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는 실종, 과도한 인상비평이 남긴 것들
[논단] 무위라는 문명비평가는 진중권 비판 전에 논리학부터 먼저하라

이기현

그동안 진중권을 인신공격 수준으로 "비판"하던 무위는 지난 4일 대자보에 <조셉 켐벨의 신화론과 진중권의 진중권의 무식함>라는 글에서 드디어 세계적인 대가들까지 끌어들여 진중권을 모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먼저 프랑스의 아르센 뤼팡과 영국의 셜록 홈즈를 불러들여 추리소설의 대가들을 모욕하기 시작한 무위는 이후 소칼의 지적사기를 인용한 이후 진중권을 인신공격하기 위해 조셉 켐벨, 맑스 등을 전혀 엉뚱하게 인용해 ‘소칼의 지적 사기’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말해도 그리 심하지 않을 정도의 글을 썼다. 더욱이 장장 A4로 장장 17쪽에 이르는 장문의 글에서 이규태를 비판한 진중권을 비판한 근거가 단지 자신의 경험이 모두인양 하는 논리학에서 자주 나오는 ‘일반화의 오류’를 정확하게 보여줬다. 또한 이후 박정희를 옹호하는 것 역시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전에 끝난 논쟁에서 한 발자국도 더 발전하고 있지 않으며 이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이명박을 옹호하기 위해 역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을 또 다시 반복했다.

이미 무위가 지나치게 피아를 구분해 상대편에 대한 인신공격 수준의 과도한 비판은 이전에 <무위는 ‘진중권 콤플렉스’부터 벗어라>에서 문제점을 지적한 일이 있다. 그러나 무위는 그 때 이후 지금까지도 진중권이라는 “무식하고 뻔뻔한 지식인”을 비판하기 위해 “문명비평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자칭하면서도 전혀 그만한 논리력은 벗어버리고 단지 “내가 보니까 이규태는 맞고 진중권은 틀려”, “진중권이 영어공용화론을 맑스를 인용해 비판했는데 그건 틀려”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논리에서 벗어날 의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다.

무위의 논리를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무위는 1900년 전후에 있었던 두개의 최고의 추리소설을 이렇게 평가한다.

“내가 보기엔 영국에서 괴도 루팡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소설로 태어나기 어려운 만큼이나 프랑스에서 셜록 홈즈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 따분한 캐릭터다. 이런 차이가 한쪽은 탐정을 영웅으로 만드는 서사구조를 만들어 내었고 또 다른 쪽은 영리한 도둑을 영웅시하는 서사구조를 만들어 냈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보수적인 유럽인들에게 이런 특이한 기질을 가진 프랑스 사람들이 농담반 시샘반으로 변덕쟁이 또는 거짓말쟁이로 치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문장에서 백년 전통의 양대 연구가, 다시 말해 홈지안과 뤼패니안들은 모두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무위의 도입부는 이렇게 대가들,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을 모욕하는 것부터 시작을 한다. 여기에서 무위는 프랑스 사람들의 인식을 자신의 경험에 미뤄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었는데 이건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앙숙이라는 영국 사람들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무위의 이 표현은 유럽에 바이어들에게서 들은 것이 전부다. 간단하게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무위의 글에서 자신의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하도 비일비재해서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뤼팡과 홈즈가 프랑스인과 영국인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뤼팡은 1차대전 이전시기이고 홈즈는 19세기 말이다. 이 시기는 바로 프랑스와 영국의 제국주의의 영광이 극에 이른 시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당시 추리소설의 비조에 해당하는 포우의 소설부터 시작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제대로 정착을 하면서 한쪽은 탐정으로, 다른 한쪽은 도둑으로 정착을 한다.

뤼팡이라는 인물을 조금 더 살펴보면 실제로 뤼팡이 도둑질을 하던 시기는 의외로 “기암성”까지일 뿐이다. 뤼팡의 인생에서 따지면 20세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시기이다. 뤼팡의 매력은 모리스 르블랑이 한 말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 “형사는 사건을 관찰하는 존재라면 도둑은 사건의 당사자다”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뤼팡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은 모험소설의 요소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처음부터 결말까지 구상해 놓은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할 정도로 치밀한 구성에 지금도 종종 차용할 정도로 무궁무진한 모티브는 뤼팡 시리즈를 말하는 핵심이다. 거기에 당시 시대를 풍자하는 내용들은 당대의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수정마개가 실제로 수에즈 운하와 관련한 정치인들의 추문을 바탕으로 구성이 돼 있다는 것에서, 그리고 이들을 비꼬고 가면들을 벗겨내는 모습에서 당시 프랑스인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다는 것이 빠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프랑스 사람들이 농담반 시샘반으로 변덕쟁이 또는 거짓말쟁이로 치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한 문장으로 왜곡돼 버렸다.

이상하게 시작한 글은 드디어 한국의 좌파로 오면서 더욱 이상해진다.

“나는 최근 한국에서 진보를 참칭하는 몇몇 지식인들 중에서 앨런 소칼이 지적한 이런 류의 지적 사기를 벌이고 있는 현상을 목도한다. 그 중에서도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이런 지적 사기가 정도를 넘어 서고 있다고 판단된다.”

무위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한국 지성계에 이렇게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사대주의 습성은 매우 만연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무위는 이후 자신만의 상상을 갖고 말을 한다.  한국의 사대주의적 지식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말하면서 “미국의 빌 게이츠나 조지 소르스 등이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 섰다는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이 인용의 핵심은 노블리스 오블리쥬가 아닌 자본의 첨병인 빌 게이츠나 조지 소르스까지도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상속세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전혀 노블리스 오블리쥬와 상관이 없다. 게다가 노블리스의 오블리쥬는 역사상 한번도 자발적으로 이뤄진 일이 없다. 노블리스의 오블리쥬는 민중들이 강제해낸 것이다. 제대로 알고 말을 하기 바란다.

그리고 드디어 진중권의 이규태 비판을 끌어온다. 무위는 진중권이 이규태를 비판한 부분을 다시 자신의 경험에 미뤄 아니라고 말한다. “인도 아라비안 문화를 상당히 접해”왔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코에도 수차례 가 보았고 심지어 중동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땐 수저나 포커 대신에 손가락을 쓸 정도”인 무위가 보기에 이규태의 말이 맞다는 말이다. 유일한 반론의 근거가 중동 사람과 식사를 할 때 자신이 손가락을 쓰기 때문에 더 잘알고 그래서 자기 말이 맞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랍 음식을 먹을 때 그 사람과 똑같이 먹는 것은 예의에 속하는 것인데 겨우 그 수준으로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용기는 만용이고 만용을 인신공격이라는 폭력의 수단으로 써먹었다.

이규태의 글을 다시 보자.
 
이규태는 “아랍사람들이 사는 고원지방은 맹하 후에 엄동이 끝바꿈하고 또 같은 계절에도 타는 듯한 낮과 얼음 속 같은 밤이 끝바꿈한다”며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랍인들은 “극에서 극으로 급변할 뿐 중간의 조화나 완충이 없다”고 설명한 이후 이러한 아랍인들이 적대적인 집단에게 “알라신이 정해주신 숙명이라면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건 펜타곤이 폭삭하건 국제 경제가 뒤죽박죽이 되건 미사일이 날아오건 아랑곳없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를 보고 이규태는 아랍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는 흑인들은 금과 유리를 놓고 가지라고 할 때 유리를 선택하기 때문에 이성이 없기 때문에 노예로 쓸 쑤 있다고 한 것이나 흑인들은 더운 곳에 살기 때문에 게을러서 혼자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월한 민족의 지배를 해도 된다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야만의 세기인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주의자들이 써먹은 논리다. 이러한 것들에 별로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 스스로가 인종주의자라는 말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대가들을 왜곡해서 모욕을 한 무위는 이후 맑스를 끌어들여 영어공용화론이 맑스 이론에 따르면 맞다고 주장을 한다. 여기에서 일단 맑스가 무소불위의 비판이 허락되지 않는 진리만을 말한 사람이라는 오류는 일단 뺀다. 다만 “영어가 계급”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영어를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없는 자들에게 주자는 말은 말장난이라는 것만 하겠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일제 말기 한국어 사용을 금했던 것이 한국 민중들의 삶을 얼마나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이 됐는지만 확인해도 충분하다. 진중권이 맑스를 인용한 것은 맞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위가 이상한 것일 뿐이다.

그러더니 조셉 켐벨을 끌어들여 조셉 켐벨을 모욕했다. 무위는 “정반대로 민중들의 자발적인 박정희 향수와 희구에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글의 서두에 활용해야만 올바른 예시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실소를 금치 못하겠는 부분이 박정희 향수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과학적 근거”가 졸지에 박정희 향수의 ‘정당성’이라고 무위에 의해 왜곡 되고 있는 부분이다. 미안한 충고지만 책을 읽는다면 자신의 인식체계에 책을 맞추지 말고 그대로 읽기 바란다.

