한 것이었다. 이라크 파병에 이어 새만금공사 재개,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한미 FTA 추진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 정책 과정은 많은 의혹과 분노 어린 시선을 받았다. 그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자기방어기제다. 그는 언제나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중병에 걸린 듯하다. 기층 민중이 아파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진심으로 민중을 사랑하는데 왜 민중은 자기를 사랑해주지는 않냐고 반문한다. 얼마 전 루마니아를 방문한 노 대통령이 교민 간담회에서 털어놓았다는 말을 기사로 접하면서 정말이지 실소를 넘어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는 이유가 국민들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란다. 나는 열심히 뛰고 있는데 더 뛰라고 채찍질하니 (힘들지만) 하여간 열심히 뛰어보겠단다. 앞뒤로 사족을 덧붙여놓긴 했지만 지지도 상실의 현실에 대한 그의 판단의 현주소가 이 수준이다. 귀도 눈도 모두 닫혀버린 듯한, 그의 기묘한 순교자의식이 나는 정말 끔찍하다.

애초부터 ‘정치적’이었던 인간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정치가 인간의 심성을 얼마나 황폐하게 할 수 있는지 처절하게 반증하는 정점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게 될 것 같아 측은하다. ‘한미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국민들이 많은데 약효가 그리 길게 가지는 않겠지만 이럴 때 제가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만나면 한동안 조용하다. 이번에도 한미관계를 탈없이 조정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이 사람은 어느 다른 우주의 외교 현실을 사는 대통령인가. 국가 경영이나 외교가 그런 투정이나 로맨스 같은 발언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현실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 끔찍해 신문 보기 두렵다는 이들이 많다. 신문 보면 욕설이 나와 홧병이 도지니 딴 얘기 하자는 이들. 요즘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유명 대사가 ‘나도 그때 노무현 찍었다’이다. 그를 당선시켰던 사람들이 갖게 된 기묘한 열패감과 정치적 냉소라는 이 병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병을 깊게 만든 당사자는 여전히 자기성찰의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국민들의 희망 수준이 너무 높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말이 떠올랐다. “희망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것이다.” 소설 <고향>에서 노신이 토로하는 희망론은 동시에 절망론이기도 하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그 길이 절망의 길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가고 있는 길은 이전의 대통령들에게서 신물나게 보아왔던 그토록 수많은, 속칭 ‘정치 지도자’들이 닦은 전형적인 소통불가능한 길로 이미 접어든 지 오래인 듯하다. 그리고 그 길의 정점에 있는 한미FTA체결을 막아낼 수 있는 길은, 순수한 열망으로 ‘노무현’이라는 상징을 만들어냈던 12014277명의 힘으로부터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냉소는 세계에 절망한 이들이 세계를 향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미래가 통째 걸린 한미FTA 앞에서, 새로운 정치열망의 상징을 만들어냈던 12014277명의 사람들이 동력이 되어 새로운 12014277을 창조해야 할 때가 지금이지 않을까. 상징을 넘어서는 상징을 만들기 위해선, 죽어버린 상징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 김선우/시인
정부가 밀실협약 체결하듯 쉬쉬하며 한미FTA를 밀어붙이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간 많은 공론화가 이루어졌고 공론화되어 문제제기가 많아지자 그제서야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체한다. 국민 누구도 한미FTA가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지 모를 때로부터 출발해 ‘한미FTA 권한 쟁의 심판’을 청구하는 데까지 왔다. 비전이나 희망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이 나라 정치 현실에 희망을 만드는 일은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걷는 것이다. 내 미래의 생활을 속속들이 간섭하고 옥죄게 될 엄청난 협정에 대해 열린 광장에서 충분히 함께 이마를 맞댄 뒤 정말이지 국민투표를 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정치하는 놈들 다 그렇지 뭐, 라는 열패감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우리 현실의 주인이라는 것을 축제처럼 누릴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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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9-14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때 노무현 찍었지 ㅡ..ㅡ;
이젠, 넌 찍혔어...
 

 

미국은 항상 전세계 사람들에게 미국이 많은 나라에 금융원조를 하는 ‘가장 관대한’ 국가라고 말한다. 통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도주의적 관대함인가, 아니면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인가?

