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렸다!

장동건이 한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평생에 걸쳐 ‘잘 생겼다’라는 말을 들었을텐데, 이제 그런 말이 지겹지 않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장동건은 ‘잘 생겼다’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지겹지 않다고 말했다. 그 입장이 안 되어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럴 것 같다는데 크게 동감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 특별히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러 번 들어도 지겹지 않은 말은 이 말이 아닐까 싶다.

수학자들이나 음악가들이 어렸을 때 또는 젊었을 때보다 더 뛰어난 이론을 만들었다거나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일은 굉장히 드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집니다. 특히 산문가들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의 경우 말입니다. 그렇다는 건 글쓰기가 재능에 달린 게 아니라 많은 부분이, 압도적 부분이 훈련에 달려 있다는 걸 뜻하는 것입니다. 재능도 필요하지만,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42쪽)

아이들을 키우면서 ‘타고난 재능’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떤 일을 한다는 것, 그것도 곧잘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눈앞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에만 방점을 찍었을 때, 나도 모르게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글쓰기의 많은 부분, 압도적 부분이 훈련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희망을 준다. 다시 두 손을 불끈 쥐게 되고,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라는 김동률 노래를 내 노래로 착각하게 된다. 물론, 이 ‘훈련’이 어떤 훈련인지, 그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 테다.   

 

2. 뜻하지 않게 등장해 버리고

한자어와 고유어가 결합해서 복합어를 만드는 예들 가운데는 동의중복 현상을 보이는 말들이 있습니다. ... 이런 잉여적 표현은 어휘 수준, 특히 명사에서 가장 흔합니다. 예컨대 외갓집, 처갓집, 산채나물, 돌비석, 손수건, 모래사장, 단발머리, 한옥집, 양옥집, 삼월달, 낙숫물, 새신랑 따위가 그 예입니다. (167쪽)

뜻하지 않게 등장해 혼자 웃고, 조용히 밑줄을 긋는다. 나는 잘 웃는 사람이다.

 

3. 실전편

1. ‘의’가 거듭 반복될 때는 대체로 하나나 둘을 빼는 것이 좋습니다. ... 예컨대 ‘한국의 문화’보다는 ‘한국 문화’가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일본식 표현입니다. (123쪽)

2. 여격조사 ‘-에게’는 유정명사, 즉 사람을 포함한 동물 뒤에 쓰고, ‘-에’는 무정명사, 곧 식물과 무생물 뒤에 씁니다. (164쪽)

3. 어떤 조사든, 주격 조사든 목적격 조사든 보조사든, 빼도 의미를 흩뜨리지 않는다면 빼라! 간략함, 간결함, 그게 좋은 문장의 미덕입니다. (221쪽)

4. ‘~하는 이유는 ~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오문입니다. 그런데 저런 표현을 굉장히 많이 씁니다. ... 꼭 ‘이유는’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으면 ‘이유는 ~에 있다’거나 ‘이유는 ~ 것이다’거나 ‘이유는 ~ 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문법에 어긋나는 한국어가 됩니다. (257쪽)

 

4. 지금 그리고 여기

그러면 한국어는 어디에 속하는가?... 원시 한반도에서 쓰이던 정체불명의 언어에 알타이어가 포개져 이뤄진 것이 한국어라는 주장도 있고요. 아무튼 아직까지는 그 어느 설도 입증되지 않았으니, 한국어는 말하자면 고아 언어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언어인 거지요. 세상에 아무런 친척도 없는 언어 말입니다. ... 한국어는 사실상 고아 언어입니다. 한국어와 친척관계에 있는 언어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325쪽)

세계화의 거센 돌풍 아래 영어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세계 공용어가 된지 이미 오래다. 인터넷 상에서도 영어로 작성된 문서의 개수는 기타 모든 언어로 작성된 문서의 개수보다도 더 많다(고 들었다). 영어를 공용화해야한다는 주장은 신문 사설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데, 놀랍고 신비한 이런 칼럼을 쓰는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외국어는 11세 이전에 마스터해야만 하고, 그 외국어는 영어이어야만 한다.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은 이미 외국어 학습의 적기를 놓쳐 버렸으니, 방법은 오직 하나다. 자녀들을 미친 사교육, 조기교육 시장으로 내모는 것이다.

