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과 유시민 의원은 경제를 배우시오!
[논단] 장사의 원리, 시장의 원리, 경제의 원리 그리고 분양원가 공개

 

2002년 12월 대선에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대국민 공약 사항으로 걸고 나온 대선후보가 노무현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얼마 안 있어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불가를 천명하고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높은 봉급과 약간의 명예와 향후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 지급될 예우와 적지 않은 연금이 보장되는 자리로 취업을 시켜 준 주인들에게 일개 종복(從僕)의 몸으로서 주인을 배신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취업시켜 주면 반드시 하겠다고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이때 그를 선택한 주인들은 속았음을 느끼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기에 노무현과 열린 우리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또 재보선 참패로 호된 댓가를 지불하게 했다.
 
 5년 임기가 보장된 썩 괜찮은 직장을 두 손아귀에 거머쥔 노 대통령이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가 불가함을 천명하면서 한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장사는 남아야 하며 아파트도 장사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 물론 쉬운 말로 직설적인 화법을 쓰는 노무현 대통령인지라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 말은 노무현의 경제에 대한 지식과 철학이나 한 나라를 이끄는 리더가 된 자로서의 역할이나 책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말 한심한 사람이라는 증명이 될 만한 발언이었다.
 
그 이후 얼마 안 있어 열린 우리당에서 제법 똑똑하다고 일컫어지며 또 전공이 경제학이었다는 유시민의 의원의 유명한 레토릭도 나왔다. "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시장의 원리에 반한다"는 말이다." 
 
이 두 사람에 의해 만천하에 공개된 발언이 청와대의 주인과 열린 우리당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공히 놓쳐버린 더 중요한 원리가 있음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장사의 원리도 아니고 시장의 원리도 아닌 경제의 원리다. 그리고 이것은 장사꾼이 아니고 이론 경제학자도 아닌 정치가들과 국정을 담당할 리더의 자리에 있는사람들이라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너무나 중요한 원리다.
 
그럼 정치인과 리더가 반드시 가져야 할 경제의 원리가  장사의 원리, 그리고 또 시장의 원리와 어떻게 다른가? 이를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와 관련해서 알기 쉽게 설명하겠다.
 
1. 장사의 원리

현재 내가 관계한 사업은 줄곧 수출에만 주력하다 내수 확장을 위해서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에 주요한 고객을 몇 분 확보해 두고 있다. 우리 회사가 만든 것을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 공급하고 그 샘플을 보고 다시 외국에 수출하는 오더를 받으면 또 우리 회사에서 간접적으로 수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종의 컨소시엄을 마련한 것이다. 한데 얼마전 한 남대문의 한 고객이 와서 이런 말을 했다. 그 사장님은 우리 회사에 상당한 매출을 내고 있는 분이셨는데 어느 날 우리 회사 매장 직원에게 자신이 주문하는 제품의 원가를 공개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난 무척 황당했고 또 기분도 심히 불쾌했다. 그후 주문한 물건을 찾아가면서 또 그 말을 하길래 일단 웃으면서 그렇게는 할 수 없노라고 거절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말을 그 고객에게 가볍게 던져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저희 회사에 자본을 투자해서 우리와 동업을 하시면 자연스럽게 원가를 알게 되실 텐데" 물론 그 고객이 우리 회사와 동업을 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의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본다. 내 본심은 " 동업을 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제조업체의 최종가격이 아닌 원가를 공개해 달라는 주장을 하실 수 있느냐?" 하는 가볍고 간접적인 핀잔이었다. 이는 동시에 그 분이 바르게 판단하기 위한 데이터를 제공한 후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은 결례라는 것을 넌지시 밝힌 말이었다.
 
이것이 공급자 중심에서 본 장사의 원리다. 경제를 장사에 원리에 기준을 두다 보면 과거 실학자 박지원이 경제의 왜곡 현상을 풍자했던 <허생전>에서 허생이 대추 밤 등 몇몇 제사용(祭祠用) 상품을 매점매석해서 최대의 이익을 올리면서 민생을 도탄으로 이끄는 것도 합리화된다. 이것이 박지원 이후 200년도 더 지난 21세기 한국의 현실에서 아파트 가격 폭등을 이끈 장사의 원리다. 누구든지 돈을 투자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익을 많이 남기면 되는 것이다. 이런 원리가 국가 경제를 지배하게 될 때 국민경제에는 태풍이 일고 시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이 태풍에 목숨을 잃고 도탄에 빠지고 피해를 보는 계층은 돈없고 힘없는 서민 계층이다.
 
2. 시장의 원리

그럼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유시민 의원이 잘난 체 하면서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한 발언을 살펴 보자. 유시민이 "시장의 원리"는  아파트라는 재화의 수요와 공급을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 시장의 원리로 중요한 경제 문제가 해결되는가? 많은 경우 그렇지만 국민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몇몇 재화의 경우는 절대로 그렇치 않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왔다. 국민경제를 시장의 원리에만 맡겼을 때 부작용이 너무나 심각해서 가장 극단적으로 돌파구를 찾아보자고 한 것이 공산주의였다.
 