그리고 구술문화는 파시즘을 말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이미 예전에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여전히 똑같은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여기서는 간단하게 지적하고만 넘어가겠다. 적어도 ‘문명비평가’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내세우고 싶으면 최소한 나태하지는 않기 바란다. 나머지 박정희 옹호논리와 이명박 옹호논리는 이전부터의 논쟁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생략한다.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예전에 무위는 “공산주의을 이해할려면 10개의 책을 읽어도 된다면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000 권의 책을 읽어도 부족”하다고 한적이 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무위 자신이 얼마나 책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그것조차도 자신의 생각에 짜깁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면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까지 최소한 5000권을 읽은 상태에서 아직도 공산주의를 제대로 모르겠는데 어떻게 겨우 열권의 독서량으로 이해가 가능한지 알려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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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와 사랑’ 이야기나 나올 때 어김없이 필자에게 떠오르는 것이 일본의 거지 성자 다이구 료칸(1758~1831) 스님이다. 무욕 생활의 화신이었던 그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떠돌이 걸식 생활로 일관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견지했다. “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식량 다섯 줌 정도이다”라는 말로 알려진 그는 평생 명성을 기피하면서 살았으며 가장 즐겨했던 일은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 연을 날리거나 숨바꼭질하는 것이었다. 임종이 가까워진 시절에 그는 그의 제자이자 역시 시인으로서 자질이 뛰어났던 데이신(1798~1872) 비구니와 ‘정신적 사랑’에 빠져 시를 주고받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순박하면서도 거짓 한 점 없는 이들의 시를 읽어보면 사랑이란 욕망이면서도 일반 욕망과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속인이건 승려건 도만 깨친다면…

“내가 본 것이 정말 그대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은 꿈일 뿐인가?”(데이신)

“나를 잊었던가 아니면 길을 잃었던가? 하루 종일 그대를 기다려도 그대는 오지 않는구려.”(료칸)

료칸의 임종이 임박했을 때에 데이신은 그에게 마지막 시구를 써주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별의 슬픔을 어찌 참겠는가?”

“내가 남긴 유물은 봄에는 꽃, 여름에는 두견, 가을이면 단풍잎일세.”

료칸이 남긴 데이신과 우주에 대한 마지막 사랑 고백이었다.

 

 

전체 본문

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6/03/0211090002006031706010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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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4-09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남긴 유물은 봄에는 꽃, 여름에는 두견, 가을이면 단풍잎일세.”
 

혼인 뒤 딴 남성과 사랑에 빠진 유씨부인을 저잣거리서 가혹하게 사형… 새로운 수준의 여성 통제, 동아시아 유일 대한민국 간통제의 뿌리가 되다

요즘 전통 시대의 성 모럴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에 모순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2003년의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다음으로 요즘 <음란서생>이 인기를 거두는 등 조선시대의 ‘엄숙주의’ 신화 깨기가 유행인가보다. 새롭게 발견되는 조선에서는, 금욕적 유림과 절조를 생명으로 여기는 열녀뿐만 아니라 쾌락을 쫓아다니면서 법망에 걸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대담하면서 매력적인 남녀도 살았다는 것이다.


△ 한글 제정 등 근대국가가 가져야 할 수많은 요소들을 갖추었던 조선 세종대왕. 전대보다 강화된 국가권력 아래서 여성에 대한 통제도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거기에다 김별아의 <미실>처럼 고대 사회를 자유분방한 ‘섹스의 낙원’으로 그리는 최근의 문학작품이 가세해 동방예의지국의 이미지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1947년에, 독일에서는 1969년에, 프랑스에서는 1975년에 각각 폐지되고, 미국의 대다수 주의 법전에서 삭제된 간통죄 처벌 조항이 대한민국에서는 헌재의 합헌 판정을 받아가면서 살아남고 있다. 개인의 성생활이 국가적 감시·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상’으로 보인다. 그만큼 한반도에서 국가적인 성 통제의 역사가 길다.

일본과 더 비슷했던 신라인의 성생활

성 통제야 계급사회와 함께 탄생되지만, 경우마다 그 모습들이 다르다. 헤이안시대(794~1185) 일본 같으면 귀족사회의 주된 결혼 형태는 방문혼(訪問婚)이었다.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을 몇 번 방문해 간단한 혼인식을 올리는 것인데, 그 뒤에는 처가로 이사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었다. 이사간다 해도 다른 여성을 방문하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낄 것도 없었고, 여성도 마찬가지로 한 남성에게 매달릴 일은 없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생아’ 같은 개념의 성립조차 불가능했다. 물론 그 당시의 일본도 정치권력이 남성들에게 집중되는, 이상 양성평등 사회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족 계급의 남편이 부인을 간통 현장에서 발견하는 즉시 죽여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에도시대(1615~1867)의 법 제도나, 1898년 식민지 조선에서도 적용된 여성에 대한 처벌 위주의 근대적 ‘간통죄’ 규정에 비해 성을 통한 여성의 자아 표현이 훨씬 쉬운 시대였다. 일본이 일찍이 가부장제로 발전된 중국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고래의 습속을 이처럼 잘 보존한 것인가? 한반도에서도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성이 더 자유로웠다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 듯하다.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여에서 이미 3세기에 여성의 간통·투기(妬忌)에 대한 처벌로 처형이 사용됐던 반면, 중국과 먼 한반도 남부의 현실은 달랐다.

물론 신라에서도 특히 지체 낮은 남성과 귀족 여성 사이의 간통의 경우는 가혹한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삼국유사>의 설화에 따르면, 5세기 말 소지마립간이 서출지라는 연못에서 나타난 신비한 노인이 건네주는 편지를 보고 왕궁의 내전 안에서 버젓이 사랑을 즐기고 있던 궁주(宮主)와 스님을 쏘아서 죽인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외간 남성과의 통정이 완전히 금기시되지는 않았다. 같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661~681)의 서제인 차득공이라는 인물이 오늘날의 광주 지역에서 익명으로 여행하고 있을 때 안길이라는 현지 관료가 그를 자신의 집에서 대접할 적에 자신의 부인들에게 “손님과 하룻밤 동침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자신의 부인·첩으로 하여금 귀빈과 동침케 하는 것은 일부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의 잘 알려진 습속인데,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도 그 습속이 그대로 잔존했던 모양이다. 물론 결혼도 신라에서 ‘야합’, 즉 당사자의 자유 의지로 자주 이루어졌다. 김유신의 아버지와 누이동생도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각각 신라 왕족의 여성·남성과 ‘야합’했고, 유학자를 자처했던 7세기의 유명한 외교관 강수도 스스럼없이 대장장이의 딸과 ‘야합’했다. 8~9세기의 신라는 이미 ‘소중화’를 자임했지만 실제 신라인들의 성생활 패턴은 차라리 당대의 일본에 더 가까웠다.

신라를 이은 고려시대에는 비록 화간을 처벌했던 당나라의 법이 시행됐지만 이혼·재혼이 자유로웠으며 불명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법으로는 금지됐어도 혼외 성관계를 맺는 것이 예외岵?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자유 시대’는 조선 건국으로 끝이 났다.

‘아랫것들의 음란함’은 불문에 부쳐라

학자들 중에 한국의 조선시대나 중국의 명·청시대, 일본의 에도시대를 ‘근대로의 이행기’ 또는 ‘동아시아적 근대의 맹아기’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한국의 경우 토지 사유권과 매매, 부계 중심의 직계 가족집단, 시장에서 금전의 활발한 사용 등 근대성의 기초 요소들이 조선시대에 비로소 확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이 아닌 중앙관료제에 의해 자원이 유통·재분배됐던 나라를 자본주의적 근대의 ‘후보생’으로 부르기에는 의심이 따른다. 하나, 한 차원에서는 조선시대의 ‘특등의 근대성’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유럽 같으면 19세기가 돼야 가능해진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국가적 감시·처벌을 조선은 이미 15세기 초에 실행했다.


△ 조선시대의 새로운 ‘도덕 독재’ 분위기에서 비범한 성생활을 한 어우동은 사형수가 되었다. 사진은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의 1985년 작품 <어우동>.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에서 하층민의 ‘난교(亂交)의 악습’이 통제 대상이 되지 않았듯이 조선시대도 ‘아랫것들의 음란함’을 불문에 부치곤 했다. 노비 사이의 혼외 정사는 물론이거니와 ‘가격(家格)이 없는 상한(常漢)’에게도 곤장을 80 내지 90차례(여자가 남편이 있는 경우) 치게 돼 있는 <대명률>의 화간범 처벌 조항을 잘 적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산층 이상의 신사에게 비공식적으로 사창가에 드나들거나 하층민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할 권리를 주었던 빅토리아시대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사대부의 국가 조선도 사족 남성이 예컨대 자신의 노비를 성노리개로 이용하는 것을 별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런데 통치 이데올로기에 모범적으로 순응해야 했던 사족 여성이 결혼의 울타리를 넘어 자유를 탐색해보거나 ‘아랫것’ 남성이 감히 양반 여성과 화간을 범했을 경우 이야기가 달라졌다.

지폐에까지 얼굴을 비쳐주는 세종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왕이라고 칭하는 데 대해 별다른 거리낌을 느끼지 않지 않는가? 한글 제정이나 대포 제작부터 오늘날의 헌법에 명기돼 있는 북방 경계선의 확립까지, 근대로 접어들 국가가 가져야 했을 수많은 요소들이 그 시대에 처음 갖춰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전대보다 훨씬 강화된 국가 권력인 만큼, 여성에 대한 통제도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상층 여성의 사찰 방문과 같은 ‘바깥출입’을 엄격히 제한한 세종은 500년 전의 ‘자유부인’들을 가차 없이 ‘시범 케이스’로 만들어 희생시키기도 했다. 1423년 9월, 전직 관찰사인 이귀산의 아내 유씨가 조서로라는 관료와 상통했다는 비밀 보고가 들어오자 세종이 철저한 수사를 명해 결국 해당 법률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사형이라는 극단적 처분을 내렸다. 조서로와 먼 친척이 되는 유씨는 그를 10대 초반부터 사랑해 14살에 처음 관계를 가지고 그 뒤에 사랑 없이 이귀산에게 시집가고 나서도 계속 첫사랑인 조서로와 애인 관계를 유지해온 것인데, 이 사건에 대한 세종의 결론은 이랬다.

