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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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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괴기하고 당황스러운 것’에 대한 이해의 출발
트랜스포머, 케러비안의 해적, 헤리포터, 반지의 제왕, 미녀와 야수, 한강 등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일까? 같은 장르로 묶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들을 비롯한 많은 영화들이 컴퓨터그래픽이라는 기술을 이용하여 감독이 상상하는 세계를 만들어 낸 것과 더불어 이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에 주목해 본다. 그저 상상의 산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자동차의 로봇으로 변신, 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골인간이 등장하여 사람과 싸움을 하고, 사람이 이상한 동물 모습으로 변하며, 무시무시한 괴물에서 감성적인 느낌을 보여주는 것 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한 경향성을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지 영화 평론가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나름 일정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 등을 형용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 ‘그로테스크(grotesque)’라고 한다. ‘그로테스크’란 15세기 말 고대 로마의 폐허를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건축물 볼트가 동굴(grotta)과 흡사하였다. 그 벽 모양은 덩굴식물인 아라베스크에 공상의 생물, 괴상한 인간의 상, 꽃, 과일, 촛대 등을 복잡하게 결합시킨 것으로, 그 괴이함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그로테스키(grotteschi)라는 일종의 괴기취미의 유행을 낳았다. 그로테스크란 말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화에서 보여주는 괴기한 것을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볼프강 카이저의 ‘그로테스크’는 바로 미술과 문학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경향성을 분석하며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와 그 변천과정을 살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로테스크’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구분하고 있다. 16세기와 질풍노도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에 걸친 시기 그리고 20세기를 그로테스크의 시대로 꼽는다. 이렇게 구분하는 시각은 이 시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경향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믿음, 안전한 세계 질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던 때’라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을 바탕으로 저자는 미술과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그로테스크’적 요소를 찾아내 분석하고 그것이 그 시대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우선, 미술 분야에서는 피에로 데 코시모, H.보스, 그뤼네발트, 라블레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정체 모를 괴물이나 괴수가 인간을 위협하고 농락하고 살해하며, 악기가 거꾸로 인간을 연주하고, 거지와 불구자나 망령의 무리들이 득실거리고 있으며, 합리적인 질서나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적나라한 자연의 마력과 다시 대결하는 등의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알려주고 있다.

저자 카이저가 주목하는 분야는 문학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포, 호프만, 에드거 앨런 등의 작품에 낭만적인 괴이한 환상이 자주 나타나는 경향성이나 19세기 후반의 보나벤투라, 로트레아몽의 문학 등에서도 보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연극, 공포소설, 언어유희, 서정시, 초현실주의 회화와 그래픽 미술 등의 작품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소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어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던 것이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올 때의 갑작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이 그로테스크의 일차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미지의 무엇을 구체화한 것’이며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테스크’ 낯선 단어가 주는 당황함을 책을 읽어가는 도중에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기에 그렇겠지만 만만치 않은 내용 또한 어려움을 주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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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산사기행
승한 지음, 하지권 사진 / 불광출판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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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먼저 간 발자국 따라 걸어보자
주변 사람들을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삶의 여유가 생겨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산 자체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을 찾는 사람들이 산에서 얻어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연과 교감하는 동안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가 아닐까 싶다. 일상에 묻혀 정신없이 살아오는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에 자연과의 교감은 더없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가는 산에는 열에 아홉은 사찰이 있다. 인구에 회자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사찰 한 곳은 꼭 있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 역사 속에서 불교가 차지했던 역할에 근거한 것 때문이다. 하여 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와는 무관하게 사찰을 찾게 되고 사찰이 주는 사찰만의 고유한 분위기에 공감하는 경우가 많아지곤 한다. 우리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와 어느덧 정서적 공감을 이룬 결과이리라 생각된다. 

일반인이 사찰을 찾아가서 그 사찰의 공간에서 머무는 동안 느꼈던 마음을 담은 책은 이미 많이 발간되어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나를 치유하는 산사기행’ 역시 그렇게 사찰을 찾는 마음을 담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다른 산사기행 책과 다른 점은 저자가 스님이라는 점이다. 스님은 불교라는 종교에 귀의하여 자신을 둘러싼 온갖 번뇌와 망상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깨달음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다. 그런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 산사이기에 스님이 산사기행에 관한 책을 발간한다는 점은 다소 의외의 흥미로움이 있다.

이 산사기행을 시도한 승한 스님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으로 병원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신춘문예에 시와 동시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젊은 날 남다른 번뇌에 쌓여 고통 받던 스님은 불교에 귀의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에 들어선 구도자이다. 현재는 경기도 가평 대원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지도하고 있다. 산사기행을 발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승한 스님은 2년여 동안 전국 산사를 찾아다니며 구도자의 길에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다. 찾아가는 산사 어느 곳 하나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 산사가 간직한 역사를 자신의 수행과정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이 산사를 찾아가며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근원적 고통으로 아파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산사를 찾아가고 찾아간 산사에서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얻게 되는 마음의 위안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그것이다. 

