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리는 희망, 마주보는 절망
한겨레
▲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폭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를 설명하는 이론 중에 ‘학습된 무기력’이 있다. 오랫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보면, 정당방위나 탈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기력해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개념은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무기력은 여성 피해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해 여성이 폭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학습된 무기력’ 때문이 아니라 ‘학습된 희망’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남편의 폭력이 사소한 것이며 언젠가는 나아진다는 희망을 설파하고, 이런 ‘희망’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얼마 전 서울대에 특강을 갔다. 대학본부 앞에서 “황 교수 연구 재개”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던 지지자들이, 나와 동행한 학생들 길을 막고 “학생들이 해야 할 일을 생계를 팽개치고 우리가 하고 있다”며 ‘애국 시위’ 동참을 요구했다. 며칠 전에는 황우석씨를 지지하는 30대 남성이 차를 타고 서울대 건물로 돌진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인생의 문이 닫힐 때 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말라고 하지만, 나도 닫힌 문을 계속 두드려 대는 타입이라 그들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한심’하기보다 마음이 아팠다. 착각과 망상도 춥고 외로운 밤바다에서는 등대가 된다. 그들은 마치 사랑하는 자식의 주검을 붙들고 숨소리가 들린다고 외치는 부모 같았다. 집착도 때론 사는 힘이어서, 그들에게 황우석은 아직도 희망인 것이다.

희망은 무조건 좋은 것일까. ‘사람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은 누구를 위한 현실일까. 대개 우리가 품는 희망은 이미 가능성이 없거나 혹은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중심 지향성’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국민에게 희망을 제시하겠다’는 정치인은 일단 의심한다. 지도자는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는 사람 아닐까(아마 후자는 인기가 없겠지만). 공지영 소설에서 수녀님의 면회를 거절하는 사형수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지옥입니다.” 연인에게 ‘차인’ 사람에게 가장 힘겨운 일은 상대방의 불분명한 태도, 이른바 ‘희망 고문’이다. 닿을 수 없는 항구에 닻을 내리라는 것인가. 이룰 수 없는 희망은 가혹할 뿐이다.

‘새마을운동’과 ‘상록수’의 정신으로 희망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는, 계속 상승하는 삶이 실제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상승의 그 순간, 바로 내려가야 한다. 반대로,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서 시작한다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어오르는 일만 남는다.

절망은 말 그대로 모든 바람을 끊어 내는 일.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 현실을 똑바로 보자는 의미가 아니다. 바람을 멈출 때, 고민이 시작된다. 나 역시 늘 “그런 희망이라도 없으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한탄하지만, 사실 살아가는 의미를 묻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절망은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그래서 절망은 사유의 광맥이다. 행복은 모든 불행을 살아내는 것. “꿈이여, 다시 한번” 대신, 나날이 산더미처럼 생기는 문제와 마주하며 고생과 고민을 서로 권유하고 대화하는 삶이 차라리 위로가 아닐까.

(이 글은 사이토 미치오의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에서 도움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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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불리는 사람들