“오래전부터 예의로 다스려져온 동방의 우리나라, 대대로 벼슬한 사람의 집안에서 이와 같은 행실은 있을 수 없다. 조서로가 개국 공신의 후손이니 형을 가할 수 없지만 음탕한 짓을 저지른 유씨 부인을 3일간 저잣거리에 서게 한 뒤에 목을 베라.”(<세종실록>) 남자는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감히 어렸을 때의 사랑을 지켜온 유씨는 ‘만세의 사표 세종대왕’에 의해 죽고 말았다. 나중에 이와 같은 무자비한 ‘가중 처벌’이 하나의 판례가 되어 1480년 우리에게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절세의 ‘자유부인’ 어우동(어을우동)이 붙잡혀 심판을 받을 때에 사형 선고의 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이순신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인식되는 세종은 실제로 여성에게 자아의 성적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성리학적 윤리관의 맹신자였는데, 이 사실까지 교과서에 실리려면 아마도 꽤나 오래 걸릴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없어진 지 반세기가 지났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아예 법적으로 규정된 적도 없는 ‘간통죄’는 동북아 주요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만이 처벌하지 않는가?

유씨부인 사형은 언제 교과서에 실릴까

두 남녀가 정이 깊어 서로에게만 충실하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데 윤리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장된 국가가 개개인의 성생활을 규제·감시·심판·처벌하게 된다면, 위선과 폭력이 난무하게 되고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다. 결국 용감한 소수는 모든 탄압에도 불구하고 ‘금지된 사랑’에 도전하지만, 순응하는 다수는 국가가 만든 윤리법을 하늘의 법으로 알고 내면화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장병인,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1997

2. 정성희,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3. 이배용 외,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제1권, 청년사, 1999

4. <조선왕조실록> 인터넷판: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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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종의 백색신화/ 진중권


나치는 유태인만 미워하는 게 아니다. 유태인과 원수처럼 싸우는 아랍인도 미워했다. 함족의 눈에는 유태인이나 아랍인이나 어차피 셈족. 이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증오를 `안티세미티즘'이라 부른다. 백인 보수층에는 안티세미티즘 성향이 잠재되어 있으나, 오늘날 공개적으로 이런 인종주의를 설파하는 자들은 단 하나, 네오 나치뿐이다. 그런데 노골적으로 이 백색신화를 선동하는 분이 우리 나라에도 있다. 조선일보의 이규태씨다. 몇 주전 그는 자기 칼럼에서 들어주기 민망한 해괴한 인종주의 망언을 했다. 좀 늦었지만 인류평화를 위해 지적해 두고 넘어가야겠다.

이규태씨에 따르면, “혹서와 혹한”이 교차하는 “고원지방”에서 사는 아랍 사람들은 “극단을 오가는 기후 틀에 마음도 틀이 박혀 매사에 극단적”이며,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이다. 그래서 “인샬라-곧 알라신이 원하신다면-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건 펜타곤이 폭삭하건 국제 경제가 뒤죽박죽이 되건 미사일이 날아오건 아랑곳없다.” 그리고 지금 “색출되고 있는 암살 테러범들”은 “예외 없이 아랍인들”이며 이들은 모두 “자살 충돌 직전에 예외 없이 `인샬라!'를 크게 외쳤을 것”이라 한다.

이것은 유치한 환경결정론으로, 고리타분한 19세기의 편견이다. 인종주의는 다양한 개인들을 하나의 집단에 귀속시킨 후, 그 집단의 특성을 논하곤 한다. 물론 그 특성을 기술하는 술어들은 부정적인 것 일색이다. 가령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 이규태씨는 혹시 아랍 사람들 만나본 적이나 있는지. 적어도 내가 만나 본 아랍인들 중에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들은 아랍어는 “인살랴”가 아니라 “살라말레쿰”이었다. 그런데 “너희에게 평화를”이라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이라고?

정작 “복수에 민감”한 게 누구인가? “보복”을 하자고 난리를 치는 그 사람들이 아닌가. “호전적”인 것은 누구던가? `암살, 테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60개국에서 더러운 전쟁을 벌이겠다', `필요하면 핵을 쓸 수도 있다'고 막말을 하던 사람들이 아닌가. 인류가 겪은 수많은 전쟁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을 “세계전쟁”이라 부른다. 그런데 두 번의 세계 전쟁을 일으킨 호전적인 인종은 누구더라? 지난 세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한 나라는 어디? 또 멀쩡히 잘 사는 아랍인에게 `십자군 전쟁'을 걸었던 문화는 어디더라?

소위 “지하드”는 몇몇 광신도들이나 하는 짓. 우리는 그 성전을 “테러”라 부른다. 하지만 또 다른 성전은? 부시는 이번 아프간침공을 “십자군”이라는 이름의 “성전”으로 축성하려다 빈축을 샀다. 지하드와 십자군 전쟁. 하나는 일부 광신도 집단이 벌이는 성전, 다른 하나는 국가에서 수행하는 성전이다. 이 시간에도 아프간에서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 미국의 폭탄에 맞아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런 살육은 `테러'라 부르면 안 된다. 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국가가 축성하면 신성해지기 때문이다.

우습지 않은가? 황인종 칼럼니스트가 함족 대표로 인종주의 망언을 한다. 이규태씨는 도대체 어디서 살다 오셨나? “혹서와 혹한을 완충하는 봄이 없고 가을이 없”는 “고원지방”에서 살다 오셨나? 따뜻한 봄, 서늘한 가을이 있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살면서, 왜 이리 심성이 “극단적”이실까? 함경도 개마고원에서 자라나셨나? 아랍인에 대한 이 인종주의적 혐오감은 미국이라는 암몬신(神)에 대한 얼빠진 애정의 뒷면. 그리고 인종주의 망언은 언론인의 자폭행위. 암몬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칼럼이라는 항공기를 몰고 이슬람 사원으로 돌진하시면서, 충돌 직전에 그도 이를 악물고 외쳤을까? “부시께서 원하신다면!”

진중권/<아웃사이더>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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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의 의식구조 (2001.09.14)

아랍사람들이 사는 고원지방은 맹하 후에 엄동이 끝바꿈하고 또 같은 계절에도 타는 듯한 낮과 얼음 속 같은 밤이 끝바꿈한다. 이 혹서와 혹한을 완충하는 봄이 없고 가을이 없다. 이와 같은 극단을 오가는 기후 틀에 마음도 틀이 박혀 아랍사람들은 매사에 극단적이다. 사람을 극진히 환대하다가도 적대를 하고 관대하다가도 호전적이며 포옹하다가도 칼을 뽑는다. 극에서 극으로 급변할 뿐 중간의 조화나 완충이 없다. 이 같은 아랍 마인드는 말이나 행동뿐 아니라 의식주, 소설, 역사, 제도, 신앙,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체계화한 것이 레온 고시에의 「이슬람 철학 서설」이다. 수십년 전까지 카이로 남방 400㎞ 지점에 있는 엘 파다리라는 농촌에는 주민 90%가 부인과 아이들만으로, 남자라고는 노인만 남고 성인은 한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사나이가 증발하고 없어진 데는 조손 3대에 걸친 복수전쟁 때문이었다. 각기 다른 혈족 간에 모욕을 주는 사건이 있어 보복으로 살인을 했다. 복수는 같은 혈족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의무요, 당대에 복수 못하면 대대로 상속 유지된다. 연쇄살인으로 성인 남자들은 죽어갔고 살아남은 사나이가 있으면 그 아내가 삭발을 하고 비겁함을 고발하는 바람에 복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공할 원념이 이글거리는 아랍 마인드다. 다마스쿠스에서는 북부인이 남부인의 밭에서 오이 하나 훔친 것이 발단이 되어 그 유명한 7년에 걸친 오이 전쟁을 하기도 한 아랍인이다.
같은 아랍인일지라도 이라크 시아파는 북부인이요, 사우디의 수니파는 남부인으로 각기 정통을 긍지로 삼고 적대해왔기로 반목의 골이 깊고 역사도 유구하다. 그만큼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인 아랍인이다.

아랍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수태된 지 40일 만에 알라신의 장부에 그의 숙명이 치부되며 그 숙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끝마다 「인샬라ㅡ」, 곧 알라신이 원하신다면ㅡ 알라신이 정해주신 숙명이라면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건 펜타곤이 폭삭하건 국제 경제가 뒤죽박죽이 되건 미사일이 날아오건 아랑곳없다. 색출되고 있는 암살 테러범들이 예외없이 아랍인들이며 이들에게 공통점을 찾는다면 자살 충돌 직전에 예외없이 「인샬라!」를 크게 외쳤을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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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4-04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진중권이 더 낫네 뭐 ㅡ..ㅡ;

릴케 현상 2006-04-04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진중권이 잘못한 건 없는듯한데요~

마태우스 2006-04-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주 옛날에 읽었던 글인데...진중권 글 보고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로자 2006-04-0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규태의 글을 거의 본 적이 없지만 이 글은 인종주의 입장에서 쓴 글이 분명하네요.
 

[주장] 우리 사회는 좌파 지식인들의 분발을 더욱 요구해야 한다

무위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을 통해 본 집단 무의식

유럽 바이어를 만나서 그들이 프랑스인들에 대해서 평하는 말을 들은 적이 많다. 프랑스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었는데 이건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앙숙이라는 영국 사람들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서 온 어떤 여자 바이어는 "어머 쟤는 프랑스 사람도 아니면서 왜 거짓말을 하지?" 하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물론 단순한 편견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아니 난 오히려 거짓말도 종종 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그런 자유분방함을 나름대로 존중한다.

내가 써 놓은 글 중에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즈와 모리스 르블랑이 지은 괴도 루팡에 관한 간단한 소고(小考)가 있다.