시장의 원리가 경제적 약자의 이익을 제대로 반영해 주었다면 인류 역사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생겨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현재 서구 유럽의 선진국들은 의식주 등에 밀접한 재화를 배분할 때 절대로 수요 공급 중심의 시장의 원리에 맡겨두지 않는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그렇고 심지어 자본주의 핵심지라는 뉴욕에서도 임대 시장 같은 것은 <렌트(RENT) 안전법>같은 법률로 시장가격의 1/10이나  1/20 정도에서 서민들이 소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시장의 원리가 아닌 사회복리국가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가 입안한 법률이 강제하면서 깊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장이라는 것도 재화 시장, 서비스 시장, 노동시장, 외환시장, 금융시장, 지식 시장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알기 쉬운 예로 노동시장만 해도 장사의 원리나 시장의 원리에만 맡겨두면 대부분의 민중들은 최저생계비도 획득할 수 없는 맬더스의 인구론 시대가 지배하게 된다. 최저임금, 연금, 생리휴가, 출산휴가, 퇴직금 이런 제도는 시장의 원리나 장사의 원리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경제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외환시장도 절대도 시장의 원리에 맡겨두지 않는다. 지금 대부분의 국가는 고정변동환율제도이다. 시장의 원리를 살리되 국가에서 간섭해서 외환의 수요공급에서 왜곡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3. 경제의 원리

경제의 어원은 " 經世濟民--세상을 經륜하고 민중을 구濟한다" 에서 나왔다.
옛날 동양의 통치자들이 한 경제의 가장 큰 일은 치수관개 사업이었다. 중국같은 나라를 예를 들어 보면 황하강의 범람으로부터 민중을 구해내는 일을 잘한 사람이 위대한 리더로 길이길이 칭송을 받아오고 있다. 세상을 올바르게 경륜하고 민중을 구제한다는 경제의 원리는 노무현이 말한 장사의 원리나 유시민이 말한 시장의 원리보다 훨씬 상위의 개념이다.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재화를 놓고 볼때 장사의 원리나 시장의 원리는 공급자나 복덕방업자가 할 소리지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정치인이나 대통령이 할 소리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의 치수사업은 주거시설인 주택이라는 재화의 물이 원활히 흘러서 후미진 곳에 있는 서민대중들까지 그 물의 혜택을 적정한 가격으로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주거문제보다 더 원초적인 문제인 먹는 문제에는 어떤 경제 원리가 적용되어 왔는가? 수확기에 일시에 시장에 나오는 미곡 가격의 폭락을 막기 위해 정부가 일정량을 사들이고 또 춘궁기에는 미리 사들인 쌀을 방출하여 공급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해서 일어나는 국민경제문제를  해결해 왔지 않은가? 이 문제를 시장에 맡겨 두었다면 미곡에 대한 투기꾼들의 횡포로 빈익빈 부익부 문제 수준을 떠나서 나라 전체가 절딴나고 있을 것이다.
 
 보릿고개가 해결된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주택문제의 수요 공급에는 왜 이런 식의 정부 개입을 하지 않고 장사의 원리가 어떻고 시장의 원리가 어떻고 하면서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는 짓을 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툭 깨놓고 말해서 농민들에게서는 정치권에 검은 돈이 흘러 들어올 여지가 없는데 반해 건설족에서는 각종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관계로 정치 모리배들에게 검은 돈이 흘러 들어와서 권력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싱가포르 같은 경우만 해도 국민의 80% 이상이 국가에서 만들어 준 주택에 살고 있음은 정치인들은 관심도 없는가? 참고로 싱가포르가 국민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한 정책이 장사의 원리나 시장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지 경제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볼 일이다.
 
◈(문화일보)공공임대주택 정책〓정부에서 임대주택의 공급물량을 꾸준히 늘리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주택물량중 임대주택이 차지하고 있는 물량은 3.5%정도로 선진국의 20% 수준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전체 주택의 83.9%가 공공주택이고, 국민의 86%가 공공주택에 거주한다. ‘주택 및 개발위원회(HDB)’가 공급, 배분, 관리를 통합적으로 담당해 공공주택중 자가소유율은 91%에 이른다. 공공주택의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주택선매권 제도를 도입하여 주택을 매각할 경우 공공기관이 우선 매수할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공공 주택의 매각과 매입 자격을 무주택자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2002.문화일보)
 
4.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나는 일국의 국정을 맡은 대통령의 입에서 아니 그것도 한국처럼 아파트 투기로 인한 가격폭등이 모든 국가자원의 원할한 배분을 왜곡하고 있는 나라의 리더가 마치 소수의 공급업자의 대변인이라도 된 양 "장사의 원리"를 주장하는 뻔뻔스러움을 절대로 이해 할 수 없다. 게다가 노 대통령은 그걸 공약으로 대통령이라는 그럴듯한 직장을 우리에게서 얻어내지 않았던가? 주인의 행과 불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렇게도 중요한 약속을 해 놓고 어떻게 배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배반했다고 하면 그것을 상쇄할 결과나 효과라도 제대로 만들어서 주인 앞에 내 놓아야 하지 않는가?
 
