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슬픕니다. 평화를 지키려고 촛불을 든 바로 옆에서 현란한 불빛아래 평화를 즐기고 있는 현실이.”

   2006년 5월 7일 밤. 서울 광화문. 촛불을 밝힌 40대 후반 노동자가 눈을 슴벅이며 잔잔히 건넨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생명과 평화의 땅, 평택을 지키는 국민촛불문화제’가 열린 동아일보사 앞마당, 그 뒤에선 ‘하이 서울 페스티발’이 청계천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열렸습니다.

   40대 후반, 건설노동자는 경기도 평택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황금 연휴’에 그는 대추리를 찾았습니다. 이 땅의 평화를 지키려고, 생명을 지키려고, 가족을 지키려고 갔습니다. 곧 곤봉을 휘두르는 군대가 투입된 현장에서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이틀 밤을 철창에서 보낸 뒤입니다. 7일 오후에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광화문으로 달려왔습니다. 40대 후반의 성실한 ‘노동자 시민’에게 촛불 주변의 ‘하이 서울’ 괴성은 슬픔일 수밖에 없었을 터입니다. 

   물론, ‘촛불 문화제’는 주최 쪽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휴일이었지만 3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열기도 뜨거웠습니다. 젊은 대학생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솔직 합시다. 3천명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문화제’ 현장을 무관심으로 스쳐가는 젊은 시민이 숱했습니다. 청계천 물길을 관광하러온 사람들도 무관심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탄핵 반대 촛불과 비교해보십시오.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었을 때, 촛불을 떠올려보십시오.

   노무현 정권은 기실 촛불 속에 태어났습니다.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은 노 후보에게 표를 주는 데 한 몫 톡톡히 했습니다. 그는 “미국에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고 공약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이 언죽번죽 공약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쳤을 때만 해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탄핵을 받았을 때, 촛불은 다시 타올랐습니다. 어김없이 노무현을 지켜줬습니다.

   그래서입니다. 현장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노동자는 새벽까지 이어진 뒤풀이 술자리에서 결기를 세우며 말했습니다.

   “촛불로 집권한 이 정권을 촛불로 끝장내야 합니다.”

   촛불은 새로운 집회, 신선한 시위 문화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냉철히 톺아볼 때입니다. 과연 우리 촛불만 들어도, ‘문화제’만 펼쳐도 괜찮을까요.

   촛불은 상대의 양심을 밝히는 뜻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묻는 까닭입니다. 과연 오늘의 노 정권 내부에 촛불로 밝힐 양심이 남아 있을까요. 노 정권은 촛불 든 시민을 시들방귀로 여긴 지 오래입니다.

   보십시오. 26년 만에 곤봉을 든 군인이 시민을 구타하는 저 살풍경을. 주한미군의 다른 나라 ‘침략 전략’을 ‘전략적 유연성’으로 선뜻 합의해준 노 정권을. 그 ‘유연성’을 실전에 옮길 최첨단 미군 기지를 평택이라는 지리적 요충지에 대규모로 건설하려는 저들을. 그 침략 기지를 위해 애면글면 박토를 농토로 일궈온 늙은 농민들을 마구 몰아내는 저들을. 

   그래서입니다. 울뚝밸을 거듭 삭이며 묻습니다.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든 촛불은. 군 병력을 동원해 대추 초등학교를 박살내는 노 정권에게. 농토에 철조망을 친 뒤 군사보호구역이라 부르는 참여정부에게. 그곳에 가려는 시민을 곤봉으로 갈기는 저들에게. 촛불은, 우리가 든 촛불은, 과연 더 밝힐 양심이 있을까요. 과연 있을까요. 촛불로 노 정권을 바로 잡을 가능성은.

   명토박아 둡니다. 행여 시민의 무관심과 언론만 탓할 때가 아닙니다. 1970년, 80년, 90년대 내내 민주화운동은 언론권력의 여론조작에 흔들림 없이 맞섰습니다. 힘차게 거리투쟁을 벌이며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의 길을 열어왔습니다.

   그 길 위에서 오늘 우리 앞을 보십시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이어 폭력적으로 미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정권이,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강행처리하려는 정권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 않습니까.

   국민촛불문화제에 참석한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은 강조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싸워야 할 때”라고. 옳은 말입니다. 다만 덧붙일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제대로 싸워야 할 때입니다.   (기획위원/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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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내부비판'과 '성찰'에 충실하자(강준만)

2006. 5. 3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605/h2006050218533224390.htm

 

[강준만 칼럼] '내부비판'과 '성찰'에 충실하자

우리 신문들은 정권이 끝날 때마다 그간 보도하지 못한 비화(秘話)를 연재하고 그걸 책으로 묶어내는 서비스를 충실히 해오고 있다. 재미도 만만찮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왜 이런 이야기가 대통령의 임기 중에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다. 정권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내부 사람들이 왜 그간 내내 침묵하다가 정권이 다 끝나고 나서야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느냐 하는 것이다.