이 두 개의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에는 단순히 재미로 보기에는 중요한  문화 코드가 숨어 있다.  내가 발견한 그 코드는 두 소설 속에 깃든 영국과 프랑스라는 집단이 공유하는 무의식이랄까 또는 민족적 기질에 관한 것이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잡는 사립형사가 히어로인 셜록 홈즈는 질서와 규율을 존중하는 수호자며 이는 보수적인 영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투영된 결과다.

이에 반하여 기존의 틀에 박힌 질서를 숨막혀 하며 개인의 자유로움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은 기존 질서의 수호자인 치안 경감을 비웃으며 신출귀몰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고 심지어 조롱까지 하면서 유유히 빠져나가는 -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도둑- 루팡을 발현해 낸 것으로 분석했다.
 
영국에서 괴도 루팡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소설로 태어나기 어려운 만큼이나 셜록 홈즈가 프랑스에서 셜록 홈즈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 따분한 캐릭터다. 이런 차이가 한쪽은 탐정을 영웅으로 만드는 서사구조를 만들어 내었고 또 다른 쪽은 영리한 도둑을 영웅시하는 서사구조를 만들어 냈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보수적인 유럽인들에게 이런 특이한 기질을 가진 프랑스 사람들이 농담반 시샘반으로 변덕쟁이 또는 거짓말쟁이로 치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학문적 엄밀성을 요구하는 분야에서까지 이런 거짓말이 범람한다면 사정이 많이 다르지 않을까? 다음은 프랑스 지성계를 발칵 뒤집으며 프랑스의 무식한 거장들을 비꼬았던 지적 사기(이희재 譯)라는 책의 전말이다. 

엘런 소칼의 지적 사기 논쟁

과학의 기본개념조차 모르면서 자신들의 빈약한 이론을 난해하고 위압적인 과학용어로 포장해 독자들의 기를 죽이고 명성을 얻은 학자들의 지적 사기극을 파헤친 흥미있는 보고서가 있다. 이른바 '소칼의 장난 Sokal's Hoax'으로 불리는  일련의 논쟁적 사건은 소칼이 패러디와 넌센스로 가득찬 한 논문을 <소셜 텍스트 : Social Text>라는 포스트모던 저널에 기고함으로서 촉발되었다.

의도적인 거짓말을 여러 과학 용어로 잘 포장한 이 논문은 결국 게재에 성공하였으며, 후에 학문적 엄밀성'을 시험해 보기 위한 시도한 것이라고 폭로함으로써 그 정점에 달했다.

이어 소칼은 루벵 대학 물리학과 교수 브리크몽과 협력하여 <지적 사기>를 프랑스에서 출판하였고,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들이 과학을 남용한 사례를 철저히 분석, 비판하면서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해 전면적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소칼과 브리크몽이라는 전문 과학자의 눈에 비친 그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상은 한마디로 엉터리다. 라캉, 보드리야르, 크리스테바, 들뢰즈 같은 이름난 지식인이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이 원래의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과학적 개념을 써먹거나 이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성찰은 고사하고 개념의 정확한 뜻조차 밝히지 않은 채 전문 과학 용어를 마구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판은 라캉으로부터 시작된다. 수학, 특히 위상학과 정신분석학을 연결시키려는 라캉의 시도는 하찮은 지식을  과시하고 의미가 결여된 문장을 조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매우 알기 쉽게 구체적인 예로 써 놓은 hanjander님의 블로그 (http://cafe.naver.com/hanjander/231)에 있는 글도 읽어보자. 

의도적 사기였는지, 자기기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지는 모르나 허수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학적 위상학>을 쓴 후 자신이 위상수학의 가장 최신이론을 응용했다고 으스대고, 상대주의와 상대성조차 구분하지 못한 '라투르'는 자기가 아인슈타인한테 한 수 가르쳐 주었다고 기염을 토한다.

크리스테바는 '무한집합'을 이야기하고 보드리 야르는 '비유클리드 공간'과 '복수의 굴절률을 가진 초공간'이라는 수학에도 물리학에도 없는 발명품을 들고 나온다. 이에 참지 못한 뉴욕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앨런 소칼은 이들의 사기에 대해 역사기를 치는데 이들 학자들의 이론을 패러디하고 유클리드의 파이나 뉴턴의 중력을 적당히 부정하며 억지와 후안무치한 궤변으로 가득한 엉터리 논문을 써서 그들의 저명한 문화 연구지인 '소셜 텍스트'에 보내 대서 특필하는데 성공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과학자들 간에 벌어진 사기사건의 전말이다. 사기란 옳지 않고 저급한 수단이나 앨런 소칼의 장난기 넘친 사기는 일면 귀엽기까지 하다.

(이하 생략, 이 사기극의 내용이 궁금하면 여기를 클릭)

권위에 오만하고 진리에 겸손하라!

사실 이 책의 내용이 새삼스레 필자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대학 시절 "권위에 오만하고 진리에 겸손하라!"라는 좌우명을 스스로 만들고 온갖 고전과 세계 사상 서적을 섭렵하던 시절 나는 세가지 거의 확신에 찬 가설을 세웠다. 말이 가설이지 셋 다 거의 확신에 가까울 정도의 자신감이 깃든 나의 판단이었다.

그 첫째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공산주의는 그 이론 자체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矛循)에 의해서 스스로 붕괴될 거라는 것이고 둘째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그가 자신의 억지 논리를 맞추기 위해서 상당부분 임상 실험을 조작했으리라는 결론을 자체적으로 내린 일이었다.

또한 그 마지막이 필자가 대학 졸업할 즈음에 번성하기 시작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예술이나 문예 사조라기 보다는 화려한 말장난이나 지적 사기가 그 주류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경제학이라는 전공이외에도 독학으로 영문학도 전공자격을 취득하였기에 지적 사기에 나오는 프랑스의 유명학자들의 면면은 나름대로 친근하기도 하다.

공산주의의 몰락에 관해서는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고 프로이트의 임상실험 조작에 관한 이야기는 필자가 군대에 있을 때 한국 일보를 통해서 그의 손녀가 이런 사실을 폭로한 기사를 접하게 되어서 몹시 반가웠다. 마지막 부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많이도 다툰 분야였는데 엘런 소칼이 쓴 <지적 사기>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 내렸던 나의 판단이 맞았음을 상당 부분 보증해 준 셈이다.

내가 이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책의 작가가 아무리 권위 있는 학자라 할 지라도 그가 쓴 글이나 주장은 철저하게 방법적 회의를 하면서 대했기 때문이다. "권위에 오만하고 진리에 겸손하라!"라는 그 당시 나의 좌우명처럼 나에게 있어 권위란 극복하고 뛰어 넘어야 할 대상이었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유일하게 대해야 할 것은 진리 그 자체뿐이었다

한국 지식인들의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지적인 천박함

나는 최근 한국에서 진보를 참칭하는 몇몇 지식인들 중에서 앨런 소칼이 지적한 이런 류의 지적 사기를 벌이고 있는 현상을 목도한다. 그 중에서도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이런 지적 사기가 정도를 넘어 서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의 글에 본문의 내용과 별 연관도  없는 온갖 유명 인사를 장식용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수법이 너무나 비슷하다. 이건 애런 소칼의 책 <지적 사기>에서 폭로된 가장 기본적인 일치점에 불과하다. 

더 황당한 것은 진중권이 인용해 오는 저명한 학자들의 주장이 본문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혀 상관없거나 심지어 조셉 캠벨이나 마르크스의 경우처럼 자신이 주장하는 말과 완전히 반대의 경우도 있음을 확인하게 될 때 실로 어안이 벙벙하다.

이건 독자를 무시하는 진중권 류의 뻔뻔함에서도 기인하겠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의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무식함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해석할 도리 밖에 없다. 무식하지 않다면야 저명한 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자기 글을 치장을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주장과 일치점이 있는 것을 선택할 정도의 기본적인 지적 능력은 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약간의 뻔뻔함이라든가 지적 오만을 가지는 것은 독(毒)보다는 일종의 약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된 독자라면 진중권이 쓴 몇몇 글에서 일종의 천박함을 느끼는 경우라면 '그의 좆은 서지 않는다.' '좆잡고(파지음경)-' 하는 식의 온갖 저질스런 용어를 글이랍시고 내뱉는 이상한 용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TV 대담에 나와 자신의 논지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정신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라고 내뱉는 독설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좋게 보면 금기시된 용어를 써 주위를 환기시키는 기법 정도로 애교로 봐 줄만 하다. 그 이상한 용기의 이면에 숨어있는 다음의 형태에서 진실로 천박함을 느끼게 된다.

일반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기도 어려운 '앙겔루스 노부스' 같은 말을 책 제목으로 다는 이중적인 태도는 약과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인식의 기초이고, 벤야민은 영감의 원천이다'라는 진중권의 뜬금 없는 글처럼 이름을 빼고 나면 아무 알맹이도 없는 말의 난장이다.

유명한 사람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의 글을 포장하는 식은 저급하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논지와 별 상관도 없이 억지로 등장시키는 발터 벤야민, 들뢰즈,노엄 촘스키, 조셉 켐벨, 비트겐 슈타인, 알세튀르 같은 이름에서 지적인 천박함을 발견하지 않을 사람은 지식인이 아닐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도나 사상(思想)하는 힘이 취약하기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서구 유럽에 대한 끝없는 열등감과 지적인 천박함을 그의 글에서 읽어 내기는 특별히 어렵지 않다.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한국 지성계에 이렇게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사대주의 습성은 매우 만연하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에는 그중에서 프랑스에 대한 열등감이 상당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프랑스의 '똘레랑스'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 범람시켰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이런 용어를 좋아하지 않고 또 그 용어를 만들어 낸 서구사회에 대한 막연한 우월적인 문화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런 용어가 세간에 마구 번져가는 현상의 기저에는 한국인들의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열등감을 이용해서 우월감을 총족 시켜 보려는 천박한 지식인들의 이해관계와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려보려는 심리가 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한국의 많은 교수나 칼럼니스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서구 부유층의 기부문화와 함께 빠뜨리지 않는 예가 하나 있다. 