영어,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도 할 말이 좀 있는데, 그래서, 이렇게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실상은 영어로 인한 고통과 수난, 그리고 말도 되지 않은 콩글리시로 인한 치욕의 역사가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영어를 잘하게 되는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가 아니고, 아니며,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 나는 위의 문단, 위의 문장이 참 좋았다.

한국어는 고아언어입니다.

고아라는 단어가 주는 처연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용하는 한국어, 내가 말하는 한국어는 고아언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언어다. 친척 관계에 있는 언어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말 그대로 고아언어, 하늘에서 온 말, 천상의 언어다.

북한주민, 해외동포를 합치더라도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1억명이 넘지 않을 것이다. 근래의 가파른 출산율 저하로 보아 한국인의 인구가 눈에 띄게 감소하는 건 이제 눈앞의 현실이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말이다. 내 위치에서, 내 자리에서, 한국어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말하는 것이다. 더 아름답고 더 유려한 문장을 쓰면 좋겠지만, 만약 그게 어렵다면, 그 곳까지 도달할 실력과 체력, 훈련이 턱없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다. 양으로 승부를 지어야겠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말해야겠다.

 

5. 기쁨의 나팔

이번 설에는 어머님이 세뱃돈을 안 주셨다. 아들들은 안 주시더라도 손자들이랑 며느리들은 꼭 챙겨주셨는데, 올해는 며느리들도 패쓰!라고 하셨다. 다행히 엄마가 세뱃돈을 많이 주셔서 상쾌한 기분으로 교보문고로 향했다. (그렇다. 나는 아직 철이 안 들었다.) 시댁과 친정이 모두 서울에 있어 연휴 내내 서울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인지, 아니면, 연휴를 맞아 책을 보러 나온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교보문고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계산대마다 책을 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로 지나갈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딸롱이는 교과서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아무 책도 사지 않았고, 아롱이는 『마법천자문 30 : 눈을 떠라, 전설의 수호자! 용 룡』을 샀다. 내가 사고 싶었던 필립로스의 책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자넨 날 수집했네.”라는 기막힌 문장을 앞세운 『EXIT GHOST』를 구입했다.

 

 

 

 

 

 

 

 

 

화면으로만 보고 원서를 구입했을 때 실망한 경우가 많아 알라딘에게는 메롱!이지만 원서는 직접 살펴보고 구입한다. 자간도 넓고 행간도 넓다. 책사이즈도, 표지도, 두께도 모두 적당하다. 마음에 든다. 이제 읽을 일만 남았는데, 고아언어 한국어도 사랑해줘야 하고, 필립 로스의 문체도 제대로 느껴야 해서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개학’이라 이름붙여진 기쁨의 나팔은 3월 2일에나 울려 퍼질 예정이다. 아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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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3-0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학 이라 이름붙여진 기쁨의 나팔은 오늘 울려퍼졌겠네요, 단발머리님!! >.<

단발머리 2015-03-03 10:53   좋아요 0 | URL
아, 어제 다락방님 계신곳까지 나팔소리 들렸나 모르겠네요. 어제 제가 나팔 크게 불었구요.
오늘의 환희의 나팔, 크게 불어봅니다...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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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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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들을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거의 정해져 있다. 1) 아이들의 학업에 대한 정보 : 어느 학원이 좋다더라, 어느 학원 무슨 선생님이 좋다더라 2) 남편 뒷담화 : 우리남편은 집에 오면 이렇다, 저렇다 3) 담임선생님 : 담임선생님이 몇일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더라. 이러저러하셨다더라 4) 홈쇼핑 : 나도 그걸 저번에 샀는데 별로였다. 00를 광고하던데 정말 사고 싶다. 이런 모임에서 책이야기하면...

전업주부 엄마들은 정말 착해서 책이야기를 했다고 때리지는 않겠지만, 퀭한 눈빛. 넌 뭐야, 눈빛. 그런 눈빛이 예상된다.

현실에서 책수다가 가능할까. 나는 책에 대한 이야기,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언니가 두 명이나 있다. 나는 책수다가 가능한 사람이다.

