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뒤 딴 남성과 사랑에 빠진 유씨부인을 저잣거리서 가혹하게 사형… 새로운 수준의 여성 통제, 동아시아 유일 대한민국 간통제의 뿌리가 되다
요즘 전통 시대의 성 모럴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에 모순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2003년의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다음으로 요즘 <음란서생>이 인기를 거두는 등 조선시대의 ‘엄숙주의’ 신화 깨기가 유행인가보다. 새롭게 발견되는 조선에서는, 금욕적 유림과 절조를 생명으로 여기는 열녀뿐만 아니라 쾌락을 쫓아다니면서 법망에 걸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대담하면서 매력적인 남녀도 살았다는 것이다.
△ 한글 제정 등 근대국가가 가져야 할 수많은 요소들을 갖추었던 조선 세종대왕. 전대보다 강화된 국가권력 아래서 여성에 대한 통제도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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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다 김별아의 <미실>처럼 고대 사회를 자유분방한 ‘섹스의 낙원’으로 그리는 최근의 문학작품이 가세해 동방예의지국의 이미지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1947년에, 독일에서는 1969년에, 프랑스에서는 1975년에 각각 폐지되고, 미국의 대다수 주의 법전에서 삭제된 간통죄 처벌 조항이 대한민국에서는 헌재의 합헌 판정을 받아가면서 살아남고 있다. 개인의 성생활이 국가적 감시·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상’으로 보인다. 그만큼 한반도에서 국가적인 성 통제의 역사가 길다.
일본과 더 비슷했던 신라인의 성생활
성 통제야 계급사회와 함께 탄생되지만, 경우마다 그 모습들이 다르다. 헤이안시대(794~1185) 일본 같으면 귀족사회의 주된 결혼 형태는 방문혼(訪問婚)이었다.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을 몇 번 방문해 간단한 혼인식을 올리는 것인데, 그 뒤에는 처가로 이사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었다. 이사간다 해도 다른 여성을 방문하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낄 것도 없었고, 여성도 마찬가지로 한 남성에게 매달릴 일은 없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생아’ 같은 개념의 성립조차 불가능했다. 물론 그 당시의 일본도 정치권력이 남성들에게 집중되는, 이상 양성평등 사회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족 계급의 남편이 부인을 간통 현장에서 발견하는 즉시 죽여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에도시대(1615~1867)의 법 제도나, 1898년 식민지 조선에서도 적용된 여성에 대한 처벌 위주의 근대적 ‘간통죄’ 규정에 비해 성을 통한 여성의 자아 표현이 훨씬 쉬운 시대였다. 일본이 일찍이 가부장제로 발전된 중국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고래의 습속을 이처럼 잘 보존한 것인가? 한반도에서도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성이 더 자유로웠다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 듯하다.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여에서 이미 3세기에 여성의 간통·투기(妬忌)에 대한 처벌로 처형이 사용됐던 반면, 중국과 먼 한반도 남부의 현실은 달랐다.
물론 신라에서도 특히 지체 낮은 남성과 귀족 여성 사이의 간통의 경우는 가혹한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삼국유사>의 설화에 따르면, 5세기 말 소지마립간이 서출지라는 연못에서 나타난 신비한 노인이 건네주는 편지를 보고 왕궁의 내전 안에서 버젓이 사랑을 즐기고 있던 궁주(宮主)와 스님을 쏘아서 죽인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외간 남성과의 통정이 완전히 금기시되지는 않았다. 같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661~681)의 서제인 차득공이라는 인물이 오늘날의 광주 지역에서 익명으로 여행하고 있을 때 안길이라는 현지 관료가 그를 자신의 집에서 대접할 적에 자신의 부인들에게 “손님과 하룻밤 동침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자신의 부인·첩으로 하여금 귀빈과 동침케 하는 것은 일부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의 잘 알려진 습속인데,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도 그 습속이 그대로 잔존했던 모양이다. 물론 결혼도 신라에서 ‘야합’, 즉 당사자의 자유 의지로 자주 이루어졌다. 김유신의 아버지와 누이동생도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각각 신라 왕족의 여성·남성과 ‘야합’했고, 유학자를 자처했던 7세기의 유명한 외교관 강수도 스스럼없이 대장장이의 딸과 ‘야합’했다. 8~9세기의 신라는 이미 ‘소중화’를 자임했지만 실제 신라인들의 성생활 패턴은 차라리 당대의 일본에 더 가까웠다.
신라를 이은 고려시대에는 비록 화간을 처벌했던 당나라의 법이 시행됐지만 이혼·재혼이 자유로웠으며 불명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법으로는 금지됐어도 혼외 성관계를 맺는 것이 예외岵?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자유 시대’는 조선 건국으로 끝이 났다.