97년 한여름 밤 처갓집에서 동서와 웃통 벗어젖히고 한참 술잔을 주고받을 무렵 잡지 기자로 일하던 후배가 펑크 난 원고를 때워주라 전화를 했다. 글을 써본 적 없는 나에게 그런 청을 한 것부터가 희한한 일이었지만 그놈의 술이 흥을 돋웠던지 아니면 사는 게 워낙 팍팍했던지 동서가 돌아간 새벽녘 식탁에 혼자 앉아 뭔가를 끼적거렸다. 그런데 그게 빌미가 되어 이듬해 초 나는 한 영화주간지의 고정 칼럼을 맡게 되었다. 얼떨결에 ‘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칼럼이 여섯 해나 이어진다거나 필자가 아니라 저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쓸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쓸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름밤 술김에 썼던 것이나 영화주간지에 처음 쓴 것이나 똑같이 ‘날라리의 영역인 록음악에 깃발을 꼽고 주인 노릇을 하는 모범생들 욕’이었던 건 그런 난처함의 반영이었다. 그렇다고 시작하자마자 꼬리를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를 어째, 한참 낑낑거리다 불현듯 방안이 떠올랐다. ‘그래, 내 이야기를 쓰자.’
독자로서 내 체험 때문이었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른바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가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이 사람들은 왜 제 이야기는 안 하는 걸까’ 였다. 그들은 언제나 구름 위에 앉은 양 세상 이야기를 했고 제 이야기나 일상을 들먹이는 건 어딘가 품위 없는 짓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김수영이라는 거의 유일한 예외를 빼놓고 말한다면, 내가 보기에 한국의 지식인들이란 뇌는 있으되 자의식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의 당연한 하나로서 아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내가 처음 쓴 아이 이야기는 98년에 쓴 ‘딸 키우기’라는 글이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한 여자를 생산해놓은 한 남자의 소회를 적은 글이었는데 지금 읽어보면 그 절절한 필치에 빙그레 웃음짓게 된다. 그 글에 등장한 다섯 살짜리 내 딸 김단은 지금 “내 초경은 언제일까” 궁금해 하는 열세 살 여자다.
아이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나에게 또 다른 예상하지 못한 의미가 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아이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내 글과 내 삶을 일치시키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아이하고 있었던 일을 소재로 내 사회적 견해를 쓰면, 그 사회적 견해가 내 일상을 다시 거꾸로 검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 아이를 결부지어 어떤 이야기를 해놓고선 그 이야기와 다르게 행동하긴 어려웠다. 하기야 세상에 어떤 악한이 제 새끼 앞에서 한 말을 쉽게 거스를 수 있겠는가.
이제 나에게 아이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내가 글 씁네 지식인입네 하다가 주둥이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하는 매우 강력한 장치가 되었다. 그런데 갈수록 아이에 대해 쓰는 것보다는 아이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뜻밖의 것들을 종종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언젠가 나는 김건(김단의 동생, 열 살 남자)과 땅에 대해 대화하다가 가슴이 저렸다. 그는 말했다. “아빠, 그런데 왜 어른들은 땅이 자기 거라고 하는 거야?” 아이들, ‘아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영원한 선생이다.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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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칼럼] 노무현 정권의 비밀

비밀은 전략의 고갱이다. 영국 속담이다. 기실 모든 권력은 자신의 속살을 숨긴다. 아무 것이 없을 때도 마치 뭔가 있는 듯이 어루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권이 목매는 풍경을 두고 곰비임비 추측이 이어진다. 어떤 비밀이 있을까. 보수는 물론, 수구세력 일각에서도 갸우뚱한다. 왜 그럴까. 양극화를 해소한다면서 양극화를 부채질할 협정에 저돌적인 노 정권의 깜냥을 저들조차 이해할 수 없어서다. 대한민국의 미국 예속으로 벅벅이 분단체제를 영구화할 협정을 아무런 여론수렴도 없이 강행하는 노 정권 앞에 군부독재 세력까지 입을 다물지 못해서다. 그래서다. 장안의 화제다. 언제나 정치인 노무현의 ‘깊은뜻’을 헤아리는 지지자들은 여러 가지 ‘비밀’로 풀이한다.

무엇보다 남북관계를 내세운다.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보장받았다는 ‘큰거래’설이 나돈다. 하지만 개성공단이나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조지 부시 정권의 살천스런 눈초리가 풀리는 조짐은 없다. 현실은 거꾸로다. 자유무역 협상과 동시에 노 정권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까지 덥석 받아들임으로써, 동북아 정세가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진실은 미국의 ‘보장’을 받아 진전되는 남북관계는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또다른 비밀은 미국의 압력이다. 수출로 살아가는 한국 경제가 미국 압력을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다. 노 정권을 비판할라치면, 대뜸 현실을 모른다고 시쁘게 여긴다. 하지만 압력론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 손사래쳤다. “어떤 압력”도 없었다며 “우리가 주도적으로 여건을 조성하여 우리가 제안하여 성사된 것”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결국 ‘큰거래’도 없고 압력도 없었다. 적어도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 대통령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우리 국민의 자존심이 많이 걸려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생각은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도 불거진다. 그가 “책임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며 제안한 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신감”이다. 결국 비밀이 있다면 하나다. 대통령이 거듭 밝혔듯이 자존심이다.

