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몰랐나보다.

 

이응준 신작이 나왔다.

 

영원한 탐미주의자 이응준의 소설 미학이 빚어낸

여섯 편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 

 

읽고 싶다, 가능한 빨리.

 

비가 많이 온다.

 

바이올린 방과후 수업가겠다는 딸롱이를 만류했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에어컨 청소는 했는데, 한 번도 안 틀어놔봐서

아이들이 있는데 처음으로 에어컨 틀기가 망설여진다.

 

집안이 너무 눅눅하다.

 

비를 맞고 출근해, 에어컨 바람에 팔이 서늘해지던

어떤 여름이 생각난다.

 

비가 많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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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7-2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만간 살 거에요!! ㅎㅎ

단발머리 2013-07-22 13:57   좋아요 0 | URL
이힝~~
다락방님 다른 책들 땜에 바쁘지 않으세요?

천/천/히
 

1. 이번주 금요일엔 방학식

금요일, 토요일은 교회 여름 성경학교라 아이들은 이틀 내내 저녁까지 교회에서 지내고, 다음주부터는 방학. 성수기의 도래다.

2.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성수기 전주, 바야흐로 육아서를 읽어줄 때가 됐다. 방방 뛰는 아롱이, 할 일 많아 혼자 바쁜 딸롱이, 이해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일단 제목을 보고 생각한다. 무슨 내용일까.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사랑해 주겠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안아 주겠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이해해 주겠다.

아이들은 금방 쑥쑥 자란다.

아이를 키우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아이를 키우는 소중한 시간을 맘껏 누려라.

일단 이런 내용일거라 추측한다. 이런 내용이라 하더라도,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저자는 나보다 인생의 경험이 많으시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간들을 지나 오셨다. 지금 내가 힘들게, 가끔은 지겹게 여기는 육아의 시간들이 사실은 보석처럼 값진 시간이라는 건, 나보다는 저자에게 더 실감날 수도 있다. 아기띠를 메고 알록달록 기저귀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고등학생 외모의 엄마들을 보며 내가 그렇듯이.

3. 예상은 적중할 듯 했지만, 아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단락.

‘자녀에게 올인하지 마라.’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부모들에게 당부한다. 심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걸 자식에게 몽땅 쏟아붓지 말라고. (80쪽)

전업주부 생활 10년 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셔서 그런가.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신다. 자식에게 올인하지 마라. 그 다음도 만만치 않다.

‘아이는 손님처럼‘

아이를 손님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은 일. 드디어, 어느 날 손님이 떠나 버린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후련하고, 한편으로 서운하지만 무사히 떠나보냈다는 데서 오는 흡족함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무엇보다 손님을 치르는 기간 내내 나 역시 마음수업을 많이 한 것 같아 스스로에게 뿌듯하다. 아이도 결국 그렇게 떠나 버릴 사람이다. 아니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이다. (93-4쪽)  

두 가지 제안 다 내가 평소에 ‘지론’으로 삼는 육아원칙 아닌 육아원칙이다. 우리 집 애들을 남의 집 애들처럼 대하자.

다른 집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우리집 아이들도 남매끼리 곧잘 싸운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씸히 싸워요.”

그렇다. 얼마나 열씸히 싸우는지, 치고 받고, 물고 뜯고, 발로 차고 손으로 밀고, 아무튼 열심히 싸운다. 다른 집도 다들 그렇다지만, 그런 모습을 가까이서 볼라치면 금방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마련이다. 누나에게 까불까불 깝죽대는 아롱이 잘못이 75%, 지우개 가루만큼도 동생에게 양보 못 하겠다는 답답한 성정의 딸롱이 잘못이 20%, 그리고 날씨 탓 5%다. 말리다, 말리다 보니, 이젠 내게도 내성이 생겼나. 이렇게 말한다.

“(성의 없이) 어, 왜? 왜 그래? 뭐? 왜? 하지 마. **이, 하지 마. ##이, 하지 마.”

남의 집 애들에게 이야기하듯, 지나가는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듯 타이른다. 그러면, 꼭지가 확 돌아 애들 싸움 말리다 내가 애들과 싸우게 되는 비상상태는 피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자녀에게 올인하지 마라. 아이를 손님처럼 대해라. 저자는 전업주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 놀아주는 엄마, 올인한 엄마였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열심히 노는 애가 공부도 잘 한다고. 하지만.