미국의 빌 게이츠나 조지 소르스 등이 상속세 폐지운동에 반대했다는 사실인데 이런 사실로 그들이 노블레스 오브리주가 말하는 '가진 자의 겸양과 미덕'의 정신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속세란 자신의 재산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식의 재산이 걸린 문제에 불과하다. 상속세 폐지 반대 운동에 앞장서는 이런 고매한 사람들이 법인세나 금융 소득세 인상 같은 자신의 재산이 직접 걸린 문제에는 반발이 매우 심하다.

빌 게이츠는 언제나 미국의 독과점 규제법을 피해 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국제 환투기꾼 조지 소르스는 세금 포탈죄로 프랑스 법정에 오른 사실에 의아해 할 것이다. 조지 소로스는 한국에서도 서울은행을 매입하고 매각하는 짧은 기간에 무려 수백 억 원의 차익을 남기고 세금 한 푼 안내고 도망갔다.

또 프랑스는 과거 그들이 식민지로 두었던 아랍계 이민 2세들에 대한 차별문제 때문에 장기간의 폭등이 세계에 알려지자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똘레랑스의 허실이 드러나고 있다. 현실적인 이익이 걸린 법인세나 금융 소득세에는 극렬히 반대하는 이들이 자기가 죽고난 후에 자식의 걸린 이익인 상속세 존속에는 찬성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부러 라도 자수성가했다는 것을 내세워 그 능력을 인정받겠다는 문화양식과 떼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이규태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몰고 간 진중권의 저돌성(猪突性)

9·11 테러에 관한 사회적 이슈가 한참이었을 때 나온 진중권의 초창기 글 중 그가 예로 든 카오스 이론을 보고 정말 저 사람이 카오스 이론은 제대로 알고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정도였다.

이건 엘런 소칼이 프랑스 지성계에 만연한 지적 사기 풍토에 의문을 품은 것과 같은 동기였고 공교롭게도 앨런 소칼이 쓴  <지적 사기>라는 책에도 '7. 간주곡-카오스 이론과 포스턴 모던 과학' 이란 소제목을 단 글이 나온다.

진중권의 그 글을 처음 접했을 땐 "참 재미있는 사람도 다 있구나" 라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이규태가 말한 아랍의 소위 인샬라 문화를 논하는 글에서 '살람 말레꿈' 이란 아랍의 인사말을 인용하면서, 일생을 비교문화 연구에 바친 故 이규태 씨를 말 한마디를 꼬투리 삼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고가는 광경에서는 영락없이 씩씩거리는 멧돼지의 모습을 연상한 사람은 단지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중동 바이어와 오랫동안 무역을 해온 관계로 인도 아라비안 문화를 상당히 접해 왔다. 게다가 필자가 대학 시절에 문화 인류학에 심취했었기 때문에 우리와 상이한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나름대로 갖추어진 상태였다.

이슬람 사원인 모스코에도 수차례 가 보았고 심지어 중동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땐 수저나 포커 대신에 손가락을 쓸 정도다. 이런 필자가 보기에도 중동의 종교와 기후와 문화에 기반하여 종합적인 논지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큰 문제점이 없었던 문화평론이었다.

다만 故 이규태 씨가 연재한 비교문화 코너는 긴 논문이나 책이 아니라 매우 짧은 글로 마무리해야만 하는 관계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은 구조적으로 내포된 문제였다. 그런데 그 글에 나온 작은 옥의 티를 의도적으로 침소봉대해서 인종차별주의자 운운한 진중권의 특이함은 단순 무식한 멧돼지가 가진 저돌성(猪突性)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다. 이 저돌성의 기본적인 속성이 전후 좌우를 종합적으로 볼 수 없는 좁은 시야 즉 편협함과 무식함이다.

그때 진중권이 보여준 것은 평생을 비교문화학을 연구하며 쌓아온 故 이규태 씨의 투철한 장인(匠人)정신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울고 간 진중권의 영어 공용화 반대 논리

그러던 중 진중권이 제법 유명한 잡지 말지에 기고한 영어공용화를 반대하는 이유로 든 '맑스주의 반자락' 이야기에서는 정말 기절초풍할 뻔 했다. 진중권이 맑시즘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만 알아도 그가 주장하는 영어 공용화 반대 논리에서만은 맑시즘을 끌어 들여서는 안되는 일이 자명했다.

그가 그 글에서 언어에  대한 유물론적 도구론을  공박하면서 내놓은 민족 감정이나 상징은 철저하게 관념론적 논리에 근거하고 있음으로 해서 유물 변증법적인 토대에 있는 맑시즘이 들어오면 이율배반이 일어난다. 진정으로 맑시즘에 기반한다면 하부구조인 경제구조에 촛점을 두고 관념적인 민족정기나 민족 의식을 양보하는 대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영어 공용화에 앞장을 서야 앞뒤가 맞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는 '영어가 계급'이라는 말은 공공연하다. 직장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못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약 140%에 달하는 임금격차를 향유하고 있다. 물론 임금이 높은 것과 비례하여 승진이나 근무환경 물론 개인의 노력 유무도 있겠지만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그의 부모가 얼마만큼의 영어 환경을 만들어 주었느냐 하는 원인에 달려 있기에 이건 이제 계급의 문제로 인식해야 정당하다.

영어 공용화가 되어야만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영어를 배울 기회를 상대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는 무산자 계급이 조금이라도 더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진중권이 쓴 그 글의 원문에 나온 칸트나 훗설 비트겐슈타인 등의 유명인사는 전혀 엉뚱한 쳇바퀴 위에 올려져 헛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말하듯이 극단주의가 문제라고 말하려면 더욱 더 '맑시즘의 반자락'을 거들먹거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맑시즘이야 말로 노동 토지 자본 경영 정보 같은 다양한 생산요소 중에서 유독 노동시간에만 집착한 노동가치설을 펼친 극단적인 논법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인류 역사를 오로지 하부구조인 경제 구조 즉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따라 구별하는 논법 또한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좌파 지식인(?) 진중권의 뇌 구조가 어떻게 짜여져 있기에 영어 공용화를 반대하는 글을 써면서 유물론에 기반한 언어 도구주의를 비난하고 칸트식의 관념주의를 싣컫 칭송한 후에 자기가 무엇을 주장했는지 글을 끝맺기도 전에 철저하게 유물 변증법의 세례를 받은 맑시즘 이론에 기반하여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공박했다는 글을 썼다는 말을 자랑삼아 늘어 놓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민족은 브로조아의 지배이데올르그라서 프롤레타리아의 적이며 전세계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위하여 민족을 버려야 한다고 주창한 마르크스와 엘겔스의 사상을 진중권이 알 턱이 없다. 정작 진중권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에 상관없이 마르크스가 가진 권위일 뿐이다.

필자는 왜 개그 콘스트 연출가들이 진중권을 개그맨으로 출연시키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 개그계의 발전을 위해서 진중권 스스로 개그계로 진출해 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그의 감각적인 재능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계통이 이곳인데 학문적 엄밀성을 요구하는 영역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목표를 잘못 잡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진중권의 지적 사기에 이용된 조셉 켐벨의 권위

진중권은 박정희의 공과를 평하자는 것이 야바위 판이라면서 죠셉 켐벨의 책을 예로 들며 "Das Volk dichtet"(민중은 詩作을 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 조셉 켐벨이 인용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진중권이 말하고자 하는 논리구조와 전혀 안맞다.

죠셉 켐벨의 '신화의 힘'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이면 이 논증이 얼마나 배꼽이 뒤집힐 정도로 황당한 경우인지 안다. 진중권은 죠셉 켐벨이 말한 "민중은 시작(詩作)을 한다' 명제를 끌어다가 박정희 신화의 허구성과 비주체성을 설명하는 서두를 장식했다.

그런데 이 명제는 박정희가 위대했다고 믿는 민중들의 믿음에는 전혀 과학적인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할 때 쓰야 하는 명제가 절대 아니다. 정반대로 민중들의 자발적인 박정희 향수와 희구에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글의 서두에 활용해야만 올바른 예시가 된다.

만일 조셉 켐벨이 평생을 들여 연구한 성과를 한국의 진중권이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 자기가 말한 부분을 교묘하게 트릭으로 도둑질 당했다는 써먹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죠셉 켐벨이라면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하기보다 뺨을 한대 갈겼을 것이다.

진중권이 끌고 들어 온 신화학자 조셉 켐벨은 진중권의 글에서 저렇게 이상하게 이용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이는 조셉 켐벨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다음을 생각하면 싶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신화학을 전공으로 삼아 평생을 구술문화의 총아인 신화와 전설이나 민족 설화를 연구한 학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를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너무나 쉽게 깨닫는다. 신화학이란 우리가 터무니 없는 이야기나 미신(迷信)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리는 신화와 전설 또는 민간 설화를 연구해 보면 장소와 민족에 관계없이 어떤 공통적인 코드나 구조가 있음을 기본적인 전제로 하여 출발한다.

또한 신화 속에 깔려 있는 그 코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과학적이며 정교한 구조를 띄고 있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이 조셈 켐벨이 그의 명저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에서 그리스 신화, 아메리칸 인디언 신화, 인도신화, 불교사상, 중국의 노장 사상은 물론 20세기 영화 <스타워즈>까지 풍부하게 활용하면서 신화의 본질과 그 속에 녹아 있는 '큰 지혜'를 들추어내는데 주력한 본질적인 이유다.

