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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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란 말이 많이 들린다. 자신은 강남 사람들처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혜택을 누리면서도 말은 좌파적, 진보적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그런 말이 요즘은 그래, 난 강남 좌파다. 내 이런 조건이 내 사상을 좌파로 규정하지 말란 법 있느냐는 말로 바뀌어 쓰이고 있기도 하다.  

하여 강준만은 이 책에서 강남 좌파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세 가지 분류 기준을 제시한다. '강남'의 성격, 주체의 위상, '좌파'의 실천. 이렇게 세 가지 기준에 의해 다시 세 가지씩 나뉘어 강남 좌파는 9가지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번째 '강남'의 성격에서는 경제적 강남 좌파(경제적으로 상류층에 해당하는 사람들), 문화적 강남 좌파(생활방식-문화향유 방식이 부유층과 유사한 사람들), 연고적 강남 좌파(소위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로 나뉜다고 한다. 이런 기준을 보면 강남 좌파가 꼭 부자일 필요는 없다. 

두번째 주체의 위상에서는 공적 강남 좌파(지도자, 정치인, 고위 공직자 등), 중간적 강남 좌파(언론인, 시민운동가, 대학교수 등), 사적 강남 좌파(일반 시민)로 나누고 있다. 

세번째 '좌파'의 실천에서는 이타적 강남 좌파(이념과 삶의 수준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합리적 강남 좌파(이념은 좌파지만, 생활은 나름의 이기심을 발휘하는 사람),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자신의 이익을 위해 좌파의 이념을 이용하는 사람)로 나누고 있다. 

이런 다양한 강남 좌파의 개념이 칼로 무를 썰듯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고, 그때그때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강남 좌파라는 말보다는 진보를 표방하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강남 좌파는 노무현 시대에 나왔다고 한다. 그런 개념이 예전에는 없다가 노무현 시대에 들어와서 강남 좌파라고 제 생활은 우파인데, 사상만 좌파인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노무현 시대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다을 강준만은 민주확 이루어진 시대 이후에는 엘리트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그래서 예전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들이 이 시대에서는 문제로 불거지게 되었다고 한다. 즉 엘리트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 것이다. 

예전에는 개인적인 결함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대의에 묻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는 개인적인 결함이 치명적으로 다가오게 되고, 사람들이 더 문제삼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건, 정치가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했다는 이야기고, 이는 개인적인 실천과 이념을 비교, 판단할 수 있는 시대적인 여건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즉,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개인의 생활과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일치하느냐 하는 쪽으로 평가 기준이 옮겨갔는데, 그걸 인지 못하고, 왜 우리만 갖고 그래라고 항변한 그 시대 정치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3  

강남 좌파는 아닐지라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준만 특유의 실명 비판이 시작된다. 여기서 굳이 강남 좌파로 분류된 사람만 다룰 필요는 없다. 강준만이 지적하듯이 우리나라에서 정당은 이념으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고, 이들은 선명한 이념을 내세우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그 이념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남 좌파에 속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힘을 지닌 정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이 그가 다루고 있는 인물이다. 이들에 대한 평들 중에 우리가 받아들일 내용이 많다. 물론 우리는 정치를 이들 중심으로 하면 안된다. 인물 중심이 아닌, 바로 우리들 생활을 중심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인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니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어느 정당, 어느 인물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말고, 진정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방법, 즉 민생 현안 중에서 서로 함께 공유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찾자'(336쪽)고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사로 함께 할 수 있는 공약수, 그 중에서도 최대공약수를 찾고, 이 최대공약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행동하자고 한다. 그런 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강남 좌파의 문제를 정치의 문제에서 교육의 문제로, 아니 학벌의 문제로 끌어온다. 이 학벌이 능력주의로 흘러, 결국 개인의 책임으로 문제를 돌리고 있으며, 학벌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그래서 그는 학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최근에 이야기됐던 서울대 폐지론보다는 조세정책의 변화를 제시한다. 그는 '입시, 사교육 문제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조세 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많이 버는 만큼 세금을 많이 내게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워렌 버핏이 생각났다. 그가 돈을 버는 방식이 내 맘에 들지 않을지라고, 그는 자신은 세금을 너무 적게 내고 있다고, 자신의 세금을 더 많이 걷어 가라고, 자신과 같은 투자가들 중에 세금이 무서워서 투자 안한다는 사람 본 적 없다고 했다.   

