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의 눈] 작품마다 담론의 영역에서 실종된 하층민의 삶 조명

 

"공선옥의 소설은 담론의 영역에서 실종된 사회하층민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한번도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상황을 발화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세상을 향해 내던질 말의 내용은 있지만, 그 말하는 방식을 찾을 수 없는 존재들이 공선옥의 소설에는 흔히 등장한다. 공선옥의 소설쓰기가 오늘날의 현실에서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가 제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한 이 민중들 혹은 하위주체들의 '아가리'를 대신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평론집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새움, 2005)에 실린 공선옥 소설에 대한 평이다. 공선옥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그들의 고통스런 삶, 그리고 그 안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미마음(모성)'을 이야기한다. 아니, 이명원의 말처럼 그들의 '아가리'를 대신 열어주고 있다.

등단할 때부터 그는 줄곧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의 목을 틔워주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공선옥의 펜을 통해 그들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질릴 만도 하건만 공선옥은 지금껏 그 역할을 자임해 왔다.

2006년 1월 공선옥을 비롯한 소설가·시인 4명과 10명의 사진작가들이 내놓은 인권 사진집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현실문화연구)도 그런 얘기다. 이 책에서 공선옥은 <엄마, 저 오네>와 <촌아, 울지마> 등의 사진에 글을 보탰다.

공선옥은 1991년 {창작과 비평}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이전에 그의 삶은 신산(辛酸)했다. 공선옥은 1963년 전남 곡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 시절, 공선옥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글에 목말라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노트에 쓰기도 했고, 벽지로 발라놓은 신문이며 누에를 키우기 위해 가져온 헌 신문지를 샅샅이 읽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너무 슬프고 힘든 일이 많으니까 어떤 통풍구가 심리적으로 필요했거든요. 살고 싶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글이었던 것 같아요."

1983년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게다. 그러나 아버지가 키우던 소들이 병들어 죽고 가계가 몰락하자 아버지는 빚을 갚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공선옥은 1학년 1학기에 대학을 중퇴하고,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버스 안내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 안내양으로 구로공단의 공장노동자로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막장과도 같은 현실에서" 살았다. 그 사이 결혼도 했지만 사는 것은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글 쓰는 것은 하나의 위안이었고, 우연찮게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무렵 쓴 글로 등단하게 됐다. 공선옥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나 자신이 소설가로 살아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80년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나에게 광주의 비극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가계의 몰락 앞에서 다니던 대학을 1학년 1학기에 중퇴하고, 버스 안내양으로 시작, 구로공단의 공장노동자로 생계를 영위해야 했던 막장과도 같은 현실에서, 소설쓰기란 내게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이었던 남편의 고통을 뼈아프게 지켜보면서, 광주 이후에도 세상이 아무런 문제없이 너무나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어느 날, 나는 그것이 소설인지도 모르고, 지나온 내 삶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말해주었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소설가로 등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1년의 [씨앗불] 이후 공선옥은 글로 먹고살겠다고 작정하고, 끊임없이 작품을 내놓았다. 그렇게 내놓은 작품이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1993)과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1994), 장편 {시절들}(1996), 소설집 {내 생의 알리바이}(1998),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2000),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2001), 소설집 {멋진 한 세상}(2002), 장편 {붉은 포대기}(2003), 산문집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2003), 소설집 {유랑가족}(2005), 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2005) 등이다.

이런 작품을 내놓는 사이 공선옥은 1995년에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고, 2004년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2005년에는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다. 2001년에는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후보로 추천됐으나 공선옥은 이 상을 거부했다. 그는 후보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글을 쓰게 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를 "상금 5,000만원을 미끼로 작가들을 줄 세우기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자한테 그랬다. 나 솔직히 돈은 탐난다고. (내가 거부한다고 하면) 비웃을지 몰라도 돈 때문에 떨어지는 감 받아먹으려고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입 떡 벌리고 있긴 싫다. 작가가 작품으로 말했으면 됐지 구구절절이 뭘 더 말하라는 건가."

작가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는 얘기다. 공선옥이 생각하는 작가는 이런 사람이다.

"작가는 '안다'는 사람들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는 질곡에 빠져 있다. 질곡이란 운신이 힘들다는 거다. 그렇게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의 숨통을 조금이라도 터주는 게 작가 역할 아닐까."