자신감과 자존심. 딴은 좋은 말이다. 카네기 따위의 성공처세술에 단골로 등장한다. 하지만 일찍이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경고했다. 어리석은 권력자들이 지니는 게 바로 자존심임을. 게다가 자신감이 무지를 밑절미로 할 때 폐해는 무장 커진다. 아니, 차라리 자신의 무지를 알면 전문가나 지식인에게 귀라도 기울인다. 가장 큰 문제는 어설프게 아는 일이다. 대통령이어서 더 그렇다. 최고의 의사결정권을 지닌 걸 마치 최상의 판단력을 갖췄다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보라.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자’임을 사뭇 진지하게 자처하는 모습을. 썰렁한 희극이다.

임기 내내 자신의 실정을 언죽번죽 남 탓으로 돌려온 대통령의 언행에 비추어본다면, 최악의 ‘비밀’도 가설이 될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될 때, 경제 실정을 모두 그 탓으로 돌리려는 정략은 아닐까. 임기를 마치며 진보세력의 무책임한 반대로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노라고 실패를 합리화하지 않을까.

노 대통령은 자유무역 협상을 강행하며 국민에게 자신감을 주문했다. 실소를 머금으며 명토박아 둔다. 이땅의 민중은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무책임한 자신감이 없을 뿐이다. 도박을 하지 않을 뿐이다. 남 탓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다. 국민의 자존심 걱정은 접기 바란다. 겸손하게 대통령 자신을 성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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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교수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체세포 복제 위조 논문 건으로 서울대학교에서 면직되었다. 가장 투명하고 정직해야 할 과학계에서 사진 조작으로 체세포 복제에 성공한 것처럼 꾸며 논문을 작성함으로써 잠시 세계 학계를 놀라게 하고 허명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소장 학자들에 의해서 체세포 복제 연구 결과가 거짓이라고 지적되면서, 결국 황우석 교수는 교수 직도 박탈당했다.
 
 황우석 교수 사건을 보면서 느낀 점은 적어도 자연과학계는 적어도 자체 검증 과정을 가지고 있어서 궁극적으로 거짓과 허위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사소한 오류도 집단적인 검증을 통하여 지적되기 때문에, 왜곡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학문 공동체의 역할이 학계의 권위와 신뢰를 만들어 준다. 

  이와는 달리 언론 매체에 언급되는 정보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고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매일같이 언론 매체에서 전달되는 정보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정파적 입장에서 혹은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검증이 안 된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들이 매체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만약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와 같이 철저하게 진위를 따진다면, 아마도 상당 부분의 기사들이 문제가 되어 정보 제공자나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이 면직을 당하거나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사로 전달되는 정보에 대해서 독자들도 언론사들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한국 신문들은 그야말로 허위와 날조에 가까운 정보까지 쏟아내고 있다. 신문의 기사들은 지나치게 정치화해 이제 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졌다.

  최근 사회 양극화를 둘러싼 언론 매체들의 보도가 대표적으로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동아일보는 신용평가 기관 무디스 부사장인 토머스 번의 권위를 빌려 한국의 사회 양극화가 프랑스나 캐나다보다 심하지 않다고 보도하면서, 연초부터 사회 양극화를 문제로 제기한 정부를 비판하였다. 마치 한국의 사회 양극화가 심하지도 않은데, 노무현 정부가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사회 양극화를 부풀려 사회문제로 제기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엉터리 통계에 기초한 엉터리 발언을 진실인 양 보도

  한마디로 이것은 틀렸다. OECD 국가들의 소득 불평등을 연구한 최근의 모든 연구 결과들은 한국의 소득 불평등 정도가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 지니계수로 측정한 불평등 지수가 한국의 경우 0.358를 넘는 수준이었고, 프랑스는 0.273, 캐나다는 0.301이었다. 스웨덴 0.243, 덴마크 0.225, 독일 0.277 등과 비교하여 한국의 소득 불평등은 대단히 높은 편이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 지니계수가 1996년 0.295까지 낮아졌다가, 경제위기 이후 급격히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미국의 소득 불평등보다 낮지도 않다. 미국의 지니계수는 0.357로 한국과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흑백 차별이 심하고, 도심 내에 대규모 흑인 슬럼가가 형성되어 있어서 부익부 빈익빈이 극단적인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불평등 정도는 대단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빈곤층의 비율도 17%로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고, 유럽보다 두세 배 높은 수준이다.