부자 감세 운운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참 부러운 일이다. 세금을 통해 소득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굳이 대학에 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대졸과 고졸의 임금 격차, 정규직 유무, 그리고 승진 유무가 심하게 차이나고 있지 않은가? 단지 공부하겠다는 열망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의 격차 때문에 대학, 특히 학벌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학벌들이 정치집단 사이에서는 더욱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이러한 학벌 체제에 균열이 일어난다면 정치 집단에서 작동하는 학벌도 많이 약화되리라고 본다. 

또한 많이 벌수록 세금을 더 내면 능력주의의 환상도 어느 정도 사라질테고, 더불어 사회적 평등도 어느 정도 당겨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대학 가려고 아둥바둥 대는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이니, 강준만의 해결책은 타당성이 있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개그콘서트의 어느 한 꼭지가 생각이 났다. N극과 S극들이 나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내용.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과 결합이 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밀어내는 모습 속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꼭지다. 

그런데 이 꼭지가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고 이들은 서로를 밀어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서로 잘 결합이 되어 있고, 함께 결합이 되어 있어야 할 진보와 서민들은 서로 밀어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 모두 N극과 S극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어느 극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내 안의 극들을 내 스스로 성찰하고, 이를 남들과 소통할 때 조절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소통의 정치, 이를 말로만 하지 않고, 앞에서 이야기 했던 민생의 최대공약수에서는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게 정치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끼리의 정권 쟁취 싸움, 이권 쟁취 싸움밖에는 안된다.

 

강남 좌파를 읽으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 엘리트들, 소위 사대부란 사람들, 양반이란 사람들의 최종 목적은 평천하다. 그렇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순차적인 개념일까? 아니면 병렬적인 개념일까?  

꼭 수신을 해야 제가를 하고 치국을 하고, 평천하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치국, 평천하를 하면서 수신과 제가를 함께 할 수 있을까? 

강남 좌파란 치국, 평천하를 하겠다는 사람이 수신, 제가에서 실패했을 때 들을 수 있는 말 아니던가? 

그렇다고 수신하고 제가한다음에 치국을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만든 것이 치국을 할 때, 제가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즉 감시기구를 작동시키는 것 아니겠는가? 수신이야 치국, 즉 정치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는 말로 대신하면 될테고 말이다. 

자신의 정책 실패를 성찰하고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정치가, 이는 수신에 성공한 정치가이리라. 그리고 가족 비리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감시기구를 작동시키는 정치가 이는 제가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정치가 이고...이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로 발목을 잡히지 않을테니, 더 나은 정치를 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남 좌파란 말대신 정치 엘리트, 아니면 그냥 엘리트들이라고 썼으면 좋겠다. 엘리트란 말이 외래어라서 좀 그렇다면 지식인라고 하자. 어짜피 정치가들은 이들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지 않는가? 물론 진보 정당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식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진보 정당에서 주요한 위치에 들었을 때는 일반 민중이 아닌 지식인처럼 행동하고 사고한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지식인으로 이야기해도 별 무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말이 아니지 않은가? 민중과 유리된 지식인이 아니라, 지배층에서도 지식인이 나오고, 민중에서도 지식인이 나와야 한다. 지식인은 계층과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하면, 또다른 하나의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 지식인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좌파냐, 우파냐가 결정되지 않을까? 

그람시의 용어를 빌면 전통적 지식인이 되느냐, 유기적 지식인이 되느냐 하지 않을까? 강남 좌파라는 말이 이 '강남'이란 말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진보를 지향하는 지식인을 유기적 지식인, 보수를 지향하는 지식인을 전통적 지식인이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좌파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선이 내년이다. 많은 정치적인 논쟁들이 일어나고, 많은 지식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것이다. 이 때 나는 어떤 입장을 지닐 것인가? 무엇이 정말 많은 사람을 위하는 것인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의 표지에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란 말이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모든은 아니다. 이 모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인들이 유기적 지식인이 될 테다. 그리고 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좋아질테고... 

우리는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가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강남'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하는 모습, 이건 허황된 꿈에 불과할까?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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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 그들은 맥도날드만이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
에단 와터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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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그들은 맥도날드만이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제목과 부제이다. 영어로 되어 있는 부제를 보면 미국식 정신질환의 세계화 정도일텐데... 번역된 제목이 더 자극적이다. 

이 책에는 4개의 사례가 나온다. 