* 월간 인물과 사상 2006년 3월호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6-03-2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 그 잡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훌륭한 작가입니다만, 독자들에게 좀 아쉽습니다. 공선옥이 조선일보 거부했을 때 안티조선 5천명이라도 한권씩 책을 사줬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정도의 보상도 없으면 누가 감히 조선일보를 거부하겠습니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성석제가 동인문학상 타니까 뭐라고 하고, 그런 무책임한 비난이 참 싫더라구요...

라주미힌 2006-03-28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용... 책 잘들 안 읽잖아욤.. ㅎㅎㅎ
게다가
국민의 반은 안티조선이지만, 또 반은 좋아하는게 현실이니 ㅎㅎㅎ

포월 2006-03-29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나 더 붙이면 공선옥은 '아가리'를 열어주지만 그 아가리를 표나게 연구하는 무슨 식민론자들은 공선옥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거죠. 아가리에는 관심이 있지만 아가리 속에 뭐가 있는지는 별 관심이 없는거겠죠.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 경제는 스포츠가 아니다

우석훈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멋진 한 마디는 21세기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정신분열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하긴 현실의 사회에서 일견 모순되는 개념들이 ‘형용모순’을 겪지 않고 결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이런 면에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진중권의 멋진 패러디를 달고 있는 어느 책이 판매에서 실패한 것은 그보다 더 멋진 패러디와 결합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지율이 20%이든 혹은 40%이든 노무현 대통령은 21세기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상품인 것은 사실일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좋은 점 또 한 가지는 심각하지 않아서 좋다. 그에게는 투사의 비장함이나 학자의 심각함 같은 건 없고, 자유로운 개념상의 결합을 꺼리지 않고 한다는 점에서 캐나다의 천재적 배우 마크 마이어스를 떠올리게 된다.
 
쉐구어라는 말로 유명해진 shag이라는 오스틴 파워표 속어는 옥스퍼드 사전에까지 올라갔다고 하지만 오스틴 파워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마크 마이어스는 “슈렉 2”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주인공을 맡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누구도 마크 마이어스에게 속된 2류 코미디 배우라고는 하지 못한다. 전세계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 중 하나가 바로 마크 마이어스의 목소리이다. 슈렉, 그 달콤하면서도 천박스러운 즐거움은 이제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최고가 되었다. 아무리 대통령 중심제의 사회라고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통령 같아 보이고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드는 데에는 사실 우파나 좌파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성공한 사람처럼 보인다.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야 잘못하면 양쪽에서 다 욕을 먹겠지만, 제대로만 한다면 너도 우리편, 당신도 우리편 그리고 댁 같은 분도 우리편, 그야말로 최고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형용모순이라고 한 마디 할 수야 있겠지만 힘의 실체가 자신이 그렇다고 하는데야 이론을 바꾸어서라도 이 상황을 설명해야지 원래 책에는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고 얘기해봐야 별 효과적인 비판은 안될 것 같다.
 
사례를 들어보면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과 비슷한 사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스위스의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일종의 연합정권이 유사한데, 이 정권에서는 UN 가입 이후로 EU에도 가입하고 그렇게 해서 스위스를 평화주의 고립정권에서 바꾸려고 하고, 이 중에 조금 더 우파에 가까운 사람들이 진행하는 것이 다보스 포럼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위스의 일종의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극우파 정권 소위 “자유민주연합”이라고 하는 CDG라는 극우파 정당인데, 이렇게 전환된 사건이 바로 이라크 파병 사건이다. 좌파들은 세계화를 주장하면서 이라크 파병을 추진하였는데, 극우파에서 전통적인 스위스의 평화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파병은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라크 파병건이 국민투표에까지 올라갔고, 극우파가 국민투표에서 승리하였다. 지금은 28% 정도까지 극우파 지지율이 높아진 상태이다.
 
이런 스위스의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좌파와 노무현 정권의 성격이 비슷한 면이 있는데, 물론 농업과 복지정책 같이 속으로 들어가 보면 스위스 좌파는 친미파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소위 “좌파 신자유주의”는 친미를 넘어 숭미에 가까워져 있다는 사소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형용모순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했던 정권이 노무현 정권 밖에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세계화를 위해서 참전을 얘기한 스위스의 좌파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스위스 극우파의 논쟁축이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기는 한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대통령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루를 살아가는 스위스의 정치 및 사회 논쟁이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운 지역적 논의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어쨌든 이런 논의들이 “중앙”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중앙이고 청와대도 중앙이고, 여기에 대해서 이런 저론 토를 다는 언론들도 중앙언론이고, 야당도 중앙이고 하다못해 이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시민단체나 노무현과는 자신은 다른 좌파라고 생각하는 단체들도 중앙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서민’이라는 상징화된 우리나라 정치담론에서의 “절대선”도 사실은 중앙화된 신화적 개념에 가깝고, “민중”이 과도하게 추상화된 상징체인 것처럼 “국민” 역시 중앙적 개념이다.
 
