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45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 갈무리 / 2014년 1월
평점 :
재독이라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탁탁 걸리는 문장들을 자주 만났다.
여성은 가축이 되었다. (156쪽)
결혼제도는 남성과 여성과 재산을 축적하는 메커니즘이었다.(157쪽)
여성은 영원한 소수자가 되었다. (169쪽)
사냥꾼-남성은 기본적으로 생산자가 아니라, 기생자이다. (172쪽)
우리의 현재 가족 개념은 부르주아의 가족 개념이다. (234쪽)
여성 노동력은 저렴했다. (235쪽)
인류가 ‘사냥꾼’에서 목축유목민이 되는 과정, 목축유목민에서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정주하게 되는 과정, 자본주의가 등장해서 발달하는 과정에서 사회 변화의 동력은 ‘경제적 이해(이득)’다.
사냥꾼 사회에서 목축유목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가장 먼저 ‘가축화’된 것은 ‘여성’이었는데, 이는 여성만의 고유한 능력, 재생산(출산) 능력 때문이었다. 이웃 부족과의 전쟁 이후 상대 부족 남성들을 모두 살해했던 이유는 위험 요소만 가중시킬 뿐 쓸모가 없었기 때문(159쪽)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성과 어린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의 소유가 되었다. 정확히는 ‘사유 재산’이 되었다.(158쪽)
반복하자면,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납치와 탈취로 여성 또는 여성의 육체를 얻는 방식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빠르고 확실한 부의 축척 방식이었다. 인류 초기의 남성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패한 여성, 여성 집단은 오늘날까지도 그 패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여성 혐오는 인류 문명의 근간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 경제, 문화적 압박은 여성을 인간이 아닌 ‘여성’으로만 한정했다.
생산자이자 노동자인 여성을 외부에서 더 많이 데려오기 위해 습격과 노예제를 이용하는 대신, 승혼제도로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유력자는 자신의 공동체나 계급에 속한 많은 여성에게 접근할 뿐 아니라, 약한 남성의 여성에게도 접근했다. 여성은 불균형 혹은 불평등한 결혼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좀 더 많은 여성을 통제하는 것이 곧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63쪽)
봉건시대에도 여전히 여성은 교환 상품으로 취급되면서 하나의 상품으로 기능한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왕국의 공주이건, 가난한 농민의 딸이건, 상관없이 남성들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여성은 거래되고 교환된다. 이 경우에도 가장 중시되는 것은 ‘경제적 이해’ 관계다.
여성은 자신의 생산성, 자신의 섹슈얼리티, 자신의 생식 능력에 대한 통제권을 자발적으로 남편과 유력자(교회, 국가)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성적 생산적 자율성에 대한 가장 잔혹한 공격을 당한 끝에 유럽 여성은 의존적이고 길들여진 가정주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원리 아래 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노예 습격과 대응하는 것이 마녀사냥이다. (168쪽)
대부분의 희생자가 여성이었다는 점, 이를 통해 산파들이 출산 과정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점, 여성 집단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았다는 것에 더해, 어쩌면 이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경제적인 부분일 것이다. 말 그대로, 마녀사냥은 돈이 되었다. 마녀재판에 관계했던 변호사나 집행관들에게는 ‘재판에 들인 노고와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사례금이 지급되었고,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모두 선제후에 의해 압수되었다. (197쪽)
신대륙의 발견(?)과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 본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식민지 본국의 여성들을 가정주부화하고, 식민지의 자연과 본토인들을 폭력적으로 착취하고 억압한 결과다. 그 일은 유럽의 백인 남성들에게 ‘돈이 되었다’.
처음에는 부르주아 여성이 그다음으로는 노동계급의 여성이 ‘핵가족 결혼제도’ 안에 묶이게 되었다. 여성의 재산권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기혼 여성이 일하고자 할 때 남편의 ‘허락’이 필요했다. 기혼 여성의 임금은 남편의 재산으로 귀속되었고, 그마저도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피 묻은 여성 운동의 결실로 이제 여성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은 이제 투표할 수 있다.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총리가 될 수 있으며, 대법원장이 될 수 있다. 그룹의 총수가 될 수 있고, 과학자가, 의사가, 교수가 될 수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장은 옳고, 옳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바야흐로(?) 신자유주의 시대다. 정희진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나 사회 구조가 작동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하는 통치 방식”이라고 말했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9쪽) 우리는 그 시대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해 버렸다. 가부장제를 이겨버린 신자유주의의 위용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여성의 납치로 재산을 축적했던 시대를 거쳐, 마녀사냥을 통해 돈을 벌었던 시대가 지나갔다. 여성에게 돈을 빼앗아 남자에게만 재산권/상속권을 주었던 시대가 저물었고, 여성의 교육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여성을 가정에만 묶어두어 남자만 경제적 이득을 얻었던 시대가 끝났다. 여성의 진입이 불가능했던 여러 직업군에 이제 여성도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여성도 돈을 벌 수 있다.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힘으로 꾸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정희진은 <신자유주의 통치와 페미니즘/알라딘 아카데미> 강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환경 속에서 각자도생의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
이를 내 위치/자리/처지/환경에 적용해 보자. 나는 가사 노동을 주로 하고, 사회적 계약 관계에 들어가지 않은 전업주부로 19년을 살았다.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1원 한 푼 받지 않았다. 받지 못했다. 그건 내가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는 태업 주부이고, 불량 엄마이지만, 아무튼 나도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얼마간의 ‘일을 했다’. 하지만, 내 일은 국가 경제 지표에 포함되지 않는,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나는 돈을 받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노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의 일부가 나의 노동에 빚진 결과물이지만, 그 일부가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돈과 나의 연관성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벌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작년부터 일을 시작한, 사회적 고용 관계에 들어선 나는, 비정규직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일용직’ 노동자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부끄럽거나 하찮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성장의 중요한 한 순간과 내 일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내 힘을 다해 그들을 진지하게 대하려 애쓴다. 하지만, 내 ‘일’은 그렇게 취급받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하는 일로 인정받는 것이기에, 나 역시 그렇게 ‘인식’된다. 내 노동은 그 중요성에 비해 ‘철저하게’ 저평가 당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드디어 도달했다.
남성이 여성을 납치해 재산으로 삼은 것이 돈이 되었고, 마녀사냥이 돈이 되었고, 여성의 재산권을 탈취하는 것이 돈이 되었고, 여성의 정치적 자유를 구속하는 일이 돈이 되었던 시대를 지나왔다면. 힘겹게 그 시대를 일정 부분 탈출했다면.
이제는 왜 어떤 것은 돈이 되고, 어떤 것은 돈이 되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을 부당하게 이용해 돈을 버는 것,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것, 버닝썬을 운영해서 돈을 버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넘어, 그런 것만이 돈이 되는 세상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봄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보다 백 배나 중요하다는 생각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만큼, 왜 어떤 사람의 급여가 어떤 사람의 급여보다 320배나 많은지 물어야 한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 자체가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금요일 피곤한 저녁, 퇴근 후 교회 가기 전에 한쪽을 썼다. 토요일 아침, 수험생 아침을 차리고, 크린토피아에 교복 바지를 맡기고, 커피를 사 들고 와서 두 문단을 썼다. 설거지를 하고, 중간중간 세탁통 청소를 하면서 나머지를 썼다.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지금 이 문단을 쓴다. 이제 다림질만 남았다.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과 저평가된 돌봄노동에 대해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이 일들의 의미파악, 의미부여, 의미생산, 결론도출의 책임이 나한테 있다고 느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나 혼자. 아무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