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논객 이규태와 진중권 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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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진중권식 글쓰기 '파시즘 분쇄효과' Vs '문명과 문화 퇴행' 현상 |
깊은생각/무위
* 무위의 "이규태와 진중권: 장인정신과 멧돼지정신의 충돌"이란 기사에 대해 대자보 독자이신 '깊은생각'님이 이규태식 글쓰기의 한계와 진중권식 글쓰기의 의의를 제기하며 반론했고, 이에 무위의 재반론 등이 이어졌습니다. 본문에 대한 독자여러분들의 다양한 평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편집자 주.
조선일보식 글쓰기 이규태와 진중권 효과 / 깊은생각
이규태씨가 거의 20여년 '이규태 코너'를 연재한 신문이 조선일보라는 점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도 하나의 주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실을 '주장'에 맞출때 문제인데, 제가 보건데 고 이규태씨도, '지하 서가'를 마련하고 엄청난 자료를 읽으면서 '행복한 글쓰기'를 한 '대단한 분'이라는, 고 이규태님의 '권위'에 대한 또 다른 무위님의 '논증'에도 불구하고, 그의 짧은 글 조차 조선일보식이라는 것이기에 생명이 길게 이어졌다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 조선일보의 편집위원이기도 했지만, 요컨데 요즘 유모 논설위원처럼 현 정부의 말만 요란한 '양극화 극복' 방책이 무슨 좌파정책인양 '오렌지색 정책'으로 색칠하는 그럼 사람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안그랬다면 조선일보에 계속 글을 쓸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보는 이규태 코너의 문제점은 바로, '넓고 얕게 자료수집에 바탕한 글'이면서 조선일보식의 사고방식에 '딱 들어맞는' 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이를테면 '한국사람은 엽전이다'라는 식의 사람들속에 마치 전통상식처럼 떠내려오는 것들을 건져올리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아랍인들은 일반적으로 테러기질이 있다'이런 테제를 입증하는 글을 쓰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해서, '앵글로 색슨과 유태인은 날때부터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과연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보면 다른 생각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탱크와 전투기와 소총 등을 배에 잔뜩 싣고와서 나라의 시작을 '전쟁'으로 치루어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아니었나요? 그때 그 땅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팔레스타인들이었고? 마찬가지로 '원주민의 땅' - 원래 땅주인을 백인들은 인디언이라고 하는데 적절한 이름은 아니죠 - 을 이런 저런 수단으로 - 때로는 돈과 물건 근본적으로는 기병대를 동원한 점령 - 의 방식으로 차지한 사람들이 북미에 이주한 '백인'들 아니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그 사람들은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특정 지역과 사람들에 대한 '딱지붙이기'가 성행하는 것 아닙니까? 가령 히틀러가 게르만의 우월성을 내세워 '유태인과 슬라브인 박멸, 그들의 땅에 게르만 거주지 건설'을 말했고, 남의 나라 얘기할 것 도 없이 훈요십조의 '왕건'은 '호남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말해 놓지 않았습니까? 요컨대 특정한 목적에 의해 '조작된' 이데올로기를 무슨'원래 그런' 진리처럼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글을 쓸 때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선한 마음' 또는 남방불교식으로 말해, '선법'을 키우고 증강하는 방향으로 세워나가야 하죠!