결국은 “연극성” 혹은 “가상성”인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중앙권력들 사이의 “말놀음”에 가깝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말놀음의 한 가운데에 현재 노무현 대통령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 좌파라고 얘기하든지 혹은 신자유주의라고 얘기하든지 나머지 존재들은 그러한 규정을 중심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 또 그렇게 해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기실현 예언”처럼 자발적인 구성원리에 의해서 뭔가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혹은 본인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파시즘적이든 그런 말 자체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엄청나게 생산적일 것 같지는 않다. 그야말로 TV 토론을 지켜보면서 세상이 좋아질까 나빠질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바보같은 일”을 어쨌든 앞으로 한 달 동안 많은 국민들이 반복하고 있을 것이고, 실제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답답한 일들이 또 몇 년 간 계속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중앙의 연극성”만이 아니라 묘하게도 “스포츠성”이 말하는 화자인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 말을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역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 경제의 출현이라는 것을 근대경제학자들은 과거의 전쟁을 ‘시장의 경쟁’으로 대체한 것이라서 더 많은 평화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견하였는데, 한국적 근대성이라는 것은 경제를 스포츠처럼 보는 데 익숙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솔직히 든다.
 
현실적인 규모로는 경제 10위 정도에 있는 한국은 이제 특정 몇 개 분야에서 4강에 한국 스포츠가 들어가는 것을 아주 놀랍게 보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월드컵의 4강을 보는 것처럼 경제를 보는 것 같고, 대단한 민족이라서 그런지 경제에서는 4강이 아니라 절대 강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스포츠의 신화를 어느 사이에 공유하는 것 같다. 메모리형 반도체에서 맛보았던 스포츠화 된 경제의 신화가 어느 새 경제에 관한 상식이 되어버린 것 같고, 1등을 하면 어떤 조건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스포츠의 상식’이 어느 새 전국민의 상식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세계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담론들 중에서 유독 ‘경쟁해서 승리한다’는 전투적 스포츠 정신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강조되는 것 같은데, 이런 것이 시대정신이 사회를 한 마디로 “천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의미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4강주의’ 혹은 ‘절대 강자주의’ 같은 것으로 치환하고 그의 말을 읽으면 대체적으로 뜻이 통한다. 도대체 왜 할리우드를 꺽을 수 없느냐고 하시는 영화에 대한 대통령의 이해나 ‘손자가 찾아올 만한 곳’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농업이 된다는 말들은 스포츠와 같은 경쟁의 인식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모든 생산 부문이 세계 1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하는가? 그리고 이게 수사학적인 강조법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담대함을 보이는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야 따도 그만 안 따도 그만이고, 월드컵 예선을 통과해도 안 해도 그만이지만, 경제를 그렇게 세계 ‘경제 4강전’처럼 이해한단 말인가? 대통령의 비장한 ‘출사표’는 마치 세계대회를 앞두고 감독들이 하는 말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그의 화려한 수사학 속에 묻혀 있는 “양극화 해소”는 시청앞 광장에서 열심히 응원을 성원자와 지지자에게 돌아가는 버스편만은 국가에서 마련해주겠다고 하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우리나라 경제에서 세계 1위가 안 되는 부문을 위해서 “은퇴 프로그램”을 마련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노무현의 소위 좌파 담론의 핵심인 것 같은데, 예선 통과하는 정도로 참가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제 부문은 이제 그만 세계 대회에 나가야 하는 것일까?
 
정말로 그렇다면 정치인들부터 퇴출시키고 비정상적인 중앙권력부터 구조조정하고, 지금까지 “산업건국”의 일념으로 고강도 노동을 감동했던 그야말로 이 땅의 민중들은 아직도 나름대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들은 중앙권력으로서 온갖 단꿈과 특혜는 다 누리면서 민중들만 ‘영어도 못하고’ 게다가 ‘혁신정신도 없다’고 몰아붙이는 게 좀 이상해 보인다.
 