거식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정신분열, 우울증 

거식증은 홍콩에서, 홍콩식의 독특한 거식증에서 미국식의 거식증으로 정리되어 가는 과정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에는 스리랑카에서 지진해일로 인한 사람들의 모습을, 스리랑카만의 독특한 문화적 관습으로 대처해나가는 모습에서, 하나의 표준화된 모습으로 정리되어 가는 과정을, 

정신분열은 잔지바르에서의 정신분열에 대해 대하는 태도와 미국식 태도의 다름을 이야기하면서, 이 또한 미국식 정신분열로 정리되어 가는 과정을, 

우울증은 일본에서 일본인들이 생각했던 우울증을 미국식의 우울증으로 바꾸어가는 과정과 결과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미국식의 정신질환으로 세계가 표준화되는 것만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세계가 하나의 표준으로 정리되는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이러한 표준화가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다만, 표준화가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각 문화의 독자성, 특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이러한 예를 들 때 돋보기와 프리즘을 거론하는데... 

외부에 햇빛이 있고, 나와 햇빛 중간에 돋보기와 프리즘을 각각 놓아보자. 그러면 돋보기는 다양한 빛깔을 보여주지 못하고, 또 빛을 퍼뜨리지 않고, 하나로 모아, 단일한, 집중된, 다른 모습을 생각할 수 없게 보여준다. 햇빛은 오직 하나의 점으로 수렴될 뿐이다. 

이와는 다르게 프리즘은 햇빛을 다양한 빛깔로, 여러 개로 분산시키고, 한 점이 아닌 면으로 분산시킨다. 그래서 단일한 모습으로 보이는 햇빛에 아주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의학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빛을 질병이라고 보면, 돋보기는 미국식으로 통일되고 표준화된 질병치료의 잣대라고 할 수 있고, 프리즘은 표준화되지 않은, 각 문화, 각 사람의 특성에 맞게 시행되는 질병치료의 잣대로 할 수 있다. 

공통점은 분명 있다. 이 공통점을 인정하고, 표준화된 의학기술을 적용하되, 각자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잊어선 안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리라. 

지금은 세계화가 되어서, 오히려 각자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의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세계적으로 공유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사실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의학도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자가 의사가 아니라, 저널리스트라는 점에서 저널리스트의 관점에서 쓴 이 책은 전문서적이라기 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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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임재성 지음 / 그린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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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20대 초반, 병무청에서 나온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고 있는 나. 군대 누구나 간다고 하지만 누구나는 가지 않는 그 곳. 가고 싶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가지 않았으면 하는 곳. 어떻게 하면 가지 않을 수 있나? 눈이 나쁘면, 간이 안 좋으면, 혈압이 높으면, 평발이면, 몸무게가 너무 안 나가면, 몸무게가 너무 나가면, 키가 아주 작으면, 손가락이 없으면....등등 

온갖 군대 가지 않을 방법이 난무한다. 이 많은 방법이 대부분 자신의 신체에 관한 것이다. 양심이라는 신념에 대한 것은 없다. 아니 없었다. 그 때는 생각을 못했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감옥에 갔다오는 것, 양심수로 말이다. 

결국 '빽'없는 소시민의 자식들은 신체검사를 통해 현역병으로 입영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존경하는 인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이런 질문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사람들... 장군들이다.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하다못해 요즘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계백, 김유신, 연개소문, 왜 광개토대왕이 광개토태왕이 되고, 영웅이 되겠는가? 세계적으로도 나폴레옹, 한니발, 아이젠하워,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맥아더... 

이들이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이들 밑에서 얼마나 많은 군인, 백성들이 죽어갔겠는가? 이들의 이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대편 사람들이 죽어갔는가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수 천, 수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고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전쟁영웅이란, 장군이란 남의 생명을 수없이 없앤 사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루쉰이 쓴 '나폴레옹과 제너'란 글이 생각난다. 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을 살린 제너보다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나폴레옹을 더 기억할까 하는 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제너와 같이 수많은 사람을 살린 사람들이 아닐까.