 

 

 

이동진과 김중혁. 두 남자의 책수다는 유쾌하다. 진지한 논의 사이사이 진한 농담이 오고가고, 말꼬리 잡기 유머도 단골 손님이다. 오른쪽에는 썰렁개그, 왼쪽에는 어색함을 무기로 책속을 종횡무진한다. 전문가임에 분명한 두 사람이, 전문가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전문가적 소견을 편안하게 풀어간다. 귀로 들었을 때도 분명 즐거웠지만, 책으로 읽으니 훨씬 더 진지하게 다가온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읽다가 포기한 책이다. 다시 도전해 보려했으나, 아직은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파이이야기』은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다. 내용을 알고 있는 책 읽기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역시 도전이 요청되는 책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시험을 마치고 답안지의 답을 맞추는 심정으로 듣고, 또 읽었다. 특히 밀란 쿤데라나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서 쉴새 없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에게 빠져있는 여중생들 같았다.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역시 『속죄』다. 팟캐스트가 방송되고 한참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었고, 알라딘에서도 5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했었다. 그 때, 책을 사지 않은 것이 내내 후회된다.

 

 

《속죄》는 단지 저릿한 로맨스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역사가 어지러운 분수대 옆에서 차갑게 고개를 내저을 때, 문학은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깨어진 이야기의 조각을 건져낸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고쳐 쓰여야 한다. _이동진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은, 한계이자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 문장들 때문에 《속죄》라는 소설의 의미는 우주만큼 넓어진다. _김중혁 (73쪽)

 

책을 고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놓은 책들, 읽어야할 책들을 기역, 니은 순으로 읽을 수도 없고, 출간연도에 따라 읽을 수도 없다. 어디까지나 책은 끌리는 대로 읽게 되어 있다. 읽다가 이게 아닌가벼, 싶으면 책장을 덮게 되고, 이 책을 읽다가도 저 책이 손에 잡히면 그 책을 먼저 읽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정말 훌륭한 책이다.”, “다시 읽어도 정말 좋았다.”라고 연거푸 말하는 이 두 사람의 진정성어린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 책을 손에 들 수 밖에 없다.

결국에는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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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6 0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6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렇게혜윰 2015-02-16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속죄를 사두었던 기억이 스믈스믈^^;;;

단발머리 2015-02-16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그 때 못 사둔것이 내내 아쉬워요.
[속죄]는 가끔 다시 읽고 싶더라구요.
읽을 때는 조금 힘들었는데, 기억이 자주 나요. 특히 ㅅㅈ장면이요... ㅎㅎㅎ

2015-02-16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8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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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이유 - 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밥장 글.그림.사진 / 앨리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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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가지고도 오래도록 펼치지 않았던 건 작가 소개 때문이었다.

 

일레스트레이터. 작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뒤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다가 어느 날 그림에 빠졌다. ...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며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그의 여행기를 읽지 않아도, 그의 이력 두 번째 줄에서 세 번째 줄까지의 이야기만 해도 벌써 책 한권이 나올법하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하다. 이 책은 그의 여섯 번째 책이다.

이미 성공한 사람, 이라는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한 가지의 재주만 있더라도, 단 하나의 재능만 있더라도 그것은 축복받은 일이며, 축하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작가는 웬지 시작부터가 좋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을 읽기 시작한다. 에세이 분야 15기 신간평가단에 빛나는 나, 단발머리는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나의 일이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선물 받은 사랑의 묘약, 파니스 마르티우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물론, 나는 세계 지도를 확인했다. 헬싱키와 발트 해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그 에스토니아라고 하는 나라는, 핀란드 바로 밑에 있다.) ‘파니스 마르티우스’는 라틴어로 ‘3월의 과자’라는 뜻인데 아몬드, 설탕, 달걀을 섞어 만든 마지팬이라고 한다. 사랑의 고통을 아물게 하고 기억을 되살려주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61쪽) 사랑의 묘약 이야기를 하면서 지은이는 밸런타인데이에 대한 이야기도 꺼낸다. 그것 자체가 특별한 역사가 있었다기보다는 은근슬쩍 초콜릿 파는 사람들이 만든 기념일이 아닌가 싶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밸런타인데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본 없는 이벤트라고 애써 무시해봐야 사랑받을 기회만 놓칩니다. 밸런타인데이가 지나면 화이트데이, 그 뒤로 생일, 100일, 200일, 크리스마스까지 챙겨야 할 날들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행을 떠날 때면 굳이 무슨 날이 아니어도 면세점에 들러 여성 화장품과 향긋한 차를 고르고 명품 가방 매장을 영혼 없이 기웃거려야 합니다. 만약 그게 싫어서 못 살겠다, 때려치우겠다면 뭐 나 홀로 지내야죠. 그뿐입니다. 하지만 뉴기니의 극락조도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 반짝거리는 유리조각을 주워 모은다는 것만은 알아두면 좋겠군요. (64쪽)