사실 경쟁력으로 따지면 아직도 면적당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 농민들이 집약도 부문에서는 세계 최고이다. 오염된 실내대기를 전환할 틈도 없이 비정상적인 노동조건을 감당하는 전기로를 비롯해 각종 제조업에서 고강도의 노동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이 시간당 물질 생산성에서는 세계 최고에 해당한다. 생산성으로 따지자면 우리나라 청와대의 생산성이 다른 나라의 최고 지휘부보다 높고, 우리나라 국회의 생산성이 다른 나라 국회보다 높고, 또 우리나라 중앙언론의 깊이가 다른 나라 언론보다 높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 물러나라고 하지는 않고, 모든 국회의원들 집에 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느 사회에나 의사결정 시스템이 필요하고 무능하다고 할지라도 이 시스템이 감당하고 가야하는 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위 좌파 정부의 대통령께서는 당신들이 “야구 4강”보다 못하니까 해직당하는 것이고, “월드컵 국가대표” 보다 못하니까 계약직에 의한 비정규직 인생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또 당신들한테는 응원과 지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것을 배우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요소별 생산성 분석을 시스템 내에서 해본다면 실제로 건국 이후 ‘경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세계 최대의 착취율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가장 비생산적인 중앙권력이 등을 돌린 셈이다.
 
이런 대통령의 담론은 이미 스포츠의 가상성 세계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고, TV가 옳고 그름을 전달하는 세계에 길들어져 있고, 자기가 해고당하는 이유는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투수들에게나 적용되는 순간 통계치의 논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나 적법한 말이기는 하지만...
 
아이들에게 보도 듣고 배우라고 할 얘기는 아니다. 선생님이 만약 이 학생은 공부를 못 하기 때문에 뒷줄에 앉는 거야 혹은 그래서 전학을 보내는 거야, 아니면 “여러 분이 전교 1등을 해야 제 반의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어떻겠는가?
 
이 나라에 태어난 이상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강력한 민족주의도 모자라서 이제는 스포츠 논리까지 끌여들이면서 경제를 국제 스포츠 레이스처럼 희화화하는 상황이 좀 이상해 보인다.
 
전세계에서 최고의 경쟁력만을 가진 부문들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는 것이라면 도대체 이 국민들은 아직 최고 국가로 이민가는 방법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살고 있는 국민이라는 말인가? 왜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자꾸 생긴다. 그렇다면 수영은 아시아권에서도 입상을 거의 못하는데 뭐 하러 하고 국제 기록과는 멀기만 한 육상은 뭐 하러 필요한가? 혹은 지역발전을 위해서 죽어도 동계 올림픽을 유치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세계 1위가 되기 위해서인가?
 
경제에는 경쟁의 속성이 분명히 있고, 모든 경제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지만 이것들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시장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만 하나의 선 위에 줄 세우는 경쟁력 담론만으로는 시장도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현대 경제의 복잡성이다.
 
대통령의 “좌파적 신자유주의 정권”은 경제학 교과서를 너무 읽었다기 보다는 TV의 스포츠 중계를 너무 많이 봐서 생긴 현상 같아 보인다. 중앙에 해당하는 대도시에서 TV를 너무 많이 보다 보면 세상을 연극처럼 이해하는 현상이 생기는데, 여기에 우리나라한테는 스포츠성까지도 따라 붙은 것 같다.
 
생각해보시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라고 영국의 전 부문을 세계 최고로 만들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작 시락 대통령이라고 프랑스를 절대 강국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아니면 하다못해 부시라고 해서 미국이 모든 것에 강자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런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득볼 것 같아 보이는 한미 FTA에 그나마도 모자라서 이것저것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비관세부문’까지 바꾸자고 하는 것은 미국도 모든 것에 최강자만 모인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FTA만 하면 대부분의 부문이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다는 이 전제는 아무래도 스포츠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고 밖에는 잘 해석이 안 된다.
 
언제나 최강의 선수를 돈으로 모을 수 없던 어려움에 시달리는 김인식 감독이 리더쉽이라고 하지만 스포츠에서도 이런 황당한 담론은 없다.
 