이런 사람들의 평생에 걸친 노력과 학문적 성과로 인해 신화와 전설이나 민담을 두고 고려할 가치가 없고 비과학적인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진중근을 빼 놓고서 굳이 이런 '무식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으라면 과학이나 학문이 아닌 종교적 신앙에 심취한 나머지 지성 세계에서 뒤떨어진 사람들 정도뿐이다.

즉 서구 기독교 같은 유일신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이성을 잃고 있는 극소수의 근본주의자들 같은 경우에는 세계 각 국의 전설이나 샤머니즘을  미신이라 치부하며 백안시하는 무지몽매함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진중권이 잘못 인용한 조셉 켐벨의 경우는 '서구인들의 보수종교의 편협성에 실망한 나머지 오늘날을 비신화한 세계로 규정하고  신화가 우리를 영적인,범인류애적인 의식의 수준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보배로운 가치가 있다'고 설파한 사람이다.

조셉 켐벨이 스타워즈를 보고 주장했다는 내용도 너무나 의미 심장하다. 그는 테크놀로지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데 이 말은 진중권이 신화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말과 구술문화 활자문화 논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반대 방향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솔직히 대학물을 먹은 사람치고 신화를 끌어다가 이런 논법으로 신화학의 주장을 인용하는 사람은 진중권을 빼고는 접해보지 못했다.

신화학이 한참 발전할 시기에는 문화인류학도 번성했다. 서구 지성계에 구조주의 열풍을 몰고 온 레비 스트로스의 저서 <슬픈 열대> 나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같은 책에 나오는 정령 신앙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고도로 문명화된 서구사회의 편견으로 쉽사리 무시하고 야만적이거나 미개하다고 치부하는 파퓨아 뉴기니 같은 원시 사회도 서구 문명 사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개한 사회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들이 아프리카 등의 오지에 들어가서 연구해서 쌓아올린 학문적 성과는 아무리 문명화된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시의 모습을 간직한 이들 부족과는 본질적으로 갖은 구조를 갖고 있음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미개한 사회로 치부하고 있던 이들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등불을 밝혀주는 귀중한 보고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며 또 그들이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낸 학문적인 성취이다.

그러므로 진중권이 신화학이나 문화인류학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갖고 있고 그것을 제대로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박정희의 공과 논란에 신화 속의 영웅신화를 끌고 들어가는 무모한 객기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 신화의 허구성을 말하면서 신화를 말하는 논증 방식을 취하는 것은 박정희 신화가 엉터리임을 밝히는 데 기여할 수 없는 태생적인 운명을 갖고 있다.

오히려 신화학의 원래 목적처럼 박정희 신화는 근거가 충분한 민중들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사실만 더욱 확인해 줄 뿐이다.

물론 진중권의 지적처럼 신화라는 뜻에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의미가 분명히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뜻을 거기다가 갖다 쓰는 것은 숲을 보고서도 일부러 못 본 척하고 그 숲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만 보았고 또 보아야 한다고 딴청을 떨고 있는 짓이다. 왜냐하면 진중권이 말한 '잘못된 믿음'이라는 뜻은 신화가 가진 많고 많은 함의(含意) 중에서 끼껏해야 한가지 의미일 뿐이다.

그것조차도 진중권의 주장처럼 제대로 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만든 주장이 아니라 신화에 대해서 뭘 모르는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쓰고 있는 개념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진중권이 인용한 조셉 켐벨이 그의 일생에 걸쳐 신화를 연구하고 강의한 목적이야말로 바로 '진중권처럼 무지한 사람들이 가진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점을 밝히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죠셉 켐벨은 민중이 집단적으로 시작(詩作)을 해낸 영웅신화라는 것이 썩은 새끼줄처럼 허약하기 짝이 없는 논리구조를 가진 것이 아니라 토대와 근거가 너무나 단단한 동아줄 같이 강력한 견인력이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신화를 말하고 있다.

그의 저서에 다른 것도 아닌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제목이 주는 메시지는 책을 읽어본 사람이나 심지어 읽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메시지가 너무나 자명하게 다가온다.

'신화는 힘이 있다. 그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하지만 신화를 읽고 그 코드를 읽고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그 숨겨진 힘을 찾아낸다.' 이것이 죠셉 켐벨이 현대 문명 사회에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이란 저서를 내 놓으며 던진 화두이며 주 테마다.

그런데 죠셉 켐벨의 말을 빌어서 신화가 근거없는 미신이라는 주장을 하는 엉터리 지식인 진중권의 대담무쌍함은 도대체 어디서 그 힘(POWER)이 나오는 걸까? 이건 조셉 켐벨이 말한 '신화의 힘'이 아니라 진중권의 대뇌 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식함의 힘'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진중권이 신화를 해석할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신화학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일천해서 나온 만용이 확실하다.

진중권이 왜곡한 월터 J. 옹의 구술문화와 활자문화

진중권의 작은 실수로 마치 자기가 말한 듯이 인용조차도 밝히지 않은 구술문화와 활자문화 논법은 실제로는 월터 J. 옹이 체계화한 것이다. 월트 J. 옹은 구술시대의 대표적인 텍스트로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꼽고 있다. 그리고 구술성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로 밀만 패리의 논문을 든다.

하지만 이들의 구술문화 활자문화 이론체계를 읽으면서 필자가 발견한 점은 두 문화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관계이지 그 차이나 우열이 아니다. 마치 원시 미개 사회의 문화든 현대 문명 사회의 문화든 간에 문화는 상대성을 가질 뿐이지 그 우열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구술문화는 문자문화를 지향하게 되어 있고 의식의 지평에서 상대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기능이나 발전 단계상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지 구술문화나 문자문화가 옳고 그름을 말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문자문화는 구술문화의 영속선 상에 있는 제 2의 구술문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건 진중권이 요즘 다른 글이나 각종 행사에서 자신의 마치 이론인 양 인터넷 미디어를 예를 들어 말하고 있는 제 2의 구술문화라는 용어와도 전혀 다른 뜻이다. 즉 월터 J. 옹이 말하는 '제 2의 구술문화'란 활자문화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지 인터넷 언어를 기반으로 요즘에야 새롭게 태어난 언어 문화 형태가 아님이 분명한데 진중권은 그 개념 파악조차 잘못한 듯이 이 용어를 혼동하고 있다.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와 표현의 특징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술문화는 분석적이라기 보다는 집합적이며, 장황하거나 다변적이며, 종속적이라기 보다는 첨가적이며,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며, 객관적 거리 유지보다는 감정이입적 혹은 참여의 속성이 강하며, 논쟁적인 어조가 강하다.

또한 인간의 생활 세계에 밀착되어 있는 속성이 강하며, 항상성이 있으며, 추상적이라기 보다는 상황 의존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특성들은 활자문화와의 구조적 차이를 말하고 있지 활자문화 보다 열등하다는 논증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복잡하거나 정교하다는 것이 옳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듯이 기능과 영역이나 범주의 차이는 말 그대로 차이일 뿐이다.

오히려 쓰기(활자문화)는 일종의 말하기(구술문화)의 모방이라는 저자 월터 J. 옹의의 주장에 걸맞게 구술문화야 말로 21세기 인터넷 문화가 꽃피운 댓글 문화에 더 닿아 있고 또 이를 해석하는데에 더 많이 활용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유명한 곰의 색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데 이는 구술문화 활자문화가 말하는 핵심적인 요소와는 거리가 먼 데도 불구하고 진중권처럼 이를 자꾸 말하면서 구술문화가 활자문화 보다 열등한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이 논리체계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벗어난 일종의 트릭에 불과하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 이론을 읽고 무슨 심사인지 이런 핵심적인 사항은 파악을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 자신의 논리를 위해서 은근슬쩍 비껴 가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이 두 문화 사이에 무슨 옳고 그름에 해당할 만한 판단 요소라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활자문화의 세계에서 구술문화의 세계보다 훨씬 많은 거짓말이 활개치고 있다. 산문 세계의 지존은 소설이며 소설은 그야 말로 '개연성 있는 허구(虛構)'의 세계다. 소설은 구술문화 세계보다 활자문화 세계에서 훨씬 발달되어 있고 이는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짜여진 구조라고 해서 그것이 진리임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손쉬운 예다.

그리고 사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인용을 해 왔으면 원저자를 밝히면서 사용하는 것이 학자를 지향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양식이다.

신화와 신화학(Mythology)

내가 생각하는 과학적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그 원인(cause, input)과 결과(effect, output)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원인과 결과 사이에 놓여 있는 얼개를 이성적인 논리(logos)로 설명하는 작업이 집약되어 그 양과 질이 높아지면 하나의 학문체계로 발전한다.

신화학(mythology)이란 학문도 신화(mythos)를 논리적(logos)으로 해석하겠다는 목적으로 그 체계가 잡힌 이성적 작업의 산물이다. 마치 이집트의 로제타 스톤에 새겨진 상형문자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신화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해석해서 그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구조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의 명저 '신화와 종교"에서 집단 무의식을 강조한 칼 구스타프 융의 경우도 그렇고 또 진중권이 인용한 죠셉 켐벨의 경우도 또한 그렇다.

진중권의 주장대로 신화는 구술문화를 갖고 있는 무지한 인간들이나 믿고 있는 터무니 없고 비과학적인 잡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거짓 논증에 터무니없게 인용당하기 위하여 이들이 평생을 바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조셉 켐벨이 알면 진중권에게 명예훼손이라도 걸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오류다.

진중권은 신화학 개론 강의를 듣고 죠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 대한 강의를 다시 들어 보기 바란다. 필자가 왜 읽어 보라고 하지 않고 남이 강의하는 것을 들어 보라고 주문하느냐 하면 진중권의 지적 능력으로 도저히 혼자서 책을 읽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미 진중권은 신화를 자기 글에 인용는 양식으로 보아서 자신이 신화와 신화학에 완전한 백치상태나 다름없음을 드러냈다. 그가 진정으로 신화에 대해서 적당량의 전문 지식이라도 있었더라면 박정희 신화 논증에 신화를 끌어 들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리라.

