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의 필수 상식이 된 ‘경제력 보유자로서의 남성상’의 역사… 벼슬길 거부하고 책만 읽던 혜강 최한기도 조선 남성으로 대접받았다
필자는 가끔 오슬로대학교를 찾은 한국 손님들과 대학교 부설유치원을 방문하는데, 그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재학생들의 자녀라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한국 손님들은 충격을 받는다. “학생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렇다. 평균 결혼 연령은 노르웨이와 한국이 27~28살로 비슷하지만, 20대부터 이성과 동거생활을 하는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학생으로서 동거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장래 보장도 없는데 뭘 믿고?
국내의 일상적인 가치관으로서는 남자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동생활은 ‘모험’으로 인식되는 것은 물론 무일푼의 남성을 지속적인 파트너로 택하는 여성의 결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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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사진 안)은 근대 처세서의 원조 격이다. 최근 새롭게 번역돼 한국 서점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재산 계급에서 ‘성공’이 보편적 철학이 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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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이 될지 안 될지 모르고 장래 보장도 없는 사람인데 뭘 믿고 운명을 맡기나?” 물론 국내에도 캠퍼스 커플이 많지만 대학 시절 연애에서는 상대인 남학생을 완전한 성인인 ‘어른’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남성은 군대에 갔다 와서 남성 사회의 조직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무엇보다 가족 부양 능력자다.
물론 자본주의로 막 이행하는 동유럽 사회에서 남성의 경제력을 따지는 분위기는 한국보다 더 강할 수 있다. 한국 여성에게 결혼 상대자로 무난하게 꼽히는 직업 중 하나는 안정성과 가르치는 이로서의 ‘품위’를 두루 갖춘 교사라고 한다. 그럼에도 시민단체에서 적은 활동비로 자신의 꿈을 키우는 남성 같으면 한국 사회에서 괴로울 때가 많다. 이것은 복지 결여나 경제동물 되기를 강권하는 경쟁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어렵게 만들어 부양자로서 남성의 위상을 높인 성차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제시대 이후 부르주아 사회에서 굳어져버린 ‘진짜 남자’에 대한 인식의 연장이다. 베스트셀러 처세서들은 물론,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기리고 성공과 경제력을 연결시키는 매체는 ‘실력가’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여기쯤에서 필자에게 질문이 날아올 것이다. 계급사회치고 남자 경제력을 따지지 않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고? 그렇다. 보수주의자들이 ‘선비 정신’을 들먹여 조선시대 지배계급을 도덕군자로 그리지만, 이것은 ‘날조된 전통’의 표본이다. 퇴계 이황 등 성리학 대가들을 다 사귀어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선비 미암 유희춘(1513~77)의 생활 기록인 <미암일기>를 봐주시기를. 임금에게서 받는 녹봉, 동료 벼슬아치와 교환하는 선물, “군사 몇십 명을 보내 농장의 관개시설을 만들어달라”는 식의 지방관들에게의 부탁이 기록돼 있다. 안빈낙도도 하나의 이상이었지만, ‘제가’(齊家)라는 당위적 이념부터 어느 정도의 경제성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재(理財)에 치중하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도 남성이 취할 수 있는 도리였다. 예컨대 실학의 대가 혜강 최한기(1803~77)는 벼슬길에 나서라는 영의정의 권고도 거절하고, 재산을 도서 구입에 다 쏟아부어 노년에는 자신의 책을 저당 잡혀 먹고살았다. 그렇다고 책을 얻기만 하면 밤새도록 읽어 잠도 못 이뤘던 그를 동류 사회에서는 실패한 남성으로 보지 않았다.
역시 초기 개화파의 길라잡이이자 매천 황현의 스승 격인 추금 강위(1820~84)는 가난한 무인의 집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하게 지냈지만 자신을 시와 문장의 귀재로 인정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벼슬 청탁을 하지 않았다. 혜강·추금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고, 최신의 중국 저서를 모으는 벽에 빠진 ‘미치광이’들도 조선 사회에서는 진정한 남성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남자 노릇하는 방법이 다양했다고나 할까.
1870년대 일본에서 절실했던 <자조론>
물론 근대가 밀고 들어왔다고 해서 조선 말기 무일푼의 시인, 사상가의 부류가 멸종한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1880~1939)는 근대 민족주의의 창시자이고 함석헌(1901~89)은 근대적 종교 민중주의의 대가였지만 돈과 관계하지 않는 그들의 생활 패턴들은 혜강·추금이 대표하는 조선의 기인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근대적인 유산계급의 지배적인 남성상은 전근대 호남자(好男子)들의 불기(不羈·옭매이지 않음)와는 달랐다. 최근 새롭게 번역돼 한국 서점가에서 인기를 끈 근대 처세서의 원조 격은 일본 메이지 시대에 ‘금세의 성서(聖書)’로 일컬었던 새뮤얼 스마일스(1812~1905)의 <자조론>의 초기 번역인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이었다. 1871년 처음 나와 출판 직후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이 책은 그 뒤에 수십만 권이 팔린 것은 물론, 문부성(교육부)에 의해 윤리 교과서로 지정돼 전국 학교에 배분됐다. 근대 국민국가 역사상 외국 처세서에 그 정도의 국가적인 예우를 해주었던 경우가 또 있는가?