남을 해치려는 마음, 적대감, 편견, 비하, 우월감의 과시 이런 것들을 드러 내는 글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테러리스트' 기질은 아랍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내재된 '원래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교육'을 하는 까닭은 그와같은 '내재된 속성'을 바꾸거나 지우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이스라엘 대사가 연세대 강연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라고 말해서 물의를 빚고 있다죠. 그 이스라엘 사람들, '유태인들 내부의 민주주의'는 정말 철저히 잘 제도화 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에 대하여 '비민주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것 참 쉽겠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히틀러'가 웃을 것입니다. 너희들, 내 욕하더니 결국 '나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 않니. 봐라, 그게 원래 그런것 아니니. 이런 생각을 '진리'로 품고, 다른 가치 지향들을 '도덕 교과서속의 헛소리' 쯤으로 여기는 '세계관'이 다위니즘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바로 이 지점! 다위니즘적 관점에 서면 '윤리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 쓸데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진중권의 글쓰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두가지 기능을 수행해 왔습니다. 다름아닌 잘못 조형된 이데올로기의 '해체' - 이는 시민적 상식의 재건축이라는 것으로 나타나죠. 둘째는 '시민적 윤리성'의 새로운 확립. 이런 지점에서 이규태와 진중권을 '장인정신과 멧돼지 정신'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규태'의 장인정신이 20여년 이상 '아무탈'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만큼이나, '진중권'의 멧돼지 정신이 왜 '필요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죠. 이규태의 '장인정신'은 그의 시대 - 1983년부터라니까 정확히 '신군부의 독재'시대 - 와 아무런 '불화'도 없었던게 틀림없습니다. 심지어 '민주화 시대'에도 그랬겠죠. 이 지점 바로 보아야죠. 아니, 더 알아 보아야 하겠지만, 어쩌면 '민주화 시대'에 아주 약간의 '불화'를 겪지 않았을까요.
요컨대 이규태님의 글 자체는 글자 그대로 '민속학지'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이데올로기'에 딱 맞는 그런 것이었다면 지나친 얘기인가요? 이 때문에 '학계'에서 그의 글을 그냥 '그러려니'하고 '연구대상'으로 여기지 않은 것 아닐까요?
무위님. 그 '많이 읽은 책들' 인용해서 긴 글 써 보아야 읽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요컨대 진중권이 '무엇을 목표로 왜 그런' 글을 쓰는지 알아야 '멧돼지 정신'이라고 딱지 붙이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이규태씨가 왜 그런 글을 그렇게 오래도록 '시대와의 불화'따위 없이 '조선일보'에 세상을 떠나기 사흘전까지 쓸 수 있었는지 알아야 그것에 대하여 '장인정신'이라고 '높이 평가 할 수 만은'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위님의 이번 글은 결국 '나도 진중권 당신 만큼 많이 알아' '당신의 이규태 비판은 멧돼지 처럼 달려들어 물어 뜯는 것 뿐이네' '이규태님은 그런 당신의 돌격에 닿지 않는 장인정신 속에 고고하시다네' 이걸로 끝납니다.
무위님의 글은 '경제를 심리로 환원하는 최용식씨과 참여정부'에 대한 인식비판에서 아주 빛났습니다. 이번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중권 현상은 문명과 문화의 퇴행 / 무위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또 달라야 합니다. 제가 오랜 짐을 덜어냈다고 표현했듯이 진중권이 이규태를 공격한 글을 읽자 마자 바로 가지게 되었던 내 마음의 짐이 이제야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규태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문가를 비방하고 마음대로 말하면서 폭언을 일삼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진중권 현상>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일종의 문명과 문화의 퇴행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남의 눈에 든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의 대들보는 잘 못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 이번 글을 다 퇴고 하고 나면 더 이상 진중권에 대해서 쓰고 싶은 생각이 안 생길 지도 모릅니다.
몰라, <진중권과 파시즘>이나 <욕설의 경제학, 욕설의 미학>이란 글이 완성되면 진중권이란 이름이 몇 번 정도 더 등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하여간 <진중권 현상>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그 주역인 진중권을 거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규태의 글쓰기는 정치적인 글쓰기가 아닙니다. 20년이나 넘게 비정치적인 글쓰기를 해 왔다는 것은 어쩌면 기회주의적인 속성이라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보고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파시즘입니다. 정치적인 것은 십년을 못가지만 문화적인 것은 100 년을 넘어 영원히 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규태의 가치가 새록새록 새싹 돋듯이 돋아서 큰 나무로 자라날 것은 확실합니다.
