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통의 아줌마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는 ‘내’가 있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가 있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들이 규정하는 나는 보통의 ‘아줌마’다.
큰 아이가 18개월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참동안, 아니, 근래에도 나는 이런 저런 모임에서 ‘일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일단 외모는 ‘일하는 여성’인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고 산다). 하지만, 실상은 ‘노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도, 전업주부 자신들도, 전업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말했다. 가사노동은 노동의 범주에서도 ‘소외’된다고. ‘가사 노동’은 ‘노동’이 아니기에, 나는 ‘노는 사람’, ‘쉬는 사람’, ‘집에서 애 보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고, 책을 읽어주고, 책을 골라준다. 게다가, 게다가 나는 가끔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책을 읽는다. 나는, 나 자신이 ‘보통의 아줌마’는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보통의 아줌마’로 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4년 다니다가, 지금은 집에서 ‘애를 보는’, 집에서 ‘노는’ 그런 보통의 아줌마로 본다. 나는 보통 아줌마다.
2. 기독교 비판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이들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서 오늘을 빼앗는 건데, 그건 사랑을 빼앗는 거거든요. 어떤 형식이든 구조는 똑같아요. 우리의 억압 체제를 비판하려면 자본, 기독교, 권력을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해요. ...(중략)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 인문학자는 반드시 기독교를 비판해야 해요.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예요. 인간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그래서 고통의 폭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그보다 작은 고통을 지닌 사람을 품어줄 수 있어요. 글에 힘이 있고. ... 신을 죽인 그 곳에서, 그 피를 기억하는 곳에서 인문학자는 살아나가는 거예요. 인간을 제외한 일체의 것들에 기대지 않겠다는 자세로 불행이든 뭐든 우리가 끌고 가야 하는 거예요. (410쪽)
만약 강신주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형교회의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해서, 이를 테면 부자 세습에 대해서, 화려한 교회 건물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에 대해서, 보수화에 대해서, 우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라면 난, 긴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잘못된 일이다.
대형 교회 당회장직의 부자 세습은 잘못된 거다. 지나치게 화려한 교회 건물은 잘못된 거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더 배려해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의 보수화 및 우경화는 우려할 수준을 넘어섰다. 많은 부분에 있어,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기득권층의 권익 보호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이미 자신들 스스로가 ‘기득권층’이다.
그런데, 강신주가 비판하는 기독교는 현재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독교의 부정적 행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 가지 괴물, 자본, 기독교, 권력을 비판할 때, ‘기독교’ 그 자체를 비판해야만, 즉, ‘신을 죽여야’만 인간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안 죽으려면 내가 악마가 되면 돼요. 조금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고 단호하게 공격해야 해요. 종교 비판 책은 그렇게 써야 해요. 일체의 틈을 안 줘야 해요. ‘나는 사실 기독교 신자지만 요즘 교회는 비판해요’ 이것도 허용하면 안 돼요.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113-4쪽)
‘나는 사실 기독교 신자지만 요즘 교회는 비판해요’. 이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중학교 1학년 여름, 아니면 봄. 토요예배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토요예배가 ‘학생회 모임’, 표현 그대로 ‘학생들만의 자치 활동’이어서 별다른 순서가 없었다. 찬양을 30분정도 한 후에, 전도사님의 말씀을 잠깐 듣고, 그 후에는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특별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걸로 보아, 주로 ‘노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게임도 하고, 새로운 찬양도 배우고, 부활절 즈음엔 계란을 삶아 포장하고, 어버이 주일엔 꽃을 만들고, 크리스마스 한 달 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그리고 가끔 청소를 하고, 그런 식이었다.
그런 토요일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찬양 시간을 갖던 중, 그 날 따라 이 찬양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주시는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찬양하기 원하네
예수 처음과 나중되시는
오 예수 날 위해 고통당하신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왕의 왕이 되신 주
예수 당신의 끝없는 사랑
오 예수 목소리 높여 찬양해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듣는 사람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끔찍하게 느껴질 만한 가사라는 거, 나도 안다. 아마 강신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다.
나는 걸음마를 막 떼었을 때부터 사촌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었다. 그 때가 중 1이었으니, 시간으로 따진다면 거의 10년 가까이 교회 교육을 받아온 터였다. 그래서, 그 날, 그 토요일 오후, 내가 느낀 충만한 감정들과 내가 나의 것으로 인식했던 생각들 전부가 어쩌면 ‘내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과 관념이, 그리고 느낌과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 난 설명할 수 없다.
확실한 건, 그 날, 그 토요일 오후에, 나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했다는 것이다.
2000년 전, 로마의 식민지였던 작은 나라의 촌구석에서 태어나, 특별하고 권위 있는 설교로 대중을 사로잡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는 그 남자, 로마에 대한 반란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실망과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했던 그 남자,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어졌다. 그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었다는 그 말이, 믿어졌다.
강신주는 말한다.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는 바로 지적했다.
그가 말한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는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을 확인하는 핵심적인 물음 중의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자신의 삶의 주권을 “예수님”에게 내어 놓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핵심적 가치이다.
나는 ‘인문학자’가 아니고, ‘인문학 서적 편집자’도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보통의 아줌마’다. 내 안의 믿음, 내적 확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사랑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믿어진다고’ 말할 뿐이다.
4.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내가 싫다고 할 때...
인문학자로서 대척해야 하는 결정적 지점은 결국은 ‘종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강신주는 조금 후에,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좀 더 견고해진 후에, ‘악마’가 되어, 조금의 빈틈도 없이 ‘기독교 철학’을 공격하는 책을 내겠다고 했다.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다.
2010년, 처음 강신주의 책을 읽었을 때부터 나는 강신주가 너무 좋았다. 서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니, 수정해야겠다. 서인국만큼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남자는 섹시하다. 자유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인문학자, 자신의 삶과 앎을 일치시키려 하는 남자,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일이라며 지방 강연을 마다하지 않는 남자, 하루에 4명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남자, 설악산을 100번이상 올라갔다는 남자, 이런 남자가 어떻게 섹시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한다. ‘신’에 기대어 살려는 사람, ‘기도로 퉁쳐 버리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싫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토요일 밤, 새벽 3시까지 이 책을 손에 잡고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내가 싫다고,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말이다.
답은 아직도 찾지 못 했다. 당연하다. 강신주는 변하지 않을 테고, 아마 그의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책을 왜 읽는 걸까. 내 생각을 바꿀게 아니라면, 그럴 게 아니라면, 왜 그의 책을 읽는 걸까.
더운데, 속상해서 더, 더운 오후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해서, 난 더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