난 한 번도 자식에게 올인한 적이. 없다.

난 한 번도 내 자식이 나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책을 읽지 말았어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이미 이렇게 살고 있구나. 자식에게 올인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손님 대하듯이 하면서. 이미 난 그렇게 살고 있구나. 너무 건성 건성 산건 아닌가. 급격하게 반성의 시간 찾아온다.

그러니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다는 것은 바로 아이가 상냥하고, 인사성 바르고, 성실하고 정직하면서도 늘 당당하게 키우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당당하게 자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결코 스스로를 찌질하게 산다고 비하하지 않는다. (87쪽)

아이를 어떻게 훌륭하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친한 언니들과 이야기할 때, ‘내 눈에도 예쁘고, 다른 사람 눈에도 예쁘게 키우고 싶다’ 했는데, 그게 먼저가 아닌 것 같다. 제일 중요한 건, ‘아이가 행복한 것’ 같다. 어떨 때, 아이가 행복할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때, 아이는 행복해한다.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때.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게 있다면 아이들 셋을 낳은 것, 그리고 마흔 넘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 그 두 가지다. 살다 보면 때론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댈 때도 많지만 그 때마다 난 스스로를 위로한다. 넌 그래도 두 가진 잘했잖아. (173쪽)

나도 스스로를 위로해야겠다. 난 좋은 엄마는 아닌데, 그래도 아이들을 낳았잖아. 내게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다면, 나도 잘한 일이 두 가지가 되는데. 나의 적성은 뭘까. 내가 잘 하는 일은 뭘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도 하지 않은 고민을 이제야 하고 있다. 내 적성은 뭘까.

4. 그냥, 그냥 하는 말이다.

나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박혜란 할머니의 육아관 많은 부분에 동감한다. 동물적 스킨십 부분이나, 아들과의 칼싸움 이야기 등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드는 생각은 이렇다.

저자가 며느리들에게 무한정으로 보내는 하트뿅뿅은 어쩌면 그녀들이 집에서 살림하기에는 아까운 재원들이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어떤 며느리는 자신의 아들보다 더 공부에 적성과 능력이 있고, 며느리 둘은 가족을 통틀어 제일 고학력자들이다. 저자는 그런 며느리들이 집에서 아이들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건데, 30년 이상 여성 운동을 하고 계신 한 여성학자의 애정 어린 시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녀가 생각지 않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그녀의 며느리들이 의외로 ‘전업주부’ 체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부도 많이 했고, 직장 생활도 해 보았지만, 사실은 집안을 돌보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끼는, 말 그대로 ‘살림의 여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다시 사회 생활을 해 보라는, 너의 능력을 살려 보라는 ‘시’어머니의 조언은, 너무 부담스럽다.

또 하나는, 그녀의 며느리들이 시댁에서 이렇게 존중받고, 말 그대로 호강하며 사는 것도 결국은 그녀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모두 시댁에서 대접받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녀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서 일했던 며느리들을 알아봐 주는 ‘시어머니’를 만났으니까. 그러니, 추석에 시댁에서 남자들이 설거지하고, 아이들 다 봐 주고, 며느리들은 시아버지와 카드 놀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오버일 수도 있다. 내가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 삐뚤어진 심성에, 자괴감에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이해해줘야 한다. 나는 사회적 약자, 제3의 성, 집에서 노는 사람, 돈 안 벌고 돈만 쓰는 사람. 난 아줌마다.

생각보다 결론이 우울하다. 마지막 문장 수정한다.

난 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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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3-07-1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아서를 읽고 나서는 꼭,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책 읽을 시간에 아이들이랑 놀아 줄걸 그랬나.
이 책 읽을 시간에 아롱이 책을 읽어 줄걸 그랬나.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육아서를 읽지 않고, 그 시간에 놀아주겠다. ㅋㅎㅎ

다락방 2013-07-18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분이 유명한 그 분! 이시군요.
옮겨주신 내용에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발머리님 의견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네요.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에 보면요, 공부 잘하는 줄리아 스타일즈가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결혼하는 걸 택하자, 그걸 무척 안타까워하며 교수인 줄리아 로버츠가 찾아가 설득을 해요. 왜 결혼을 하냐, 너는 공부를 더 해야 하는게 좋지 않겠냐, 너는 성적도 좋고 똑똑한데 앞으로 쭉쭉 진학하는게 좋지 않겠냐, 하고요. 그런데 줄리아 스타일즈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남자랑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고, 그게 내 꿈이다. 선생님은 공부를 더 하는 것만이 여자들이 발전하는 길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꿈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게 내 선택이고 내가 원한거다, 하고 말이지요.