 필자가 우리 회사 제품의 원가를 공개해 달라고 했던 그 고객의 주장이 무리한 요구라고 말한 것은 우리 회사 제품이 공공재의 성격을 띠지 않는 순수 소비재이자 일종의 사치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별히 정부로부터 큰 간섭을 받을 필요도 없는 이 제품에도 원산지 증명이나 유통기간이나 각종 제재가 붙는다. 하물며 국민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진 아파트라는 재화는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말도 안되는 장사의 원리나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 시대나 21세기의 신자유주의에서나 주장될 수 있는 냉혹한 시장의 원리가 아니라 영원히 역사 속에 살아남은 따뜻한 경제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장사의 원리나 시장의 원리가 축구 경기 속의 선수들이 가져야 할 개인기나 잘 보아도 선수들간의 팀웍 정도라면 경제의 원리는 그 경기가 반칙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호각을 불고 제재를 하는 심판이 알아야 할 원리다. 경기를 이기려고 하는 감독도 마찬가지다. 한 두 선수의 입장에 몰입해서 그 포지션에만 집착해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감독은 경기 전체의 흐름을 주재하고 조율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감독과 심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원리는 시장의 원리도 아니요 장사의 원리도 아닌 그 보다 더 포괄적인 경제의 원리인 것이다. 감독이 특별한 선수를 편애해서 기용하거나 심판이 특정한 팀에 유리하게 한다면 그건 관중들에게서 무슨 게이트를 통한 뇌물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 의심은 주인된 국민으로서는 지극히 정당한 권리다.
 
오늘(205년 7월 8일자 ) 신문에서 열린 우리당에서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당론으로 추진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늦었지만 국민에 제대로 서비스하기 위한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스럽다. 물론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가 아파트값 폭등을 막고 한국의 주택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만병 통치약은 아니다.  이 제도의 시행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위축될 지도 모르는 공급을 보완하기 위해서 공용개발이라든지 대단위 서민 임대아파트도 확충할 플랜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투기 수요를 잡기 위해서 투기로 인한 수익을 국가 재원으로 환수할 수 있는 길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분양원가 공개가 줄 가장 큰 효과는 아파트 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행동으로 만 천하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과거 대만의 총통 장제스가 대만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서 이권 청탁에 개입한 며느리의 손목을 짤랐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런 확고한 의지표명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만의 경제성장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정당에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이 거의 없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감안해 볼 때 막대한 정치비자금이 들어오는 창구 중 하나를 정치인들 스스로가 앞장서서 봉쇄한다는 것은 실로 뼈아픈 각오가 없이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 등 주거 시설 건축말고도 국가 세금으로 할 수 있는 대단위 토목 공사나 F-17機 도입같은 국책사업을 수행하면서도 얼마든지 비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국민들은 없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몇몇 거물 정치인들에게만 그 자금이 들어가지만 아파트 단지 개발 같은 것은 금뺏지를 달고 있는 모든 정치인들이 그 로비대상으로 각자가 검은 돈을 만질 수 있을 생각할 때 이를 포기하는 정책의 도입에 대해서는 의외로 정치권의 저항이 더욱 거셀 것은 불문가지다.
 
마치면서
 
 집권자들이 아파트 분양 원가를 앞장 서서 공개하게 되면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확실히 던져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국민 경제 전반에 주는 효과는 너무나 지대하다.
 
"국민 여러분! 우리 정치인들은 더 이상 건설족들에게서 검은 돈을 받아 먹고 그들의 이권을 챙겨주는 비싼 댓가로 국민들을 희생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택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검은 돈을 받아 국민들을 착취하며 우리의 배를 불리겠다는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제 건설업체 당사자 여러분도 부패로비보다는 원가절감이나 기술혁신으로 승부하시고 시중의 투기꾼들도 아파트로 한탕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십시오. 우리 심판들이 솔선수범해서 주택 시장 안정을 위해 나섰으니 건전한 개발이익 수준을 넘어선 초과 이익도 모두 환수시킬 것입니다. 우리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손을 씯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이 부분에 대한 과도한 탐욕을 버리십시오." 
 
아파트에 관해서 정부가 무슨 정책을 내놓으면 투기꾼들이 콧방귀를 뀌며 오히려 돈을 벌 절호의 기회로 알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정치권부터 먼저 손을 씻겠다는 의지표명보다 확실한 정책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아파트 분양원가공개는 실질적으로 비자금을 숨길 수 있는 길을 원천봉쇄한다. 그리하여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국민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책들의 결정과정에서 그 효율성 제고와 투명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대신 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정치인들은 주인인 국민들을 기만하지 않고 제대로 봉사하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국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얻는 수확이 있을 것이다./ 무위(칼럼리스트, 문명비평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름  
   만파식적  (2006-05-31 20:44:14, Hit : 61, 추천 : 11)
제목  
   '지방'의 공간에도 진보는 없었다...