● 자기성찰 없이 상대편 흠집내기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내부비판’을 금기시하는 우리 풍토다. 정적(政敵)으로 간주하는 세력을 비판하는 건 쉬울 뿐만 아니라 속된 말로 남는 장사다. 윗사람에게 잘 보일 수 있고 열혈 지지자들로부터 뜨거운 지지까지 얻어내 정치 기부금까지 늘어난다.

반면 내부비판은 윗사람과 열혈 지지자들을 화나게 만든다. 도대체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그런 비판을 하느냐는 공격까지 받아야 한다. 내부비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현실 인식도 내부비판을 주저하게 만든다. 게다가 진정성이 결여된 채 자기 홍보용으로 하는 내부비판도 없지 않아 내부비판을 하고 싶어도 그런 오해를 받을까봐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게다.

그밖에 또다른 이유들이 있겠지만, 이래저래 내부비판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달리 말해 한국정치엔 자기교정 메커니즘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치세력이건 자신이 직접 잘 해서 점수 따는 건 드물고 상대편의 타락과 과오의 반사이익을 챙겨 득세하는 게 정치의 법칙처럼 돼 버리고 말았다. 양쪽 모두 자기성찰이 없이 상대편 흠집내기에만 열중해 번갈아가며 과실을 챙기는 ‘시소 게임’ 비슷하게 돼 버렸다.

정치만 그런 건 아니다. 지식인 사회도 비슷하다. 요즘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공세가 만만치 않다. 그들의 비판엔 말 되는 말이 많다.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기여했거나 그 정권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지식인들이 내부비판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데다 일부는 권력에 도취된 모습마저 보였으므로 비판받을 건수는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마저 자기성찰은 외면한 채 정치권의 ‘시소 게임’을 흉내내는 것 같아 보기에 안타깝다. 뉴라이트 지식인들은 반대편 지식인들의 질을 매우 낮게 평가한다. 그런 자부심은 좋지만, 그런 질 낮은 지식인들이 득세하기까지 라이트ㆍ뉴라이트 지식인은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그 점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뉴라이트 지식인의 주요 비판 메뉴 중의 하나는 포퓰리즘 비판이다. 일부 개혁ㆍ진보파 지식인들이 대중을 선동해 반(反)지성주의를 확산시키고 지식인 사회를 사실상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섬뜩한 비판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뉴라이트는 집권을 원치 않는다는 뜻인가? 대중을 그렇게 일개 지식인 집단에 의해 놀아나는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여기면서 그들의 표를 얻어 집권하겠다니 모순 아닌가?

뉴라이트 지식인의 사부 격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치열한 사상전’을 예고하면서 “다시 피가 끓는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부정과 투쟁의 시대’는 한번으로 족하다. 이른바 ‘좌파 386’의 그런 특성은 시대의 업보이지, 새롭게 벤치마킹할 건 아니다.

● 뉴라이트 지식인들도 닮은 형태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면, 대중에 대한 혐오부터 거둬들이고 그들로부터 차분하게 신뢰를 얻으려는 ‘긍정과 설득’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 반대편 지식인들도 무언가 배우는 게 있어 과거의 과오를 성찰해나갈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건 내부비판과 성찰이지 피가 끓는 분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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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비평_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 (2)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보수적 민족주의 등장과 타이밍 일치…맥락 놓치는 초역사적 서술

2006년 05월 02일   최장순 기자 이메일 보내기

박노자는 20~30대 젊은층에 가장 잘 알려진 학자 중의 한명이다. 한겨레의 칼럼 필진으로 활동하며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서열주의 등을 질타해온 그의 칼럼집은 베스트셀러에 등극했으며, 그는 서울과 지방의 주요 대학을 순회하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기에 바쁘다. 이방인이지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의 치부를 잘 안다는 그의 인기비결과 혹 있을 지도 모를 거품현상을 함께 짚어봤다.

“질풍노도같은 명쾌한 글솜씨와 함께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하원호 성균관대 교수)
“그의 역사의식은 한국 사람의 평균치보다 더 진보적이다”(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근현대사에 대한 그의 안목은 4차원적 비평을 가능케 한다. 그는 천재다”(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이방인이면서도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한국인보다 더 잘 안다”(김수영 한겨레출판사 편집장)

지금까지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이하 박노자)에게 쏟아진 찬사다. 우리 사회에 그동안 이러한 인물이 없었던 것일까. 지식인에 대한 온갖 찬사를 그가 독점해 간 것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에 대한 여러 점의 초상화와 줄기찬 언론 기고를 통해 ‘죽비소리’를 내온 그가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2권을 펴낸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이 책은 교보문고 ‘사회/정치/법’ 분야에서 4월 3주간 6위(1권은 11위)를 기록했다.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진입시키는 그의 매력은 뭘까.

