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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언니, 이 얘기는 남편한테는 못 하겠어요. 책 살때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 제말 한 권만 다 읽어보고 사라고... 언니한테만 말해야겠어요. 소세키는 아무래도 제 스타일이 아닌가 봐요. 재미가 없어요.”
아름다운 나쓰메 소세키 시리즈 8권까지 구입을 완료한 상태에서, 『풀베개』만을 완독한 상태에서, 『산시로』를 읽다 포기한 상태에서 내가 말했다.
소세키 전작, 하루키 전작, 밀란쿤데라 전작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김연수도 혀를 내둘렀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도 “음, 그렇게 쉽게 읽히지는 않지.”라고 말하는 H언니가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언니는 『그 후』를 먼저 읽어보라 했다. 나는 소세키 작품은 ‘『산시로』-『그후』-『갱부』’의 순서로 진행해야 하기에 그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나쓰메 소설 6권은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언니의 추천대로 『그 후』를 읽기 시작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이런 문장들에서 나는 무릎을 탁 하고 친다. 이런 문장을 쓰는 소세키를 두고 스타일 운운했던 사람은 누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소세키를 좋아한다.
그런 형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극이 없는 대신에 부담스럽지 않고 마음이 편해 좋았다. (83쪽)
다이스케의 입장에서 세이고는 손잡이가 없는 주전자 같은 존재로, 어느 쪽으로 손을 내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85쪽)
“젊은 사람이 그런 실패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실성과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게다.”
“성실성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49쪽)
다이스케는 매사에 서두르거나 매이는 일이 없다.
“자네 전화 좀 걸어주게. 집으로”
“아, 본가에 말입니까? 무슨 말을 하죠?”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찾아뵙지 못하고,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반드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게.”
“어느 분께 말씀드리죠?”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셔서 할 말이 있다고 잠깐 들르라고 하시는데...... 뭐, 꼭 아버지가 아니어도 되니까 아무에게나 그렇게 전하게.” (26쪽)
내가 좋아하는 건 소세키만이 아니다. 나는 다이스케도 좋아한다.
그는 언제나 무사태평이다.
“돈 버는 일이 싫다면 그걸로 좋다. 돈을 버는 것만이 일본을 위한 일은 아닐 테니까. 돈을 벌지 않아도 좋아. .. 그러니까 뭔가 하려고 노력해 보거라. 국민의 의무로서 말이야. 이제 너도 서른이 아니냐.” (48쪽)
돈 벌지 않아도 좋으니 무엇이든 해보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네, 네, 대답하기는 해도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대해서는 자신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도 너무 무사태평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랬던 다이스케가, 소극적이고, 내면지향적이며, 유약해 보이는 다이스케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의 변화는 가히 ‘변신’이라고 할 만하다.
다이스케는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아내 미치요를 돕고 싶어한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가여워하며, 그녀를 위한다.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한다.
다이스케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건 그녀와 함께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 같은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다이스케는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있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말이다.
한동안 말없이 미치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뺨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지더니 평소보다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제야 다이스케는 미치요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로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들이 무의식중에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 데는 2, 3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227쪽)
비슷한 장면이 떠오른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
그들은 잠시 서 있었다. 여자는 닫힌 문이었고, 남자한테는 열쇠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미소는 사라졌다. 긴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찰스는 진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는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뛰어내리고 싶다고,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기만 하면 그녀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열띤 감정으로 호응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마침내 그가 속삭였다.
“다시는 단둘이 만나서는 안 되겠소.” (262쪽)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두 사람이 함께하는 순간에 그들은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가장 흔한 일이며, 가장 희귀한 일이다. 이 일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가장 저급한 이야기이며, 또한 가장 고차원적인 이야기이다. 가장 통속적인 이야기며, 가장 고상한 이야기이다. 뻔히 그 끝이 보이는 이야기이며, 그 끝을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자연스러운 애정에 근거한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제 와서 적당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세속적인 형에게 동정을 받으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선택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 만족감을 이해해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 사람들도 모두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어 태워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자신을 빨리 태워 없애기를 간절히 바랐다. (322쪽)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는 아버지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돌봐주는 형도, 편안한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세상도, 이제 그에게는 모두 적일 뿐이다. 자신을 이해해 줄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다이스케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다. 불길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
평소의 다이스케가 이런 경우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미치요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불편을 피하면서 아버지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결혼을 승낙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이스케는 그런 식으로 쌍방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기란 쉬웠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이제 와서 울타리 밖으로 몸을 반만 내민 채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284쪽)
결국, 다이스케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던 이전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로 한다.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쌍방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고, 편안하며, 쉬운 일이었지만, 미치요를 선택한 지금,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그는 그 모든 불편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한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 그에게 중요한 단 한 사람, 미치요를 위해서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다.
옳다, 옳지 않다 했을 때, 그의 행동은 옳지 않다. 바르다, 바르지 않다 했을 때, 그의 행동은 바르지 않다. 하지만, 조용하고 여유롭던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행복했던 이전의 삶을 뒤로 하고, 일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서둘러 일어서는 다이스케는 의외로 의연하다.
휘청거리며 미치요에게 다가서는 다이스케. 안쓰러운 그의 뒷모습 때문에 마음 한 켠이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