“손해 보는 협상은 안 한다”고 하지만 손해 정도가 아니라 기둥뿌리가 흔들릴 것 같아 보이는데, 스포츠는 지는 건 안 보고 이기는 게임만 보면서 기분이라도 상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있지만 국민경제에는 그런 선택권이 없다. GDP는 국제적 스포츠가 아니라 작은 지표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는 이제 경제도 스포츠처럼 TV를 통해 즐기려고 하지만 시스템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랑스에서는 26세 미만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2년 안에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최초고용계약법'(CPE) 때문에 예비노동자인 대학생들, 심지어 고등학생들까지 무려 150만 명이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26세 미만은 물론이고 전 연령에 걸쳐 2년 고용계약을 할 수 있고 2년 안에는 아무 때나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법안을 만들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
  
  22일 저녁 동국대 본관 중강당,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은 '강정구 교수 천막강의'의 세번 째 강사로 나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학생,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이날 강연에는 300여 명의 동국대 학생들이 참석해 홍 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법안'에 왜 관심이 없나"
  

 
강정구 교수 천막강의 세 번째 강사로 나선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대학생이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고 있다. ⓒ프레시안  

  홍 편집인은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한국의 '침묵'에 대해 '비판적 사회의식'의 부족을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나만 고시 공부하고, 학점 공부하고, 토익 공부해서 상층부에 진입하겠다는 계층 상승을 모색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키우고 사회 전체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주문했다.
  
  홍 편집인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는 '몸'과 '의식' 두 가지로 이뤄지는데, 우리는 '몸'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심이 높으면서도, 반대로 '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과연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을 권유했다. 국가적 이념만을 강조하는 교육체계와 자본이 장악한 대중매체에 의해 의식화된 일반 대중들이 어느샌가 '자발적 복종'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교육을 통해 노골적으로 '복종'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분단 이후 '반공', '안보', '질서'라는 이름으로, 최근에는 '국익', '국가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은연 중에 국가권력에 복종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또한 '자본에 의해 장악된' 대중매체도 TV를 켜면 하루에도 수십 번 씩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물신주의를 조장하며 강력하게 일반인들의 의식세계를 파고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형성된 의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홍 편집인은 "TV토론을 나가봤는데, 토론자들은 나와서 시종일관 자시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애초부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자세가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한번 성립된 의식이나 세계관은 좀처럼 바꿀 수 없다"며 "인간은 합리화에 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의 고집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홍 편집인은 특히 '정보화 사회' 덕분에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또 다른 무지 상태에 놓여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택시를 타고 가다 택시기사에게 '<한겨레신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20%는 호의적이지만, 80%는 '여당지다', '운동권신문이다', '편파적이다', '빨갱이신문이다', 심지어 '전라도 신문이다'는 반응까지 보이며 부정적 인식을 나타낸다"며 "그러나 정작 <한겨레신문>을 자세히 보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교조를 욕하면서 사실 전교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고, 민주노동당에 대해 부정적이면서도 민주노동당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노력해본 사람도 없다"며 "대개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조중동'과 같은 주류 매체에 의해 전해지는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 쉽게 판단하며 그냥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모두 '비판적 사회의식' 혹은 '성찰적 자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며 살고 있다"
  
 
  '데칸쇼'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말한다. 홍세화 선생은 고전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와 달리 비정규직에 침묵하는 현 한국사회는 '존재를 배반하는' 사회다. ⓒ프레시안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결국 '존재의 배반'을 낳는다. 홍 편집인은 "20:80의 사회(상위 20%가 부의 80%를 소유하고 있는 사회)라고 하는데, 하위 80%를 위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하자고 하면 정작 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상교육·무상의료에 찬성하지 않는다"며 "이는 지배세력이 다수 서민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자신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우리 사회는 '존재를 배반한' 사람들로 가득찬 사회이거나, 최소한 구성원들이 '자신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속에 사는 것이다.
  
  홍 편집인은 이를 바탕으로 대학생들에게 "끊임없이 긴장하고 살 것"을 주문했다. 그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인생을 통해 딱 두 번 긴장을 하는데, '대학입시'와 '취직시험'"이라며 "그러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아 실현을 위해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에 한 여학생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팽배한 상황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중요한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홍 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고, 나름대로 그 속에서 자신의 자아실현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양보'는 가능할지언정 '포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세상에 '양보'는 할지언정, '포기'는 하지 말라"
  
 
강정구 교수 천막강의 세 번째 강사로 나선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대학생이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고 있다. ⓒ프레시안  

  대학 진학, 사회 진출의 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지 못했다고 해서 '그냥 나는 돈이나 벌래'라는 식으로 '포기'하지 말고, 다른 길을 가는 순간에도 다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도모해야 한다는 말이다.
  
  홍 편집인은 이날 대학생들에게 ▲고전 읽기 ▲견문 쌓기 ▲내면적 성찰 ▲인간성 회복을 강조했다. 그는 "리영희 선생의 '대화'라는 책을 읽었는데, 리 선생이 일제시대 중학생이던 시절 '데칸쇼'를 즐겨 읽었다고 쓴 구절을 봤는데, 여기서 말하는 '데칸쇼'는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말한다"며 "대학 시절에는 '5년 안에 10억 만들기' 같은 책보다는 고전을 통해 풍부한 지식과 사색의 기회를 가질 것"을 권유했다.
  