 

바로 이 지점, 64쪽에서부터 나는 작가를, 밥장을 좋아하게 됐다. 결국 어떤 책을 읽느냐는 것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소설이라면 작가가 그려낸 인물에 애정을 느껴야만 끝까지 읽을 수 있고, 여행기라면 작가 그 사람을 좋아해야만 마지막 책장까지 넘길 수 있다. 이 단락을 읽고 나서, 나는 이 여행기를 더 읽어나갈 흥미를 느꼈다. 나를, 화장품과 향수 선물 받기 좋아하는 속물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뉴기니의 극락조도 수컷이 가져다주는 반짝거리는 유리조각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나.

여행에 대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홉 가지이다. 행운, 기념품, 공항+비행, 자연, 사람, 음식, 방송, 나눔, 기록. 몰스킨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는것보다 더 자세했다. 나도 집에 놀고 있는 몰스킨을 몇 개 가지고 있는데, 밥장이 몰스킨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몰스킨에 쓸 수 있는 무언가, 그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부러웠다.

 

 

 

 

 

 주요 키워드는 여행과 뉴기니의 극락조와 몰스킨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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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02-1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씨잘 쓰는 사람 부러워요, 그래서 그림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나봐요,

단발머리 2015-02-16 00:2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글씨 잘 쓰는 사람 부러워요. 그림 잘 그리는 사람도 부럽구요.
그리고 서니데이님처럼 바느질 잘 하는 사람도 부럽습니당^^

서니데이님~ 밤이 깊었는데 아직도 안 주무시고 뭐하시나요?

서니데이 2015-02-1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느질은 저희 엄마 솜씨구요, 저야 뭐^^; 이것저것 생각할 일이 많아서 한동안 잠을 잘 못자는 날이 많네요^^

단발머리 2015-02-16 02:00   좋아요 1 | URL
아... 이것저것 생각할 일이 걱정거리는 아니었음 좋겠어요.
저는 잠이 너무 많은게 생각할 일인데, 오늘은 밀린 리뷰때문에 2시를 보네요.
서니데이님, 굿밤이요*^^*

아무개 2015-02-16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그림으로 밥먹고 산다니
킁....
부러우면 지는건데 부럽긴 하군요.

단발머리 2015-02-16 08:26   좋아요 0 | URL
이 분과 세트로 고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역시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신 박시백 화백이 생각나네요.
저는 이미 졌어요. 끄응~~~

라로 2015-02-1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네요!!! 근데 별점이 3개????

단발머리 2015-02-18 20:30   좋아요 0 | URL
원래는 별3.9개구요. 제가 별점에 좀 짠 면이 없지 않다는 걸 부득불 인정해야겠네요.
4개는 완전 좋아하는 책이구요. 5개는 일년에 10개 미만인 관계로다가....^^
 
문학동네 81호 - 2014.겨울 - 창간 20주년 기념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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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

김훈이고, 김훈의 작품이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수 있겠는가. 내가 더한다고 해서 그의 완벽함이 더욱 빛나겠는가. 내가 뺀다고 해서 그의 완전함이 손상되겠는가.

나는 그냥 읽고, 읽으며, 또 읽을 뿐이다.

 

‘나’는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9급 준비생, 구준생이다. 흉어가 계속되자 4.5톤짜리 배를 팔아 수협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서울 이주비용을 대주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 덕분에 ‘나’는 구준생 나름으로는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영자’는 고시텔 집현전에서 일 년 반 동안 동거한 여자다. ‘나’는 거주하고 있던 방의 보증금이나 월세를 분담시키지는 않았고, 관리비만 내는 조건으로 그녀와 동거에 합의했다. 섹스 문제는 구체적으로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교감이 생기는 대로 이루어질 거라 예상했다.

저녁 여섯 시 무렵에는 시장한 구준생들이 컵밥을 파는 노점 앞에 줄을 섰다.