저 역시 줄리아 로버츠처럼 그녀의 능력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가 크게 한 방 맞는 것 같았어요. 그래, 전업주부가 꿈일 수도 있는데, 어느틈에 나는 전업주부는 차선책으로만 여겼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 영화 생각이 나네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13-07-18 17:1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대문 사진 너무 이뽀~~~~요.

그런 영화가 있었군요. 그 쪽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우리보다 빨리 이뤄졌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한 여러 의견도 더 먼저 있었겠지요.

저는 저자의 며느리들이 다 '전업주부' 스타일인것 같다 뭐, 그런건 아니구요. 다만, 전업주부도 뭔가! 반드시! 일을 해야한다는, 돈을 벌어야한다는,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주위의 분위기가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제가 느끼는 부담을 그렇게 표현한거 같네요.

전업주부가 꿈일 수도 있지요. 한편으로는 전업주부 생활의 특장점도 있고요.

한 가지 질문은.
전업주부인데, 요리랑 청소, 정리정돈 잘 못 해도 되는 건지, 그걸 좀 묻고 싶어요.

그래도 되나요? 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3-07-18 17:17   좋아요 0 | URL
글쎄요. ㅎㅎ
제가 만약 전업주부가 된다고해도 저 역시 요리랑 청소 정리정돈은 완전 메롱인지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 괜찮지 않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대신 신랑이라도 좀 잘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 집이 좀 어느정도 형태가 유지될테니...쿨럭.

단발머리 2013-07-18 17:30   좋아요 0 | URL
저희 신랑은 치우진 않아도 어지럽히지는 않는다고, 본인이 극구 주장합니다.
아이들은 주로 어지럽히고.

저는 어지럽히면서 치우지 않습니다. ....쿨럭.

야클 2013-07-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좀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요즘들어 특히. 아직은 올인하고 있어요. ^^

단발머리 2013-07-18 17:38   좋아요 0 | URL
앗!! 야클님...

안녕하세요*^^* 야클님도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전 항상 고민고민이예요.

 

 

             

1. 나는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세계다.

소설 읽는 것만큼 좋아하는 건 ‘작가의 말’ 읽기다.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기발하고, 환상적인 아이디어의 소유자, 언어의 마술사가 내게 말을 건다. 평범하지만, 쉽게 알아듣기 어려운 ‘작가들의 말’이 난 좋다.

‘작가의 말’보다 더 좋아하는건, ‘수상소감’이다. 어떤 마음으로 이 소설을 시작했는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방황했는지 작은 목소리,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수상작품’보다 ‘수상소감’이 더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수상소감 쓰는 것도 연습하나.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야 만다. 특히 좋았던 건, 한겨레 문학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의 수상소감이다. 지금 한 번 더 읽고 싶은데, 책이 없구나.

2. 이미 ‘책머리에’서부터...

이 책은 누구에 대한 책인가. 니체의 책에 대한 책이다.

니체, 설명이 필요 없는 세기의 철학자.

그의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를 만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를 만나기 전에, 먼저 ‘고병권’을 만난다.

나는 “모든 사상가는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기 먼 시대의 감옥에 갇힌 ‘할아버지들’과 어떻게 참된 대화를 펼칠 수 있는가. 시대를 뛰어넘는 우정의 커뮤니케이션은 그들이 자기 사상의 정점에 서 있던 그런 건강 상태로 다가올 때에야 가능하다. 그들이 우리와 동시대인으로서의 건강을 누릴 수 있을 때, 그들도 ‘지금-여기’의 삶을 위한 사상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7쪽, 책머리에)

이건, 니체의 문장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아니다. 그를 설명하는, 그를 해체하고자 하는 고병권의 문장들이다. 한 문장, 한 문장 당당한 그의 문장들을 보고 있노라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그가 구사하는 문장들이 ‘철학자’의 문장이라는 것, 또 하나는 그가 구사하는 문장들이 너무나 ‘문학적’이라는 것. ‘책머리에’서 나는 직감하고 만다. 니체만큼, 차라투스트라만큼, 고병권도 내게 커다란 산으로 다가올 것임을 말이다.

