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12

 

들어라, '쇄국론' 비판하는 바보들아

[한미FTA]경쟁력 빵점짜리들 - 관료, 노대통령, 중앙일보 등

굳이 한미FTA만이 아니더라도 경제나 정치, 교육 등 어디서나 많이 듣는 말이 ‘경쟁력’이다. 치열한 국제경쟁, 거기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얼른 한미FTA를 체결하여 경제를 개방하고 선진국으로 가자. 한시가 급한 이때에 한미FTA를 반대하는 때아닌 쇄국론이 웬말인가!

정부의 통상담당 관료들도, 보수언론도, 미국식 경제학 말고는 공부한 적이 없는 ‘우국적 지식인’들도 모두 이런 식이다.

미국식 경제학만 공부한 '우국적 지식인'들의 한심한 발상

일단 FTA 반대가 쇄국론이라는 수준 이하의 주장은 제껴두자. FTA를 체결하지 않은 지금도 한국 경제를 쇄국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무 생각 없는 바보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FTA 아닌 것이 모두 쇄국체제라면, 미국과 FTA를 맺은 10개의 나라(요르단, 파나마, 싱가포르, 모로코, 멕시코, 캐나다, 칠레, 호주, 바레인, 이스라엘) 말고는 모두 쇄국체제라는 말인데, 이거 지지할 사람 찾는 거, 쉽지 않을 것이다.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거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살아남는 거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미FTA를 체결해야 한다는, 그것도 황급히 해야 한다는 논리는 중학교 교육이라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결코 쉽게 하기 힘든 터무니없는 비약이다. 경쟁력 없는 교육, 그게 그런 식의 허접한 말들을 지위와 나이, 직업을 막론하고 아무 부끄럼 없이 마구 쏟아내게 하는 원인이다. 정말 경쟁력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먼저, ‘경쟁력’이란 말부터 간단히 보자. 경쟁이란 말이 이처럼 생사를 건 문제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진화론’ 때문일 것이다. 개체들간의 경쟁, 자연도태와 적자생존, 진화, 이것이 다윈의 이름으로 19세기 이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던 진화라는 말의 이론적 배경이다. 머, 여기서 진화론에 시비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진화론에서 사용하는 경쟁이나 도태, 진화라는 말의 의미 정도는 좀 알고 말을 해야 경쟁력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쟁력'의 참뜻을 알고 얘기하라

진화론에서 경쟁과 도태, 적자생존이 발생하는 전제조건은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즉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고, 경쟁력이란 환경에 대한 적응능력이다. 따라서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언제나 ‘좀더 완전한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흥미로운 예가 등장한다. 가령 대서양에 있는 마데이라 섬에는 다른 곳과 달리 한결같이 날개가 퇴화되어 제대로 날지 못하는 것들만 살고 있다. 다윈에 따르면 그 섬은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었고, 따라서 제대로 날개가 달린 놈들은 날아다니다 바람에 날려가 모두 바다 속으로 ‘도태’되어 버리고 날지 못하는 놈들만 적응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즉 날개 없는 놈들이 마데이라 섬 같은 환경에서는 가장 경쟁력이 있었던 것이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제의 경쟁력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는데 적합한 능력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환경이 달라지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조건이 달라진다. 산업의 자생력이 약한 곳에서 개방은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물론 지금처럼 개방이 불가피하다면 개방체제에 적응하여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 농산물 유예, 수퍼 301조는 눈에 안보여", 대책없는 한국 개방론자들

이를 위해선 적응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미국도 호주와 FTA를 체결하면서 농산물에 대해선 장장 18년(!)의 유예기간을 설정했고(호주는 즉각 개방했지만), ‘완전개방’을 말로는 외치지만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반덤핑관세’라는 형식으로 강력한 보호관세를 유지하고 있다(악명 높은 슈퍼 301조가 그것이다).

이 슈퍼301조는 FTA를 해도 철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이미 확고하게 표명한 바 있다. 낙농으로 유명한(상당히 경쟁력이 있는) 스위스는 미국과 FTA 협상을 추진하다가 자국 농산물 보호를 위해 FTA를 포기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농업이나 제조업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완전개방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대책 없는 개방론자들 말고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경쟁·개방에 관해 말할 때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첨단으로 가는 게 경쟁력을 확보해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상식적 주장의 맹점이다. 첨단부문에서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그렇다고 전체 경제가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날짐승이지만 훌륭한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날지도 못하는 날개를 가진 비둘기보다 훨씬 급속히 도태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훌륭한 날개가진 독수리가 비둘기보다 훨씬 급속히 도태되는 이유

그런데 한미FTA를 추진하는 관리들의 주장은 이런 턱없는 상식에 호소하고 있다. “중국의 추격을 피할 수 없으니 제조업을 포기하고 서비스업을 빨리 선진화해서 경쟁력을 갖추자”는 이른바 ‘중국위협론’의 전략이 그런 경우다. 일단 한국의 서비스업이 FTA를 통해 개방된 환경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는 논외로 하자. 즉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나 ‘중국위협론’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중국의 추격’ 앞에서 제조업을 포기하면서 서비스업으로 성공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일단 제조업을 포기한다면, 제조업에 관련된 기업이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까? 모두 선진화된 서비스업으로 이동하거나 이직하게 될까? 선진적 서비스업이라는 게 법률사무소, 컨설팅회사, 보험회사, 은행 등인데, 그게 이들을 고용할 수 있을까? 한국의 전 산업을 서비스업화할 수 있을까?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깡통’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경쟁력 있는 서비스업이라면 ‘노동집약적’일 리 없으니 고용효과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럼 몰락한 제조업에서 밀려나온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경쟁력 없는 존재니 도태되는 게 자연스런 일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게 경쟁력 있는 국가를 만드는 길일까? 아님 ‘복지국가’들처럼 실업기금으로 먹여 살릴 것인가? 그거야 말로 경쟁력 없는 경제로 빠져들게 되는 결정적 일보가 된다고들 하지 않던가?