카레라이스, 제육덮밥, 김치볶음밥은 이천원이었고 그 위에 계란프라이를 얹은 크라운컵밥은 이천이백원, 계란프라이 위에 햄버거 한쪽을 더 올린 로열컵밥은 이천육백원이었다. 라면 스프를 푼 국물을 일회용 컵에 담아주었다. 노점마다 ‘국물 리필’이라는 팻말을 천막 끝에 매달았다. 인공조미료와 식용유를 끓이는 냄새가 퍼져서, 거리는 시장했다. (30쪽)

 

저녁 여섯 시 무렵에 시장한 구준생들이 컵밥을 파는 노점 앞에 줄을 선다.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 내일을,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암담함. 늙으신 부모님, 주변의 기대 그리고 가벼운 주머니. ‘국물 리필’ 팻말 밑에 줄 선 사람들, 줄 선 청춘들.

'나'는 9급 지방 행정직 시험에 합격해서 경상북도 내륙 산골 마장면 면사무소로 내려왔다. 영자가 노량진에 아직 남아 있는지, 노량진을 떠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노량진을 떠날 때 영자에게

- 나, 간다. 잘해.

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응답이 없었다.

영자가 문자를 봤는지 안 봤는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노량진에서 뚝불이라도 함께 먹고 헤어질걸‧‧‧‧‧‧ 고속버스가 도청 소재지에 닿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데없이 떠오르는 그런 생각에 나는 당혹했다. (34쪽)

 

도청 소재지에 닿아서야, 그렇게 멀리 와서야 영자를 생각해낸 ‘나’가 너무 야속하다. ‘나’는 고시텔에서 영자와 일 년 반 동안 동거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동거했다 하더라도, 계약하에 이루어진 관계라 하더라도 말이다. 함께 지낸 시간들이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축하해주지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도 않는다. 한 사람은 붙고, 한 사람은 떨어졌다. 방을 뺄 날짜를 말해주고, 짐을 챙겨 나간다. 서로에게 인사하지 않는다. 같이 밥 먹지 않는다.

먹기를 마치고 카운터에서 사천오백원을 계산할 때 영자와 눈이 마주쳤다. 영자는 떡라면 냄비를 기울여서 국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나는 영자가 먹은 떡라면 값 이천오백원을 함께 계산했다. 내가 영자의 밥값을 내주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9급 시험이 가까워서 둘 중에 누가 붙고 떨어지건 간에 곧 동거를 끝내야 할 수도 있으리라는 예감이 그런 자선심을 발동시킨 모양이다. 영자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 잘 먹었어. 고마워.

라고 영자는 말했다. (42쪽)

 

‘내’가 딱 한 번 영자의 식사비를 내주는데, 그 때도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은 게 아니다. 배를 팔아 돈을 보낸 아버지가 있는 ‘나’는 사천오백원짜리 뚝불을 먹고, 마을버스 차부 옆에서 순댓국집을 하는 엄마가 있는 ‘영자’는 이천오백원짜리 떡라면을 먹는다.

두 사람은 같이 밥 먹지 않았다.

마장면에서, 단풍 든 숲을 바라보면서 나는 때때로 영자를 생각했는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40쪽)

 

이 단편의 결말과 상관없이, 나는 ‘나’가 영자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영자를 찾아 노량진에 온 ‘나’는 이제 노량진을 영영 떠나려는 영자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회하게 된다. 이제 ‘나’는 ‘내’가 영자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지만, 영자는 지금 자신이 왜 ‘나’와 다시 만나게 됐는지 알지 못 한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지나쳐가려는 영자에게 ‘나’는 말한다. 우리 밥이라도 한 번 먹자.

내켜하지 않는 영자를 끌고서 식당에 들어선 ‘나’. ‘나’는 영자에게 묻지도 않고 주문을 한다.

아주머니, 여기 ‘뚝불 2개’요.

 

 

 

<출처 : 네이버블로그 땅콩쿠키의 달달한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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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2-1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지막 결말 참 멋지네요 뒷이야기를 듣는듯^~^

단발머리 2015-02-11 08:34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런가요? 저의 소망을 간절히 담은 결말인데요.
허접하기는 하지만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저로서는 나름 마음에 드는 결말이예요.
김훈 작가님께는 비밀입니다~~
반가워요, 해피북님*^^*

라로 2015-02-1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뚝불 사진 오려주시는 줄 알았더니~~~.^^;;;;

단발머리 2015-02-11 08:40   좋아요 0 | URL
헤헤헤...
어떻게, 뜨뜻한 걸로다가 한 장 올려볼까요? :)

라로 2015-02-12 16:46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ㅎ 올리셨네요!! 그러니 글이 더 잘 느껴집니다요!!!^^

단발머리 2015-02-13 10:02   좋아요 0 | URL
아롬님이 예쁘게 봐주시니 매우 기쁨니다요!!!^^

다락방 2015-02-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이 책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김훈의 소설 말입니다.