3.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위대한 건강이란 하나의 건강이 아니라 수백 개의 건강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 하나의 진리, 하나의 이상을 찾는 고단한 수행의 과정이 아니라 수백 개의 건강을 즐겁게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위대한 건강을 지닌 자는 자기 안에 수백 개의 힘들을 갖는, 이른바 ‘힘들의 과잉 상태’를 즐기는 사람이다. (55쪽)

니체의 생애를 살펴볼 때, 질병이 없었을 때보다 질병이 있었을 때가 더 일상적이었다. 니체의 전 생애는 질병과의 ‘원치 않는 동거’였다. 특히, 두통과 근시가 심했다고 하는데, 1888년 말부터는 정신장애가 아주 심해졌다고 한다.

의사 자크 로제는 저서 『니체 신드롬』에서 1880년을 기점으로 니체의 상태가 울증이 지배하는 조울증에서 조증이 지배하는 조울증의 만성적 단계로 변했다고 말했다(40쪽). 이는 니체의 성격, 행동, 표현, 문체, 작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고병권은 인생 후반기 니체의 변화에 있어서, 1877년부터 1881년까지 니체를 괴롭혔던 질병에 대한 니체 자신의 평가, 즉 “가장 건강한 자만이 시도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는 니체의 말을 조금 더 신뢰하는 것 같다. 질병과 치유의 체험을 통해 니체가 자신의 삶을 치유하고 세계의 운명을 치유하는 철학적 원리들을 발전시켰다(58쪽)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힘들의 과잉 상태’는 다양한 자아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고 하는데, 이는 힘들의 배치가 바뀌면서 자아가 달라져 다양한 자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스스로를 ‘힘들의 과잉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그 방안으로 질병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고병권도 지적했듯이 니체 같은 예술적 수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아 분열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어려운 일이다.

고병권의 자세하고 세밀한 설명과 분석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부분이 어려웠다. 물론, 무지의 소치겠지만, 다양한 자아를 갖는다는 것 자체도 매우 힘든 일인데, 니체는 어떻게 다양한 자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질병의 여러 변화 과정을 스스로 조절했을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상인'과 ‘광인’의 경계를 어떻게 넘나들었을까. 이 부분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세상에 자기 작품을 사랑하지 않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마는 니체만큼 자기 작품과 그 속에 표현된 작가로서의 자신을 사랑하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자기가 써 온 작품들을 쭉 리뷰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라는 낯 뜨거운 제목을 달았을까. 심지어 그는 자기 책을 읽는 사람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 내 책 중의 하나를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드문 존경의 하나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60쪽)

웬만해서는 이렇게 말하기 힘들지 싶다. 보통 글을 쓸 때는, 글을 엮어 책을 낼 때는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가 쓴 글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책으로 엮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내놓고는 말한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리뷰를 쓰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리뷰를 쓰는가> 아니다, 안 되겠다.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 사는 것을 보니, 그 삶이 완전히 ‘가상 현실 체험하기’였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뒤에 벌어질 일에 관한 이야기로 삶을 탕진하고, 대지에 발 붙인 자들은 대지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천국’ 이야기로 날밤을 세운다. (138쪽)

 

 

물론 고대 사회에도 노동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어떻게 노동 없는 사회가 가능하겠느냐’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과 그것을 찬미해야 한다는 주장은 별개다.

이제 노예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로, 이른바 “만인의 동등한 권리” 또는 “인간의 기본권”,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권리, 또는 노동의 존엄과 같이, 예리한 시 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짓말로 하루 하루를 이어가야 한다. (「그리스 국가」, 175-6쪽)

 

 

국가는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국가의 모든 것이 가짜다. 잘 무는 버릇을 가진 국가의 이빨도 훔친 것이다. 그 내장도 가짜다. 너희가 국가라는 새로운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국가는 너희의 자랑스러운 두 눈을 매수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181쪽)

 

당연하다. 강신주가 생각난다.

인문학자가 비판해야 하는 세 가지, 종교, 자본, 국가에 대해, 니체는 지속적으로 비판한다. 특별히, 현대 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찬미는 우리 모두를 ‘노예’보다 더 한 ‘노예’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개미와 베짱이에 대한 고병권의 지적도 재미있다.