 

양심적 병역 거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용어야 많지만,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때 양심은 우리가 말하는 착한 마음이라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병역 거부를 하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처음에는 병역 거부는 살상 무기를 잡지 않을 권리, 남을 해치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게 해주는 차원에서 대체 복무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실시한다고 했다가,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 백지화시켜 버린 대체복무제. 점점 평화에서 멀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병역거부의 역사가  짧은 것도 있고, 여호와의 증인을 중심으로 종교적인 신념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그래서 이들이 감옥에 가게 되었고, 이들을 감옥에 가게 하지 말자는 운동으로 대체복무제를 주장했지만, 아직도 이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체복무제가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의 끝이냐고? 아니다. 이 책은 그것이 아님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보아도 된다. 그것이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대체 복무제만을 주장하지 않고, 군사주의를 반대한다. 군사주의로 표방되는 획일화, 생명경시의 사회를 반대한다. 이들은 평화주의를 제창한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런 차원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 위에 군대 거부까지 나아가려고 한다.  

이런 내용이 2부에 자세히 실려 있다. 군대, 그리고 군인, 이는 살인집단이고 살인기계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제나 예비되어 있는 살인 집단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이에 대한 반대를 한다면 평화는 한걸음 더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된다.

 

1부는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여호와의 증인과 재세례파들로 이루어진 종교적이 신념에서 한 거부부터, 2000년대 들어 자신의 평화에 대한 신념으로 거부한 사례까지 다루고 있다. 종교 자체가 이미 평화이거늘, 어떤 종교 단체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극렬하게 비난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종교 단체들은 이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있는데... 아직도 군복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군대만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는 인식을 지닌 사람들이 있듯이, 종교가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세속의 이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종교집단이 있다. 

교회가 늘어나고, 절이 늘어나고, 성당이 늘어나고, 모스크가 늘어나고, 또... 어떤.. 어떤 종교의 예배장소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세상은 평화로 넘쳐야 하는데...왜 아직 안 될까? 왜 이들은 군대를 문제삼지 않을까? 임재성의 이 책은 이제는 우리가 병역 거부를 정면에서 문제 삼아야 한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종교 현장에서도 군대를 정면에서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래도 전쟁은 안된다는 생각을 국민 대다수가 지니고 있고, 평화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대부분이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전쟁은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의 모습을 만들어갈까? 

이 책의 마지막에 보론이라고 인터뷰가 실렸는데.. 이 중 마케도니아 사람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마케도나아와 알바니아가 전쟁상황 비슷한 갈등에 처했을 때 이들 마케도나아 병역 거부자들이 한 일은 조국을 지키자가 아니라, 알바니아 병역 거부자들과 함께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야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우리만을 보지 말고, 저 편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와 같이 숨쉬고, 먹고, 울고, 웃으며 행복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전쟁은 어떤 형태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더 강화했다고 할까. 

양심적 병역 거부자, 이들은 우리가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이 거부하는 병역, 그것은 지금 우리 삶에도 깊숙히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군대 갔다와야 사람된다. 쉽게 하는 말이다. 사람된다에서 사람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제 제 주제를 알고 조용히 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면 사람된다는 말이 맞다. 그러나 사람이란 남에 의해 자신의 삶을 저당잡히지 않고, 자신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존재라면 이 말은 바뀌어야 한다. 군대 갔다오면 사람 없어진다로. 생각하면 안 되는 존재, 바로 그들이 군인 아니던가. 그래서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는 대체 복무로 끝나지 않고, 군대 폐지 이전의 단계로 군대의 인권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최근에 기수열외 등 참 안 좋은, 군대내 비인권적인 모습이 많이 불거졌는데... 군대를 인권이 살아있는 조직으로 만드는 운동 역시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인권은 어떤 때, 어떤 장소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니까.  

 

군대. 많은 사람을 소외시킨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등 

이런 군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군대는 필요한가. 톨스토이는 국가는 폭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군대를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외국군 보다도 자국민을 더 많이 죽인 집단이 군대라고...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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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동서양 문명의 교류 살림지식총서 103
이희수 지음 / 살림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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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기 전에 미리 그 곳에 대해 알고 가면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이 말의 위력은 실제로 알지 못하고 여행을 갔을 때와 알고 갔을 때 느끼는 엄청난 차이에서 실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천년고도 경주가 있다면 터키에는 천년고도 이스탄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이름이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뀌었듯이 매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성소피아 성당이라고 불리는 아야소피아 사원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기독교 성당이었다가, 다음에는 이슬람 모스크로 쓰였고, 지금은 아예 박물관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 사원에 들어가보면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스탄불에는 각종 문화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국제적인 도시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이 책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터키 사람들의 친절함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고, 이 친절함이 다른 문화를 용인하는 자세로 나타남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도시에 대해서 이만큼 자세하게, 그리고 쉽게, 실감나게 쓴 책이 있을까 싶다. 

