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읽지 못하는데 한 작가의 책을 모두 읽기에는 이 세상 천지 읽지 못한 책이 너무 많아서이고, 앞으로 읽을 책이 매우 많아서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위대한 작가의 훌륭한 작품들을 모두 다 읽을 수 없으니, 위대한 작가, 그들 중 일부의 작품을 ‘하나씩’이라도 읽겠다는 거였다.
일테면, 카뮈의 『이방인]은 읽고, 『페스트]는 미뤄두었다.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는 읽고 『생의 이면』은 제쳐두었다.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읽었고, 나머지는 남겨두었다.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 『정체성』을 읽고, 『불멸』, 『생은 다른 곳에』는 미뤄 두었다. 이응준은 『내 연애의 모든 것』을 읽고, 『밤의 첼로』는 다음을 기약했다. 박민규는 『삼미슈퍼스타즈』, 『지구영웅전설』을 읽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미뤄두었다. 줌파 라히리는 『저지대』는 읽었지만 아직 단편집은 시작하지 못 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읽는 내내 쾌활한 느낌이 좋아 『오만과 편견』, 『설득』, 『엠마』를 읽었고, 이번에 『이성과 감성』을 읽게 됐다. 나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완전 좋았다고도 할 수 없다. 내게는 『오만과 편견』의 등장인물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조합 말이다. 뭐, ‘굳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뭐, ‘굳이~~’ 이런 걸 좋아라한다.
오만과 편견 > 설득 > 엠마 > 이성과 감성
컵 때문에 책을 산 것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으나, 생각보다 책의 겉장이 얇아 많이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같이 구매한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당당한 매력을 뽐내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신 가족 모두에 대한 저의 존경은 정말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가 느끼던 이상의, 혹은 표현하고자 했던 것 이상으로 어떤 믿음을 불러일으켰다면, 그런 존경을 표현하는 데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28쪽)
엘렌쇼에서 엠마 왓슨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국 남자애들은 옷도 잘 입고 매너도 좋지만, 절제하는 편이라고. 연애 전 단계에서는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지 어쩐지 알게 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지만, 미국 남자애들은 그렇지 않다고. 그 애들은 몇 일만에 ‘너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데이트를 신청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쪼리를 신는다, 그것까지 좋아하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엠마 왓슨은 그것이 ‘컬쳐쇼크‘였다고 말했다.
메리앤이 겪고 있는 상황이라는 건, 엠마왓슨의 컬쳐쇼크에 다름 아니다. 메리앤이 보낸 편지에 대한 연인 윌러비의 답신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 가족 모두에 대한 저의 존경은 정말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가 느끼던 이상의, 혹은 표현하고자 했던 것 이상으로 어떤 믿음을 불러일으켰다면, 그런 존경을 표현하는 데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28쪽)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당신 가족에 대한 존경은 사실이나, 제가 느끼던 감정인 존경 이상의 감정 즉, 사랑에 대한 어떤 믿음, 즉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은 나의 불찰이다.”
다시 말해 이런 뜻이다.
“당신의 가족을 존경하나 당신에 대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없다. 오해가 있었다면 미안하다.”
정말 그랬을까? 윌러비의 행동에는 메리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전혀 없었을까. 이 모든 것이 메리앤의 오해였을까. 아니다. 윌러비는 남자가 연정을 품고 있는 여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었고, 아직 물려받지 않았지만 곧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예견된 자신의 저택을 보여주려 했다.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달라고 애원했고, 잠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그녀를 모른 척 하는 거다.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도 형식적인 인사를, 그것도 먼발치에서만 할 뿐, 그녀에게 다가오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메리앤은 병이 나고 말았다. 편지를 보냈고, 답을 받았다.
“당신에 대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없다.”
메리앤의 절망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사랑을 잃었고, 명예를 잃었고, 미래를 잃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변심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잃었다. 남자가 떠나고, 모든 것이 변했다.
이 책을 읽어가던 중 알라딘에서는 이런 질문이 유행했는데, “무인도에 이상형의 남자와 살게 된다면 구조요청을 할 것인가”는 거였다. 거기에 대해선 각자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답이 존재했을 텐데, 나는....
어떤 남자와 단둘이 있을 것이냐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더랜다. 많이 좋아하지만 김수현은 사실, 좀 부담스럽다. 현빈도 좋은데, 조금 있으면 금방 지루해 질테고. 노래도 불러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는 성시경도 좋긴 하지만, 재미있는 걸로 하면 유희열이 딱 내 스타일이다. 남자를 바꿔가며 이런 저런 생각을 끝도 없이 이어가던 찰나, 이런 문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메리앤, 한 사람에게 한결 같은 애정을 갖는다는 생각이 매력적이긴 해도, 그리고 자신의 행복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말이 일리가 있긴 해도, 꼭 그래야만 한다는 건 맞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아. (324쪽)
맞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단다.
남자에게만 방점을 찍던 나에게, ‘내’가 필요하며, ‘나’도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던 어떤 고운님이 떠올라 혼자 또 미소짓는다.
그 생각이 매력적이긴 해도, 일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야만 한다는 건 맞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이제 생각을 고쳐먹은 나로서도 ‘그렇단다’에 한 표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