제조업에 어이없는 이미지 뒤집어 씌우는 <중앙일보>는 최악의 패배주의

추격해오는 중국의 제조업에 대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을 찾기는커녕 이 모든 사태를 감내하면서까지 한국의 제조업을, <중앙일보>처럼 ‘가발공장’이라는 60년대식의 어이없는 이미지를 뒤집어 씌워 포기하자는 말이야말로 경쟁력이라곤 없는 최악의 패배주의 아닐까?

농업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 농업이 미국농업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는 것은 누가보아도 분명하다. 쌀의 생산비용이 4배를 넘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은 토지가 좁기 때문에 경쟁력을 확보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이 경우 경쟁력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는 게 정부관리가 할 일일까? 농사를 포기하는 대신 선진화된 서비스업으로 가라구?

그럼 평균 연령이 60에 가까운 농민들이 재교육 받아 컨설팅회사나 보험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 역시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깡통’ 아니면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이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일까?

지금 350만 농민 가운데 다행히 반은 살아남는다 해도, 나머지 170만 농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서비스업에서 번 초과이윤을 그리로 돌린다구? 머,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그럴 거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그 돈을 그냥 줄 리는 없지 않은가?

서비스 산업 선진화 누가 반대? 그걸 위해 농업·제조업 포기를 비판 하는 것

그거야 말로 경쟁력 없는 실업자를 사회가 부양하는 거라며, 일 안해도 먹고 사는 풍토가 만들어질 거라며 부르주아들이 쌍지팡이 들고 결사반대할 것 아닌가? 그럼 그걸 받기 위해 나이든 농민들이 취로사업에라도 나가야 할까? 그러려면 취로사업을 위해 새만금 같은 거대 공사를 몇 개 더 벌려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사회복지사들이 지급하는 생활보조금으로? 이 역시 가능하다고 가정해도 멀쩡히 일하던 170만 농민들을 국가가 먹여 살리는 ‘거지’로 만들어버리는 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운영되는 경제가 과연 경쟁력 있는 경제가 될까?

서비스업이라는 선진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추자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제조업이나 농업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이 정말 경제 전체의 경쟁력을 상승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가 될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서비스업에 경쟁력이 있는 것이 전체 경제가 경쟁력이 있는 것을 뜻하진 않기 때문이다.

보험회사나 법률회사 10개가 강력한 경쟁력을 갖고 선진화되어 살아남는 것보다는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수천 개의 부품회사와 연결되어 있는 자동차 회사 하나가 선진화되어 살아남는 것이 전체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는 걸 설명해야 할까? 그래서 개방경제론의 모델인 미국조차 자동차에 자국 내 부품을 사용한 정도(‘국산화율’)를 표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도태돼야 할 곳들 1순위는 통상관료들

하지만 ‘국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말 강력한 도태과정이 필요한 곳이 있다. 관료들의 세계, 특히 통상교섭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세계가 바로 거기다.

‘4대 현안’을 내주면서 아무 것도 받아온 것 없는 걸 ‘협상’이라고 하고 있는 관료들, 국책연구소의 어용연구조차 수치를 지우고 바꾸고 속여서 보고하는 관료들, 단 3개의 연구보고서만 갖고서도 ‘오랫동안 충분히 준비해왔다’고 생각하는, 아니 오랫동안 겨우 그것 밖에 준비하지 못한 관료들, 그리곤 협상을 위해서라며 모든 걸 비밀에 붙이기로 하고 심지어 협상도 하기 전에 협상결과를 3년간 비밀에 붙이기로 한 관료들.

이들이야말로 무능하고 경쟁력 없는 관료들 아닐까? 이들이 정말 경쟁력 있는 국가를 만들 거라고 믿어야 할까? 이들이 이끄는 정부, 이들에 끌려가는 정부, 이거야말로 국가의 경쟁력을 최악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암적 요인 아닐까?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바로 이들을 제거하고 도태시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경쟁과 도태의 냉정한 법칙이 작동하게 해야 할 곳, 그것은 바로 이들 관료들의 세계가 아닐까?

관료 무능 감추는 '비밀주의' 전술 빨리 그만 두라

그래서 꼭 말해두고 싶다. 한미FTA로 경쟁력 있는 개방체제로 가고 싶다면, 가장 먼저 관료들 자신의 세계부터 개방하여 무한경쟁체제로 가도록 해야 한다고. 남들을 경쟁체제에 밀어 넣기 전에, 자기 자신이 앞서 경쟁체제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고. 무능을 감추는 비밀주의라는 비겁한 전술을 하루빨리 포기하라고. 그거야말로 당신 자신의 경쟁력을 낮추는 길이라고.

그러나 그런 점에서, 관료들이 유능하다면 ‘철밥통’을 준들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그의 안목을 근본에서 의심하게 한다. 이 경쟁력 없는 관료들이 그의 눈에는 철밥통을 차고앉아도 좋을 사람들로 보였다는 것일까? 철밥통을 주면 그나마 있던 경쟁력도 사라지고 만다는 걸 모르는 것일까?