  그는 또한 "요즘 배낭여행들을 많이 하는데, 뒤통수 너머 사진찍기에만 골몰하지 말고 북유럽이나 그런 곳에 가게 되면 대학교수와 청소부가 월급이 똑같은데 왜 그들은 그렇게 하는지 관심을 갖고 직접 알아보는 등 견문을 넓힐 것"을 주문했다.
  
  홍 편집인은 "마르크스를 비난할 때 제발 모르고 비난하지는 말라. '자본론'을 읽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최소한 '경제학초고'나 '공산당 선언' 정도는 읽고 비판해도 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2시간여에 걸친 강연을 끝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신문의 붕괴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구독자의 감소세가 심각하다. 정보 생산이 빠진 철저한 유통형 무가지 출현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지만,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신문으로 사보던 기사가 포털의 광고 수익을 위한 미끼로 헐값에 넘겨지고 있다는데 있다. "신문에 광고를 싣지 않아도 돼"라는 공감이 광고주에 퍼진다. 인터넷에서 보면 뭐든지 공짜라는 가공할 정서를 강화시킨 자살 행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저널리즘의 중심은 포털로 옮아갔다. 가상 세계가 삼켜버린 것이다. 어렵고 귀찮고 성가신 취재만을 남겨놓은 채 편집과 배포라는 알짜배기를 삼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는 중립을 표방한 채 광고를 챙긴다. 재주는 곰만 넘는다. 가상 세계로의 대응 전략에 실패한 현실 세계의 참상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케이스다.

계속 이대로 종이 신문은 쇠하고 포털은 흥하는 구도가 계속될까? 만약 지금 피어 오르기 시작한 불씨가 타오르지 못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블로그라는 혁명의 불씨다. 기존 언론과 포털 수집형 뉴스의 상투적으로 정형화 되어 가는 색깔에 무력감을 느낀 개인들이 아예 스스로 신문사와 뉴스국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블로그에 링크된 기사 이외에는 보지 않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신문도 보지 않고, 포털의 뉴스도 읽지 않는다. 대신 내가 구독하는 백여개의 국내외 블로그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편식 현상으로까지 보일 이러한 뉴스 소비 형태는 어쩌면 '내 스스로 내 삶을 둘러싼 뉴스의 편집자가 되겠다'는 궁극적인 개인화 선언이다. 신문이나 포털이 차려준 균형은 잡혔지만 무미건조한 영양식 대신, 내 스스로 나의 정보 샐러드를 DIY하겠다는 것이다.

신문이 관심 밖으로 밀려 나가듯 포털 역시 관심에서 밀려날 수 있다. 적어도 일부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보인다. 왜 모두가 같은 조간 뉴스를 읽어야 하는가? 왜 모두가 똑같이 낚시에 걸려야 하는가? 블로그 혁명의 요체는 바로 이러한 획일화 대신 더욱 다양하고 개성 있는 관심을 되찾아 가는 일이다.

개인화, 단편화되어 가는 대중의 관심을 신문이나 포털과 같은 보편적이고 무미 건조한 대량 배급 체계가 소화하기는 쉽지 않다. 기득권의 상식과 교화에 질려 버린 것이다. 블로그는 주류의 기사를 꼬집고 야유한다. 그 동안 조용히 있었던 현장의 전문가들은 이제 현실과 유리된 혹은 전문성이 부족한 기사를 더 이상 간과하지 않는다.

5년 전에는 신문에 실리지 않으면, 1년 전에는 포털이 집어 주지 않으면 화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블로그가 휘몰아쳐 준다면 바로 내일 논란의 핵이 될 수도 있다. 관심이 옮아 가는 일. 신문과 포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대량 배포의 독점력이 거세된 신문과 포털. 책상물림 들에게 이제 '삶의 현장' 블로거는 두려운 경쟁자가 된다. "이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게 살고 글도 잘 쓰는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니" 블로그는 이러한 발견의 연속이고, 이 재미는 더욱 다양하고 활력 있는 '저널리즘'을 잉태할 불씨가 된다.

이제 저널리즘은 정말 가치가 있는 식견 그 자체에 관심과 주목이 모이는 시대로 접어 든다. 그리고 그 원천이 기자이든, 초딩이든, 전문가든 모두가 공평하게 진실과 판단과 비전을 들고 대중의 관심을 구애하게 된다.