TV에 출현하지 않는 개미들, 즉 기적을 체험 못한 대부분의 개미들은 불행히도 우화 속 주인공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우화 속 개미와 똑같은 여름을 보내지만 똑같은 겨울을 맞이하지 못한다. 현실을 보면 개미와 베짱이 운명이 뒤바뀐 예가 휠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름철에 너무 많이 일한 개미는 겨우내 디스크에 걸려 누워 있고 보험 혜택도 못 받아 병원비 걱정으로 날을 세는데, 베짱이는 최신곡이 떠서 소위 잘 나가는 스타가 된다. (172쪽)

물론, 요즘은 사정이 조금 바뀌었다. 베짱이도 노력 없이는 ‘스타’가 될 수 없다. 언제 데뷔할지도 모른 채 고단한 연습생 시간을 견뎌내야 하고, 인기를 얻어 많이 알려졌다 해도 지속적인 관리와 노력 없이는 스타의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 연기 공부도 꾸준히 해야 하고, 휴식기에는 얼굴도 좀 고쳐야 하고, 남녀불문 몸매 관리도 해야 한다. 그래도, 베짱이는 개미보다는 나은데, 개미는 한여름 땡볕에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해도 남는 것이 없지만, 20대 초반의 아이돌들은 50억짜리 주택을, 아니 별장을 구입해서는, 서로 이웃사촌을 맺고는 사이좋게 행복하게 잘도 살더라. 역시, 개미보다는 베짱이. 요즘 대세는 베짱이다. 노래하자. 춤추자.

4. 예의상으로는

이 책을 읽었으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것이 예의겠지만서도, 비는 너무 많이 오고, 습도는 너무 높고, 그리고 곧 폭염이 몰려올 거다. 예의에 좀 어긋나더라도 이해해 주신다면, 이 책으로 도전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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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경선의 남편은 그녀의 칼럼을 읽지 못 하고.

아롱이 준비물로 신문을 챙기다가 한겨레신문 5월 16일자 임경선의 칼럼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수영 수업을 할 때, 읽어보려고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맨 먼저 보이는 글자는 <끝>, 그 날은 <임경선의 남자들> 연재 마지막 날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15개월 전, 임경선은 한겨레로부터 칼럼 연재 제안을 받았는데, 주제가 ‘내가 사랑한 남자들’이었다.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어떠냐 물었더니, 남편 왈, ‘사랑했던 남자들 얘기만 해서는 한계가 있지 않겠냐. 반년이라도 버티려면 ’사랑한 남자‘만이 아니라, 미워하거나 인상적이었다거나 다양하게 써야 하지 않겠냐’며 다만 자기 얘기는 빼줄 것을 점잖게 요청했다는 것이다. ‘사랑한 남자들’로도 반년은 족히 쓸 수 있었지만, 아무튼 그러마고 연재를 시작했고, 격주로 신문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남편은 칼럼이 실린 섹션만 고이 빼내, 손도 안 댄 듯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놓더라는 것이다. ‘읽지 않고 있다’는 그만의 표현이었다고.

2. 홍서트에서 생긴 일

지난 주 티켓은 남편 카드로 결제했다. ‘홍광호, 홍광호’를 연호하며 정신줄을 놓아버린 날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는 하지만, 남아있는 자리 중 그래도 괜찮은 자리를 골라주며, 결제를 향해 클릭, 클릭하는 모습이 뭐, 그렇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 전날 갑작스레 발생한 가정사도 있고 해서, 남편은 토요일 아침 8시부터 그 날밤, 그러니까 내가 집으로 돌아온 밤 11시까지 애들을 돌봤다. 차려놓은 아침을 먹이고, 김밥을 사 먹이고, 콩국수를 사 먹였더랬다.

<Hongcert>에 다녀와서 나는 페이퍼를 썼다. 기획사를 통해 공지되었다시피 <Hongcert>는 ‘홍광호’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콘서트였다. 홍광호는 몽골청년 '솔롱고'도, 로맨시스트 '유리 지바고'도, 냉혹한 ‘지킬’도, 귀족청년 ‘라울’도, 가면을 쓴 ‘팬텀’도, 넉살 좋은 ‘배비장’도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홍광호 팬들이 표현하듯 순수배우 그 자체, 인간 홍광호였다.

나는 사실 홍광호의 연기를 본 적이 없다. 뮤지컬 배우 홍광호의 뮤지컬을 본 적이 없다는 거다. 난 그냥, 그의 노래 소리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 그 콘서트에 가게 된 거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기 전부터 ‘빠순이’ 문화가 한반도 널리 널리 퍼지기는 했지만, 난 누가 보고 싶어, 누가 좋아서, 어디를 쫓아다닐 만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 때는 부지런히 쫓아다닐 곳이 있었고, 졸업 후에는 바로 결혼을 했다. 이제는 얘가 둘, 명실상부 제3의 성, 아줌마다.