  무디스의 토머스 번 부사장이 정말로 이러한 발언을 했다면, 한마디로 무디스 사는 신용평가 기관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 정도로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발언을 했다면, 무디스의 평가는 정말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자료를 거론하고 있으나, 세계은행이 사용한 자료는 비교가 불가능한 소득 자료에 기초하고 있다. 소득 불평등은 조세 전과 조세 후가 완전히 다르고, 전국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가, 도시 가계만을 대상으로 하는가, 아니면 1인 가구를 제외한 도시 근로자 가계만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 그러므로 국제적으로 비교 가능한 소득 불평등 분석은 세계은행이 아니라 룩셈부르크 소득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몰랐다면, 무디스는 정말로 무능한 신용평가 기관인 셈이다. 또한 이러한 통계에는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볼 수 있는 부동산 투기로 인한 자산 불평등은 전혀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은 무디스의 권위를 빌리든 신문사의 권위를 빌리든, 거짓 정보와 거짓 지식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거짓이 정말로 무지(식)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면 분명한 것은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반성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언론사들이 보여주는 무지와 무책임은 대중 선동가의 덕목이지, 책임 있는 언론의 덕목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선진화하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언론의 자기 반성과 개혁이다. 언론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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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3-30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놈들이 하도 많다 보니까
만성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제기네요.

비연 2006-03-30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짓말은 이제 지겨울 정도죠...ㅠㅠ 퍼갈께요~
 
 전출처 : 마늘빵 > 좌파 신자유주의(홍세화)

좌파 신자유주의


   언어 사용의 혼란은 사회의 혼란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좌파’가 아니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말한 점도 흥미로운데, 이에 대해, 한나라당에선 노대통령을 ‘좌파’라고 비판하고 다른 쪽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을 응수한 말이라는 그럴 듯한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보다는 “말은 ‘좌파’로 하고 행동은 ‘신자유주의’로 한다”는 게 더 정확한 해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좌우’라는 말이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1789년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쳐부수면서 시작된 대혁명은 급기야 군주제를 지속한 것인가 아닌가로 치닫게 됩니다. 그 때 입헌군주제에 찬성했던 의원들이 의회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고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의원들이 의회 왼쪽에 모였던 일에서 좌우라는 말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좌우의 차이는 그렇게 분명했는데, 결국 1792년에 공화국 이 선포되고 루이16세는 ‘루이 카페’라는 평민의 이름으로 1793년 1월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프랑스의 군주제가 종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5년 권세 이후 몰락하면서 왕정은 복고되었고 1848년 2월 혁명까지 군주제는 지속됩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마침내 앙샹 레짐은 끝나는데,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모태인 자유주의가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 게 바로 이 때부터입니다. 구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은 신분질서와 토지의 지대에 바탕을 둔 귀족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 때까지 구체제에 맞섰던 시민계급은 무산자계급과 유산자계급으로 나뉘어 전자는 사회주의(좌)를, 후자는 자유주의(우)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거칠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1848년에 나온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고 시대의 반영물이었지요.

   좌우는 시대의 변화에 조응합니다. 구체제 아래 ‘좌’였던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그러자마자 곧 ‘우’에 자리를 잡습니다. 과거에 스스로 ‘좌’라고 했던 사람도 일단 권력을 장악 玖 ‘우’에 자리 잡으려는 경향이 강한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각 개인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재산을 축적하면 점차 우경화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철칙은 아닙니다만.

   대개 사람은 사회 환경의 변화에 조응하면서 스스로 바뀝니다. 천천히 바뀌기 때문에 바뀐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박정희 정권의 사형수였던 이철씨가 오늘 철도공사 사장이 되어 신자유주의 전선에 서서 KTX 여승무원들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과연 청년 학생 시절의 그는 자신의 오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불성설이라는 점에서.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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