장은수 도서출판 황금가지 대표는 “신기하고 솔직하기 때문 아니냐”고 되물었다. 한국 지성 사회의 진부한 담론 생산과 가식적인 태도를 꼬집은 말이었을까.

“박노자는 우리 사회의 인맥 관계에 부담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자기 할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방관자의 자리에 가 있다. 그래서 제3자의 눈으로 한국사를 볼 수” 있어 그의 글이 솔직하고 도발적일 수 있다는 것. 학연과 지연, 사승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지성사회를 볼 때 그의 지적은 타당하다.

장 대표는 “흔히 외국인들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 비판은 ‘한국 사회 참 이상하다’는 식의 체험적 한국론에 그친 반면, 박노자는 한국사에 대한 탄탄한 문헌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어 깊이가 있다”며 박노자 신드롬의 ‘근거’를 제시했다.

백원근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여건들을 모두 고려하다 보면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박노자는 단순한 논리를 구사하여 본질적인 문제를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어 호응이 좋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외부에서 맴도는 비판, 그는 왜 밖에 있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박노자 신드롬은 “그의 민족주의 비판이, 80년대와는 달리 보수화·우경화된 지금의 민족주의 등장과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이 맨살로 느끼는 역사적 감각을 결여하고 있어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전했다.

장은수 대표는 “박노자처럼 역사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비판하는 것은 쉽다”는 입장이다. “가령 ‘친일파’는 삶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며 “그러한 유보적 태도가 역사에 대한 예의인데 그는 너무 쉽게 단죄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한국의 경제적 상황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빨리빨리’ 문화를 비판하려면 한국의 내부적 구조부터 면밀히 살펴야 하는”데 “박노자는 한국의 ‘최선’의 선택에 대해서 너무 쉽게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박노자가 생각하는 ‘절대선’이 아니면, 상황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최선’일지라도 가차 없이 비판당하고 만다는 지적이다.

역사적 맥락 빠뜨린 포스트모던한 서술

이권우 도서평론가는 “우리는 분단과 독재를 겪으면서 권력의 검열체제를 내면화해왔다”며 “박노자는 우리가 자기 검열을 통해 항상 ‘쉬쉬’해 왔던 것들을 공론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신선”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 최전선’(푸른역사)에서는 자기만의 원칙으로 우리 역사를 재단하는 느낌이 강했다”며 아쉬움을 토했다.

한국의 근대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세계사적 맥락과 접목시키는 박노자의 글쓰기는 한국 외부에서만 맴돈다는 느낌을 준다. 한 문학 교수는 “파란과 질곡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의 내적 동인을 살피지 않고, 그런 것들의 부작용에만 시선을 돌리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2’의 이번 컨셉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다. 해부대에 올려진 (주)대한민국이 대학과 병영, 기업, 그리고 살갗에 와닿는 일상의 풍경에 근저당을 설정해놓았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진단은 타당하지만, 그 진단과정에 개입되는 인식론과 해법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매매계약에 있어 그가 꼬집고 있는 것은 단연코 ‘폭력’의 코드이고, 궁극적으로 그 비판의 칼날은 이 땅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잘만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향한다. 이번 책 역시 종전까지 박노자 텍스트가 보여준 인식론과 같은 곡률을 이루고 있다.

한국에 이식된 훈육사회의 근본적 폭력성을 참을 수 없던 그는 ‘폭력의 기원’을 찾아 80년대 신군부를 거쳐 박정희 식 개발독재로 옮겨갔다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폭력성에 머물더니, 이내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 결과, “사대부가 노비를 때려죽이더라도 처벌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219쪽) 조선시대의 폭력성과 한국사회의 폭력성을 병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두고 하원호 성균관대 교수(한국근대사)는 ‘초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비판했고, 박노자는 ‘초역사적’ 역사서술에 대한 알리바이로 지금까지 브로델의 ‘장기지속’을 도입해왔다. 이와 관련해 고원 경희대 강사(프랑스사)는 “의식의 장기지속이 성립되려면, 공통되는 물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의 물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비슷한 현상이라 해도 단순 병치시킬 수 없다”고 일축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

이에 대해 박노자는 “한국의 주된 근대적 제도들-학교, 신문, 근대적 스포츠, 경찰 등-은 이미 개화기에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개화기 신문이나 학교에서의 국가주의적 주입의 요소들을 보았을 때, 그 뒤의 비슷한 요소들과 연결시키는 것이 그렇게 무리는 아니다”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박노자 식의 계보학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해석하고 있어 ‘지금 여기에’ 창조적 의미를 던져주지만, 대문자 ‘H’의 역사가 배제하는 다채로운 미시사들에 대한 오밀조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아, 물적토대를 벗어난 ‘역사적 오류’가 담겨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박노자에 대한 지지도가 9할을 넘는 고명섭 한겨레 기자도 약점을 발견하고 지적한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결벽증에 가까운 순결주의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식의 성급한 견제심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악마의 집단 응원전을 보고 파시즘적 광기를 느꼈다는 박노자의 진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박노자는 “민족주의는 군사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형태이며 내가 그 형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근대적 자본주의의 여러 병폐와 모순점을 이야기하면서 민족주의의 모순점을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타자의 평가가 객관적이라는 심리는 착각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박노자 신드롬을 두고, “우리 사회가 스스로의 눈으로 자기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을 잘 아는 한 이방인이, 한국인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기 때문에 관심을 끌었던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나와 다른 부류의 타자로부터 또 다른 객관성이 확보된다고 믿는 심리상태가 존재하는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라고 전했다.