대통령의 경쟁력, 그것은 일단 무능한 관료들도 유능한 관료로 만드는 것일 터이다. 무능한 관료들에게 철밥통을 주려는 대통령처럼 경쟁력 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정말 경쟁력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안목도 없고 경쟁력도 없는 대통령 자신의 위치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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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4-3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진경씨가 요즘 이런 글도 쓰고(원래 그랬나?)
세상이 급박하긴 한가보다... (놈현 이 찢어죽일 놈 ㅡ..ㅡ )

가을산 2006-04-30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로 buddy들이 모이면 꼭 나오는 소리가
놈현이 도대체 왜 이러지? 입니다. 원래 그런놈이다. 포위되어서 설득당했다 등
여러가지 썰이 있습니다만.....
불가피하게 응하는게 아니라 이쪽에서 몸이달아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있으니..
 

손석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름
[서평]『과격하고 서툰 사랑 고백』

비판 언론인의 역할 모델

우리 사회 비판적 언론인으로서 하나의 역할 모델을 만든 손석춘이 새 책을 냈다.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 짧은 글들을 묶은 것이지만 어느 한 편도 예사롭거나 그저 그렇게 쓰지 않은,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며 문제들을 돌파해 들어간다. ‘손석춘식 글쓰기’가 갖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요즘같이 미문과 스타일이 압도하는 글쓰기 추세를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으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갑다는 표현은 어쩌면 부적절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면 푹신한 소파나 안락의자에 앉아 긴장 없이 눈 가는대로만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세를 고쳐 잡아야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읽게 하는 게 손석춘, 그의 글이다. 불편하게 만들지만, 현실과 비판적으로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 아닌가.

그의 글이 문제 삼고 있는 현실은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대학, 언론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자리하는 실력자들 거의 전체를 망라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언론과 그 사주들, 수구보수 정당의 시대착오적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이 보이는 패권적 행태도 피해가지 않는다.

누구보다 비판의 핵심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개혁’을 ‘개혁’할 때다. 낡은 것으로 고침은 결코 개혁이 아니다. 개혁은 새롭게 고침이다...... 간곡히, 거듭 촉구한다. 이 땅의 민중이 열망해 온 ‘개혁’을 더는 우롱하지 말라. 누가 권력을 주었는지 잊었는가.”

손석춘이 노무현 정부에게 던지는 이 말 속에 한국 사회의 슬픈 현실이 있다. 민주개혁의 실종과 사망, 그것은 타살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죽음, 곧 자살이었던 것이다.

냉전반공주의의 뒤틀린 심사를 나타낸 김수환 추기경도 성역일 수 없었으며, 정연주 KBS 사장과 이미 운명을 달리한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에 대한 비판 역시 날카롭다. “언젠가 내가 타락할 때 그 잘못을 지적해 줄 후배를 ‘각오’하고 있다.” 오늘의 사회 현실에서 이런 자세를 갖는 언론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크게 위안 받는다.

회피하고 싶은 불편함

손석춘이 비판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오해다. 손석춘은 먼저 흥분하지 않는다. 사태의 앞뒤를 가리고 경중을 따져 문제의 원인과 구조의 얼개를 밝히고 나서야 그는 책임감을 촉구한다. 그런데도 그의 글에 대해 너무 세다고 말하거나, 지나치게 날카롭다고 하면서 회피하는 주변의 평가가 많다. 왜 그럴까? 의아할 따름이다.

그의 글이 날카롭게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태의 핵심 구조를 집약적으로 아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없는 큰 장점이고 오히려 부럽기까지 한 일이다. 그는 문제를 돌려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글의 핵심 주제에 다가가는 방식은 직접적이며 초스피드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이런 저런 관계 때문에 쓸데없이 눈치 보지 않으니 이 역시 좋은 점이다.

추상적 원리나 외국의 철학 사조들을 경쟁적으로 인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떠벌리는 종속적이고 속물적인 지식인 문화가 압도하는 현실에서, 현실을 말하고 그것도 곧바로 말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받을 일이다.

“대한민국 자본주의가 오늘 천박한 까닭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비인간적인 살벌한 경쟁에 내몰리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아직 12%에 지나지 않아서다.” 얼마나 간명하고 명쾌하게 핵심을 찌르는 말인가?

그런데도 손석춘을 불편해하는 분위기는 강하다. 어떤 이는 손석춘이 아무리 오늘의 한겨레가 처해 있는 현실을 실증한다 하면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손석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돌려 묻고, 어떤 이는 그의 글이 너무 선동적이라고 해서 탓한다. 그래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에서 손석춘은 자신이 이렇게 평가되는 것에 대해 정말 애끓게 설명하고 솔직하게 이해를 구하려 한다. “오랜 세월 한국의 부자신문과 친미언론들이 퍼뜨려 좋은 말들에 우리 모두 어느새 친숙해 있어서다. 그 결과일 뿐이다. 저자의 칼럼이 ‘과격’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이도 모자라 그는 “저자의 칼럼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저자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다짐해본다”고 말하고, “그랬다. 독자에 드리는 서툰 사랑의 편지, 연서였다”라며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이 글이 손석춘의 바람대로 읽힌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는 낙관의 모티브가 된다. 그럴까? “비판을 본령으로 하는 언론인에게 결국 남는 것은 인간적 쓸쓸함이 아닐까”를 끄트머리에 덧붙이는 그의 말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거짓에 대한 비판, 그리고 꿈을 향한 열정이 상실되어버린 오늘 바로 우리의 자화상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모두 부라퀴들

‘부라퀴’. 손석춘이 잘 쓰는 우리말 표현이다. “제게 이로운 일이면 영악하게 덤벼대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 주위를 채우는 사람들, 그가 진보건 보수건 떠나 대체적으로 이런 류의 사람들이다. 무슨 한가한 도덕률을 되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이 그렇다는 것은 뭔가 한국 사회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이다. 손석춘이 강조하듯 “민주주의를 일궈온 우리가 ‘무장해제’ 말아야”했는데, 무장해제 되었다는 말이다.