1
5.31 지방선거의 핵심포인트는 '지방권력 교체'라는 열우당의 논리와 '중앙정권 심판'이란 한나라당의 논리였다.
주지 하듯이 한나라당의 언어가 일반대중에게 압도적으로 먹힌 것이 선거결과라 할수 있다.
또하나 열우당의 히든카드였던 '강풍'과 '강금실의 급작스러운 몰락'은 주목할 부분이 크다할 수 있다.


'강금실의 몰락'과 '오세훈 바람'은 아마 뒷날 한국정치사를 돌아보며 두고두고 회자될 드라마틱한 사안이다.
강금실류의 '내포없는' 이미지정치가 비슷한 이미지정치인을 만났을 때 얼마나 약할 수 있냐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줄 순 없진 않는가?
이는 개혁의 내포는 없고 비주류란 이미지, 약자란 컴플렉스속에서만 진행된 지난 4년간 노무현식 개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할 뿐이다.


2

한나라당 오세훈의 등장은 박찬종-이인제로 이어지는 한국정치사에 있어 이미지정치인의 정점으로서 아마 차차기 대선때 과연 그를 상대할 후보가 있긴 있을까하는 공포와 좌절을 느끼게한다.

언제나 정권 중후반에 치루어지는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난바있다. 김대중정권때도 국민회의는 참패를 면치못했다.
문제는 왜 지방이 지방 고유의 언어와 문법대신 중앙정치의 이런 스케쥴에 끌려다니는가 하는점이다.


열우당은 지방권력 교체를 말했지만 정작 지방은 스스로의 언어와 문법을 구축할 제대로 된 여론도 언론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한국인 만큼 정치를 욕하면서도 관심있는 민족은 드물지만 정작 내 집앞, 내동네의 대소사엔 무관심하다.
지방선거에서도 중앙정당만 보고 일렬로 찍는 것을 미디어에선 비판하지만 아무도 어떻게 사람들이 지방에 관심을 갖게 하고 내 동네에 참여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엔 무관심하다.

시민사회와 지방사회를 육성하며 시민사회와 비판적 파트너쉽속에서 사회대개혁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 한나라당과의 감정적 날선 대립, 정치심-국가중심의 담론뿐인 노무현식 개혁이 부른 화가 바로 오늘날 '여전히' 초라한 지방사회를 우리가 목도케하고 있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란 말은 이때 필요한게 아닐까

3.

사실 중앙정치가 할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제는 시민사회이며 지방사회이다. 열우당이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는 "무림비급"도 진보세력이 압도적 우위의 수구-보수 양당을 꺽을 수 있는 "천하의 명검'도  사실은 시민사회와 지방사회에 숨겨져 있음이다.

그러나 민노당 역시 이에는 별관심이 없지않을까 난 솔직히 의심한다.
민노당의 지방공약 아토피제로화와 학교급식문제는 그래도 진보정당은 다름을 볼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것말곤 없다.민노당의 도의원 공약에도 시의원공약에도 정작 우리동네의 현안, 우리마을의 이슈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대정권싸움, 최대강령수위의 담론에만 익숙해진 남한진보운동의 고질병은 지방시민사회에 뿌리박고 지방에서 진보적 시민사회를 뿌리내릴 사람 하나 키우지 못하고 있다.


반세기간 한국 지방선거의 핵심은 누가 더 지역개발공약을 잘 가공할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진보정당이라면 지역복지, 지역문화공약을 어떻게 내 마을에서 실현할 것인지 로드맵이 있어야하지 않겠나..민노당이란 로고가 박힌 팜플렛에서도 그런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4.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란 공허한 수사만이 지방선거에도 되풀이 될뿐이다.
오세훈은 대중들에게 매력적이다. 매력의 차원은 다르겠지만 민노당 후보가 민노당의 정책이 대중들에게 매력적일 순 없을까..
사실 이건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정책은 싱크탱크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시민사회와 지방에서 발로 뛴 경험에서 나오는 법이다.

민노당이여 제발 당 밖에으로 눈을 돌려라. 정말 자신의 정파가 민노당을 장악하고 싶다면 과천이나 안양 같은데에서 시의회 다수파를 만들어서 진보적 모델의 도시로 만들어보라. 그런 성과를 이룬 정파(그게 자민통이건 전진이건 진정추건 정파라면 다 싫어하는 진보누리류 무정파pd들이건)라면 누가 민노당을 장악하는걸 반대할 것인가..

민노당이여 제발 '의회'와 '거리'가 아닌 제3의 공간 시민사회와 지방에 눈을 돌려라..
의회에서 정책 잘 만든다고 그게 통과가 되냐..지금 이 시대에 거리에서 봉기할 것도 아니고 뭘 얼마나 싸울 수 있냐..진보가 먹고살 것은 시민사회에서 이슈 하나 만들어내고 죽자사자 투자하는 길이다. 지방을 잘 이해하고 가장 잘아는 지역전문가를 각 고장마다 키워내는 것이다.

중앙정치가, 진보가 할수 있는 일은 사실 별로 없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생활공간인 지방이 할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민노당의 정파 또는 열성당원들이 살길은 당내에서 숱한 당원민주주의 어쩌고 하는 제도들을 껴안고 죽자살자 싸우고 낑낑대는게 아니라 지방과 시민사회에서 큼지막한 성과하나 이루는 것이다.