‘아랫것들의 음란함’은 불문에 부쳐라
학자들 중에 한국의 조선시대나 중국의 명·청시대, 일본의 에도시대를 ‘근대로의 이행기’ 또는 ‘동아시아적 근대의 맹아기’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한국의 경우 토지 사유권과 매매, 부계 중심의 직계 가족집단, 시장에서 금전의 활발한 사용 등 근대성의 기초 요소들이 조선시대에 비로소 확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이 아닌 중앙관료제에 의해 자원이 유통·재분배됐던 나라를 자본주의적 근대의 ‘후보생’으로 부르기에는 의심이 따른다. 하나, 한 차원에서는 조선시대의 ‘특등의 근대성’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유럽 같으면 19세기가 돼야 가능해진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국가적 감시·처벌을 조선은 이미 15세기 초에 실행했다.
△ 조선시대의 새로운 ‘도덕 독재’ 분위기에서 비범한 성생활을 한 어우동은 사형수가 되었다. 사진은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의 1985년 작품 <어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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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시대의 영국에서 하층민의 ‘난교(亂交)의 악습’이 통제 대상이 되지 않았듯이 조선시대도 ‘아랫것들의 음란함’을 불문에 부치곤 했다. 노비 사이의 혼외 정사는 물론이거니와 ‘가격(家格)이 없는 상한(常漢)’에게도 곤장을 80 내지 90차례(여자가 남편이 있는 경우) 치게 돼 있는 <대명률>의 화간범 처벌 조항을 잘 적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산층 이상의 신사에게 비공식적으로 사창가에 드나들거나 하층민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할 권리를 주었던 빅토리아시대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사대부의 국가 조선도 사족 남성이 예컨대 자신의 노비를 성노리개로 이용하는 것을 별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런데 통치 이데올로기에 모범적으로 순응해야 했던 사족 여성이 결혼의 울타리를 넘어 자유를 탐색해보거나 ‘아랫것’ 남성이 감히 양반 여성과 화간을 범했을 경우 이야기가 달라졌다.
지폐에까지 얼굴을 비쳐주는 세종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왕이라고 칭하는 데 대해 별다른 거리낌을 느끼지 않지 않는가? 한글 제정이나 대포 제작부터 오늘날의 헌법에 명기돼 있는 북방 경계선의 확립까지, 근대로 접어들 국가가 가져야 했을 수많은 요소들이 그 시대에 처음 갖춰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전대보다 훨씬 강화된 국가 권력인 만큼, 여성에 대한 통제도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상층 여성의 사찰 방문과 같은 ‘바깥출입’을 엄격히 제한한 세종은 500년 전의 ‘자유부인’들을 가차 없이 ‘시범 케이스’로 만들어 희생시키기도 했다. 1423년 9월, 전직 관찰사인 이귀산의 아내 유씨가 조서로라는 관료와 상통했다는 비밀 보고가 들어오자 세종이 철저한 수사를 명해 결국 해당 법률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사형이라는 극단적 처분을 내렸다. 조서로와 먼 친척이 되는 유씨는 그를 10대 초반부터 사랑해 14살에 처음 관계를 가지고 그 뒤에 사랑 없이 이귀산에게 시집가고 나서도 계속 첫사랑인 조서로와 애인 관계를 유지해온 것인데, 이 사건에 대한 세종의 결론은 이랬다.
“오래전부터 예의로 다스려져온 동방의 우리나라, 대대로 벼슬한 사람의 집안에서 이와 같은 행실은 있을 수 없다. 조서로가 개국 공신의 후손이니 형을 가할 수 없지만 음탕한 짓을 저지른 유씨 부인을 3일간 저잣거리에 서게 한 뒤에 목을 베라.”(<세종실록>) 남자는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감히 어렸을 때의 사랑을 지켜온 유씨는 ‘만세의 사표 세종대왕’에 의해 죽고 말았다. 나중에 이와 같은 무자비한 ‘가중 처벌’이 하나의 판례가 되어 1480년 우리에게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절세의 ‘자유부인’ 어우동(어을우동)이 붙잡혀 심판을 받을 때에 사형 선고의 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이순신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인식되는 세종은 실제로 여성에게 자아의 성적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성리학적 윤리관의 맹신자였는데, 이 사실까지 교과서에 실리려면 아마도 꽤나 오래 걸릴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없어진 지 반세기가 지났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아예 법적으로 규정된 적도 없는 ‘간통죄’는 동북아 주요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만이 처벌하지 않는가?
유씨부인 사형은 언제 교과서에 실릴까
두 남녀가 정이 깊어 서로에게만 충실하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데 윤리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장된 국가가 개개인의 성생활을 규제·감시·심판·처벌하게 된다면, 위선과 폭력이 난무하게 되고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다. 결국 용감한 소수는 모든 탄압에도 불구하고 ‘금지된 사랑’에 도전하지만, 순응하는 다수는 국가가 만든 윤리법을 하늘의 법으로 알고 내면화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장병인,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1997
2. 정성희,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3. 이배용 외,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제1권, 청년사, 1999
4. <조선왕조실록> 인터넷판: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