박노자 신드롬은 스스로를 外化시켜 객관의 광학을 마련하지 못한 우리 지성의 현주소를 방증한다. 외부자의 시선에 의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회자될 수는 없을까.

당신과 우리. 그 사이엔 아직도 너무나 커다란 장벽이 있는 듯하다.

최장순 기자 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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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섹시녀의 기준은?

날씬한 몸매가 이상형으로 뜬 건 일제시대에 연애가 강조되면서부터

규방에선 풍만한 여인을 선호했지만 기녀들에겐 ‘개미허리’ 기대하기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바로 ‘통념’이 아닌가 싶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지배자들이 갈망해온 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통념이 되어 ‘당연하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이야기지만 그런 이념을 통념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들은 부지기수다. 지나가는 미국인을 아무나 붙잡고 미국이 민주국가냐고 물어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이 ‘그렇다’고 말하거나 당연한 이야기를 왜 물어보냐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상박하후’(위는 박하고 아래는 후한)의 여성을 보여준다. 풍만한 하체는 조선 후기 양반 여성의 자랑이었다.

미국을 민주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 왕국을 ‘인자한 성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인국(仁國)’으로 부르는 것처럼 지배집단의 명분과 현실이 헷갈린 것인데 이 사실을 아무리 설명해도 다수의 미국인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지나가는 한국인들에게 국제 경기에서 우리 팀이 이길 때 가슴이 뿌듯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지”와는 다른 대답을 할 사람이 나타나려면 과연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태극마크를 단 이들이 마크 색깔이 다른 상대방보다 골을 하나 더 넣는다고 1년에 국내에서 생계 곤란과 비관, 빚쟁이 독촉 등으로 자살하는 이의 수가 줄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왠지 가슴 뿌듯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 ‘왠지 절로’의 무서운 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면 모순에 찬 계급사회의 지속의 비결을 알게 될 것 같다.

유방은 산아능력의 상징이었을 뿐

‘미국은 민주국가다’와 같은 통념들이 세계관을 만드는가 하면 기존의 지배 관계를 은근히 정당화하는 수많은 통념들은 행동 양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 통념들을 정치적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는 가장 정치적일 때가 많다. 예컨대 “살 빠졌다”는 어느새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예뻐졌다”와 동의어가 됐다. 2001년에 코미디언 이아무개씨가 “운동해서 36kg을 뺐다”는 선언을 했을 때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 빼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뿐이었으며 나머지에게는 ‘인간의 승리’로만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 그가 선전했던 다이어트 방법이나 뒤에 밝혀진 지방흡입 수술까지 대산업을 이루었다. 국내 다이어트 시장의 규모는 약 1조원, 즉 국가 총예산의 1% 가까이 된다. ‘뚱보’를 조롱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물론, 유아를 위한 동화책에서도 긍정적인 주인공은 보통 날씬한 반면 지능이 둔하거나 마음씨가 나쁜 인물과 동물들은 자주 뚱뚱하게 묘사된다. 젊은 남성이 살이 쪄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성은 어떤가. 남성의 관능적인 시선을 끄는 날씬한 여성이 바로 이상적 여성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남성들뿐 아니라 다수의 여성에게도 상식이 된 것은 비극이다. 자기 타자화의 함정에 빠진 자가 불평등한 지배 관계의 전복을 꿈꿀 수 있을까?

‘날씬한 여성의 매력’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남성적 판타지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봉요’(蜂腰·개미허리)를 섹시함의 절대적 조건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키가 큰 편이고 운동·다이어트 등으로 날씬해 보이는 여성의 몸이 이상형이 된 것은 일제시대 이후인데, 그전에는 어떤 것이 ‘아름다운 몸’이었을까? 지금 우리에게 섹시해 보이는 몸매가 과거에도 섹시한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구한말에는 여성들의 유방을 아이를 가진 서민층의 어머니들이 자랑하듯 노출하고 다녔으며 가슴은 남성을 흥분시키는 섹시함의 상징이 아닌 산아·육아 능력의 상징이었다. 한국·중국의 고전 한시 중에서 유방의 섹시함을 찬미하는 시가 한 수라도 있는가? 중동에서 연애시의 주된 소재가 여성의 가슴이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섹시함을 보는 눈이 달랐다.