왜냐하면 이 논증에는 신화를 끌어들이면 끌어들일 수록 진중권이 주장하려는 바와 정반대의 결과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흔히 미신으로 치부되기 쉬운 민중신화에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민중의 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고 이를 해석해 보면 지극히 과학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는 신화학의 근원적인 목적에 의해서라도 더욱 그러하다.

신화학에 의하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집단적으로 갈구하는 박정희 영웅신화에는 충분히 과학적인 이유가 있으므로 현 집권 세력들은 이러한 민중의 소리를 무지몽매한 소리라 무시하지 말고 겸허한 자세로 귀를 씯고 들어야 한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식한 지식인이 쓴 잡문에 놀아난 메이저 언론

독일에 유학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독일에서는 단순한 학사학위 하나라도 학위를 따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일례로 한국에서는 논문을 쓰면서 장식삼아 예사로 인용하는 참고 문헌까지도 진짜로 읽어보았는지 꼼꼼하게 검정한다고 한다. 또 읽어보아도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를 하고 인용을 했는지도 치밀하게 검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대충대충 공부하던 방식으로 독일 유학갔다가는 학위를 못받는 것은 물론이고 지도교수나 논문 심사위원들로 부터 듣기에 가혹할 정도로 심한 면박만 당하고 쫒겨나기 일쑤라고 한다. 그래서 독일 가서 공부한 사람들은 유독 학위는 못따고 수료증만 달랑 들고 돌아오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신이 없으면 독일에서는 아예 참고문헌을 넣지 말라고 충고한다고 한다. 지식에 대한 이런 엄밀성이 독일 지성계가 세계 지성계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진중권처럼 죠셉 켐벨이 말한 신화가 무슨 의미로 쓰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정반대의 쓰임으로 무모하게 인용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독일에서는 지식인의 자격까지 의심받으면서 비난받을 일이 한국에서는 그 글이 유명 잡지나 메이저 신문 칼럼에 까지 실린다.

단지 글쓴이가 세간에 이름이 좀 있다는 이유로 그 글의 논리적인 엄밀성과는 상관없이 버젓이 메이저 신문에 실린다. 알음 알음으로 글을 청탁하고 또 그런 까닭에 엄밀한 검정도 할 수 없는 학벌과 전근대적인 친분의 세계가 지배하는 한국의 지성계, 이것이 부패한 한국 지성계의 현주소다. 한국 사회에서 논문을 작성할 때 표절도 예사고 심지어 스승이 제자의 논문을 훔치는 경우도 종종 기사에 오른다. 

진중권이 말한 조셉 켐벨의 인용이나 거기에 나온 신화나 구술문화 활자문화 논법은 글쓴이 진중권의 논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논리다. 이는 노란 레몬을 맛보면 나오는 신맛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이 빨간 청양 고추를 먹어보면 상큼한 신맛이 난다고 설명하는 일이나 비슷하다.

그래 놓고 한 술 더 떠서 신라면할 때의 그 신(辛)자가 노란 레몬의 신맛할 때의 신자(字)와 같은 뜻이라고 별 유식한 체를 다 떠는 짓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신라면이 일본 중국 등에서 많이 소비되고 있는데 이는 한류현상의 승리며 이게 다 상큼한 레몬맛을 한국 라면에 고스란이 살려냈기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진중권 특유의 '내용은 없지만 너무나 감각적인 글쓰기'가 횡행하고 있다면 어떨까?

이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그림 '천지창조'로 불교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일만큼이나 황당하다. 물론 이런 지적 사기가 통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레몬 맛과 고추맛의 차이를 모르고 미켈란젤로 그림이 기독교 그림인지 아니면 불화인지 모르고 오직 그 유명세에 주눅들어 있는 그 중에서도 지적인 능력이 좀 떨어지는 독자들뿐이다.

조금만 실력있는 논술교사라면 얼핏 훑어만 보아도 빨간 줄로 좌우로 쫘악 그어서 진중권에게 반려해야 할 엉터리 잡문임에 틀림없는데 어떻게 국내 메이저 신문의 칼럼에 버젓이 게재될 수 있었을까? 이것은 한국 지성계나 언론계의 검열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박정희 신화는 결코 구술문화와 활자문화와의 충돌현상으로 설명될 사항이 아니다. 진중권의 타당성을 가질려면 박정희의 강압 통치에 반대하며 거의 한 평생을 보낸 안병직 서울대 교수나 백기완 같은 민중 운동가들이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일이 설명할 수 없다. 진중권에 의하면 그들이 구술문화를 신봉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한데 이들은 한국의 활자문화 세계에서 꼭대기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며 학계에서 진중권이 쳐다도 보지 못할 정도로 더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갑자기 활자문화를 신봉하다가 구술문화를 신봉하는 사람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쓴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 교수 장하준과 그의 공저자 정승일 박사나 박효종 서울대 교수도 박정희의 선택을 높게 평가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활자 문화의 정점에 있는 학자들에 의한 박정희 긍정 평가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럼 왜 진중권이 말한 죠셉 켐벨의 신화와 구술문화 활자문화 논리와 현실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건 현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진중권이 죠셉 켐벨이나 월터. J 옹의 활자문화 구술문화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중권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을 그 구조를 쉽게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죠셉 켑벨이나 월터. J 옹의 신화와 구술문화 활자문화 논법은 다음과 같다. 신화나 구술문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바람의 작용을 풍백 우사로 설명하여 바람의 중요성을 표현한다. 반면에 활자문화는 바람의 작용을 온도의 차에 따른 기압의 작용으로 이해해서 바람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죠셉 켐벨이나 월터.J 옹이 공통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신화와 구술문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이해가 신화적 구조를 띄고 있다고 해서 무지몽매하고 활자문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구조를 띄고 있어 현명한 사람이라는 주장에 있지 않다. 양쪽 다 '바람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구술문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비록 과학적인 용어를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과학으로 이를 분석하고 알게 될수록 그것이 너무나 정확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기에 새삼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일에다 신화나 구술문화 활자문화를 인용하는 사람은 신화와 월터.J 옹의 논지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 오는 무식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사실 박정희 신화는 구술문화와 활자문화와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를 세종대왕 이순신보다 높은 단계의 리더로 평가받는 비중이 교수 등의 활자문화 계통에서 종사하는 사람에게서 더 높게 나타나는 사실에서도 반증된다.

구술문화 활자문화의 원저자 월터 J. 옹도 활자문화란 구술문화와 별개의 것이 아니며 구술문화의 영속선 상에서 일어나는 '2차 구술문화'라고 정의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생의 업적을 통하여 정반대의 논지를 주장한 사람의 말을 가져와서 자신의 엉터리 글을 치장하려 하는 것은 제대로 무식하지 않으면 절대로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런 글을 특별한 검정도 없이 국내 굴지의 메이저 신문에 덩그러니 싣었다는 자체가 한국 언론계의 수치라 할 만하다.

이것이 한국 지성계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는 현장이다. 진중권이 앨런 소칼의 경우처럼 아예 동아일보를 망신시키기를 작정하고 엉터리 잡문을 써서 버젓이 칼럼에 실리는 광경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그 글을 썼다면 나름대로 이해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을 쓴 이후에도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부끄러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이와 연관된 엉터리 잡문들을 연속해서 생산해 낸 것을 생각할 때 이런 과감한 실험정신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논리는 진리를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

진중권이 말한 논법이 얼마나 엉터리 잡설인지 모두가 알기 쉽게 우리의 단군신화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나온다. 여기서 진중권의 말한 그대로 '바람은 왜 부는가?'라는 화두를 던져 보자.

진중권의 주장을 밝히면 무식하여 구술문화 논법에 젖은 민중들은 바람의 신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고 활자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기압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칼럼에서 진중권이 인용한 신화학의 대가 조셉 켐벨은 어떤 말을 할까? 아마 그는 다음과 같은 매우 과학적인 해석을 내릴 것이다.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분명코 농경사회일 것이다. 농경사회는 바람(風)과 비(雨)의 작용이 인간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다른 신도 아닌 바람과 비를 주재하는 신 風師와 雨師가 나올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이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엄밀하고 과학적인 구조다. 단지 그 당시 사람들이 바람과 비의 작용에 대해서 설명할 만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신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21세기 현재처럼 바람과 비를 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신이나 어리석은 일로 치부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 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라고 말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바람과 비의 중요성은 바람과 비의 작용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말고 하는 성질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쉽게 설명하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사실(fact)은 갈릴레이가 과학적으로 설명했기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갈릴레이의 과학적인 설명이 있든 말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은 진실이고 이는 갈릴레이 이전에 천동설이 팽배했다는 사실하고도 무관하다.

갈릴레이가 성공한 것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일일 뿐이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바꾼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논리가 덜 갖추어 졌기에 신화로 집단 무의식을 표현해 냈을 뿐이지 세월이 흘러 논리가 갖춰진 시대가 되었다 한들 집단 무의식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원시 시대의 신화라 하더라도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 던져주는 시사점은 너무나 크다. 이는 수 천년이 흐른 미래에도 여전히 동일한 힘을 가질 것이다 라는 것이 신화학에서 주장하는 요체다.

즉 어떤 사실의 중요성은 논리적으로 또는 수학적으로 설명 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중요성이라는 테마는 구술문화를 신봉하거나 활자문화를 신봉하거나 전혀 상관없이 동일한 비중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중들이 박정희를 찾는 현상은 고조선 시대에 바람과 비의 작용이 농경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에 풍백 우사를 찾은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박정희가 해결했던 민생고 해결이 중요한 위치를 점할 만큼 민중의 생활이 피폐해 졌다는 사실로 설명되어야 올바른 해석이다.