난 염원하건데 원칙적인 민노당이 아니라 대중에게 매력적인 민노당을 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혁명과 귀고리, 그리고 누드모델

문화대혁명때 동료의 밀고로 감옥에서 17년을 보낸 장따예의 기구한 사연…부모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어느 여의사의 이야기도 상상을 초월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2003년 1월17일로 기억한다. 장따예(따예는 할아버지라는 뜻)는 베이징의 낡고 오래된 후통(골목) 길가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긴 백발 머리와 머리만큼이나 길고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그의 표정은 한없이 쓸쓸하고 무료해 보였다. 옆으로 다가가 반가운 웃음을 건네자 장따예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그러고는 다 빠져서 이가 하나도 없는 잇속을 드러내며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따예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무심코 거울 속에서 모델의 길을 찾다

그의 첫인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 건, 칠순을 넘긴 ‘꼬부랑’ 할아버지가 양쪽 귀에 커다란 링 귀고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고리에 얽힌 사연을 듣다 보니 그의 ‘남다른’ 과거가 자연스레 들춰졌다.


△ 동료의 밀고로 17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따예. 그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것은 ‘인간성에 대한 혐오’였다.(사진/ 박현숙 기자)

장따예는 문혁이 막 끝나갈 무렵인 1976년 ‘반혁명죄’로 붙잡혀 1993년 출옥할 때까지 무려 1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무시무시한 ‘반혁명죄’는 실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당시 베이징 교외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어느 날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 “마오쩌둥이 류샤오치를 박해·타도한 일은 잘못된 것이며, 문화대혁명도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며칠 뒤,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 장따예를 ‘인민의 적’으로 고발하는 비판 대자보가 붙었다. 같이 잡담을 나누던 동료가 밀고를 한 것이다.

장따예는 문혁 이전인 1957년 반우파 투쟁 당시에도 ‘우파분자’로 몰려 7년 동안 농촌으로 보내져 ‘노동개조’ 교육을 받았다. 평소에도 ‘바른말’ 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세치 혀’로 인한 화를 많이 입었지만, ‘반혁명 분자’로 몰리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부인과도 이혼을 했다고 했다.

1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장따예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일은 바로 ‘인간성에 대한 혐오’였다. 동료의 밀고로 반혁명 분자가 된 것도 그렇지만, 감옥 안에서 그를 괴롭히는 무수한 ‘잡배’들을 대하면서 장따예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때 가장 큰 소원이 있었다면 “나쁜 놈들을 모조리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보다 그 ‘나쁜 놈들’과 매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미치고 두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감옥 안에서 정지된 줄로만 알았던 시간은 그래도 흘러 흘러서 드디어 출옥을 할 수 있게 됐다. 출옥을 한 뒤 장따예는 예전에 살던 후통으로 돌아왔다. 1976년 이후 바깥세상에 처음 나와본 장따예는 1993년 당시 베이징 길거리와 사람들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한동안 넋이 나갔다고 한다. 그 뒤 얼마 동안은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자신은 여전히 1976년에 머물러 있는데 세상은 그동안 천지개벽을 했으니 그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 뒤 장따예가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은 미술대학 누드모델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앞으로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어느 날, 무심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모델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그 뒤 장따예는 직접 자신이 쓴 모델 추천서를 들고 각 대학교를 찾아다니며 모델 ‘구직활동’을 했고, 다행히 몇 군데 대학에서 연락이 오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모델 일을 해오고 있다.

자살을 막아준 링 귀고리의 꿈

처음 만났을 당시 장따예가 귀에 걸고 있던 링 귀고리에 관한 사연은 이렇다. 2001년 어느 날 혼자서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문득 귀고리를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남자들도 귀고리 하지 말란 법 있나.” 자기 외모에 커다란 링 귀고리를 하면 더 ‘예술적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앞으로 살 날도 얼마 안 남았고, 옛날 문혁 시절과 다른 세상이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최대한 다 ‘실천’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 ‘흑색분자를 척결하라!’ 문혁 당시 만연했던 비판투쟁장의 모습. ‘반혁명분자’로 몰린 사람이 기다란 고깔모자를 쓴 채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장따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한 관계’와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17년간 반혁명 분자로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자신이 자살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언젠가는 귀고리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을 거라고도 했다. 헤어질 무렵 그는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주면서 그 뒷면에 “인생에 대해 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썼다.

지금 장따예가 살던 후통은 지난해 철거되고 없어졌다.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장따예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장따예는 링 귀고리를 하고 여전히 미술대학 누드모델 일을 하고 있을까. 일이 없을 때는 대낮의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혼자 독한 술을 훌쩍인다는 장따예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중국에는 수많은 장따예들이 있다. 그들이 거쳐온 삶의 행로는 과거 중국의 ‘정치시대’를 반영하는 자화상이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을 기점으로 1976년 문혁이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가 실종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감내해야 했다. 가장 ‘혁명적인 것’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40년 전 중국에서 벌어진 문혁은 가장 ‘비인간적인’ 혁명이었다.