이규태의 글 쓰기는 아래에 제가 가지고 온 딱 이 수준입니다. 검색창에 '개고기'라고 쳐 보면 나옵니다. 자료와 방증에 치밀하고 가급적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선동식의 글쓰기보다 이런 글의 가치가 훨씬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이규태가 세월이 지나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말미에 그냥 이렇게 툭 던져놓고 황급히 끝맺고 있음은 아마 할당된 원고지 제한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브리지트 바로도가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풍속을 보고 뭐라고 하는 것은 문화 제국주의의 횡포다, 또는 한국 사람들의 개고기 먹는 풍속은 야만적이다. 이런 표현이 어디에도 안나옵니다, 이건 진중권이 폭력으로 인종주의 망언 운운했던 그 글 또한 이런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
이규태 [바르도와 개고기] 조선일보 2001년 12월5일 ===== 개고기의 유래
개는 인간이 사육한 최초의 가축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물에서 개 뼈가 출토되고 있다. 본초강목에 나오는 6畜은, 소, 말, 양, 돼지, 개, 닭 6가지를 나타내며 이것은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고, 우리 나라 에서도 개는 6축의 하나로 선사시대부터 가축으로 길러 고기를 취하였다. 고구려시대 에는 매적이라는 불고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하여 육식을 멀리 하였으나 몽골 침략의 영향으로 다시 육식이 성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개고기를 먹은 공자의 영향으로 선비들도 개고기를 마다하지 않게 되어 개고기 식용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다. 조선시대에는 누구나 개고기를 먹었고, 어느 푸줏간에서나 개고기를 팔고있었다. 현재 보신탕 집에서 팔고있는 메뉴는 보신탕, 수육, 전골, 무침, 두루치기 정도이다. 다른 음식은 거의 없어졌다. 북한에서는 개고기를 단고기라고 한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개고기라한다. 북한에서는 개고기를 대중적인 음식으로 장려하고 있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복날에 개고기는 다른 고기들과 달라 기후 절기의 변화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프랑스에서도 1692년부터 3년 여간 지속된 이상기온 때 수많은 이들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의 파리 푸줏간에는 개고기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규태[바르도와 개고기] 조선일보 2001년 12월5일 끝
저는 개고기를 입에도 대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이 불교를 믿는 관계로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개고기를 매우 즐기는 데 몇 번이고 개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유혹했고 따라가서 침까지 꼴깍 넘어 왔지만 먹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효자라거나 개고기 먹는 것을 야만적인 풍속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저 일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서 개고기 하나 정도는 안먹고 살아도 큰 손해나 억울함이 아니고 어머니도 싫어하는데 뭐하려고 굳이.... 정도의 생각이 전부 입니다. (참고로 전 거의 모든 음식에서 가리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먹고 또 대식가입니다) 단 개를 잡을 때 맛을 낸다는 이유로 패는 풍속은 우리 인간의 잔인성을 표출한다는 측면에서 반대합니다만.<=== 이 내용은 진보누리에 쓴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전기 쑈크로 죽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가지 '나도 진중권 당신 만큼 많이 알아'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현 상태로는 절 모독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저 말고도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날 사람이 국내에도 매우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부해 온 목적이 고작 저 수준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계속 발전하기에 10년 후 20년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지금은 아닙니다. 전 인간의 지능은 20대 중반에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폐활량이 높아서 산소가 뇌게 가장 많이 공급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감각이 종합적으로 반영되는 영화에서 세계 명작 영화는 대개 20대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멋대로 살아라'라는 영화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진중권이 극우 멘탈리티를 연구하고 파시즘을 연구했다고 하는데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대로 진중권의 과거 행적은 파시스트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파시즘의 기본 속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생각하는 파시즘의 근본 속성과 핵심은 '분리와 차별'에 있습니다. 어떤 집단을 분리시켜 우월과 열등, 선악으로 분리를 시킨 후 차별이라는 폭력을 행하지요. ( 물론 이건 어느 책에서도 보지 않은 순수한 제 생각이니 동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 나라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히지만 거기서 분리와 차별을 빼놓으면 파시즘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 이야기는 책에서 해야 하는데 님이 진지하게 나오시길래 미리 밝히는 겁니다 )
분리한 집단에 폭력을 가하기 위해서 이름(딱지라고 하나요)이나 이유를 갖다 부치지요.
진중권이 그간 해 온 행적을 보시면 딴나라빠 열우빠 민노당 황빠 황까 망언 기타 온갖 명명을 해 왔지요. 그러면서 온갖 언어 폭력을 가하지요. 그런 폭력을 행하는 방식도 논리와 이유가 아닙니다. 그저 그건 극우고 파시스트고 망언이고 정신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고 ..... 네오파시즘이고 구술문화고......솔직히 너무나 한심하지 않습니까?
