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이름만 들어도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소설 속 문장같은 기막힌 문장을 구사하는 정혜윤의 책이 그렇다.

독서 에세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가 내가 읽은 그녀의 첫 번째 책이고, 페이퍼를 쓰진 못 했지만 『침대와 책』도 재미있게 읽었다.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책, 『사생활의 천재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은 이렇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 카프카

매스컴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성공요인을 가지고 있다. 머리가 좋거나,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 (이전에는 이 두 가지 행운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즘엔 '돈이 많거나,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의 행운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끈기와 열정이 있거나. 그들만의 노하우로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을 이루고,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환호한다. 물론 보고 배울 점이 많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힘이 되는 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하께서도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난관을 여러 번 이겨내셨던 것을 기억하라.), 바로 지금, 지금 현재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인하는 것처럼 잔인한 것도 없지만,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은 그러기 마련이다. 아니, 나는 종종 그럴 때가 있다.

1. 자기 삶의 천재가 되는 것에 대해서 - 박수용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소몰이꾼이 되어 시골장을 전전하던 한 아이는 밤마다 이 장, 저장을 옮겨 다닌다. 밤새도록 소 두 세 마리와 함께 산을 넘고 고갯길을 걸어가며, 그는 시장의 시간과 오솔길의 시간, 인간의 규칙과 자연의 규칙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는 후에 야생 시베리아 호랑이를 따라 숲을 헤메고, 한 해의 절반을 영하 30도의 나무 위나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기다린다. (53쪽)

세계에서 한 시간도 기록되어 있지 않던 야생의 시베리아 호랑이를 1,000시간 가까이 영상으로 기록한 7편의 감동 다큐멘터리로 프랑스 쥘 베른 영화제 관객상, 블라디보스토크 국제 영화제 특별상 'AMBA'를 수상했으며,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출간한 박수용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의 이야기이다. (81쪽)

 

 그때 나는 사슴 뼈를 보면서 숲과 사슴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살아생전 지녔을 사슴의 감성과 살아있을 동안의 투쟁과 생애 마지막 순간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 뼈를 보면서, 숲 속에 자신의 역사를 외로운 유적처럼 뼈로 남겨놓은 한 생명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0쪽)

시베리아 호랑이를 찾아 숲을 헤멘다.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 걸었던 밤길을 생각한다. 시끄러운 시장의 시간, 조용한 오솔길의 시간, 시장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규칙, 스스로 움직이는 자연의 규칙.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오랫동안 큰 울림이 되었다.

나 역시 한 열흘쯤은 초연하다가도 한 사흘쯤 가슴이 아픕니다. 비트에서 너무나 그리워했던 삶이지만 도시에 돌아오면 그 삶은 나를 또 슬프게 합니다. 자연 다큐를 하면서 나는 제작비 문제로 고생했고 같이 일하는 동료를 잃기도 했고 겨우 제작비를 타내면 ‘추후 타사와 5년 동안 방송 행위 금지’ 같은 이상한 서약서를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때 오솔길의 긴 흐름들, 비트에서 지낸 시간들, 호랑이와 함께 지낸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눈 내린 아침 전나무 끝에 매달린 아침 햇살을 생각합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큰 것이 있다. 사소한 것들은 잊힌다. 그 오솔길의 끝에.’ (68-9쪽)

 

2.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 변영주 영화감독

변영주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밀애」, 「발레교습소」, 「20세기를 기억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방법」, 「화차」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 강덕경 할머니에게서 시작된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자 돈이 딱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강덕경 할머니가 일 년 반을 살았다는 겁니다. 마지막 6개월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갈 때마다 복잡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죽어도 안도, 살아도 안도였습니다. 인간이 이래도 되나 반, 다행이다 반.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돈이 없었던 겁니다. .... 그래서 도망치듯 시나리오를 한 편 썼습니다. 시놉시스를 재밌어하는 제작자들이 있으면 미팅을 갖는 시네마트가 있는데, 저는 도망치듯 그곳에 갔고 정확히 3일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너, 나 안 지키고 딴 데 가서 딴 일 하는구나. 나 확 죽어버린다.' 꼭 이러고 돌아가신 듯했습니다. 「해운대 엘레지」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함께 있자고."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91-2쪽)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기억들을 영화로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강덕경 할머니. 변영주는 강덕경 할머니를 만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돈이 없는 거다. 할머니를 계속해서 돌볼만한 돈이 떨어진거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할머니가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교차되는 가운데, 그녀는 그만 할머니의 손을 먼저 놓아 버린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 때부터 방황은 시작된다. 자신을 학대하고, 원망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이젠 자신의 내면을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자신을 사랑하고,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도시의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큰 소리, 시끄러운 소리들. 그 소리들에 답하지 않는다. 그 소리들을 가만히 가라앉힌다.