손석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런 우리 스스로들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심리의 반영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퇴락에 대해 일말의 공범의식이 있는데 그 불편함을 마주하기 싫다는 표현이다. 그래도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손석춘은 책에서 자주 이런 말은 한다. “주장은 하되 ‘거짓말’은 말라.” 우리 모두 그래야 할 것이다. 알맹이 없이 이미지만이 난무하고 참과 거짓이 뒤섞인 오늘의 세상에서 손석춘은 불편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의미가 있다.

끝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숨쉬고 싶어 하는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에 살짝 수작을 걸어본다. “너, 참 괜찮은 놈이야. 근데 말이야, 왜 읽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면서도 가슴이 저리면서 아파오지? 아직 미련이 남아서일까,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일까?”

 

조현연/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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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프랑스의 새로운 노동법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두 달여 동안 프랑스를 불태웠던 최초고용계약(CPE, 26세 미만의 청년들을 고용할 경우 2년 안에 특별한 사유 없이 해고가 자유롭도록 규정한 법안)을 둘러싼 논란의 패배자는 프랑스 정부였다.
  
  미국 매사추세츠대학 암허스트 캠퍼스의 경제학 교수인 릭 울프는 진보적 평론지 〈먼슬리 리뷰〉 기고문을 통해 "한번의 큰 싸움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여전히 전쟁은 프랑스와 기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프랑스의 청년과 노동자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다.
  
  울프 교수는 "비록 이번 싸움에서는 패배했으나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자본가들과 정부에 맞서 좌파 세력은 이 승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의 승리는 '단결'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지적하고 결국 여러 갈래로 분열된 세력들의 단결만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비정규직 법안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는 한국사회에게도 프랑스의 승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 청년들과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 끝에 얻은 승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다음은 울프 교수의 기고문 "프랑스 좌파세력의 승리에서 배워야 할 것들(Lessons of a Left Victory in France)"의 전문이다. 원문은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SectionID=1&ItemID=10109에 가면 볼 수 있다. 〈편집자〉
  
  프랑스 좌파세력의 승리에서 배워야 할 것들
  

 
2006년 봄의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노동법에 대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시위는 결국 시라크 대통령의 'CPE 철회'를 받아냈다. ⓒEPA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비롯해 그 휘하의 프랑스 정치인들은 패배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복지를 줄이려 했던 프랑스의 신자유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 그리고 노동조합의 강력한 단결은 26세 이하의 청년들의 고용 보장을 무력화하려 했던 정부의 법에 맞서 싸워 승리를 얻어냈다. 그들은 시라크 대통령이 새 노동법을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다른 프랑스 정치인들이 주장해 왔던 것은 명백히 불법적이고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재 프랑스와 다른 지역의 모든 사람들(경제와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을 한 축으로 하고, 학생ㆍ노동조합과 좌파를 또 한 축으로 하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이번 투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서로 다른 인식은 앞으로 양측이 각각의 조직과 전략, 그리고 전술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프랑스의 우파와 그들의 기반인 거대기업들은 앞으로 그들의 조직과 손상된 대중적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오랜 숙원인 노동법과 여러 조건들을 기업의 이익에 맞게 "재정비"하기 위해 이번과는 또다른 방법을 시도할 것이다. 그들이 이번 패배로부터 얻을 교훈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정치적 패배를 피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다음번에는 이번보다 훨씬 더 잘 좌파를 분열시켜야 함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국가적' 혹은 '경제적', '안보상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라고 위장하려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ㆍ경제 '컨설턴트', '싱크탱크' 그리고 학문적인 '조언자'들을 엄청난 돈으로 매수해 프랑스 우파들의 프로그램을 재포장하도록 만들 것이다.
  
  반면에, 프랑스 좌파세력,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적들과 맞서고 있는 좌파세력들, 즉 전지구적 좌파세력은 이번 승리로부터 전혀 다른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얻어야 할 교훈은 정말 많다.
  
  첫째로, 나이ㆍ성별ㆍ소득수준ㆍ이민여부ㆍ교육수준ㆍ인종 그리고 수많은 다른 요인들로 심각하게 분열돼 있는 좌파는 이번 사태를 통해 단결이 가능하며,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하나로 통합시킨 관심사는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에 관한 것들이었다.
  
  둘째로, 이처럼 특정한 공통의 관심사는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노동자, 저학력 노동자와 고학력 노동자, 이민자와 비이민자, 젊은이와 나이든 노동자들을 분리시켜 서로 싸우게 만들려는 프랑스 정부의 끊임 없는 시도를 약화시켰다.
  