중국의 기록문학 작가 펑진차이는 <100사람의 10년>이란 책에서 그 ‘비인간성’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0사람의 10년>은 문혁을 겪었던 보통 중국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취재·기록한 구술문학집이다. 장따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혁 구술담을 절대 100% 믿지 않았을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구술담 가운데 특히 잊혀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 1966년 문혁 당시 서른 살이었던 한 아동병원 여의사의 사연이다. 그는 홍위병들에게 ‘인민의 적’으로 찍혀 매일같이 고문과 고통을 당하는 부모를 직접 ‘죽였다’. 부모의 간청 때문이었다. 그들 세 가족은 홍위병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함께 죽기로 결정했다. 부모는 의사인 딸에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동맥을 끊어달라고 했고, 그 다음에 자살하라고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동맥을 막 끊었을 때,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구술을 끝내며 이렇게 물었다. “세월이 지난 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해요. ‘너는 잘 살아야 해. 그래야만 죽은 네 부모님 볼 면목이 있는 거야’라고요. 정말 내가 잘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가요?”

‘100사람의 10년’은 계속되고 있다

펑진차이는 책 서문에서 “20세기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두 가지다. 파시스트의 만행과 문화대혁명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아직도 비극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 온전히 그것을 마주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비극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방법은 “숨기고 잊어버리거나 또는 일부러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투명하게 밝혀내는 것”이란 게 그의 지적이다. 그가 책을 낸 것은 10년 전 문혁 발발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또다시 10년이 지났다. 문혁 40주년을 맞는 오늘 중국에서 ‘100사람의 10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05000/2006/05/021005000200605250611069.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백이다. 대통령에게 과연 권력이 있는가. 묻는 사람도 무장 늘어간다. 기실 그는 오래전에 권위를 잃었다. ‘비판언론’만이 아니다. 노 대통령을 시들방귀로 여기기는 유행이다.

‘개혁’이란 말도 조롱받는다. 대체 집권 종반을 맞기까지 뭘 했는가. 비판이 쏟아진다. 집권세력 일각에선 원인을 헌법에서 찾는다. 현행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권력이 있느냐고 되술래잡는다.

과연 그러한가. 천만의 말씀이다. 현행 헌법으로 그의 전임자들은 역사적 평가를 받을 일을 하나씩은 했다. 김대중 정권은 6·15 공동선언을 내왔다. 노 대통령과 여러모로 닮은꼴인 김영삼 정권조차 ‘하나회’를 숙정하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다. 더러는 권력기관 민주화를 노 정권의 치적으로 내세운다. 아니다. 권력기관은 물론 관료사회를 개혁해야 마땅한 순간에 손을 놓았을 뿐이다. 아니, 놓쳤다.

정작 문제는 권력을 놓친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반대다. 바로 그 지점에서 노무현의 독재는 시작한다. ‘노무현의 독재’란 말은 결코 형용모순이 아니다. 대통령 노무현은 지금 이 순간 독재자의 길로 뚜벅뚜벅 걷고 있다.

청와대가 발끈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대통령은 저 오월의 민주투사들을 기리며 말했다. “생각과 행동이 아직도 반독재 투쟁의 시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과시라도 하듯 까닭까지 밝혔다. 지금은 지도자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란다. “그것은 무소불위의 독재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란다.

곧추 보기 바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어떻게 강행되고 있는지를. 대통령의 ‘정치적 감’으로 공화국의 운명을 욜랑욜랑 결정했다. 그뿐인가. 오월의 평택에서 군인이 민간인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추격했다. 그것이 독재가 아니라면 무엇이 독재인가. 오월의 투사를 폭도로 몰아친 그 언론이 살천스레 을러댄다. 피투성이로 얻어맞은 시민을 ‘반미 좌파’란다. 더 ‘엄단’하란다. 심지어 발포하지 않았다고 국방부를 훌닦는 자칭 ‘우익’도 있다.

기막힌 일이되 한국 민주주의의 엄연한 현주소다. 노 대통령은 두 김씨를 거치며 정착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마치 자신의 치적처럼 생색낸다. 게다가 국가운명을 좌우할 결정에 대통령 자신이 절차를 무시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인다. 대안이 있느냐고 되레 눈 홉뜬다. 대안? 호도하지 말기 바란다. 한-미 관계는 지금 상황도 하나의 대안이다. 굳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은 언죽번죽 충고도 했다. “아직도 권력자의 얼굴만 쳐다보는 그 시대의 낡은 사고가 남아 있다면 이제 버려야 한다.” 옳다. 권력자의 얼굴만 쳐다볼 때가 아니다. 권력의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게 아니다. 노 정권은 시장에 넘긴 권력을 철저히 대변한다. 휘두른다. 시장의 철권, 그것이 노 정권의 본질이다. 신자유주의 독재정권이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독재이기에 지자체 선거 참패는 벅벅이 필연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아직도 자신의 정권이 지닌 독재의 성격을 파악 못한 데 있다. 딱한 일이다. 그의 참모들 가운데도 분별이 뚜렷한 사람들은 이미 떠났거나 배제되고 있다. 남은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평택 미군기지로 줄달음치는 독재자 노무현이다.