단발머리 2015-02-11 11:56   좋아요 0 | URL
네.... 네개 정도 읽었는데, 모두 다 좋더라구요.

김영하님 작품도 좋구요, 성석제님 작품도, 박현욱님 작품도 좋아요.
두껍다는 단점 빼고는, 완전 좋은 단편이 수두룩 빽빽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5-02-1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계속 눈팅은 했었는데,
아무래도 댓글은 처음 남기지 싶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꾸벅 (__)

단발머리 2015-02-11 12:3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양철나무꾼님~~
처음 댓글 감사합니다*^^*

많이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저야말로 양철나무꾼님 서재에서 좋은 글 많이 읽고 있어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꾸우벅 (__)

icaru 2015-02-1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렇게 해서, 김훈 단편 하나를 단발머리표 썸머리로~ 촵촵,,, 꿀꺽 소화~
시키지도 않은 작은 고백을 하자면,,, 저는 작가 김훈 님의 글은 십년전 교과서에 실린 자전거기행이 전부예요..
아아... 밥벌이의 괴로움도 있군요.. ㅎㅎ 근데 그건 김훈은 컴맹이고, 운전면허도 없다,, 라는 밖에 기억 나는게 없는거있지요. ㅠ,ㅜ)
밑천 드러나는 이런 고백~~ ㅎㅎ
아,,뚝불 참 맛나보인다~

단발머리 2015-02-14 09:19   좋아요 0 | URL
김훈님은 컴맹이고 운전면허도 없어야지요. 사람이 너무 가진게 많으면 안 됩니다.
조금 부족한 구석도 있고 그래야지요.ㅋㅎㅎ

저는 <자전거기행> 새로 나왔을때 준비시켜 놓았는데 아직 시작을 못했어요.
역시, icaru님은 십년 전에. 주로 icaru님은 십년전에... 진심 부러워요. *^^*
 
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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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 얘기는 남편한테는 못 하겠어요. 책 살때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 제말 한 권만 다 읽어보고 사라고... 언니한테만 말해야겠어요. 소세키는 아무래도 제 스타일이 아닌가 봐요. 재미가 없어요.” 

아름다운 나쓰메 소세키 시리즈 8권까지 구입을 완료한 상태에서, 『풀베개』만을 완독한 상태에서, 『산시로』를 읽다 포기한 상태에서 내가 말했다.

소세키 전작, 하루키 전작, 밀란쿤데라 전작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김연수도 혀를 내둘렀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도 “음, 그렇게 쉽게 읽히지는 않지.”라고 말하는 H언니가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언니는 『그 후』를 먼저 읽어보라 했다. 나는 소세키 작품은 ‘『산시로』-『그후』-『갱부』’의 순서로 진행해야 하기에 그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나쓰메 소설 6권은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언니의 추천대로 『그 후』를 읽기 시작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이런 문장들에서 나는 무릎을 탁 하고 친다. 이런 문장을 쓰는 소세키를 두고 스타일 운운했던 사람은 누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소세키를 좋아한다.

그런 형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극이 없는 대신에 부담스럽지 않고 마음이 편해 좋았다. (83쪽)

다이스케의 입장에서 세이고는 손잡이가 없는 주전자 같은 존재로, 어느 쪽으로 손을 내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85쪽)

 

“젊은 사람이 그런 실패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실성과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게다.”

“성실성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49쪽)

 

다이스케는 매사에 서두르거나 매이는 일이 없다.

“자네 전화 좀 걸어주게. 집으로”

“아, 본가에 말입니까? 무슨 말을 하죠?”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찾아뵙지 못하고,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반드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게.”

“어느 분께 말씀드리죠?”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셔서 할 말이 있다고 잠깐 들르라고 하시는데...... 뭐, 꼭 아버지가 아니어도 되니까 아무에게나 그렇게 전하게.” (26쪽)

 

내가 좋아하는 건 소세키만이 아니다. 나는 다이스케도 좋아한다.