일제시대의 매체를 보면 여성의 풍만을 보는 시각은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신문마다 “몸이 뚱뚱한 사람, 이렇게 고쳐라”(<중외일보>, 1930년 10월4일)와 같은 다이어트 이야기를 실어 ‘몸 마르는 방법’을 알리고, ‘뚱뚱보 조롱’(<별건곤>, 1933년 11월) 등으로 독자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근대적 신체와 다른, 약간의 자연스러운 풍만을 보이는 신체를 조선 재래의 미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미녀 그림, 한-중-일의 차이

식민지 시대 화가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여인은 대개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각선미나 날씬한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 예컨대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 ‘화가가 본 조선 여자의 미’라는 글을 연재했던 화가 이상범(1897~1972)은 “조선의 얌전한 처녀”의 이상형으로 “꽃동 저고리와 주름 곱게 접힌 치마”를 입은 풍만한 체형의 여성을 제시했다. 오지호(1905~82)와 같은 인상주의적 화가의 <나부>(1928)나 <아내의 상>(1936)을 봐도 마른 근대적 여체의 미와 다른 여성의 외형에 대한 관점을 보여준다. 특히 ‘동양 전통’이 좀더 강조되기 시작한 1930년대 말기에는 조선 화가들이 여체의 풍만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예컨대 서달진(1908~47)의 <나부>(1937)를 보면 ‘우리 재래’의 풍만한 여체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려 한 것 같은데 오늘날의 미관(美觀)으로 봐서는 그 모델은 가혹한 다이어트를 해야만 할 것이다. 1945년 이후의 남한에서는 날씬함을 거의 절대시하다시피 한 19세기 말 이후의 구미 여성미의 기준이 무소불위의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된다.


△ 서달진의 <나부>(1937, 맨 왼쪽)에서는 풍만한 상반신이 인상적이다. 월북 화가 이쾌대의 식민지 시절의 <부녀도>(가운데)나 <부인도>(맨 오른쪽)는 하체가 풍만한 ‘전통 조선의 미’를 크게 강조했다

적당히 풍만한 여체는 전통 시대 기혼녀의 미 기준이었다. 매우 짧은(15~20cm) 저고리와 엉덩이를 한껏 부풀리는 아주 길고 폭 넓은 치마를 입는 것은 18~19세기 조선의 유행이었다. 더군다나 겉치마 밑에 너른바지와 다리속곳 등 7~8겹으로 속옷을 입었기에 하체는 더욱 풍성하게 보였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 말 그대로 ‘위가 박해도 아래가 후한’(상박하후·上薄下厚) 인상을 준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은 후기로 갈수록 풍만한 여체를 더 선호했지만, 동시대의 일본이나 중국은 조금 야윈 체형을 미인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나라 시대에 절세미인 양귀비(719~756)가 풍성한 몸매를 자랑하고 헤이안시대 귀족들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일본 최초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11세기경)에서 가는 허리 이야기는 안 나오고 ‘보동보동 풍만한 여인’들이 주로 미녀로 묘사되지만, 10세기 이후의 중국이나 13~14세기 이후의 일본에서는 점차 ‘미인’의 키가 커지고 체형이 초췌해진다. 같은 문화권이지만 미의식만큼은 차이가 명확했다.

전통 시대는 여성이 신체 관리에 덜 신경써도 되는 시대였다고 해서 과연 ‘적당히 풍만한 여체의 미’는 여성의 자율적인 미관이었을까?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가정이 성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연애 이데올로기를 가진 근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각은 섹시미에 맞춰져 있지만, 규방이 대를 잇기 위한 곳으로 인식되었던 시대에는 산아·육아 능력이 있을 법한 풍만한 여인이 남성의 눈에 긍정적으로 비쳤다. 즉, 여성에게 요구되는 구체적인 외형은 달라도 남성이 자신의 욕구를 여성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리고 전근대의 남성들도 성적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기녀, 유녀들에게는 “버들가지 같은 개미허리” “질끈 묶은 가는 허리”(이옥, 1760~1813: ‘일곱 가지 끊어야 할 일’)를 기대하기도 했다. 중국의 귀족 시인 사령운(385~433)이 ‘소요미골’(小腰微骨·가는 허리와 자그마한 뼈)을 미녀의 특징으로 주목한 뒤에는 동아시아 남성들에게 ‘가는 허리’는 하나의 성적 판타지가 됐다. 일본 유녀를 그린 에도시대 미인도들을 보면 이 부분이 눈에 띈다.

더 자연스럽게 살기 위하여

여성이 남성에게 사회경제적으로 억눌려 있는데다 남성의 이념이나 성적 욕구에 따르는 미의 기준까지도 내면화해 자기 신체를 알아서 뜯어맞춰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언뜻 보면 하찮은 일이지만 남성 본위의 획일적인 미 기준으로부터의 해방도 여성 해방의 일부분이다. 살 빼기는 ‘외모’가 아닌 건강의 문제나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개개인의 주관적 관점이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아름답다는 생각이 사회의 ‘통념’이 되어 여성이 남성적 시선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장징 지음, 이목 옮김, <미녀란 무엇인가>, 뿌리와 이파리, 2004.