  셋째로, 프랑스 정부는 "법"이란 "국민의 민주적 의지"를 결집한 것이라며 이를 관철시키려 했지만 "법"보다는 "대중운동"이 국민들을 보다 잘, 보다 더 진정으로 대변한다고 믿는 대중들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공식적 정부와 비공식적 정부라는 이중권력의 상황이 생겨났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의 수백만 국민들은 공식적 정부가 주장하는 "국민적 단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됐다. ("국민적 단결"을 내세운) 프랑스 민족주의는 프랑스 사회 안에서도 지배세력과는 상반되는 노동자ㆍ학생의 이익이 있다는 반대파의 논리를 이겨내지 못했다. 사회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사회세력간의 투쟁의 장이라는 개념은 이제 좌파는 물론 프랑스의 대다수 민중에게도 하나의 상식이 됐으며 이에 따라 이들은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자들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번 노학연대를 통해 단합되고, 대중이 참여하는, 직접적인 정치행동이야말로 승리의 열쇠라는 점이었다.
  
  프랑스가 얻은 교훈은 또한 우리의 교훈이기도 하다. 한번의 큰 싸움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여전히 전쟁은 프랑스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그들의 이익과 부유한 관료들의 이익, 기업의 확대를 위해 필요한 법과 규칙들을 제정하라고 지속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넣을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 소비자, 학생들에게 양보를 요구함으로써 국제적 경쟁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계속 노력할 것이다. 기업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먀말로 개혁, 현대화, 번영 그리고 민주주의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첩경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그들은 더 많은 자원들을 대중적 캠페인과 정치인 그리고 여러 '조사'에 쏟아 부을 것이다. 그들은 미래의 싸움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에 맞선 프랑스의 승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EPA

  노동자, 학생, 소비자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미래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이 단결하고 결집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또 다시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시라크가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지 계속됐던 시위 기간 동안 이미 떠오른 주요 문제들을 반드시 풀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관련된 이슈들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다음 신자유주의 공격이 닥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서야 또 다시 그것을 쫒아버리기 위해 싸울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들로 하여금 고용주에 맞서 끝없는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경제 구조에 도전함으로써 이 전쟁과 맞설 것인가?
  
  노동자들이 스스로 그들의 주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생산 관계에서의 기본적 변화를 위해 싸우기 위해 지난 3-4월 프랑스에서 분출된 모든 에너지와 단결된 역량을 총결집시키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전략이 아닐까? 자본주의적인 기업보다는 협동조합형 기업이 노동자-학생-소비자의 동맹에 맞선 기업들의 동맹에 구멍을 뚫기 위한 끝없는 싸움이 없는 미래로 향하는 방법이 아닐까?
  
  미국 대중매체들의 보도행태에서 드러난 부정적 교훈도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 한다. 미국의 대다수 대중 매체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무시했다. 몇몇 언론들은 산발적 폭력양상만을 과장하는 데 열을 올렸다. 조직과 기율, 연대가 두드러졌던 전체적인 시위 양상에 비추어 일부 폭력시위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 일부 언론은 프랑스정부의 반노동자적인 이번 법률을 마치 가난한 이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인 것처럼 포장하려고 애를 썼다. 명백하게 또는 암시적으로, 대부분의 언론 보도와 분석은 프랑스가 그들의 경제를 미국이나 영국 혹은 또 다른 "진취적인" 경제들처럼 신자유주의적으로 "선진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기술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상업적인 언론들은 2006년 봄 프랑스 투쟁의 열벙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번역=여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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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문화산책] "문화의 가치와 문화를 보는 올바른 시각"

굶주림의 계절인 겨울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은 이웃의 논바닥에 버려지고 여자 아기는 한 줌의 소금에 팔린다. 마을에서 70세가 되는 노인들은 가족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나라야마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한반도에도 있었다는 고려장과 비슷한 풍속이다. 70세가 되어서도 건강한 노인 오린은 자식과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을 만큼 쇠약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이빨을 돌절구에 부딪쳐 깨버린다.

그 해 가을, 마을에 흉년이 들어 식량을 훔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도둑질한 사람의 일가를 생매장시킨다.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이 일본 영화는 어찌 보면 잔인하고 어찌 보면 다른 문화권에 내어놓기에는 몹시 수치스러운 풍속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은 이를 소재로 기교를 배제한 채 리얼리즘 기법으로 독특한 영상언어를 펼친다. 이 감독이 20년 동안이나 준비해 왔다는 이 영화는, 작가 후가자와 시치로의 두 작품 '가로 전설'(노인을 버리는 전설)을 토대로 한 <나라야마 부시코>와 농촌의 성을 묘사한 <동북의 신무여>을 한데 모아 모자간의 정, 생과 사의 근원을 추구했다.

먼저 이 소재는 1958년에 기노시타 게이스케(Keisuke Kinoshita) 감독이 영화화해 일본내 영화상을 휩쓸었다. 원작이 일본내 영화상을 휩쓸었다면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데 성공한다. 영화가 나온지 1년 뒤인 1983년 칸느 영화제는 그 작품에 황금종려상을 안긴다.

1997년 영화 우나기로 또 한번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그 연출력이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가 세계인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은 척박한 환경이 인간들의 가치체계와 도덕율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진솔하게 표현해 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그려낸 사람들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비난받아야 하고 또 광화문 현판이 독재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이유로 교체되어야 한다면 중국의 진시황이 민중들의 뼈와 피로 축성시킨 만리장성은 수천 번도 더 허물어져야 했을 것이다.