그런데 문부성이 스마일스의 ‘모범적 인간’ 이야기를 중세의 효행도(孝行圖) 모양으로 아예 판화로 찍어 소학교 학생들의 필독서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스마일스에 의하면, 사업가·관료·학자가 아닌 근면하고 성실한 장인도 성공할 수 있고, 이 일은 가치 있는 인간이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재운과 재간이 좋아 돈 많이 번 부자나 고관대작도 존경받을 만한 인간이지만 제한된 월급으로 사는 근면·성실·근검한 모범생형 노동자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안정된 소득 획득이라는 형태로 편입되고, 개인 성공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집단 저항이나 직업윤리를 위반하는 게으름 등 체제 부정 행위만 하지 않으면 스마일스가 인정하는 진짜 인간, 즉 ‘진짜 남자’가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로 첫발을 내딛고 자유민권운동부터 농민반란까지 온갖 집단행동의 화염에 둘러싸인 1870년대의 일본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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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사진)는 근대 민족주의의 창시자이고 함석헌은 근대적 종교 민중주의의 대가였지만, 이들은 돈과 출세에 무관심했다. 그들의 생활 패턴은 혜강·추금이 대표하는 조선의 기인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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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저항에 신경끄고 돈이나 벌라는 훈계는 일제와의 편안한 유착을 꿈꾸는 일제시대 조선의 재산 계급에도 필요했기에 <자조론>은 이미 개화기부터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1918년에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이 완역해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해방 뒤 경무부장으로서 친일 경찰 출신의 부하를 옹호했던 조병옥(1894~1960)이 “일제시대 먹고살기 위해 친일을 한 프로잡(pro-job)은 처벌하기 곤란하다. 다만 그 이상의 친일을 한 프로잽(pro-Japanese)이 문제다”라고 했을 때, 그는 본인도 모르게 그가 속하는 계급의 상식이 된 스마일스의 논리에 입각해 있었다. 제국이 조선민족을 말살하든 뭘 하든 나만이 성실하게 일해 월급을 받으면 문제가 없다라는 이야기다.
일제시대 ‘성공한 조선인’ 중에서도 <자조론>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 중 하나는 고급 친일파로서 강원도·함경도의 장관(도지사)을 역임했던 이규완(1862~1946)이었다. 그는 일찍이 박영효(1861~1939)의 식객이 되어 갑신정변(1884)때 민씨 대신들을 살육했던 행동대 출신이었다. 그 뒤 그는 장기간 일본·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민족에게 독립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했던 소신 친일파 이규완은 그 ‘본성’을 개량하자는 의미에서 도 장관이 되어서도 작업복 차림으로 짚신을 만드는 등 ‘노동의 신성’을 실천했고, 부하의 자녀에게 양잠·견직을 가르치고, 퇴직 이후에 땅 매입·개간을 해서 4만 평이 넘는 농장의 주인이 됐다.
우리는 이규완의 인생관을 극복했을까
돈 모으는 비결을 물은 한 노동자에게 그는 “나무에 올라보라”라고 한 뒤 “이제 손을 놓아봐”라고 명했다. “손 놓으면 떨어지는데요”라는 대답에 이규완은 명언을 했다. “손을 못 놓지? 돈도 마찬가지야. 일단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비록 한 푼이라 해도 절대 놓지 마라. 모으고 또 모으고 끝까지 노력하면 성공한다!” 물론 “야구란 미친 짓이야. 그런 짓 하는 놈은 나중에 실업자 되지. 이상한 유희는 말고 집에 오면 청소부터 하고 과수원도 가꾸라”고 훈계했던 이규완이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우습게 보이겠지만, 돈을 벌지 못하는 남자를 “천대받아야 할 노예나 거지”라고 불렀던 그의 기본적인 인생관을 우리가 과연 얼마나 극복했는가?
일제시대 때 재산 계급 사이에서 보편화되고 6·25로 온 나라가 폐허가 돼 ‘성공’이 생존 문제가 된 뒤 온 국민의 필수 상식으로 발전된 경제력 보유자로서의 남성상은, 요즘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제2의 생명을 살고 있다. 과연 한국의 진보 진영이 ‘성공’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사는 것이 남자로서 얼마나 쿨하고 멋진 일인지 설득해 한국적인 ‘반문화’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참고문헌:
1.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정창권, 사계절, 2003
2. <자조론>,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비즈니스북스, 2006
3. <이규완옹 백년사>, 비판신문사출판국, 1959
4. , Earl Kinmonth,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