서울 도봉산 선인봉 석굴암을 시작으로 해남 달마산 도솔암, 경주 남산 칠불암, 제주 한라산 관음사, 구미 태조산 도리사, 순천 조계산 송광사 등 24곳의 사찰을 찾아 다녔다. 산사가 전해주는 풍광을 보고, 그 절이 간직한 옛 스님들의 행적을 더듬으며, 우리내 사람들과 함께해온 역사를 찾아내서 각기 산사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산사의 멋과 정취를 한껏 드러내는 사진의 매력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겐 보너스처럼 반가움을 전해 준기에 충분하다. 특히, 승한 스님이 겪어온 번뇌 망상과 직접적으로 관련 지어 스스로를 들어내는 부분에선 많은 공감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빵이 아니라 평화였음을. 속도가 아니라 휴식이었음을. 채움이 아니라 비움과 나눔이었음을. 그리고 내 마음의 외딴 하늘에서 외따롭게 반짝이고 있는 내 마음의 별을 내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음을.”

스님이 찾아가는 산사와 일반인이 찾는 산사는 다르지 않다. 모두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자연의 품속에 안겨 있으며 그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것이 지금 산사의 모습이기에 산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산사는 곧 자연과 공감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는 적합한 장소가 된다. 산사기행을 떠나는 승한 스님의 마음 따라 가까운 산사를 찾아 나를 괴롭히는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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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 -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며 평생을 보낸 그녀들의 내밀한 역사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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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왕의 여자에게서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텔레비전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여인들이며 그 여인들의 삶에서 겪게 되는 우여곡절이 중심 주제가 된다. 표현되는 방법이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 속에는 남자와 권력에 보다 접근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남녀가 다르지 않겠지만 유독 여인의 삶과 연결된 소재를 찾고 그것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구성하는 이유가 뭘까?

수천 년 인류의 역사는 남자들에 의해 승리한 권력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매번 중요한 사건에는 늘 빠지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여인들의 희노애락이 빠진 사건은 존재하지 않을 만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하여, 때론 여인의 힘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 천하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 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사건을 중심적으로 다룬 것이 바로 역사 드라마였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지금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왕의 여자’는 바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왕의 여자들에 관한 책이다. 저자가 왕들의 여자들에 대해 주목하는 시대는 조선 500년이다.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왕은 27명이었다. 왕들의 재위 기간은 각기 달랐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황후와 후궁 그리고 궁녀들과 함께 궁궐 생활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27명의 왕에게는 36인의 황후, 101명의 후궁을 비롯하여 숫자도 알 수 없는 많은 궁녀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왕이 살아가는 궁궐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숨어 존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궁궐의 울타리 속에서 궁녀로 살았던 여인들을 살핀다. 왕에게 소속된 여인들이었기에 그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왕에 접근하는 순서로 살피고 있다. 궁녀, 후궁, 황후가 그 순이다. 이는 궁녀에서 후궁을 거쳐 황후에 오른 여인들이 있었기에 이 순서로 살피는 것이 왕의 여자들의 삶을 보다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한다. 왕과 함께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떠났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그들의 삶을 기록한 문헌사료와 문학작품 등 다양한 문서를 찾아보고 이를 모아 정리한 것이다.

왕의 여자들에 대해 저자는 이들이 궁궐에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적 기원, 자격, 선발 과정, 인원, 직무, 품계, 사랑, 출산 등을 다양한 문헌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각종 표와 통계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자료에만 국한되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드라마의 장면들까지 동원한다. 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사료를 통해 비교 분석하여 그들의 실제 모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있다.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리며, 자신이 낳은 왕의 아들을 권력의 정점에 등극시키기 위해 벌리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궁궐 안의 여자들에 대해 이토록 다양한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이해를 돕는 일련의 작업은 왕과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온 것처럼 이해하는 역사의 한 측면을 복원하는 의의가 있다고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온전히 평가 받을 때 우리 역사는 그 만큼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점은 저자가 밝힌 왕의 여자 중에서도 궁녀를 설명하는 부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왕의 여자’를 통해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단편적인 지식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서 오는 오류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의 소재로 흥미위주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에 접근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남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현대를 살아가는 남자들 중에서 일부는 이미 사회의 중심이 여자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존재적 특성으로부터 스스로 갖는 고유한 특성을 무시하고 사회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양성 평등차원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타의에 의해 잊혀진 삶을 살아야 했던 여자들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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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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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을 보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보고자 함이다
비오는 주말, 넉넉하고 한적함이 어딘가는 꼭 가야할 것 같아 마음부터 일어서고 있다. 우산을 준비하고 가까운 시립미술관을 찾았다. ‘이런 날 누가 오려고?’ 하는 마음이었으나 막상 미술관을 들어서자 옹기종기 모이거나 또는 혼자서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제법 많다. 젊음을 한껏 누릴 남녀, 아이 손잡고 선 아버지, 지긋한 나이의 부인, 부모는 어디 갔는지도 모른 체 초롱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굴리는 아이. 이들 모두에게 살며시 얼굴에 번지는 미소로 답하고 나도 그럼 사람들의 마음이 되어 흰색 화살표를 따라 흘러간다.

