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강신주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 강남에 살지 않아도 섹시하다.
강신주의 학부때 전공은 화학공학. 석사는 서울대에서, 박사는 연세대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학위를 받았다. 정확히는 중국철학, 동양철학자인데, 서양철학에도 조예가 깊다. 깊은 정도가 아니라,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좌우로 종횡무진, 동서양 고전과 한국의 현대시를 거침없이 인용하고 설명한다. 각 분야의 철학 전공자들이 보기에 강신주의 자르고, 찌르고, 정리하는 여러 가지 논제들에 대해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강신주’만큼 여러 철학자들의 주요 사상과 현대적 해석을 나같은 철학 문외한에게도 쉽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현재까지 인터뷰집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을 포함해 단행본 18권을 써냈고, 총 12권으로 기획된 제자백가 시리즈를 비롯해 다른 저작들도 작업 중이다. 하루에 4명분의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고, 지방 도시 어디에서든 강연을 요청하면,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KTX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다. 감히 말한다. 삶과 앎을 일치시키려 부단히 애쓰는 사람이다, 라고.
이 책의 부제는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욕망’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대해 치밀하게 추적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길들이고 자극하여 끝없이 상품을 소비하게 합니다. 그 결과 노동으로 얻은 화폐는 소비되고, 그럼 또다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지요. (21쪽)
우리와 우리 이웃들은 산업자본에 고용되어 수많은 상품을 만들어내지요. 그리고 노동의 대가로 얻은 임금을 자신과 이웃이 만들어낸 상품들을 구매하는 데 사용합니다. 산업자본의 소비 전략을 통해 결국 자신이 만든 상품을 스스로 구매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362쪽)
소비할 때에야 비로소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어, 이젠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물건이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있는 물건이 아닌 ‘신상품’을 ‘소유’하기 위해, ‘소비’하는 나 자신을 ‘확인 받기’ 위해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우리는, ‘소비’하는 것이다.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삶의 환경과는 현격히 구별되는 이런 자극적이고 복잡한 도시의 사건들에 일일이 반응하면, 우리는 대도시에서 하루도 견딜 수 없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모든 일은 그저 냉담히 남의 일로 간주해야 합니다. 출근길에 만나는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는 일도 피해야 합니다. 오직 나와 직접 관련된 일에만 정서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예외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지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지적으로 파악하여 그 사건으로부터 받게 될 정서적 충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만 합니다. (85-6쪽)
산업 자본주의는 대도시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생산공간과 소비공간이 하나로 통일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더욱 증대되기 때문(79쪽)이다. 즉, ‘대도시가 화폐 경제의 본거지’가 되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될 때, 대도시의 등장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대도시의 생활은 시골에서의 생활과 판이하게 다르다. 시골에서의 삶의 규칙으로 대도시에서 살아간다면, 그는 금새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 반대는 또 어떤가. 대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껴 시골에 가서 생활하게 된다면, 그 역시 시골의 촘촘한 인간관계, 누구네 집에 수저,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서로 알고 지내는 시골의 삶에 곧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도시에서의 삶이 주는 선물은 ‘자유’다. 거리를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난 혼자 울 수 있고, 혼자 웃을 수 있다. 물론 혼자 밥 먹을 수 있고, 혼자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도시에서의 삶은 자유롭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반대편에는 ‘고독’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리를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 지금 내 마음을, 내 심정과 아픔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셔야 한다. 자유롭되 고독하게 살 것인가. 답답하지만 인정 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서 살 것인가.