그는 언제나 무사태평이다.

“돈 버는 일이 싫다면 그걸로 좋다. 돈을 버는 것만이 일본을 위한 일은 아닐 테니까. 돈을 벌지 않아도 좋아. .. 그러니까 뭔가 하려고 노력해 보거라. 국민의 의무로서 말이야. 이제 너도 서른이 아니냐.” (48쪽)

 

돈 벌지 않아도 좋으니 무엇이든 해보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네, 네, 대답하기는 해도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대해서는 자신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도 너무 무사태평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랬던 다이스케가, 소극적이고, 내면지향적이며, 유약해 보이는 다이스케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의 변화는 가히 ‘변신’이라고 할 만하다.

다이스케는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아내 미치요를 돕고 싶어한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가여워하며, 그녀를 위한다.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한다.

다이스케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건 그녀와 함께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 같은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다이스케는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있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말이다.

한동안 말없이 미치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뺨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지더니 평소보다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제야 다이스케는 미치요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로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들이 무의식중에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 데는 2, 3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227쪽)

 

비슷한 장면이 떠오른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 

 

그들은 잠시 서 있었다. 여자는 닫힌 문이었고, 남자한테는 열쇠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미소는 사라졌다. 긴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찰스는 진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는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뛰어내리고 싶다고,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기만 하면 그녀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열띤 감정으로 호응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마침내 그가 속삭였다.

“다시는 단둘이 만나서는 안 되겠소.” (262쪽)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두 사람이 함께하는 순간에 그들은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가장 흔한 일이며, 가장 희귀한 일이다. 이 일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가장 저급한 이야기이며, 또한 가장 고차원적인 이야기이다. 가장 통속적인 이야기며, 가장 고상한 이야기이다. 뻔히 그 끝이 보이는 이야기이며, 그 끝을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자연스러운 애정에 근거한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제 와서 적당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세속적인 형에게 동정을 받으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선택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 만족감을 이해해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 사람들도 모두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어 태워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자신을 빨리 태워 없애기를 간절히 바랐다. (322쪽)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는 아버지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돌봐주는 형도, 편안한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세상도, 이제 그에게는 모두 적일 뿐이다. 자신을 이해해 줄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다이스케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다. 불길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

평소의 다이스케가 이런 경우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미치요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불편을 피하면서 아버지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결혼을 승낙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이스케는 그런 식으로 쌍방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기란 쉬웠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이제 와서 울타리 밖으로 몸을 반만 내민 채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284쪽)

 

결국, 다이스케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던 이전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로 한다.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쌍방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고, 편안하며, 쉬운 일이었지만, 미치요를 선택한 지금,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그는 그 모든 불편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한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 그에게 중요한 단 한 사람, 미치요를 위해서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다.

옳다, 옳지 않다 했을 때, 그의 행동은 옳지 않다. 바르다, 바르지 않다 했을 때, 그의 행동은 바르지 않다. 하지만, 조용하고 여유롭던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행복했던 이전의 삶을 뒤로 하고, 일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서둘러 일어서는 다이스케는 의외로 의연하다.

휘청거리며 미치요에게 다가서는 다이스케. 안쓰러운 그의 뒷모습 때문에 마음 한 켠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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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2-09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들이 무의식중에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 데는 2, 3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아...옛추억이 실실~떠오르는 문장이네요.^^


단발머리 2015-02-09 11:51   좋아요 0 | URL
아.... 소세키의 문장이 아무개님에게 옛추억을 떠오르게 했군요.^^

다른 좋은 문장들도 많아요. 요즘 남자주인공들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전 너무 좋더라구요.

˝내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필요해요. 저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 겁니다.˝

다이스케의 말에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달콤한 표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그 말처럼 단순하고 소박했다. 오히려 엄숙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 말을 하기 위해 급한 일이라며 일부러 미치요를 부른 것이 유치한 시가 같은 느낌이 들었다. (267쪽)


다락방 2015-02-0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집에 [그 후] 있는것 같은데 읽어봐야겠어요. 불끈!

단발머리 2015-02-09 12:30   좋아요 0 | URL
움하핫!!!
저는 [그후]의 성공으로 소세키를 이어갈 힘을 얻었어요.
8권 중에 2권 완독, 2권은 읽고 있는 중, 그러고도 4권 남았네요. 저도 같이, 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