실제로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한 사람이 2005년 한 해에만 1만 3000 여명에 이른다. 꼭 감옥에 투옥되어 고문당해 죽어야만 억울하게 죽는 일이라고 주장할텐가? 바람의 작용을 기압의 차로 설명하고 말고가 바람의 작용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민중들이 은인을 찾든지 원인을 찾든지 상관없이 민생고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메세지를 겸허하게 읽어 내야만 조셉 켐벨이 신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 닿게 된다는 것은 웬만한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사항이지 않은가?

비바람을 막아 달라는 아우성을 하는 민중들에게 '비바람은 기압차로 생기는 데 어쩌고 저쩌고 하는 설교를 하는 짓은 배고픔을 해결해 달라는 사람에게 '배고픔이란 위와 내장에 음식이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아서 생기는 공복감에서 오는 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이런 사실을 잘 알면 배고픔이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어처구니다. 

어떤 영웅신화에도 명확한 이유가 있다

만일 고조선 건국 시절에 한반도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 민족이었다면 단군신화에는 당연히 풍백우사보다는 그리이스의 포세이돈 같은 바다의 신(海神)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였을 것이다. 이는 신화에 대한 기초 상식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한데 진중권에 의하면 그게 바다신(海神)이든 바람신(風師)이나 비신(雨師)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진중권의 가설에 따르면 그저 구술문화에 깃든 사람이라면 바다신 바람신 비신이라 할 것이고 활자문화에 깃든 사람이라면 그건 해류의 작용이고 기압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는 기가 막힌 동문서답이 나올 뿐이다.

농경문화에서는 비바람이 민중의 삶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중요하고 해양문화에서는 바다가 민중의 애환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코드를 읽어내야 하는데 무슨 해류의 작용이고 기압의 차이 운운하며 다른 분석은 미신이라고 주장하다니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민중들이 영웅신화를 갈구하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배고플 때 박정희 영웅신화를 찾게 되듯이 나라를 잃었을 때는 양만춘이나 을지문덕, 강감찬 같은 영웅신화를 찾는 것은 그들이 무지몽매하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일제 강점 시대에 신채호 박은식 같은 역사학자들이 황당무계하고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영웅신화를 살려내어 역사서에 싣은 이유를 생각해 보라. 이때의 역사서를 보면 웬만한 장군이면 초등학교 시절에 맨손으로 호랑이들 때려잡는다.

신채호 박은식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지성이 모자라고 활자문화를 모르면서 구술문화에 젖어 사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랬다는 말인가? 절대 아니다. 이분들은 신화가 뭔지 그게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와 힘(The Power of Myth)을 갖고 있는지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암울하면 민중들은 희망이라도 간직하고 살겠다는 바램이 절절이 반영된 것이 바로 영웅 신화다.

소설가 김형경은 조셉 켐벨이 말하고자 하는 신화의 본질을 제대로 봤다. 이 책을 본 김형경은 말한다.

"신화의 기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주변에 널리 유포되는 영화나 소설을 통해 그것들을 향유한다. 필자가 서두에 굳이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의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과학적인 추리기법을 사용하는 소설일지라도 그 역시 집단 무위식의 코드를 반영하고 있다는 예증으로 들었을 뿐이다.『신화의 힘』에서 조셉 캠벨이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개인의 삶 역시 영웅 신화의 구조를 띠며, 누구나 제 삶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영웅신화에 대한 개념이 신화라고는 전혀 모른다고 밖에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진중권에 의해서 영웅신화의 희구가 구술문화에 깃든 사람들의 비주체적인 갈망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어이가 없는 반전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진중권이 한 말을 원작자 조셉 캠벨이 읽었다면 '정말 귀여운 놈이로고' 하면서 고분고분 넘어갈 것 같지 않다.

박정희 신화와 이명박 신화

그렇다고 민중들은 아무에게나 영웅신화를 부여하지 않는다. 프레이져의 황금가지에서는 황금가지를 꺽어 오는 임무(mission)에 성공하고 동시에 전임 사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이 자격이 부여된다.

과거 노태우가 호헌을 외쳤던 전임 사제였던 전두환을 죽이는 쑈였던 6.29 선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대권 고지에 다가선 것이나 이회창이 김영삼에게 반기를 든 행위로 대쪽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황금가지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신화적 코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임 사제인 민주당을 죽이는 행위로 정치력을 획득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참여 정부 인사들에게는 달갑지 않고 불길한 징조겠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민중들은 이 희망의 끈을 과거의 박정희 신화와 곧 다가 올 이명박 신화에 희망을 걸고 있는 듯하다. 이 정부 들어서 공약으로 내세워서 제대로 달성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온갖 수선을 다 떨면서 아파트 값을 잡는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오히려 아파트값 폭등을 부채질하는 집권층의 무능력을 몸소 경험한 민중들이 무엇을 보고 다음 대권을 향방에 둔 황금가지라고 생각할까? 사실 이명박의 성공신화와 청계천 복원의 성공은 바로 집권 세력의 무능력에 질려 있는 민중들에게는 쉽사리 거부할 수 없는 황금가지다. 이 신화가 워낙 강렬하기에 아무리 황제 테니스 사건으로 흔들어도 이명박의 아성은 철옹성이다.

사실 이명박은 이 황금가지는 이미 꺾어서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상태다. 그에게서 전임 사제를 죽이는 행위는 박정희의 독재 이미지만 살짝 걷어 내면 된다. 아니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명박이 독재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억지로 독재의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획책하는 세력의 음모만 이겨내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손쉽다. 이명박을 공격하려면 황제 테니스 이런 이야기로는 절대 안된다. 차라리 논객 공희준의 지적대로 청계천을 발로 차서 흠집을 내는 것이 한결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2006년 현재 한국 민중들이 원하는 황금가지는 청렴함이나 도덕적인 우위가 아니라 자신들을 빈곤과 양극화의 희생이 된 절망의 늪에서 구해 줄 희망을 가진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건 민중들이 우둔해서가 아니라 비록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할 지라도 피부로 또는 느낌으로 알 말큼 현명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스타워즈라는 최첨단 영화를 본 신화학자 죠셉 켐벨이 "테크놀리지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한 이유를 다시 한번 새겨 볼 이유가 있다. 이는 진중권이 활자문화 구술문화라는 억지논리로 이용해 먹으려 했던 논리와 기교를 뛰어 넘어 진실을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안목은 '직관'이라고 설파한 것이나 다름없다.

놀랍게도 민중들은 논리와 합리성은 떨어질 지는 몰라도 과연 누가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 줄 가능성이 큰 사람인가 하는 점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런 직관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진중권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배움의 기회가 비슷한 정도로만 주어졌다면 그들 중에서 진중권 류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인들이 무수하게 출현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많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구술문화니 활자문화니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무식이나 뻔뻔스러움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것은 지식인으로서 민중의 절박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백안시하겠다는 의도며 너무나도 위선적인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는 좌파 지식인들의 분발을 요구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 이상으로 무식하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돈다. 내가 보아도 솔직히 좀 그렇다는 판단이 든다. 솔직히 진중권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마지않았던 노엄 촘스키조차 지적 사기에 연루되어 그 위선이 벗겨지고 있는 판국에 진중권이 장하준 정승일과 대담 프로에 나가서 공공연하게 온갖 창피를 다 당한 일은 특별한 일도 아니다. 좌파의 위기는 솔직히 진중권 류에 대한 대중의 평가 때문만이 아니다.

좌파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는 이렇게 무식한 상태로 알맹이도 없이 지극히 감각적인 말만 일삼는 일은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그가 좌파든 우파든 간에 논쟁과 주장 그리고 학문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엄밀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런 엄밀성조차도 갖출 수 없는 수준으로 좌파의 가치를 설파하고자 나선다면 그들은 분명코 좌파에 대한 경멸과 조롱을 불러오는 데 확실하게 기여할 뿐이다./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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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0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 글 님이 쓰신거에요?
아니면 출처를 좀...

라주미힌 2006-04-04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4941&section=section3&wdate=1144061940

무위라는 사람이 쓴 거에요.. 꽤 유명하죠. ㅎㅎㅎ


릴케 현상 2006-04-04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위는 진중권 못잡아먹어서 난린가봐요^^

라주미힌 2006-04-04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이 틀린게 많긴 한가봐요. (전 무식해서 잘.. ㅎㅎㅎ)

정상에 오르는 법,
정상에 있는 놈을 끌어내린다... 그게 아닐까요.
여튼 재미있는 글이에요. 세상에 글 잘쓰고, 똑똑한 사람들 너무 많아요.
근데 세상은 왜이리 멍청한지... 아.. 무식한 놈들이 힘은 세지 ㅡ..ㅡ;

mannerist 2006-04-04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공용화가 되어야만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영어를 배울 기회를 상대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는 무산자 계급이 조금이라도 더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윤리적 정당성하고 실현가능성과 작동논리도 구분 못하는 양반이구만요 뭐. ㅎㅎ

라주미힌 2006-04-04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다른 고수 출현 ^^

비로그인 2006-04-04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너리스트님이 지적하신 부분 굉장히 거슬렸어요...
그 부분, 동감입니다

로자 2006-04-05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댓글 달다가 포기했는데 오늘은 그냥 달고 가겠습니다.
진중권이 캠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신 분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되네요. 결론이 도대체 뭐랍니까?
박정희를 제대로 봐주자 그거 아닙니까?
어쨌거나 지식인은 늘 어렵고 힘든 모양입니다. 혹세들을 무민시키는 지적허영 가득찬 말들의 잔치에 조금은 지칩니다.

라주미힌 2006-04-0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도 등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