팔레스타인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곤 하는 미국의 실리적 금융원조 정책의 사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된 1994년 미국은 유럽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대한 금융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도움이 팔레스타인의 양보에 대한 대가임은 명백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특히 안보문제에서 이스라엘과 협력하기로 결정했고,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란 낙인이 찍힌 세력들과 싸우기로 했다. 미국과 그 동맹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의 요구를 따르고자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 한 달 단위로 돈을 주기로 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에 금융원조를 계속 제공하면서 자치정부의 경제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첫째,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경제를 압도적인 이스라엘 경제에 병합시키는 자유시장 정책을 강요했다. 둘째, 팔레스타인의 제품 생산을 중단시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봉급에 의존해 살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미국의 국제 경제정책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강요한 조건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팔레스타인에선 경제적 헤게모니를 세계은행이 아닌 이스라엘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미국은 금융원조를 통한 식민지화 구상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은 유럽 나라들과 함께,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동의하지 않고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스라엘에 양보했던 것들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면 자치정부에 대한 금융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하마스는 자신들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뜻을 배신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언제나 민주주의가 인간 진보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해 온 미국이 팔레스타인 선거 결과를 극도로 불쾌하게 여긴 것은 윤리적으로 놀라운 이분법이다. 중동의 모든 이들에게 미국이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 맞게 재단된 민주주의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윤리·도덕은 미국이 하마스 정부 붕괴를 희망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금융제재 상황에 몰아넣기로 결정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협력하면서 유럽과 꼭두각시 아랍정권들, 과거 팔레스타인 여당인 파타에 속한 일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팔레스타인에 지점을 둔 아랍은행들을 동원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공무원들은 7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땀이 아닌, 외국의 경제원조에 의존해 살았던 것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팔레스타인에서는 파업이 벌어지고, 공무원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하마스가 미국의 압박을 받는다는 것은 알지만, 배고픔을 해결할 대책은 내놔야 한다고 요구한다. 맞는 주장이지만 파산 상태인 정부가 그들에게 돈을 줄 가능성은 없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스라엘, 미국과 협력하는 반하마스 세력이 이 파업을 선동했다고 지적한다. 이들 세력의 바람대로 하마스 정부가 사라진다면 봉급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팔레스타인의 굴욕적인 대외 의존의 상징인 경제문제는 여전할 것이다.

미국의 ‘관대함’은 윤리적이지 않다. 아랍권에서 미국의 접근법은 전형적이며, 반드시 반작용을 일으킨다. 중동의 누구도 이유 없이 미국과 싸우려고 나서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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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난제로 알려진 ‘푸앵카레의 추측’을 푼 공로로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 수상자로 뽑혔음에도 이를 거부한 러시아 ‘은둔 천재’ 그리고리 페렐만(40) 이야기가 최근 국내 신문들까지 장식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류 매체들이 이 이야기를 일종의 ‘괴담’으로 처리했다. 황우석처럼 최고 과학자로 행세하여 국회나 들락날락했으면 ‘정상’이었을 터인데, 미국 우수 대학의 교수직을 거부한데다 상까지 사양하고 숲에서 버섯이나 따러 다니고 한 달 5만원짜리 어머니의 연금으로 살다니, ‘비정상’의 은둔 천재란 논리다. 그런데 국제수학연맹의 회장 존 볼이 페렐만의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삼고초려를 했음에도 수상은커녕 국제수학연맹 대회 출석까지 거부한 페렐만의 행동이 정말로 ‘괴이’한가? 나는 반대로 그가 과학의 정도를 걷는 게 아닌가 싶다.

수상 거부 이유를 물은 기자들에게, 페렐만이 학계와의 접촉을 피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수학계 보스 중의 한 사람이 푸앵카레의 추측을 푸는 데서 자기 제자들의 역할을 과장한 데 대한 한심한 심정을 피력하고, “다수의 수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정직하다고 해도, 정직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횡포’를 그냥 수용하는 순응주의자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진흙탕 싸움에 자신까지 휘말릴 것 같아 수상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학계의 한 ‘사단’으로 비롯된 그의 개인적인 상처도 이해할 만하지만, 그의 문제 제기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학문이 권력화한 세상에서는, 공부 자체가 좋아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옳을까?

특정 스승도 없고 제자도 거의 없었던 신라시대 원효부터 교수직을 가진 일이 없었던 함석헌까지, 페렐만과 같은 탈속적 처신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이들은 한국 지성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통적인 학맥 의식에다가 일본형의 근대적 권위주의가 겹쳐져서 그런지 국내 일반 학계의 권위주의는 세계의 ‘평균’보다 훨씬 심할 것이다.

학계 안의 권력 관계의 최대 문제는 무엇인가? ‘보스’의 일개 가설이 곧바로 진리로서 위치를 차지하는 소통 구조의 왜곡은, 특히 객관적인 입증이 불가능에 가까운 인문과학에서는 가장 큰 폐단이 되지 않나 싶다. 예컨대 양반귀족의 특권을 확립시키고 천민들의 신분적 예속을 가일층 강화시킨 조선왕조의 출현을 우리가 ‘역사의 진보’로 안다든지, 국부를 자신의 가산처럼 운영하면서 외세에게 변변한 저항을 하지 못한 고종을 ‘계몽 군주’로 보는 논저를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은 학계의 위계질서와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진리 탐구는 보스가 공인한 ‘진리’만을 대상으로 탐구하는 것으로 둔갑된다.