2. 이배용 외,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1999.

3. 임찬수, <겐지모노가타리>, 살림, 2005.

4. 강명관,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온다>, 푸른역사,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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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눈]중남미 좌파정권 부상과 신자유주의 저지는 시민사회 힘

 

전 세계에 걸쳐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 거기에 대응하는 형편과 사정은 각국마다 다르다. 그런데 최근 중남미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좌파 정권들이 급부상하고 있다. 그 이유를 1980년대 초부터 도입된 신 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로 해석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좀 더 넓게 시야를 가져갈 필요가 있다.
 
빈부격차의 심화, 양극화는 오래 전부터 남미를 괴롭혀온 고질병이다. 이를 고치기 위해 중남미 각국 정부는 1970년대까지 수입대체와 국내산업 보호 정책을 써왔다. 그리고 그 성과도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바라던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경쟁력 강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미국의 영향력과 외채문제를 지렛대로 한 IMF 등의 개입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약 25년간 도입되었다. 그 결과는 양극화의 심화로 나타나고 있다.
 
중남미 경제 저성장의 근본 원인은?
 
중남미의 근원적인 문제는 스페인이 통치하던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부문의 과두 독점체제가 전혀 흔들리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이의 수술을 위한 교육, 사회 개혁정책은 검토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부유층의 사립학교와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학교의 엄청난 격차 그리고 졸업후의 관료 충원 방식의 개혁 등 사회 계층의 합리적 이동을 위한 정책은 손도 대지 않는다.
 
멕시코의 신 자유주의 실험 이전과 이후의 경제 성적표를 한번 보자
 
예전에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시장개입과 수입대체 전략 이행시기인 1934년부터 1982년까지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6.1%였다. 그러던 것이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1983년부터 2004년까지의 그것은 연평균 2.3%로 떨어졌다. 94년 NAFTA가 도입된 이후의 성장률은 거의 1%대로 알려졌다.
 
제조업 연평균 성장률은 6.7%였다가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시기의 그것은 2.7%로 떨어졌다.최근의 제조업 성장률은 2001년 -3.8%, 2002년 -0.6%, 2003년은 -1.2%였다. 2004년의 제조업 연평균 성장률은 2000년의 그것보다 2.1% 낮다. 2005년과 2006년에 조금 호전되었다고 하더라도 2001년부터 2006년까지의 제조업 연평균 성장률은 겨우 1% 남짓이다.
 
제조업 부문 고용은 2001년 -3.8%, 2002년 -5.5%, 2003년 -3.4%, 2004년 -2.6%씩 고용이 줄었다. 2004년의 제조업 부문 고용은 2000년의 그것보다. 17.6%가 줄었다.
 
멕시코 경제학자 살바도르 칼리파에 의하면, 일인당 국민소득으로 표시되는 경제성장률이?1950년에서 2000년까지 아시아의 그것은 미국을 기준으로 16%에서 57%로 성장했는데 비해 중남미는 28%에서 22%로 줄어 들었다. 이 같은 중남미 경제 저성장 아니 마이너스 성장의 비밀은 종속이론이 이야기한 외부 요인 이외에 국내적으로 지나치게 낮은 노동 생산성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는 데 있다. 1950년에서 1998년까지의 노동생산성의 변화 추이를 보면 미국을 기준으로 하여 유럽은 39%에서 79%로 성장했고 아시아는 15%에서 54%로 성장했는데 중남미는 33%에서 32%로 줄어 들었다.
 
이같이 노동생산성이 낮은 이유는 각 산업부문별 독점체제가 구축되어 경쟁이 필요 없는 경제 구조 때문이다. 경쟁을 기피하는 문화가 널리 확산되어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외형적으로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소수의 과두독점지배가 지속되어온 권위주의 정치문화와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예전에 수입대체 정책을 쓸 때도 국내 산업 내에서의 경쟁은 거의 없다시피하고 나중에 신자유주의 개방 이후도 국내 경쟁은 아주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거대 전화, 통신회사인 Telmex는 이전에 국영기업일 때도 독점적 위치를 누렸고 나중에 민영화되어서도 계속 독점의 지위는 확고하여 고객 서비스의 개선 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즉 경쟁력 향상의 효과가 별로 없다. 노동자들도 노조 집단주의를 정치적 통제의 수단으로 삼는 포퓰리즘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매우 낮다.
 
