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의 세계에는 절묘한 측면들과
아무리 좋게 보아도 날림으로 된 측면들이 함께 존재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 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느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날림의 세계를 보며 절망하고
절묘한 세계를 보며 열광한다...
엉망진창 땜질의 차원을 열어 젖힐 때 쏟아지는 이 난장판의 클루지는
눈 먼 자들이 눈을 떴을 때의 세상 풍경이다.
폭력적으로 권력자들은 섹슈얼리티의 배를 채우고,
'선지자'스러운 지식인들은 까칠함으로 대중과의 거리유지에 안간힘을 쓰며,
대중은 밥벌이 이데올로기에 갇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 된 현실은 지독한 감옥이다.
그 안에 있는 인간은 모순만이 증폭된 체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되어간다..
걸리기만 해봐라... 소마틱 마커는 행동의 반경을 제어하고 실행하게 한다.
이성은 단지 감정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진화는 최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최악의 상황만을 비켜가고 있다.
맹점을 가진 눈으로 보며, 휘어진 척추로 걸으며, 과잉과 대량의 소비에 의지하며 제 삶을 부르는,
차마 신의 창조물이라 부를 수 없는 단지 인간인 것을, 인간들은 잊게 만든다.
지나친 확신.. 근거 없는 자만... 흔들리지 않는 경제적 인간들의 식욕...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수 많은 사실들은 휘청거리고 있지만, 그 위에서 같이 흔들리고 있음을
인지 못한다. 그리고 이건 단지 순간이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것도 클루지겠지.. 위안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바닥에서 치솟는 상상이라도 맘껏 해야겠지.
인간 역사에 관한 이해는 "현재의 관점에서 의미가 없는 과거의 유물"을 통해서 가능하다.
불합리하고 불필요하고 불완전한 본성을 통해 진정한 역사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선명하게 발견되는 것은 끊임없이 재생되고 반복되지만 학습을 모르는 단방향을 유지한 체,
욕망의 상승과 하락의 곡선을 따라 다니는 버블과 침체의 미래가 닫힐 줄을 모른다는 점이다.
현재가 곧 과거이고 미래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상...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르는 노력들...
기억과 기록조차도 존재의 기반을 흔드는 위험한 시도들...
날이 선 인간이 되어 세상을 비집고 들어가면 달라질까..
아닌 줄을 알면서 아닐 수 있음을 왜 망설이는지...
관성은 비겁한 자신과의 타협임을 알기는 하는지...
일상과 세계, 인간에게서 모순을 빼면 과연 동작할 것인가..
클루지와 행동경제학은....
인간과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라
물이 새고 바람이 드는 인간 내면의 '틈'임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