환경결정론과 인종주의

칼을 강도가 쓰면 마음에 상처를 주는 흉기지만 훌륭한 요리사가 쓰면 사랑의 도구가 된다. 그것이 어느 쪽으로 활용되든지 간에 칼의 생명은 예리함이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정확하고 엄밀해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환경결정론이 나찌나 제국주의에 의해서 인종주의적 차별로 이용되었다고 해서 의미가 없고 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이는 횟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시미 칼이 조폭들의 패싸움에 이용되기도 하는 까닭에 쓸모없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다.

나찌가 유태인 학살에 이용한 것은 환경결정론이 아니라 인종주의다. 이에 굳이 결정론의 명칭을 단다면 환경결정론이 아니라 '인종'결정론이나 '혈통'결정론이다. 즉 아리안 족의 피의 순수성을 주창하면서 그 희생양으로 유태인을 학살한 구실은 혈통(lineage)이나 민족의 문제였지 환경결정론이 아니었다.

씨받이와 남성 우월주의

이규태는 한국 사회의 씨받이 문화를 학술적으로 처음 밝혀냈다. 이 풍속은 임권택이라는 명감독을 만나서 씨받이라는 영화를 만드는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87년에 만든 영화 <씨받이> 출연했던 강수연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획득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는 한국의 영상예술이 세계 문화예술계를 향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영화 <마파도>에도 나오는 씨받이 문화는 사실 우리가 외국에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문화다. 만일 이런 치부를 찾아내서 밝혔다는 이유 등으로 이규태를 비난하고자 한다면 영화 감독 임권택은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을 외국인들에게까지 널리 보여 주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공격을 당해야만 할까? 이규태가 책으로 처음 살려낸 씨받이 문화나 임권택이 만든 영화 <씨받이>의 어느 한 부분에도 '씨받이 문화가 좋다 싫다 또는 옳다 그르다'는 주장은 없다. 그저 이 문화를 기록자로서 또는 리얼리즘에 기반하여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규태와 임권택의 의의

부계의 씨를 받기 위해 벌어지는 풍습 같은 것을 일일이 연구하여 학문적으로 기록해 냈다고 해서 이규태나 임권택을 남성 우월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씨받이>같은 것은 한국 문화에 깊숙이 뿌리박힌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얼마나 비인간적임을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이규태와 임권택이라는 두 거장(巨匠)은 이 <씨받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한국과 세계 도처에 있는 남성우월주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타파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이규태를 남성우월주의자로 몰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규태가 일생을 통해 써 낸 방대한 저술을 보고서 후대의 소설가나 감독이 어떤 영감을 받아 또 어떤 문학 작품과 영상언어를 탄생시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존재론과 당위론

120여권의 저서 등 이규태가 일구어 낸 방대한 그의 작업에서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건 존재론적 접근이지 당위론적 접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규태의 저술을 직접 읽어 보면 누구나 파악하겠지만 그는 철저하게 '있다. 있었다'라는 Be동사를 사용했지 '해야만 한다(should 또는 ought to)'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방대한 자료를 어디에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흉기로 쓰느냐 혹은 풍미로운 요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데 하는 차원의 문제일 뿐이다. 쉬운 예로 인종주의에 이용당한다는 이유로 유전공학을 공격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유전공학은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육종의 개량 또는 불치병의 치료 등에 활용되고 있다. 이런 이치도 모르고 이규태를 보고 인종주의자니 또는 남성우월주의자니 하는 폭언을 하는 일은 학문에 대한 몰이해나 지적인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그것도 아니면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규태를 음해하려는 '비겁함'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페어 플레이를 하지 않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 비겁한 수단에 의지하거나 반칙을 일삼는 사람은 심판에 의해 제재를 받고 심한 경우 퇴장 당해야 하는 것은 고도문명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합의다. 그가 퇴장을 당하면서 관중들에 의해 조롱을 받게 되는 것은 인과응보에 지나지 않는다.

왜 '환경'가능론인가?

흔히들 블라쉬가 주창한 환경가능론은 라첼이 체계화한 환경결정론에 반대되는 이론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환경 가능론이라는 용어 자체부터가 환경 결정론에 대항할 만한 이론체계가 아니라 환경결정론의 아류 정도임을 시사하고 있다. 땔감을 구하기 쉽고 관개가 용이한 지역에 촌락이 형성되는 배산임수 등이 환경결정론의 정수라면 환경가능론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충분히 환경을 극복하면서 살아 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환경가능론이 주장하는 바가 '환경에 비해서 인간의 의지가 훨씬 중요한 요소다'라는 것이라면 그 명칭은 환경가능론이 아니라 '인간(의지)결정론'이 되어야 더 적합하다. 이게 단순히 번역상의 문제가 아님은 그 학설을 공부하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모호해진 구별과 기회비용

최근에는 학계에서도 이 세 이론의 구별을 점점 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다. 이런 것도 모르고 필자가 환경결정론이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말했다고 인종주의자 커밍아웃을 운운하겠다면 차라리 환경결정론을 처음 만들어낸 100% 순수 환경결정론자인 라첼에게 인종주의자라고 공격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 이상한 논리라면 자연선택설을 위주로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도 당연히 인종주의자가 된다. 그런데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 치고 그들을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환경 가능론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의지(will)'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엔 기회비용 즉 선택과 효율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자원이 풍부하고 기름진 땅에 살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데도 억지로 자원도 없고 척박한 땅에 들어가서 살 이유가 없다. 이건 지구상에서 인구밀집지역과 인구희소지역의 분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능한 좋은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전략은 인간이 현명하기 때문이지 인간의 의지가 박약해서가 아니다.