50년대에서 70년대 초까지 멕시코 경제의 활력은 대단하여 한때 멕시코 경제의 기적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68년 올림픽을 개최한 것만 보더라도 자신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수입대체에만 치중했지 동아시아처럼 제조업 활성화를 수출산업화시키는 전략을 펼치지는 못했고 중공업과 하이테크 산업의 증진도 서두르지?않아 시장의 한계 등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그 활력이 점차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필자가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70,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전략 말고도 다른 대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70년대에 페소화의 평가 절상정책과 재정적자에 의해 인플레는 높아지고 수입이 엄청나게 늘면서 경상적자가 급증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급격한 평가절하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경상적자폭이 줄어들면 다시 위의 상황이 재개되고 위기 때는 외채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외채의 정상적 상환이 어려워지는 경제위기를 다시 맞는 악순환을 밟아왔다. 이와 같은 패턴은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에서 비슷한 모습이고 특히 2001년 아르헨티나 위기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달라지는 중남미 시민사회
 
멕시코는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노동 동기가 크지 않은 저생산성의 문화에 가톨릭의 대중 순응 이미지 조작과 강력한 집단적 노조주의의 통제에 힘입어 사회주의적이면서도 파시즘적인 특이한 형태의 포퓰리즘 정당인 PRI당이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서 좌파 헤게모니가 강화되었던 것은 PRI당으로부터 분화한 개혁적 좌파인 PRD당이 멕시코 시티 등의 시장을 여러 번 집권 하면서 개혁세력의 사회서비스 강화 정책을 통해 좌파적 지식인 그룹과 노동자, 서민 등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한 헤게모니 진지 강화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1968년의 경제 위기이후 주기적으로 맞아온 위기 사이클이 짧아지면서 1987년에 다시 위기 상황이 노정되자 집권 세력인 PRI당은 90년대 이후 그 출구를 NAFTA에서 찾으려 했다.?그러나 협정을 체결하자마자 일년 뒤 엄청난 경제 위기를 겪게 되었고 그 후 평균 실질 경제 성장률 1%라는 무성장이 계속되자 우파적 지식인 그룹도 위기의식을 갖게 되어 2000년 정권교체에 이르게 된다. 또한 남쪽 치아파스 지역에서의 마르코스의 전혀 새로운 대안 정치가 실시되면서 원주민들과의 연대에 의한 강력한 좌파 헤게모니 진지가 구성되어 왔다.
 
무엇보다. 올해 7월 2일에 있을 멕시코 대통령 선거를 주목해야 한다. 이 선거에서 당선이 예상되는 후보인 전 멕시코 시티 시장 로뻬스 오브라도르가 승리할 경우, 그는 당장 NAFTA 탈퇴 등의 과격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남미 공동시장과의 협력 및 석유자원과 멕시코 거대기업 TELMEX를 통한 남미 전체와의 협력은 강화될 것이고 이로 인해 미국이 받게 될 타격은 상상보다 매우 클 것이다.
 
현재 집권 친미 정당(PAN당)은 오브라도르의 당선을 막기위해 티비광고 스폿을 통해 오브라도르와 차베스의 이미지를 겹쳐 보이면서 그의 당선이 멕시코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악의적인 선동과 조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여성 지식인 작가를 인신공격하여 여성표를 잠식할 수 있는 악수까지 두고 있으며, 일부 여론조사회사의 조작의혹까지 사고있다.
 
중남미에서 ‘제국주의의 강아지’라고 비웃음을 사는 멕시코 정권은 이미 NAFTA 협약이 체결된 지가 10년이 지난 뒤 ‘경제 구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세제, 에너지, 노동 분야의 개혁, 민영화, 유연화 등의 정책 변화를 시도했지만 의회와 시민사회의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손도 못 대고 말았다. 특히 노동분야는 멕시코 정치, 경제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노조 집단주의의 전통으로 인해 감히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쉽게 하려는 구조조정이 불가능하다. 하물며 우리나라같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그들의 노조설립을 방해하고 자의적으로 해고하며 노조에 대해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기이한 사례는 중남미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중남미 좌파 붐의 배후에는 시민사회의 성장이 있다
 
일부 중남미 지식인들은 현재의 좌파 부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약 반세기는 갈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중남미 시민사회 자체의 질적, 양적 성장과 노동자 계급과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연대로 인한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의 좌파 헤게모니의 확장에 주목한다. 중남미 역사상 최초의 볼리비아 원주민 대통령 탄생, 베네수엘라와 멕시코에서의 노동계급 자주 생산방식의 실험, 각 도시마다. 소규모 국제 문화 축제를 통한 중남미 여러 나라의 문화 연대, 진보적 언론인의 국경을 넘는 적극적 취재, 베네수엘라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벌이는 유기농 실험 등 생태와 환경의 대안 문화 추구 같은 소프트한 움직임들이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남미 통합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결단-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헌법 제정, 남미 대륙을 관통하는 송유관의 건설, 남미 공동시장의 강화-등으로 연결되고 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백인 이외의 인종 그룹, 특히 원주민의 자부심의 상승으로 이들 다양한 인종이 병행 발전하게 됨으로써 미국에는 없는 사회, 문화적 역동성을 가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94년부터 시작된 마르코스의 실험도 이런?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최근 멕시코에서의 그 성과를 보면, 치아파스의 악테알이란 곳의 커피나무 재배 마을에서 1997년 원주민 마을주민에 대한 암살사건이 일어나고 오히려 그 마을 주민 5명이 붙잡혀간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석방을 기도하는 행진을 가지게 된다. 이후 자연스럽게 이 모임이 지속된다. 그들은 원두 커피의 중간상의 착취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2000년에 ‘마야 비닉’이란 유기농법의 원두 커피 생산 조합을 만든다. 이들은 정의의 바탕 위에서 생산과 분배를 나누고 있고 현재 5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 2001년에 프랑스 정부는 이들에게 인권상을 수여한다.
 