작은 소품에 불과한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살고 겪은 경험도 녹아 있으며, 이스탄불에서 우리가 보고 알아야 할 건물, 풍습, 환경, 역사까지 잘 녹아들어 있다. 

단 하루만에 이스탄불을 겉만 훑어보고 온 나에게 이 책은 그곳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해주었고, 저자의 말대로 이스탄불은 한 번 오면 또 오고 싶어지는 도시라는 말에 동조하게 해주었다. 

아야 소피아, 술탄 마흐메트 사원, 히포드롬 광장, 톱카프 궁전,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과 피에르 로티 찻집 정도밖에 들르지 못한 나에게, 이 곳들에 대한 설명은 그곳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는 것을 넘어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그밖의 곳에 대한 설명은 다시 한 번 이스탄불에 꼭 가봐야지 하는 마음을 품게 했다. 

이스탄불을 여행하고 싶으면 그 전에 이 책을 읽고, 손에 들고(사실 손에 들기 딱 좋은 크기이고, 가는 도중 비행기에서 읽을 수도 있고,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이 책을 참조하면서 곳곳을 여행해도 좋다) 가면 좋을 듯하다. 미리 가 본 사람들은, 나처럼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막연히 이스탄불에 대해 알고 갔다온 사람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이스탄불을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책을 읽어본다면 이스탄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이 본 것에 더한 것들을 채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들게 한 책이다. 

작은 책이지만 이스탄불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책. 

여행을 가기 전에 꼭 읽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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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 묵자 - 고전에서 배우는 지혜 01 고전에서 배우는 지혜 1
친위 지음, 이영화.송철규 옮김 / 예문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생각나는 사람, 그가 바로 묵자이다. 

겸애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사람, 겸애는 그의 기본적인 사상이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비공'이나 '절용'의 사상가로 다가온다. 

몇 해 전에 영화 "묵공"이 상영되었다. 묵공에서 주인공은 혁리라는사람인데, 이는 묵자의 제자이고, 묵자는 비공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를 펼치고 있다. 

특히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위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으니, 크고 작은 전쟁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지금 묵자는 다시금 우리가 새겨볼 사람이 된다. 

여기에 절용편을 보면 묵자는 형식에 치우치는 모습을 비판하고 실질을 숭상하라고 하는데, 묵자의 절용편을 지금에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도 화려하게만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 묵자라고 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은 비공편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제목을 이리 붙인 까닭은 묵자의 평화주의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뜻이리라. 

묵자의 말 중에서 좋은 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뽑아놓고, 거기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묵자의 글도 읽을 수 있고, 그와 관련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하루에 한 편씩 곱씹으면서 읽으면, 읽고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나는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 우리 삶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중에 요즘 정세와 맞물려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 요즘의 군자,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은 작은 지혜만 알고 큰 지혜를 알지 못한단 구절이다. 

자신의 이익,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익은 잘 챙기며,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또 정파에게 이익일까 하는 면을 파악하는데는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전체를 위한 일, 옳음을 위한 일에는 까막눈인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자신만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올바름의 견지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들은 묵자의 관점에서 보면 소인배일 뿐이다. 

여기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번잡할 뿐이라는 절용편을 보면, 텔레비전에서 늘 보이는 핸드폰(휴대전화) 광고가 생각났다. 

마치 핸드폰이 없으면 원시인인양, 그냥 통화만 되는 전화기가 아니라, 사진 촬영에서 노래듣기, 그리고 영상통화에 인터넷 검색, 영화감상까지 모두 되는 전화기가 나와서, 그것을 지니고 다녀야만 현대인인 것처럼 광고하는데... 이 광고 덕인지, 우리 주변에선 소음이 넘쳐나 번잡함으로 가득차 있는데... 이는 묵자의 관점에서 보면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이다. 

삶에 필수적이지 않은데, 필수적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묵자가 배격하는 행위이다. 

이런 묵자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생각나게 하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 이 묵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말, 하나, 나를 물에 비추지 말고, 사람에 비추라는 말. 

결국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또 남들도 역시 나를 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말. 

내가 잘났다고 생각할수록 내 주변의 사람을 살펴볼 줄 아는 능력, 그것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이 묵자에 관한 책이 알려주고 있다. 

어려운 철학서라기 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책을 읽고, 묵자를 꼼꼼이 읽고 싶다면 "묵자"를 사서 읽어보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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