그리고 듣는다.

숲의 소리, 자연의 소리, 조용한 소리, 내면의 소리, 작은 소리.

내 안의 침묵이 끝내 자기 자리를 찾았을 때, 그 소리는 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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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개츠비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왜 개츠비가 위대한지를 알아야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두 번 읽은 것 같은데, 어느 출판사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 번은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직후였고, 또 한 번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닐텐데, 아무튼 나는 그 책을 읽고, 주인공의 이름, ‘개츠비’만을 덜렁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려 했지만, 시간차 공격이 워낙 빈번한 까닭에 영화를 먼저 봤다.

커다란 스크린 화면 가득,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개츠비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레오나르도는 <타이타닉>, <로미오와 줄리엣>때처럼 싱그럽지는 않았지만, 원숙한 남성미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개츠비에 딱 어울리는 캐스팅이라 생각한다. 데이지를 연기한 캐리 멀리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개츠비의 지독한 사랑에 호응할 만큼, 여신같은 미모를 보여주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쳤다.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민음사판을 4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해 두었는데,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했다는 문학동네판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는 민음사판도 문학동네판도 5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팔아도 되나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사람은 없었고, 나는 김영하 번역의 문학동네판도 구매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해설>에서 이 책의 번역을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했다.

이 소설은 '선량한' 독자를 절망에 빠뜨리는, 플롯도 캐릭터도 없는 오리무중의 문예소설도 아니고, 정처없이 이름 모를 도시를 떠도는 주인공의 상념을 하염없이 좇는 관념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은 능란하게 짜여진 플롯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대결하는 흥미진진한 로맨스다. ... 『위대한 개츠비』가 '졸라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원고(대형서점에서 『위대한 개츠비』가 '졸라 재미없다'는 대화를 나누었던 두 고등학생)의 논고에 항변하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원고인 고등학생 독자의 악의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1920년대와 2000년대라는 팔십 년의 격차, 한국어와 영어의 어쩔 수 없는 다름 때문이라고 변론하려 했던 것이다. (228-9쪽)

민음사의 번역도 괜찮지만, 출판사에서 '젊은' 번역이라고 홍보했듯이, 문학동네 김영하의 번역은 읽기에 편했다. 20대 초반, 기껏해야 20대 후반이었을, 닉과 톰, 데이지와 개츠비가 서로 경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 역시 타당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문학동네/김영하>

"닉, 요즘 뭐 해?"

"증권 쪽에서 일해."

"누구랑?"

나는 동료들의 이름을 댔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인데?"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좀 재수 없었다. (22쪽)

<민음사/김욱동>

"닉, 요즘 자넨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채권 일을 하고 있어."

"어느 회사에서?"

나는 회사 이름을 말해 주었다.

"들어 볼 적 없는 회사인데."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런 말투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28쪽)

"What you doing, Nick?"

"I'm a bond man."

"Who with?" I told him.

"Never heard of them," he remarked decisively.

This annoyed me. (32-3쪽)

가독성면에서 일단 ‘김영하 번역’에 별 하나를 더 준다.

그 장교는 데이지가 말하는 모습을 지그시, 그 또래 여자들이 한 번만 받아봤으면 하는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더라구요. 너무 로맨틱해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예요. 그 사람이 바로 제이 개츠비였어요. (96쪽)

'그 또래 여자들이 한 번만 받아봤으면 하는 그런 시선', 물론 그런 시선이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길,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 그런 눈길이 있다.

가끔 TV에서 그런 눈길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극 중에서, 연기자들은 그것이 '연기', 즉거짓 감정임을 본인도, 상대방도, 시청자들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는 척‘이 아닌 ’진심'으로 무언가를 연기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진심으로 '사랑'을 '연기'할 때, 가끔 그런 눈길이 나온다. 내가 가장 최근에 TV에서 그런 눈길을 봤던 건, 송승헌, 김태희 주연의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서였다. 송승헌의 눈빛이 그런 눈빛이었다. 달콤하고, 로맨틱한 눈길,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길.

속으로 말했다.

"송승헌, 진짜로 김태희 좋아하는구나. 곧 스캔들 나겠네."