당시 파리 상점들은 눈부실 만큼 화려한 장식들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이것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려는 미적 전략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남자 종업원들이 대거 채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32쪽)
이처럼 백화점은 고가의 상품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그런 이유로 자본주의적 욕망을 훈련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목받는다는 도취감, 그리고 주목받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가 암묵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입니다. (134쪽)
백화점의 초기 형태 아케이드, 특히 19세기의 아케이드는 수많은 노숙자와 창녀들이 빈번하게 출입했던 장소였다. 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노숙자와 걸인들이 꼬여들었고, 아케이드 안의 남성 손님을 유혹하기 위해 수많은 창녀가 모여들었다. (130쪽) 하지만, 부르주아 사회가 발달하면서 경제적 부를 소비하는 실제 계층으로서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131쪽) 백화점의 주요 고객이 중산층 여성으로 상정된 순간, 남자 종업원들의 출현은 당연하다.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다.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친구의 어머니가 백화점 화장품 C넬 매장에 들르셨다. 아이크림이 다 떨어져서 새로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아이크림을 판매한 직원은 친구 어머니에게 ‘무료 메이크업’을 받아보시라고 권했다. 친구가 다른 곳을 구경하고 돌아와 C넬 매장에 돌아와 보니, 어머나! 친구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팔자 주름, 미간 주름, 주름이란 주름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잡티란 잡티는 모두 사라진 모습이었다. 친구 말대로라면 5살은, 아니 10살은 더 어려보인다 했다.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신 친구 어머니는 그 날 C넬 매장에서 ‘무료 메이크업’에 사용된 화장품 몇 가지를 구입하셨다. 몇 가지만 해도 70만원이 훌쩍 넘었다.
여기까지는, 쉽게 그려지는 그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상황이다. 희한한 건 그 다음이다. 얼마 후, 친구 어머니는 C넬 매장에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안내 전화를 받고, 그 백화점 9층식당가를 방문하셨다. 식사를 대접하기 전, 정말 이쁘게 생긴, 연예인 뺨치게 꽃같이 예쁜 20대 초반의 ‘꽃미남’들이 대거 그 음식점에 등장했다. 그리고는, 어머님들(나이로 보면 확실히 그 꽃미남들의 어머님뻘이시다.)의 한쪽 손을 다정하게 부여잡고, 이번에 새로 출시된 수분 크림을 손등에 콕콕 찍어 바르고는, 곱디 고운 꽃미남들의 손으로 어루만지더라는 것이다. 물론 “너무 촉촉하고 부드럽죠?” 라는 멘트와 함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님들 거의 대부분 그 수분 크림을 구매하셨다 한다. 모든 분들에게 그 크림이 필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분들이 감동받은 것은 확실한 듯하다. 갈비탕 1인분이 12,000원이던가 15,000원이었다는데, 그 크림은 한 개당 20만원이 족히 넘는 가격이니, C넬은 계산 한 번 야무지게 잘 했다.
옷은 분명 성교와 관련된 직접적인 성적 욕구의 충족에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옷은 성적 욕망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성적 욕구의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더욱 강한 욕망을 발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145쪽)
‘성적 욕구의 충족에 방해가 되는 ‘옷’ 때문에, 성적 욕구는 뒤로 미뤄지지만, 오히려 더욱 강한 욕망으로 발산된다‘니, 왜 의식주인가 했더니만, 이래서 의식주인가. 인간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의‘란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백화점 2층은 엘레강스 캐주얼, 3층은 디자이너 부띠끄, 4층은 영캐주얼, 5층은 남성복, 골프의류, 6층은 어린이옷, 7층은 주방용품, 8층은 영캐주얼이다. 맞다. 욕망을 표현하고 발산하고자 할 때, 가장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인간은 털갈이를 할 수 없으니. 맞다, 옷을 갈아 입을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욕망들은 그 힘이 너무도 강해서 하루아침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들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고 있는지를 절실히 느끼기 시작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더 이상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이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떠안기전에, 치유의 노력이 곧 시작될 수 있기를 말입니다. (432쪽)
자본주의에 의한 상처, 그리고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사실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이 다른 어떤 시간의 삶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413쪽)
지금 이 순간을 내일과 미래와 다음 기회와 바꾸지 말자.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자. 행복해하자.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