그래서다. 저무는 오월에, 그 핏빛 깃발 아래 찬찬히 묻는다. 신자유주의 독재권력, 노무현 정권을 어찌 해야 옳은가.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6-05-2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온 국민의 필수 상식이 된 ‘경제력 보유자로서의 남성상’의 역사… 벼슬길 거부하고 책만 읽던 혜강 최한기도 조선 남성으로 대접받았다

 

필자는 가끔 오슬로대학교를 찾은 한국 손님들과 대학교 부설유치원을 방문하는데, 그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재학생들의 자녀라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한국 손님들은 충격을 받는다. “학생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렇다. 평균 결혼 연령은 노르웨이와 한국이 27~28살로 비슷하지만, 20대부터 이성과 동거생활을 하는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학생으로서 동거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장래 보장도 없는데 뭘 믿고?

국내의 일상적인 가치관으로서는 남자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동생활은 ‘모험’으로 인식되는 것은 물론 무일푼의 남성을 지속적인 파트너로 택하는 여성의 결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사진 안)은 근대 처세서의 원조 격이다. 최근 새롭게 번역돼 한국 서점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재산 계급에서 ‘성공’이 보편적 철학이 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취직이 될지 안 될지 모르고 장래 보장도 없는 사람인데 뭘 믿고 운명을 맡기나?” 물론 국내에도 캠퍼스 커플이 많지만 대학 시절 연애에서는 상대인 남학생을 완전한 성인인 ‘어른’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남성은 군대에 갔다 와서 남성 사회의 조직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무엇보다 가족 부양 능력자다.

물론 자본주의로 막 이행하는 동유럽 사회에서 남성의 경제력을 따지는 분위기는 한국보다 더 강할 수 있다. 한국 여성에게 결혼 상대자로 무난하게 꼽히는 직업 중 하나는 안정성과 가르치는 이로서의 ‘품위’를 두루 갖춘 교사라고 한다. 그럼에도 시민단체에서 적은 활동비로 자신의 꿈을 키우는 남성 같으면 한국 사회에서 괴로울 때가 많다. 이것은 복지 결여나 경제동물 되기를 강권하는 경쟁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어렵게 만들어 부양자로서 남성의 위상을 높인 성차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제시대 이후 부르주아 사회에서 굳어져버린 ‘진짜 남자’에 대한 인식의 연장이다. 베스트셀러 처세서들은 물론,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기리고 성공과 경제력을 연결시키는 매체는 ‘실력가’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여기쯤에서 필자에게 질문이 날아올 것이다. 계급사회치고 남자 경제력을 따지지 않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고? 그렇다. 보수주의자들이 ‘선비 정신’을 들먹여 조선시대 지배계급을 도덕군자로 그리지만, 이것은 ‘날조된 전통’의 표본이다. 퇴계 이황 등 성리학 대가들을 다 사귀어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선비 미암 유희춘(1513~77)의 생활 기록인 <미암일기>를 봐주시기를. 임금에게서 받는 녹봉, 동료 벼슬아치와 교환하는 선물, “군사 몇십 명을 보내 농장의 관개시설을 만들어달라”는 식의 지방관들에게의 부탁이 기록돼 있다. 안빈낙도도 하나의 이상이었지만, ‘제가’(齊家)라는 당위적 이념부터 어느 정도의 경제성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재(理財)에 치중하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도 남성이 취할 수 있는 도리였다. 예컨대 실학의 대가 혜강 최한기(1803~77)는 벼슬길에 나서라는 영의정의 권고도 거절하고, 재산을 도서 구입에 다 쏟아부어 노년에는 자신의 책을 저당 잡혀 먹고살았다. 그렇다고 책을 얻기만 하면 밤새도록 읽어 잠도 못 이뤘던 그를 동류 사회에서는 실패한 남성으로 보지 않았다.

역시 초기 개화파의 길라잡이이자 매천 황현의 스승 격인 추금 강위(1820~84)는 가난한 무인의 집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하게 지냈지만 자신을 시와 문장의 귀재로 인정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벼슬 청탁을 하지 않았다. 혜강·추금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고, 최신의 중국 저서를 모으는 벽에 빠진 ‘미치광이’들도 조선 사회에서는 진정한 남성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남자 노릇하는 방법이 다양했다고나 할까.

1870년대 일본에서 절실했던 <자조론>

물론 근대가 밀고 들어왔다고 해서 조선 말기 무일푼의 시인, 사상가의 부류가 멸종한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1880~1939)는 근대 민족주의의 창시자이고 함석헌(1901~89)은 근대적 종교 민중주의의 대가였지만 돈과 관계하지 않는 그들의 생활 패턴들은 혜강·추금이 대표하는 조선의 기인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근대적인 유산계급의 지배적인 남성상은 전근대 호남자(好男子)들의 불기(不羈·옭매이지 않음)와는 달랐다. 최근 새롭게 번역돼 한국 서점가에서 인기를 끈 근대 처세서의 원조 격은 일본 메이지 시대에 ‘금세의 성서(聖書)’로 일컬었던 새뮤얼 스마일스(1812~1905)의 <자조론>의 초기 번역인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이었다. 1871년 처음 나와 출판 직후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이 책은 그 뒤에 수십만 권이 팔린 것은 물론, 문부성(교육부)에 의해 윤리 교과서로 지정돼 전국 학교에 배분됐다. 근대 국민국가 역사상 외국 처세서에 그 정도의 국가적인 예우를 해주었던 경우가 또 있는가?