제 글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이 없습니다. 전 독자보다는 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글을 씁니다. 물론 한 명이라도 제 글이 더 읽혀져서 우리 사회가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합니다.
앞으로 2-3년 후면 한국의 모든 종이 신문의 총 매출액이 100억 남짓 해 질 것으로 예상한답니다. 과거 수년 전만 해도 메이저 신문 하나의 매출액이 1000억을 넘었다 하더군요. 안티조선 운동 때문이 아닙니다. 인터넷 포탈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때문입니다. 이제 종이 신문에서 다른 미디어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잔인함'이지 건전한 시민 운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들은 아직은 강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제 정말 순수한 사람들만 소수로 남고 정치꾼들은 전부 빠져 나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조선일보 편집인들 중 가장 비정치적이었던 이규태까지 어떤 정치적인 목적으로 공격한 것은 야비한 일입니다.
상당한 문필력이군요. 님이 진지하게 물음 주셔서 저도 최대한 진지하게 답변해 드렸음을 밝힙니다. 건필하십시오.
진중권, 한국적 파시즘 깨기에 여전히 유효 / 깊은생각
논쟁은 필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님의 글 여러곳에서 잘 읽어서 바탕의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특히 경제를 '경세제민'으로 해석하시는 것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는 정책을 구사하는 분들이 항상적으로 명심해야 할 진리이죠.
그리고, 자기 주장의 '과잉현상' 그거 공감합니다. 이번 '황우석 사태'속에서 그것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됩니다. 그리하여 '방송' 안되면 '자살'하겠다는 피디가 나타날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아마추어리즘'과 결합해 있다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프로 '지식인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습니다. 요컨대 '뭐 좀 안다는 분들'이 하는 행태에 더 이상 못참겠다는 것이죠! 가령 황우석에 대하여, 경기고와 서울고를 거친 '성골' 주류 엘리트는 아니지만, '비주류' 수의학을 전공하고 아주 부지런히 노력하여 스스로 '기술'을 확립한 인물로 칭송하죠. 그 반대편에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서 '학력과 학벌' 풍토에 기대어 '전문가의 권위'를 내세우는 전문적 지식권력에 대한 무언의 항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례로서 서울대 '조사위'를 '조작위'로 폄하하는 것도 있습니다. 또 서울대 본관정문으로 '난입'을 시도한 그 코란도 찦차의 사진도 있죠! 이런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분들이 '인터넷'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또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면서 하나의 흩어지지 않는 '유기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님 말씀하신 '아마추어리즘의 과잉주장' 사례가 된다고 봅니다. 민주화와 인터넷 언론의 엄청나게 빠른 '정보생산 기능'과 '정보공유 기능'이 결합한 결과이겠죠! 그런데도 한국의 지식인 지도층은 여기에 대하여 여전히 '계몽'의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마추어리즘과 '사실관계'를 무시하는 한국적 언론풍토가 맞물린 극단적 사례가 '두번'인가 방송하고 사라진 케이비에스의 '시사중심'일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의 피디는 '맹목적 팩트주의'라는 말로, '음모설'을 공영방송 프로그램에 끌어 들어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 만약 님이 진중권 글의 '이데올로기 효과'로서 '아마추어리즘의 과잉 자기주장'을 조장하면서 '안티문화 확산'에 큰 역할을 한다는 '판단'에서 그런 글을 쓰시는 것이라면, 진중권의 글을 더 읽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보입니다.
오히려 진중권의 이번 글은 한국 사람들의 '편견'-맹목적 팩트주의 보다 강한것에 대한 숭상에서 일방적 사실의 조립으로 만들어진 편견-을 벗겨내는 글 아닐까요? 그리고 진중권은 일관되게 독일의 '파시즘 미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기대어 '한국적 파시즘' 문화에 대한 분석적 비평적 해체의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긍정적 효과' 또한 상당한 것입니다. 반면 이규태님의 '무슬림'에 대한 글은 한국인의 '팩트를 무시한 편견'을 늘리는데 기여한 글 아닙니까?