예상은 적중하지 않았고, 스캔들은 없었다. 송승헌이 연기를 잘한건지, 내가 잘못 본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녀는 개츠비를 바라보았다. "저기, 제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담배와 불이 붙은 성냥을 카펫 위에 던져버렸다.

"아,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원해!" 그녀가 개츠비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당신을 사랑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지나가버린 일을 어쩌라는 거야......" 그녀는 힘없이 흐느꼈다. "한때는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어. 그렇지만 당신 역시 사랑했어."

개츠비가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167쪽)

나는 개츠비가 데이지의 과거에 연연해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그녀의 과거가 문제된다면, 그는 그녀를 찾지도,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과거는 그에게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계속해서 요구한다.

즉, 데이지는 그녀의 남편 '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인정하라는 것이다. 데이지는 말한다. 어느 한 순간,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노라고. 하지만, 당신도 사랑했다고 말이다. 이건 개츠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자신이 오직 데이지만을 사랑했듯이, 데이지도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면, 개츠비의 '완벽한 사랑'은 무너진다. 역시 그가 사랑한 것은 환상 속의 여인 ‘데이지’가 아니라,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이지와 사랑을 나눌, 데이지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는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은 완벽해야 한다는 개츠비의 집착은 데이지를 숨막히게 한다. “당신도 사랑했어.”라는 데이지의 말은 개츠비를 만족시키지 못 한다. 데이지는, 반드시 자기 자신만을, 개츠비만을 사랑해야 했다. 5년 전에도, 5년 동안 계속해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개츠비는 ‘사랑에 빠진 남자’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그 여인을 위해 집을 사고, 그 여인을 위해 매일 엄청난 파티를 연다. 오직 사랑하는 여인,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서다.

하지만, 지독한 그의 사랑이 그가 그녀를 얻은 후에도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의 사랑이 그토록 강렬했던 이유는 그녀가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이 지독한 집착으로, 사랑과는 종이 한 장 차이인 집착으로 점철되어 갈 때,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도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도 결국엔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결국 가장 위대한 사랑은 ‘짝사랑’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데이지’를 생각하고, ‘데이지’를 상상하고, ‘데이지’를 그리워했던 때, 그 때 ‘개츠비’의 사랑이 가장 완벽했기에 그러하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사랑의 충만한 느낌이 계속될 수 있기에, 가장 위대한 사랑은 어쩌면 짝사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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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2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역시 민음사판 번역이 더 좋으네요. 그러니까 번역투에 더 가까운 문장이라고 해야하나요. '재수없었다'는 편하게 읽히고 익숙하지만 '나는 화가 치밀었다'는 소설 속 문장 같아서요. 저도 문동으로 서점에서 딱 한 페이지를 훑었었는데 '자연스러워서' 저는 좀 내키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얼마전에 쟌 님이 이 영화 리뷰를 쓰셨는데요, 단발머리님이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디카프리오가 이 역을 맡으면서 한 인터뷰에 진짜 완전 쑝갔어요. 개츠비를 '자신의 방식대로 근사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들면서 말이지요. 제가 혹시 모르니 여기에 가져와 볼게요.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길잃은 캐릭터다. 이 작품은 기존의 러브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를 소유하고 지워버려야만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것 없었던 과거도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디카프리오, 인터뷰에서 발췌

단발머리 2013-06-21 15:14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쟌님 영화 리뷰도 개츠비 인터뷰도 못 봤네요.

제가 진작부터 알아본 대로 (ㅋㅎㅎ), 역시 디카프리오는 멋지네요.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라니요.
너무 너무 멋져요.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네요. 외모도 되고, 캐릭터 분석도 잘 하고, 연기도 잘하고.
우앗, 완전 일등 신랑감, 아니다, 일등 배우네요.*^^*

다락방님, 신나는 금요일 오후네요. 날씨는 너무 좋구요.
오늘 저녁에도 약속 있으신가요?
시원한 맥주 500에 치킨?!? 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1. 보통의 아줌마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는 ‘내’가 있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가 있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들이 규정하는 나는 보통의 ‘아줌마’다.

큰 아이가 18개월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참동안, 아니, 근래에도 나는 이런 저런 모임에서 ‘일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일단 외모는 ‘일하는 여성’인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고 산다). 하지만, 실상은 ‘노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도, 전업주부 자신들도, 전업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말했다. 가사노동은 노동의 범주에서도 ‘소외’된다고. ‘가사 노동’은 ‘노동’이 아니기에, 나는 ‘노는 사람’, ‘쉬는 사람’, ‘집에서 애 보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고, 책을 읽어주고, 책을 골라준다. 게다가, 게다가 나는 가끔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책을 읽는다. 나는, 나 자신이 ‘보통의 아줌마’는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보통의 아줌마’로 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4년 다니다가, 지금은 집에서 ‘애를 보는’, 집에서 ‘노는’ 그런 보통의 아줌마로 본다. 나는 보통 아줌마다.