그런 내가, 거금을 주고 티켓을 예매하고, 남편과 스케쥴을 조정하고, 싱가폴에서 사 왔으나 노출강도가 심해 입지 못했던 새 원피스를 꺼내 입고, 8cm의 샌들을 신고, 바야흐로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 나타났던 거다. 오직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그런데, 아뿔싸. 그의 노래를 듣던 중, 난 정말로 ‘홍광호’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에게 열광하는 4,000여명의 10, 20, 30, 40대 및 50대 여성들의 환호성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저번 페이퍼에 썼듯이, 내 귀엔 그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들으러 콘서트장에 갔는데,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그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독한 ‘외모 지상주의’라는 비난보다는 ‘콩깍지’ 이론을 선택한다.

 

 

 

3. 내가 쓴 페이퍼를 남편은 읽지 못 하고.

콘서트에 다녀온 후, 난 페이퍼를 썼다. 미친 가창력, 꿀성대, 뮤지컬계의 아이돌, 이런 이야기야 다 당연하고, 선곡은 물론, 피아노 연주도, 색스폰 연주도 너무 너무 훌륭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유머를 구사할 때도 자신만만한 모습이 항상 당당해 보이는데, 홍광호의 말 소리를 직접 들어본 바, 홍광호에게서는 ‘연극 배우’ 느낌이 났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좌측, 우측, 정면으로 90도 폴더인사를 날려주었다.

저번 페이퍼에서, 난 정말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썼다. 내게 일어난 중대한 심적 변화를 난, 내 서재, ‘사람 사는 이야기‘에 올렸다. (알라딘 서재에 ’일기 좀 올리지 말라‘는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건 알고 있지만, 난 사실, 다른 분들의 ’일기‘가 그렇게나 재미있다. 또 나름 생각하기에, 내 이야기는 ’그냥 일기‘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다라는 생각도 있고.) 암튼, 그 날 오후, 집에 돌아온 남편이 말했다.

“그가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떴다.“

헉.

 

 

내가 홍광호와 사랑에 빠지기 직전,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한 저 잔잔하고, 애잔한 문장을 남편은 아무런 느낌 없이 그렇게 외우고 있는 것이었다.

“뭐야? 읽었어? ... 읽었어?”

“로그인을 했는데, ... ”

왜 읽었어, 왜 읽었어를 5분간 목놓아 외치고, 다시 들어와 그 글을 읽어봤다.

남편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보여주기 싫은 글이었다. 임경선의 남편은 그녀의 칼럼을, 그것도 신문에 정기적으로 실리는 그녀의 칼럼을 읽지 않고 고이 고이 접어 그녀의 책상에 올려놓았다는데, 어째 울 신랑은 ‘알라딘 서재’에 올려진 내 페이퍼를 읽었단 말이냐.

그리곤 생각했다.

남편에게 보일 수 없는 글을, 어떻게 알라딘 서재에는 올리고 있나.

이건 <Hongcert> 아니, 홍광호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홍광호’에 대한 것이 가장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글들, 책에 대한 내 생각, 내 느낌, 내 감상, 내 결심을 표현한 내 글, 내 페이퍼를 난,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알라딘 서재에는 떡~하니 올려놓는 그 글들을, 남편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다.

하루를, 이틀을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임경선은 결혼 전 ‘사랑한 남자들’에 대한 글을 1년 넘게 신문에 연재하면서 남편이 읽었단 한들 어쩌라고~ 말하고, 임경선의 남편은 그녀의 칼럼을 읽지 못 하고, 나는 내가 ‘사랑하게 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알라딘 서재’에 올리고, 울 남편이 ‘우연히’ (남편은 내가 그렇게 ‘알라딘 서재’에 가서 놀아도 도통 관심이 없다. 아마, 이번 글도 실수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 글을 읽게 된 걸 알게 된 나는, 통탄해 마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쓰는가.

나는 무엇에 대해 쓰려 하는가.

무엇에 대해 쓸 때, 남편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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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1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1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서트에서 홍광호가 제일 먼저 부른 곡이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참 예뻐요. 내 맘 가져간 사람

 

참 예뻐요. 내 맘 가져간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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