문화와 환경

마지막으로 문화결정론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행정학이나 경영학에서 인사 행정이나 조직론을 논할 때 인간과 조직 이외의 것을 모두 외부환경이라 칭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인간 이외의 것은 모두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이 환경에는 자연환경 뿐 아니라 인간이 타고난 교육환경이나 문화 환경도 포함된다. 즉 문화 자체도 공동체 속의 구성원이 사회활동을 할 때 잠시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외부환경인 것이다. 이와 같이 환경결정론 환경가능론 문화결정론 모두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어떤 논리체계로 다루고 있다. 세 이론 모두 환경이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환경가능론과 문화결정론 모두가 환경결정론의 뿌리에서 나온 한 나무라고 했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론의 유용성을 논하기보다 그 주장이 오래되었다고 고리타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 고리타분은 패션문화를 논할 때나 써야 제격이다. 물론 패션계에서도 남자가 바지를 주로 입고 여자가 치마를 자주 입는 일이 그 연원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 한들 이를 고리타분한 풍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듯 고리타분이란 용어는 그 연원의 길이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다. 사실 인문학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이론과 학설은 거의 다 나와 버렸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이런 이론과 학설에 고리타분하다는 말을 쓸 수는 없다.

유전자 결정론

환경결정론과 환경가능론 그리고 문화결정론과 뿌리가 다른 별개의 이론을 찾으라면 인간 자체가 가진 고유의 유전자(gene) 코드에 초점을 맞춘 유전자결정론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이 유전자 결정론은 일부 나쁜 집단에 의해서 정말로 인종주의에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환경결정론이 인간의 행동양식을 환경정보의 해독을 통해서 일반인의 이해도를 높여 주었듯이 유전공학도 인간의 각종 질병이나 행동양식을 유전자 정보의 해독을 통해서 그 이해도를 높여 주고 불치병 치료에도 도움을 줄 것이 확실하다.

이규태의 저술

우리가 그 학문체계가 넓고 얇다고 말할 때 프랑스의 J.디드로, 달랑베르. J.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에 의한 백과전서파를 예를 든다. 한국에서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이 이런 백과사전류다. 이들은 한 국가나 한 분야가 아닌 전 세계 또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하지만 이규태는 오직 한국에만 집중했고 더 나아가 문화 분야에만 집중했다. 그러므로 이규태의 저술을 두고 넓고 얇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이거나 의도적인 폄훼를 위한 조작이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 분야에만 국한해서 평가하면 이규태의 저술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깊다. 이건 그가 그 흔한 결혼식 주례 한번 서지 않고 오직 한 분야에만 집중한 장인(匠人)정신에 투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넓고 얕다고 판단하는 사람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한들, 단군이래 이 정도의 연구를 해 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가 500여권에 이른다고 하나 그때의 종이 상태와 이규태 시대의 종이 상태, 그리고 그 종이에 쓰여진 글자의 크기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면 어느 쪽이 더 방대한 지 능히 짐작할 것이다. 참고로 여유당전서는 1930년 초에 정인보·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해 활자본 154권 76책으로 간행되었다. 후세에 누군가 한국의 문화 풍습에 대해서 더 깊은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규태가 닦아 놓은 길을 거치지 않고는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업적은 대단하다. 실제로 이런 저술은 국립대학교나 정부의 녹(祿)을 받는 사람이 수행했음직 하지만 사기업인 언론사에서 수십 년 동안 지원해서 이루어진 사실도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서도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인샬라와 천황폐하 만세, 그리고 어머니

이규태는 아랍인의 의식구조라는 글에서 비행기를 납치해서 쌍둥이 빌딩을 향해간 아랍인들이 마지막으로 인샬라를 외쳤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는 2차 대전 당시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이 미국 함대를 향해서 비행기를 몰고 돌진하면서 '천황폐화 만세'를 외쳤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 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앞의 분석에는 무슬림들의 종교적 색채가 반영되어 있고 뒤에 것은 그 당시 일본에 팽배했던 군국주의 문화를 반영한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속성 때문에 그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말한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건 문화인류학적인 접근법이 아니다.

또 이런 것은 주로 영화나 소설에서 다루는 주제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규태 칼럼리스트는 비교문화학자였지 극작가나 소설가가 아니었다. 또한 이런 감상적인 말까지 표현할려면 이규태가 써야 했던 원고지 몇 장 분량의 지면 할애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녀사냥과 명예살인

종교를 이용한 인권학살의 예로는 그 악명 높은 마녀사냥을 들 수 있다. 현재 이슬람 세계에는 중세 마녀사냥 못지 않은 명예 살인이 횡행한다. 명예 살인이란 어떤 여성이 정조나 정절을 훼손하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도 아닌 그 여인의 가족이나 친족에 의한 살인을 말한다. 21세기인 현재 한 무슬림 국가에서는 매년 500명 이상의 여성들이 단지 정조(貞操) 문제로 명예 살인을 당한다.

한 무슬림 집안의 딸이 옆집 총각과 눈이 맞아 사랑이 싹텄다고 하자. 그런데 부모들의 허락이 없이는 그 사랑이 결실을 맺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무슬림 문명권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몇 년 뒤 그녀를 끝까지 쫓아온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오빠나 친아버지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자기 딸이나 누이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는 크게 외친다. "이제야 가문의 명예를 되찾았다!" 한반도의 조선시대에도 이런 일은 흔치 않았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 모른 척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무슬림 사회에서는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2005년 세계 여성 인권상에 뽑힌 여성은 무슬림 부족에서 집단보복 성폭행을 당하고도 보통의 경우처럼 자살하지 않고 대항했던 한 여성이었다.