2. 기독교 비판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이들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서 오늘을 빼앗는 건데, 그건 사랑을 빼앗는 거거든요. 어떤 형식이든 구조는 똑같아요. 우리의 억압 체제를 비판하려면 자본, 기독교, 권력을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해요. ...(중략)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 인문학자는 반드시 기독교를 비판해야 해요.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예요. 인간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그래서 고통의 폭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그보다 작은 고통을 지닌 사람을 품어줄 수 있어요. 글에 힘이 있고. ... 신을 죽인 그 곳에서, 그 피를 기억하는 곳에서 인문학자는 살아나가는 거예요. 인간을 제외한 일체의 것들에 기대지 않겠다는 자세로 불행이든 뭐든 우리가 끌고 가야 하는 거예요. (410쪽)

만약 강신주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형교회의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해서, 이를 테면 부자 세습에 대해서, 화려한 교회 건물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에 대해서, 보수화에 대해서, 우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라면 난, 긴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잘못된 일이다.

대형 교회 당회장직의 부자 세습은 잘못된 거다. 지나치게 화려한 교회 건물은 잘못된 거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더 배려해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의 보수화 및 우경화는 우려할 수준을 넘어섰다. 많은 부분에 있어,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기득권층의 권익 보호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이미 자신들 스스로가 ‘기득권층’이다.

그런데, 강신주가 비판하는 기독교는 현재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독교의 부정적 행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 가지 괴물, 자본, 기독교, 권력을 비판할 때, ‘기독교’ 그 자체를 비판해야만, 즉, ‘신을 죽여야’만 인간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안 죽으려면 내가 악마가 되면 돼요. 조금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고 단호하게 공격해야 해요. 종교 비판 책은 그렇게 써야 해요. 일체의 틈을 안 줘야 해요. ‘나는 사실 기독교 신자지만 요즘 교회는 비판해요’ 이것도 허용하면 안 돼요.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113-4쪽)

‘나는 사실 기독교 신자지만 요즘 교회는 비판해요’. 이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중학교 1학년 여름, 아니면 봄. 토요예배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토요예배가 ‘학생회 모임’, 표현 그대로 ‘학생들만의 자치 활동’이어서 별다른 순서가 없었다. 찬양을 30분정도 한 후에, 전도사님의 말씀을 잠깐 듣고, 그 후에는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특별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걸로 보아, 주로 ‘노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게임도 하고, 새로운 찬양도 배우고, 부활절 즈음엔 계란을 삶아 포장하고, 어버이 주일엔 꽃을 만들고, 크리스마스 한 달 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그리고 가끔 청소를 하고, 그런 식이었다.

그런 토요일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찬양 시간을 갖던 중, 그 날 따라 이 찬양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주시는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찬양하기 원하네

예수 처음과 나중되시는

오 예수 날 위해 고통당하신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왕의 왕이 되신 주

예수 당신의 끝없는 사랑

오 예수 목소리 높여 찬양해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듣는 사람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끔찍하게 느껴질 만한 가사라는 거, 나도 안다. 아마 강신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다.

나는 걸음마를 막 떼었을 때부터 사촌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었다. 그 때가 중 1이었으니, 시간으로 따진다면 거의 10년 가까이 교회 교육을 받아온 터였다. 그래서, 그 날, 그 토요일 오후, 내가 느낀 충만한 감정들과 내가 나의 것으로 인식했던 생각들 전부가 어쩌면 ‘내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과 관념이, 그리고 느낌과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 난 설명할 수 없다.

확실한 건, 그 날, 그 토요일 오후에, 나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했다는 것이다.

2000년 전, 로마의 식민지였던 작은 나라의 촌구석에서 태어나, 특별하고 권위 있는 설교로 대중을 사로잡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는 그 남자, 로마에 대한 반란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실망과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했던 그 남자,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어졌다. 그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었다는 그 말이, 믿어졌다.

강신주는 말한다.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는 바로 지적했다.

그가 말한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는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을 확인하는 핵심적인 물음 중의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자신의 삶의 주권을 “예수님”에게 내어 놓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핵심적 가치이다.