일반인이 정치경제나 외교안보와 같은 경성 컨텐츠를 요리하기에는 힘이 부칠 것이다. 이 것은 신문 기자 블로거들의 차지다. 반면에 취미라던가, 기술이라면 현업의 전문가만한 이들이 없다. 모두가 각자가 잘하는 몫을 떼내어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매일 아침 RSS를 통해 대중을 직접 찾아 가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언론의 직거래를 도모한다. 미디어로서의 블로그로 기득권이 무너지고 새시대가 오리라는 주장에 일말의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가상 세계가 추구해 온 ‘직접성’에 있다. 가상 세계는 모든 거간꾼을 소멸하거나 대체해 왔다.

인터넷이 가져온 직거래 쇼크에 의해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이들이 바로 종래의 거간꾼과 중간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변화의 시기를 놓쳐 모두 관심 밖으로 밀려났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모두 전혀 새로운 구조의 경제를 가상 세계에 이룩한 이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지금 블로그가 시도하려는 저널리즘의 구조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변화는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주위를 둘러 보자. 여러분의 블로그를 여러분 직장과 커뮤니티의 높으신 분 중 몇 분이나 읽고 계실지. 여전히 아직 이 사회는 블로그를 읽지 않는 이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이들도 가치를 느껴 관심을 둘 포스팅이 늘어날수록 변화는 가속될 것이다. 저널리즘의 구조적 변화가 시작되었다. 변화에 적응하는 이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이를 구분 지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변화는 귀찮은 것이다. 그러나 무관심은 끔찍한 것이다. 신문도 포털도 블로거도 잊어서는 안될 진리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승주나무 2006-03-2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퍼갑니다. 라주미힌 님의 서재에는 유용한 정보가 많이 있어요^^

2006-03-22 0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중은 선하다” 인식 부정하고
강자를 욕망하고 강자에 굴종하는 속물성 직시
대중을 변화시켜 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탐색
노동자 자주관리체제 ‘노동민주주의’ 제시
노동의 고통이 노동의 기쁨으로 돌아오리라


고전 다시읽기/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월드컵, 장갑차, 노무현, 황우석의 공통점은? 그렇다. 모두 대중과, 대중적인 운동 내지 대중적인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적극적인 지지나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하나의 흐름이, 대중이 되어 커다란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것. 사실 이런 식으로 대중에 대해 말하면, 어느새 87년 6월항쟁이나 7~8월의 ‘노동자대투쟁’ 혹은 광주항쟁 등을 떠올릴 것이다. 대중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만들어낸 사건들은 대개 이처럼 혁명이나 항쟁, 저항의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에 관심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중을 혁명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지금은 잠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솟구쳐오를 혁명적 존재로. 이런 관념 속에 있는 한 2002년 월드컵의 대중이나 황우석 사건의 대중은 안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1930년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미친 듯이 몰려갔던 대중 또한 안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전세계 인민들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밀어주고 블레어를 밀어주는 대중, 혹은 지금은 천황이나 야스쿠니로 상징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보이지 않을 게 틀림없다.

라이히가 이 책을 쓰던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확실히 그랬다. 노동자를 포함해 인민대중들이 미친 듯이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하며 지지했지만, 그것은 모두 원래는 선한 그들이 ‘나쁜 넘들’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거짓’을 폭로하면, 진실을 알려주면 대중이 혁명적인 본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쓸 당시 라이히는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대중은 나치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나치가 말하고 행동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고, 총통에게 속은 게 아니라 총통에게 복종하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자신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억압할 게 분명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다. 마치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사람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대중은 왜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 혁명적이어야 마땅한 계급의 대중조차 어째서 혁명이 아니라 반동을 지지하거나 욕망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라이히로 하여금 바로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밀려가지 않는 위대한 저작들의 대열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라이히는 흔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대중은 본래 혁명적이지만 속아서 저런 거라는 식으로 당혹스런 사태에 눈감지 않으며, 그렇다고 하이데거나 고상한 철학자들처럼 대중이란 속물적인 욕망, 복종적인 태도로 사는 ‘世人(세인)’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대중이 갖는 그 노예적이고 속물적이며 때론 반동적이기도 한 태도를 냉정하게 직시하며, 그것이 야기하는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대중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명시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욕망이나 태도를 전환시켜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과 해방을 위해 일어서게 만들 수 있을지,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자였음을 확신한다. 진정 혁명을 꿈꾸는 자에겐, 어떤 계급이나 대중이 혁명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의당 혁명적이어야 할 그들이 혁명적이지 못한 이유를 찾는 게, 그들이 권위에 쉽게 복종하면서 또한 다른 이들을 복종시키길 욕망하게 되는 이유를 찾는 게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라이히의 이 질문이야말로 혁명을 꿈꾸는 모든 정치학이 대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말했던 것일 게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동시에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기도 했던 그는 정신분석학을 이용해서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변형시킨, 생물학적 욕망과 오르가즘 능력이 강조된 정신분석학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성격구조다. 그에 따르면, 대중이 혁명적이지 못한 것은 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지배하려고 하지만 강한 자들 앞에선 굴종하려는 ‘권위주의적 성격구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구조는 성적인 억압 때문에 발생한다.