권력이 진리 행세를 하는 세계에 대해 페렐만이 느낀 혐오는, 면역성이 좋은 신체의 병균에 대한 정상적 반응이다. 문제는, 수요자가 소수 전문가인 수학에서는 두문불출해서 자기 작업에만 매달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어도, 시민의 세계관을 형성해야 하는 인문과학에서는 공론의 장을 ‘보스’들에게 넘겨주고 은둔 생활하는 것이 직무 유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학계가 건강해지려면 ‘보스’들이 지배하는 대학의 바깥에서 연구와 강의 공간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고, 학계의 내부 질서에 대해 실명 비판이 가능한 공개적인 토론이 한 번이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토론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격이 된다는 게 지금 학계의 슬픈 현실이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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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1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부 비판이 불가능한 학계의 현실, 당신들도 젊어선 그게 답답했을 텐데, 늙어서는 고압적인 분위기를 앞장 서서 유지하다니, 참 나빠요ㅡ.ㅡ;;;

로쟈 2006-09-12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학계'는 러시아나 중국까지도 다 예외가 없는 것 아닌가요? 노르웨이는 모르겠지만...

라주미힌 2006-09-1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연하게 동양쪽이 심할 것 같다라는 생각은 드는데, 범위가 더 넓나보네요? :-)
 

사전에서 ‘촌지’를 찾으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 사전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성을 드러내고자 주는 촌지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촌지는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최소한 불이익은 받지 않기 위해 뿌려지니까.

내가 유일하게 아는 땅부자가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특실의 화려함에 취해 병문안이란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릴 무렵 담당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환자가 많기로 소문난 분, 난 황망히 자리를 피했고, 밖에서 교수님이 나오시기만을 기다렸다. 문틈으로 봤더니 교수님은 환자 옆에 서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계셨고, 그 상담은 30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 분의 회진을 따라간 적은 없지만, 학생 때 내가 겪은 회진은 그런 다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인턴이 먼저 들어와 텔레비전을 끄게 하고, 교수님은 잠시 후 전공의들과 실습 학생들을 우르르 대동하고 환자 옆에 선다. 레지던트가 환자에 대해 보고를 하면 교수님은 한두 마디 말씀을 하신 뒤 다음 환자로 이동한다. “별 이상 없죠?” 환자가 입원 후 교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때이건만, 환자들은 1분도 아깝다는 듯한 교수의 태도에 눌려 하고픈 질문을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그럴 것이다. 일인당 맡은 환자 수가 많고,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려면 시간이 없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리 중한 병도 아니고, 이렇다 할 연고도 없는 병실에 30분이 넘도록 머무는 교수님의 모습은 좀 씁쓸했다. 내 지인이 제공할, 혹은 제공했던 많은 촌지가 아니었다면 교수님이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하셨을까?

그 병원에서 오래도록 부친의 간병을 했던 내 친구는 ㅇ 교수가 아니면 아버지께서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한다. ㅇ 교수는 물심양면으로 친구 부친을 돌봐주셨는데, 회진 때 말고도 병실에 틈틈이 문병을 왔고, 궁금할 때마다 ㅇ 교수의 방으로 찾아뵐 수 있는 특권도 누리게 해줬다. 교수가 관심을 갖는 환자인지라 친구 아버님은 간호사와 전공의들한테도 따스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는데, 전부는 아니겠지만 친구는 ㅇ 교수의 친절을 자신이 수시로 제공했던 촌지 덕분이라고 말한다. “촌지를 받고도 여전히 성의가 없는 교수님들도 많은데 ㅇ 교수는 얼마나 훌륭하니?”

그럼에도 친구는 ㅇ 교수에게 일말의 서운함을 표시한다. “아버지께서 4년이나 입원해 계시느라 매달 내야 할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었어.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촌지를 한 번도 거절 안하신 거 있지. ‘그냥 입원비에 보태 쓰세요’라고 한번만 말해줬으면 그 교수님을 더 존경했을 텐데 말이야. 설마, 그런다고 우리가 촌지를 다시 거둬가겠냐.”

몇 해 전, 환자 보호자에게 무안을 줘가면서 촌지를 돌려준 교수가 있었다. 그 얘기가 그 병원 보호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런 교수가 워낙 드물기 때문이리라. 사회학자 김종엽은 〈시대유감〉에서 촌지가 부도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거래에서 촌지를 주지 않아 손해를 보게 된다면, 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사람은 바로 촌지를 주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것은 도덕적 자유의 행사 대가이며, 자유인은 자유의 행사 대가를 스스로 부담하는 자이다. 그러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촌지를 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자녀가 된다. 이런 상황은 일종의 인질극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사람이며, 촌지는 몸값이 되는 것이다.”

병원 의사가 환자 보호자에게서 받는 촌지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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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9-08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09-0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학계의 촌지를 고발하는 칼럼이잖아요 :-) 생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