물론 미국이 주도하는 남미의 콜롬비아와 페루에서의 자유무역 협정 추진으로 남미의 새로운 비전을 향한 행진이 일시 멈칫하고 후퇴한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역사적 대세가 될 수는 없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에콰도르와 미국과의 자유무역 협정 조인은 에콰도르 국민의 40%를 넘는 원주민 사회운동세력의 거대한 시위로 말미암아 물 건너 갔다. 이들 원주민 사회운동세력의 지도자는 미국과의 자유무역 협정이 자유무역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에콰도르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통제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국민투표의 요구를 넘어 베네주엘라의 경우와 같이 헌법 제정의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석유의 국유화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원주민 독점의 사회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병행 발전을 주장하고 있다.
 
73년에 있었던 칠레 아엔데 전복 쿠데타의 성공과 달리 2002년에 있었던 베네주엘라 차베스의 실각을 노린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다. 베네주엘라에서는 칠레와 같이 극우 지배계급과 언론매체의 사보타지와 엄청난 규모의 외환도피가 있었고 그에 뒤이어 쿠데타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차베스 자신의 신중함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섣부른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고 항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은밀히 알렸다. 그래서 국제 언론을 활용하는 쿠바의 기민한 지원과 그로 인한 차베스 충성파 군부 정예부대의 반발과 엄청난 규모의 시민사회의 지지 덕분에 다시 권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약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남미 시민사회의 저력은 이렇게 성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차베스가 군인 출신인 사실에 왠지 민주주의의 지도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중남미 역사에서 70년대 이후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 하기 이전에 군인들이 진보주의 정치의 견인차 역할을 한 사례는 많다. 현재 차베스 개혁의 성과는 만만치 않다. 무상의료, 무상교육만이 아니라 노동자 세력과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한 창의적이고 급진적, 대안적 민주주의의 조직화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스페인 식민지 시절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주엘라, 파나마는 한 나라였다. 파나마를 제외한 세 나라 국기가 비슷한 것도 그 때문이고 볼리바르 장군의 역사적 전통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최근 페루에서 마치 도둑질하듯이 톨레도 페루정부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지만 시민사회의 반발로 의회에서 비준될지 의문이다. 그러나 페루는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선 알란 가르시아와 후지모리 부패정권의 포퓰리즘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좌파 헤게모니가 약화되어있어 좌파집권을 쉽게 점칠 수 없다.
 
문화적 측면의 저항과 변화 역시 주목하자
 
또한 90년대부터 본격화된 남미 각국들의 도시 중심의 작은 국제 예술문화축제를 주목하고 싶다. 필자가 최근까지 살았던 멕시코의 몬테레이 시만 하더라도 약 1994년부터 [구시가지] 국제 예술 축제가 시작되었고 예전에 제철소였다가 지금은 대중들이 많이 찾는 녹지 공원으로 변한 곳에 전시관, 소형극장 및 시네마테크가 설치 운영되기 시작한다. 이런 사례들은 특히 문화정책적 측면에서 문화의 민주화와 관련해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중남미는 문화를 통해 각국 사이에 열정이 서로 소통되기 쉬운 구조가 있다. 바로 스페인어와 가톨릭 문화 때문이다. 마치 물과 기름과 같이 상업적 미국 문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비록 코카콜라를 물처럼 마시더라도, 대중과 지식인이 공유하는 비상업적인 민속, 민중적 문화전통의 맥락은 면면하다. 이름 모를 음유시인들의 구어적, 집단적, 서사시적 음악의 전통은 중남미에서 아주 강하고 현재에도 큰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만이 아니라 연극 미술 영화 모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칠레는 국가 경쟁력 순위 등에서 중남미 최고의 선진국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 중남미에서 2위, 세계적으로 9위의 소득 격차가 심한 나라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 본문은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을 여는 진보정치연구소(http://policy.kdlp.org) '연구소 칼럼'이며 본문의 제목은 원제와 조금 다르게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2006/04/29 [11:47]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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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5-0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중남미의 정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이네요.
퍼갈게요.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