그런데 문부성이 스마일스의 ‘모범적 인간’ 이야기를 중세의 효행도(孝行圖) 모양으로 아예 판화로 찍어 소학교 학생들의 필독서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스마일스에 의하면, 사업가·관료·학자가 아닌 근면하고 성실한 장인도 성공할 수 있고, 이 일은 가치 있는 인간이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재운과 재간이 좋아 돈 많이 번 부자나 고관대작도 존경받을 만한 인간이지만 제한된 월급으로 사는 근면·성실·근검한 모범생형 노동자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안정된 소득 획득이라는 형태로 편입되고, 개인 성공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집단 저항이나 직업윤리를 위반하는 게으름 등 체제 부정 행위만 하지 않으면 스마일스가 인정하는 진짜 인간, 즉 ‘진짜 남자’가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로 첫발을 내딛고 자유민권운동부터 농민반란까지 온갖 집단행동의 화염에 둘러싸인 1870년대의 일본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책인 것이다!


△ 신채호(사진)는 근대 민족주의의 창시자이고 함석헌은 근대적 종교 민중주의의 대가였지만, 이들은 돈과 출세에 무관심했다. 그들의 생활 패턴은 혜강·추금이 대표하는 조선의 기인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망한 저항에 신경끄고 돈이나 벌라는 훈계는 일제와의 편안한 유착을 꿈꾸는 일제시대 조선의 재산 계급에도 필요했기에 <자조론>은 이미 개화기부터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1918년에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이 완역해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해방 뒤 경무부장으로서 친일 경찰 출신의 부하를 옹호했던 조병옥(1894~1960)이 “일제시대 먹고살기 위해 친일을 한 프로잡(pro-job)은 처벌하기 곤란하다. 다만 그 이상의 친일을 한 프로잽(pro-Japanese)이 문제다”라고 했을 때, 그는 본인도 모르게 그가 속하는 계급의 상식이 된 스마일스의 논리에 입각해 있었다. 제국이 조선민족을 말살하든 뭘 하든 나만이 성실하게 일해 월급을 받으면 문제가 없다라는 이야기다.

일제시대 ‘성공한 조선인’ 중에서도 <자조론>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 중 하나는 고급 친일파로서 강원도·함경도의 장관(도지사)을 역임했던 이규완(1862~1946)이었다. 그는 일찍이 박영효(1861~1939)의 식객이 되어 갑신정변(1884)때 민씨 대신들을 살육했던 행동대 출신이었다. 그 뒤 그는 장기간 일본·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민족에게 독립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했던 소신 친일파 이규완은 그 ‘본성’을 개량하자는 의미에서 도 장관이 되어서도 작업복 차림으로 짚신을 만드는 등 ‘노동의 신성’을 실천했고, 부하의 자녀에게 양잠·견직을 가르치고, 퇴직 이후에 땅 매입·개간을 해서 4만 평이 넘는 농장의 주인이 됐다.

우리는 이규완의 인생관을 극복했을까

돈 모으는 비결을 물은 한 노동자에게 그는 “나무에 올라보라”라고 한 뒤 “이제 손을 놓아봐”라고 명했다. “손 놓으면 떨어지는데요”라는 대답에 이규완은 명언을 했다. “손을 못 놓지? 돈도 마찬가지야. 일단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비록 한 푼이라 해도 절대 놓지 마라. 모으고 또 모으고 끝까지 노력하면 성공한다!” 물론 “야구란 미친 짓이야. 그런 짓 하는 놈은 나중에 실업자 되지. 이상한 유희는 말고 집에 오면 청소부터 하고 과수원도 가꾸라”고 훈계했던 이규완이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우습게 보이겠지만, 돈을 벌지 못하는 남자를 “천대받아야 할 노예나 거지”라고 불렀던 그의 기본적인 인생관을 우리가 과연 얼마나 극복했는가?

일제시대 때 재산 계급 사이에서 보편화되고 6·25로 온 나라가 폐허가 돼 ‘성공’이 생존 문제가 된 뒤 온 국민의 필수 상식으로 발전된 경제력 보유자로서의 남성상은, 요즘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제2의 생명을 살고 있다. 과연 한국의 진보 진영이 ‘성공’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사는 것이 남자로서 얼마나 쿨하고 멋진 일인지 설득해 한국적인 ‘반문화’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참고문헌:

1.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정창권, 사계절, 2003

2. <자조론>,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비즈니스북스, 2006

3. <이규완옹 백년사>, 비판신문사출판국, 1959

4. , Earl Kinmonth,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