나는 ‘인문학자’가 아니고, ‘인문학 서적 편집자’도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보통의 아줌마’다. 내 안의 믿음, 내적 확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사랑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믿어진다고’ 말할 뿐이다.

4.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내가 싫다고 할 때...

인문학자로서 대척해야 하는 결정적 지점은 결국은 ‘종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강신주는 조금 후에,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좀 더 견고해진 후에, ‘악마’가 되어, 조금의 빈틈도 없이 ‘기독교 철학’을 공격하는 책을 내겠다고 했다.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다.

2010년, 처음 강신주의 책을 읽었을 때부터 나는 강신주가 너무 좋았다. 서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니, 수정해야겠다. 서인국만큼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남자는 섹시하다. 자유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인문학자, 자신의 삶과 앎을 일치시키려 하는 남자,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일이라며 지방 강연을 마다하지 않는 남자, 하루에 4명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남자, 설악산을 100번이상 올라갔다는 남자, 이런 남자가 어떻게 섹시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한다. ‘신’에 기대어 살려는 사람, ‘기도로 퉁쳐 버리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싫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토요일 밤, 새벽 3시까지 이 책을 손에 잡고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내가 싫다고,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말이다.

답은 아직도 찾지 못 했다. 당연하다. 강신주는 변하지 않을 테고, 아마 그의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책을 왜 읽는 걸까. 내 생각을 바꿀게 아니라면, 그럴 게 아니라면, 왜 그의 책을 읽는 걸까.

더운데, 속상해서 더, 더운 오후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해서, 난 더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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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을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해 드릴 댓글을 달고 싶지만, 어떤 말도 찾을 수가 없고요,
다만 이 글이, 이 페이퍼가 정말 좋다고, 그 말씀은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이 책 읽어볼게요.

단발머리 2013-06-07 17: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감사해요.
다락방님 댓글과 졸리의 미소가 저를 위로해줍니다.
이 책 읽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다음 달에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고요. *^^*

2013-06-19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9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5 0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어느 순간 유령으로 변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던 지승호가 강신주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면을 벗고 자신의 ‘맨얼굴’에 대면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강신주도 맨얼굴이다. 생얼의 남자 둘, 멋있다.

1. 그가 바라는 것

그렇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저의 책이나 강연이 여러분 스스로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삶을 돌아보고, 자신만의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여러분을 자극했으면 좋겠다는 것 말입니다. (597쪽)

프롤로그를 읽어 지승호의 마음을 헤아리고, 에필로그를 읽어 강신주의 마지막 당부를 먼저 확인했다. 그렇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문학자인 그가 책을 읽는 내게 바라는 바다.

2. 삶이 투영되는 책읽기

아까도 얘기했지만, 체제는 항상 우리를 사랑 못 하고 교감 못 하게 쪼개놔요. 경쟁시키고. 그래서 마르크스도 분업이 최악의 원리라고 한 거예요. 시는 그걸 가로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를 읽고 고전을 읽으면서 동시대와 교감하고 윗세대와 공감하며 교감의 폭을 넓혀야 해요. 자기가 반영돼 있는, 자기의 삶이 투영되는 책 읽기를 해야 하는 거죠. (215쪽)

아름다운 미사어구에 감동받거나, ‘내가 시집을 읽는다’는 여유에 빠질 때가 아니다. 시를 통해 동시대와 교감하고 윗세대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반영하는 투명한 책 읽기를 해야 한다.

3.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내가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읽히는데, 내가 베르테르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고 베르테르가 나였으면 나처럼 사랑했을 거라는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공감과 울림이 있어요. 이게 인문학적 독법의 핵심이에요. 역사책을 읽든 고전을 읽든.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의 의사소통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315쪽)

책 전체를 통틀어 서너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이다.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제대로 읽힐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책을 읽었다. 5학년으로서, 5학년만큼의 생각의 범위 내에서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제대로 읽었다. 그 때, 나는 베르테르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유치하고, 미숙하고, 어설프기는 했지만, 그 때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제대로 읽었다.