이슬람 문명의 문화지체현상

중세에는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종교적 색채가 모든 일상사를 좌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후 기독교는 르네상스와 루터의 종교개혁 등으로 신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슬람은 그러하지 못하여 매우 안타깝게 생각된다. 중세 암흑시대의 장막을 걷어 주고 서구 르네상스의 원동력을 추진시킨 원동력이 이슬람문명이었음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 하다. 이는 거대 문명권에서 발생한 일종의 문화지체현상으로 이해된다. 내가 겪어본 이슬람 율법이란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철저하게 착취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루에 5번 하는 기도 같은 것도 교육을 많이 받고 부유층일수록 덜 지키고 가난하고 교육이 낮은 계층일수록 더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를 여러 번 경험한 우리 회사 여직원들도 이젠 '지금 저 사람이 하는 저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 이라고 한국말로 수근댄다.

소수 과격파

진중권이 말한대로 무슬림들 중 일부 소수만이 과격한 테러분자들일뿐 이라고 하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일부 소수만이 그렇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소수라고 해서 그런 현상의 심각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읽는 시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격분자는 그 사회의 암세포

사람의 몸 전체에서 보면 불과 몇 %에도 못 미치는 암세포 때문에 인체의 모든 장기가 그 순환기능에 문제를 발생시키고 급기야 생명까지 앗아간다. 과격 원리주의자나 테러분자가 그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극소 비율의 암세표가 모든 인체에 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인체에 암세포가 발생하고 그 사회에 과격분자가 생겨나는 이유도 비슷하다. 인체나 그 사회에 어떤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상존하기 때문이다. 암세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음주, 흡연 등 식생활 습관이나 체질 자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에서 과격 원리주의자들의 점유율을 현저하게 줄이기 위해서는 그 사회 전체의 문화를 재검토하고 올바른 민주주의 양식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시스템의 개선이 따라야 한다.

문명의 충돌과 교육

내가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권의 충돌을 막고 영구 평화와 세계문명의 항구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전쟁보다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설파한 이유다. 그것도 독일식으로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개방되는 교육이 선진 문명국을 위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할 필요가 크다. 외국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경험한 많은 이슬람 여성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돌아가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살고 있다. 내가 겪어 본 바로는 이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교육을 많이 받은 남성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들이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소수에 불과하다고 예사로 생각하는 과격 원리주의자들의 행동양식에 숨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과격분자들의 조직적인 행동은 그 사회 지성인들의 건전한 내부비판 자체를 봉쇄시킨다. 극소의 비율에 불과한 암세포가 인체의 건강한 순환과 소통을 막아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작은 비율에 불과한 과격 원리주의자들이 사회 전체의 건전한 소통을 방해하고 있는 것 또한 치명적인 질병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이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교육과 수양

지하철역이나 광장에서 미친 인간 한 명이 수류탄이나 M16 소총을 들고 "꼼작마라!"를 외친다고 가정해 보라. 그가 공중으로 '탕!'하고 공포탄을 하나 발사하는 순간 모든 문명은 숨을 죽인다. 과격하게 행동하는 소수의 위력은 이렇게 무섭다. 역사 속에서도 과격한 소수파가 온건한 다수파를 이기고 그 문명권의 운명을 주도해간 경우는 너무나 많다. 이를 위해 굳이 소수파인 볼세비키가 다수파인 멘세비키를 이긴 러시아 혁명사를 예로 들 필요조차 없다. 어쩌면 인류가 체계적인 교육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남이 나와 다름을 인용하고 포용할 수 있는 가치관을 광범위하게 유포시켜서 우리 사회에서 이런 과격분자들이 한 명이라도 덜 생겨나게 하는 것이 매우 큰 이유다. 그리고 나 자신 속에 깃든 이유 없는 공격성이 조금이라도 덜 자라도록 제어하는 것 또한 현대 교육의 큰 목표다. 아니 이것은 개인적인 인격 수양의 목표이기도 하다/ 김휘영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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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4-20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격분자는 그 사회의 암세포' 부분이 특히 위험한 발언이군요. 사회의 '체질 자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말도 그렇고...

라주미힌 2006-04-2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어서 아직 못 읽어봤어요... ^^;;
 

우리가 사먹는 소, 돼지, 닭 등은 가축(家畜)이 아닙니다. 집이 아닌 농장에서 길러지니 어색하긴 하나 농축(農畜)쯤으로 불러야할 것 같습니다. 속성으로 길러지는 돼지의 경우 사계절을 지내지 못하고 도축장으로 끌려간답니다. 닭에게는 더 많은 알을 낳으라고 24시간 불을 밝혀 놓는다지요. 밤을 앗아버린, 일종의 교란입니다. 초식동물인 소에게도 성장촉진과 육질을 위해 고기와 뼈를 섞은 사료를 먹인다고 합니다.

대량으로, 속성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에게는 이른바 생명평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어찌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 짐승들의 살 속에는 분노가 축적되었을 것입니다. 그 분노의 살덩어리를 우리들이 먹고 있습니다. 햄버거와 닭튀김, 피자 등이 연상되는 패스트푸드는 인류를 육식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비만이라고 합니다. 화를 자주 내고 버릇이 없다고 합니다. 참지 못하고 툭하면 싸운답니다. 아침 식탁을 살펴보십시오.

〈김택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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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 고기를 안먹는 저는 어디서 온 분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