할리우드 영화건 어디건 무슬림은 거의 대부분 '호전적'으로 묘사되면서 '지하드'를 칭송하는 '테러기질의 사람들'처럼 이야기되는데, 이런 것은 '반대쪽의 정보들'도 충분히 제공되는 가운데 형성된 '견해'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맹목적 팩트주의'를 아예 저버린 한국 언론 자체의 '언론 플레이' 습성에서 조형된 것이라는 생각인데, 이 속에서 형성된 한국 보통사람들의 '상식'이 지금 '아마추어리즘의 과잉주장'으로 반격하는 것이라면 지나칠까요?
이런 현상은 한국의 '지식인 지도층'이 잘못 역할한 때문이라 봅니다. 제 견지에서, '진중권'은 안티조선 운동에서 시작하여 강준만 교수와 갈라지면서, '시민적 상식'에 주로 독일식의 파시즘 부활을 경계하는 '정치적 진보성'을 결합하려 나름대로 애써 왔습니다. 이 지점에서 주류 지식권력과 전혀 다른 작업을 수행했고, 강준만 교수도 마찬가지죠. 요즘은 님 말씀대로 그런 제 기능 못하는 주류를 향한 '안티'가 부작용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나가있다고 여기며 이 지점에서 '아마추어리즘의 과잉주장'에 대한 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이 지점에서 '조선일보'에 대한 과도한 '안티'의 시대는 이제 접을 때가 되긴 했지만, 어쨋든, 고 '이규태님'의 장인정신이 그 날짜의 어떤 기사와 결합되면 보통사람의 마음에 '편견'을 새겨내는 '편집'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령 '섬진강'의 시인이 있습니다. 이분의 깨끗함이 '조선일보'의 '편집기술'과 만날때 어떤 효과를 내 왔는지? 가령 '우리안의 파시즘' 을 꺼내든 임지현씨가 '체게바라 전기'를 조선일보 문화면을 온통 차지해가면서 글들 썼을때 어떤 효과를 내 왔는지? 바로 이런 것들을 '해체'하는 일에 뛰어든 분들이 안티조선 했던 분들이었고, 그 중에 진중권씨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여전히 '황우석 사태'때 비추어진 한국 언론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끌 국민을 만들기 보다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과잉담론'이 펼쳐질 조건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팩트'와 '주장' 양면에서의 거대한 실패사례였다는 것이며, 이 두가지를 저는 '브릭'과 '과갤'의 젊은 과학자들의 글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직' 진중권의 작업이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규태님의 '장인정신'이 옳게 평가 받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님의 글은 너무 빨랐다고 생각하며, 진중권의 작업 전체에 대한 '조망'이 미흡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규태씨의 엄청난 글을 읽는 것 만큼, 진중권의 다른 글도 읽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님의 글이 진중권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이제 좀더 '진지모드'로 전환하되, '안티적'이지 않은 글을 쓰는게 낫다 정도로 의미있게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 진중권보다 더 잘 알아'라고 쓴 것에 대하여 '과도한 행간읽기'로 인정하고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 무위
언론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셨군요. 무슬림에 대한 님의 생각도 맞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 미국인들 보다는 무슬림을 훨씬 좋아합니다. 하지만 무슬림의 율법보다는 그들이 경멸하는 American Way 가 있는 나라에서 제 소중한 딸을 키우고 싶은 것은 사실입니다. 중1인 제 딸이 나이 18세 이상이 되어서도 야한 비디오 하나 못보는 나라에서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델란드의 이민 정책이 일면 수긍이 갑니다. 생각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제 딸이 살게 하고 싶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남을 이지매하는 나라는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부시나 네오콘도 사실은 아랍인들을 더 잘아야 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부시가 대통령에서 물러 난 후에 철저한 경호원이 없이는 밖으로 잘 다니지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아는 이슬람 율법은 사실상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한 용도로 이용되고 있더군요. 원래 목적은 절대 그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만.
전 진중권이 황우석 박사 일로 크게 이지매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중권의 표현이 약간 과격한 점이 있다고 해도 지금 네티즌들이 너무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런 점을 진중권이 과거 행적에서 불러온 이유도 있지만 하여간 자유롭게 의견이 나오고 그 의견으로 공격당하는 세상은 질식할 것 같은 세상임은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