아버지에 복종…성적억압의 산물

물질적 착취나 억압은 그에 대한 반역을 야기하지만, 성적 억압은 복종을 야기한다. 성적 억압은 “네가 원하는 건 네 엄마지?”라고 다그치며 욕망을 수치심으로 몰아넣는 한편, “계속 그러면 잘라버릴 거야!”라며 위협하며 욕망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은 오르가즘에 대한 공포를 낳고, 그것은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러한 억압은 성을 아버지가 독점하는 가부장제와 더불어 작동한다. 총통에 대한 선망, 총통에 대한 복종,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을 야기하는 이 성적 억압의 산물이다.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로, 총통으로 대체하게 하는 이러한 억압은 또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도록, 아버지나 총통, 국가로 떠넘기게 만든다. 이것이 파시즘으로 몰려갔던 대중들의 심리, 요컨대 ‘파시즘의 대중심리’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혁파하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욕구의 충족이나 쾌락, 기쁨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금욕적 체제를 넘어서서 노동과 즐거움이 서로 합치하고 노동과 욕구의 충족이 서로 나란히 공존하는 그런 체제를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노동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되게 하고, 일이 싫어도 참고 하는 의무가 아니라 좋아서 즐겁게 할 수 있는 활동으로 만드는 것. 이러한 체제를 그는 ‘노동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장인적 생산체제로 돌아가길 꿈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라이히는 노스탤지어를 먹고 사는 낭만적 몽상가가 아니다. 거꾸로 그는 기계적 합리화나 분업을 유지하면서 노동이 즐거운 활동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를 위해선 노동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설계되어야 하며, 작업 자체를 일하는 노동자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실행하며 관리하는 작업장 자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을 통해 노동자 자신이 작업은 물론 경영 전체를, 나아가 집단의 활동 자체를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기-책임(자율주의)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한 때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민주주의를 향해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던 이 혁명이 30년대 들어가면서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 국가체제로 후퇴했음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예컨대 노동자의 자주관리는 중앙에서의 결정이 집행되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장치와 국가적 통치자로 대체되고, 자발적인 노동은 성과급이나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직장을 고정하는 제도(그는 이를 ‘자물쇠’라고 부른다)에 의해 의무가 된다; 게으른 노동자와 성실한 노동자를 게시하는 제도를 통해 한편에선 수치심과 열등감, 질투심과 증오심을 유발하고 다른 한편에선 승리감과 공명심, 야심과 자만심을 배양하는 권위적 성격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스타하노프 운동 식의 노동경쟁체제로 노동자 내부의 분열과 적대가 발생하고 심화된다 등등. 대다수 대중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이런 요소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를 목도한 이후의 어떤 책들보다도 더 예리하고 현실적이다.

공산당과 정신분석협회서 쫓겨나

▲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
이 탁월한 책이 제대로 된 독자를 발견했던 것은 혁명과 사랑, 혁명과 욕망을 연결하고자 했던 1968년에 이르러서였다. 니체 말처럼 그는 너무 빨리 왔던 것일까? 그러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늦게 왔던 것일까? 어쨌건 그의 책이 갖는 이 '반시대성‘으로 인해 그는 혁명을 하고자 했지만 공산당에서 쫓겨났고, 성과 욕망, 무의식에 대해 연구했지만 정신분석협회에서 쫓겨났으며, 나중엔 정신과의사들의 집요한 로비로 미 식품의약청에 의해 체포·투옥되어 옥사했다. 그의 시간이 오기 이전인 1957년에. 그러나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그를 죽인 사람들은 이미 누구도 기억되지 못하지만, 이 책은 이후에도 오랜 시간 살아서 그의 시간을 지켜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