4. 뇌사와 장기기증

의학 분야에서는 미국만 해도 육체를 줄 수 있다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미국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문제는 우리 출판계가 미국 책을 너무 많이 번역한다는 거예요. 뇌에 대한 책이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뇌사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됐잖아요. 그런데 뇌사는 그렇게 나이브하게 볼 문제가 아니라고요. 장기 기증의 문제가 없으면 뇌사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뇌에 대한 문제는 곧 장기 기증 문제라고요. 뇌사가 한 번 죽음으로 인정돼버리면 장기는 소유주가 없는 게 된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기증하기로 했다거나 가족이 없다면 장기의 소유권이 없는 거예요. 마치 해부학 실험실에 있는 시체처럼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사물이 되는 거예요. 그게 위험한 거죠. (456쪽)

한 때, 장기 기증 서약을 하는 게 유행인 때가 있었다. 특히, 각막에 대한 기증 서약이 유행했는데, 유명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서약에 동참했다. 나는 미래의 ‘언젠가’ 불의의 ‘사고’가 나서, ‘뇌사 판정’을 받아, 내 ‘각막’을 ‘전해준다’는 가정 자체가 무서웠다. ‘각막’을 준다는 건, 의학적으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전제할 테니까.

5. 자살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난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485-6쪽)

6. 자기 계발서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우리 사회가 <쇼펜하우어 인생론>의 자본주의화된, 세속화된 버전이거든요. 열심히 자기를 계발하는 거죠. 계발하면 자본주의가 좋아해요. 노예가 되기 위해서 노예적 기능을 익히는 거예요. (488쪽)

7. 글쓰기

블로그는 초보적 글쓰기로는 괜찮은 것 같아요. 블로그의 매력은 자기가 쓴 글에 코멘트가 달린다는 거예요. 이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를 보는 걸 통해 글의 수준을 올릴 수 있으니까 블로그가 활성화되면 굳이 대학원 안 가도 돼요. 왜냐하면 문과대 대학원은 사실상 글쓰기 연습이거든요. 철학과 같은 경우는 자기가 글 써서 발표하고 코멘트 듣는 과정이 있고요. 매번 리포트라든가 완성된 글을 쓰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교수한테 평가도 받고. 그런데 블로그에 쓰면 구태여 대학원 다닐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글쓰기 연습은 될 수 있죠. (508쪽)

강신주는 초보적 글쓰기로 블로그를 추천한다. 블로그가 활성화되면 굳이 대학원에 안 가도 된다고 말한다. 초보적 글쓰기라, 좋았어, 한 번 해 보자. 초보적 글쓰기.

8. 산

산에 가면 저는 거의 안 먹어요. 사람들 끌고 가느라. 기질적으로 그렇게밖에 못 해요. 치명적으로 저 자신을 해쳐요. 끊어버려야 하는데 못 끊어요. 시작하면 끝까지 가요. 혼자 속 아파하면서. 짐이 무거워서 힘든 게 아니에요. 저를 의지하고 제 마음을 조금만 이해하면 업고도 가요.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 배신감, 이런 게 상처가 되고 힘든 거죠. (512쪽)

강신주는 사진을 보던, 인터넷 강의를 잠깐 보던, ‘강하다’는 인상이 지배적이다. 날카롭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런데, 지방 강의 얘기라던가, 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가감없이 느껴진다. 자신이 말한 대로, 인문학적 정신에 입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맨얼굴’로 대하다 보면, 상처를 많이 받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팍한 세상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려니, 순수하게, 정직하게 살아가려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든다.

9. 맨얼굴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동심을 가져야 해요. (586-7쪽)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을 만나지 말자.

10. 추천도서

<시여 침을 뱉어라>, <벽>은 확인해야봐야 한다.

이성복, 황지우, 함민복, 김현, 김윤식의 글은 찾아봐야 한다.

<이상연구>, <이광수와 그의 시대>, <임화연구>, <파시즘의 대중심리>,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무소유>, <오래된 미래>, <스펙타클의 사회>는 읽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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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신랑이 책을 들고 왔다. 나도 도서관에 신청해놓았는데, 신난다, 주말엔 가볍게.

책은 무겁지만, 가볍게.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으나...

 

 

 

 

 

 

 

 

 

 

 

 

 

 

프롤로그, 에필로그까지는 괜찮았는데.

읽기 시작하자마자 이건 뭐, 사방에서 난도질.

 

책을 덮었다. 신랑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부담스럽다. 부담스럽다, 강신주가."

 

언제나 그렇듯이 신랑의 대답은 담백하다.

 

"읽지 마."

 

근데 그럴 수가 없다.

 

"근데, 좋아. 막, 궁금하고, 읽고 싶고. 근데, 너무 부담스럽고."

 

내가 좋다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싫다고 한다.

정확히는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한다.

난 어쩌냐.

 

난 강신주가 좋고, 그의 이야기가 좋지만,

그가 말하는 대로, 내 삶을 바꿀 수는 없을 거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읽어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싫다고 할 때는...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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