시립미술관엔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흔하게 접하는 서양화가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사진도 있고 젊은 예술가들의 설치미술도 있다.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예술가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은 각기 다를 것이다. 요사이 미술관이나 전시장엔 작품에 대한 설명이나 장소를 안내하는 도우미들이 있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여전히 그림이 걸린 벽과 관객 사이에 놓은 거리만큼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림과 관객을 이어주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는 필요성에 의해 안내자가 있을 것이지만 너무 일상적인 이야기나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설명에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있다.

예술작품과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책들이 은근하게 번지고 있는 것은 실로 반가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림을 읽어주는 안내서 들이 그것이다. 이들 안내서들은 대부분 유명한 서양 작품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다소 아쉬움 점이 있지만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런 흐름의 일환으로 우리 옛 그림에 대해 그림 읽어주는 책들이 발간되고 꾸준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옛것을 우리들 가까이 불러오는 사람들 중 옛 그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이는 저자들이 눈에 띈다. 내가 주목하고 또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오주석의 한국미 특강’의 저자 미술사학자 고(故)오주석씨를 비롯하여 ‘그림, 문학에 취하다’의 고연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손철주 등이 그들이다. 오주석의 감성적이고 지극한 사랑이 물씬 풍기는 글도 매력적이고 문학 특히 시를 중심으로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는 고연희의 그림 사랑도 흥미로우며, 미술 컬럼니스트의 진면목을 보이면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한 손철주의 담백한 글도 눈길을 오랫동안 잡아두고 있다. 이들은 각기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독특한 언어로 말해주고 있지만 옛 그림에 대해 지극한 애정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엇비슷하다 할 것이다.

‘하루 한 점만 보아도, 하루 한 편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는 손철주의 또 다른 책이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는 제목처럼 옛 그림 속에 담긴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68편을 선별하고 이를 사계절로 구분하여 실었다. 이미 익숙한 화가들의 익숙한 그림도 있어 반가운 마음이 앞서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화가의 그림도 있어 새로운 작품을 대하는 설렘도 있다. 산수도, 화훼도, 풍속도, 인물화, 조충도를 비롯하여 남녀의 애뜻한 마음이 가득한 그림까지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특히, 정조왕의 그림 두 점은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군주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손철주의 글은 독특하다. 간결하고 단문이기에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만 담겨 있다. 저자의 글처럼 구성 또한 간결하다. 그림 한 점에 주목할 수 있도록 시원스런 편집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옛 그림이 전해주는 그 담백한 맛을 그대로 닮았다. 옛 그림에서 느끼는 정서를 글 속에 담아내고자 지금은 거의 쓰지 않은 단어를 일부러 골라 사용한 것은 옛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하지만 오롯하게 뜻을 전하기에는 그림에서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자꾸 멈추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42명의 화가들의 간략한 약력을 담아 놓고 그림 목록까지 있어 찾아보기에도 꼼꼼한 마음 씀씀이가 좋다.

"옛 시인과 옛 화가의 심정이 무릇 살갑다. 넘치는 욕심은 시와 그림을 망친다. 모자라기에 애타고, 덜어내기에 미덥다. 가냘프면 설렌다. 만개 아닌 반개한 꽃이 향기가 짙고, 떼 지은 꽃가지보다 외돌토리 가지가 마음에 오래간다. 쓰고 그리는 이만 그럴까. 읽고 보는 이도 말은 끝나되 뜻이 이어지는 서화에 흥이 돋는다. 여운은 남김이 아니라 되새김이다."

이는 저자 손철주가 우리 옛 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표현일 것이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의 글이 넘치는 애정의 표현이라면 손철주의 글은 굳이 들어내지 않더라도 살며시 스며드는 정서의 공유를 담아내고 있어 보인다. 묵직하고 착 가라앉은 듯하지만 울림이 큰 글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옛 그림을 읽고 싶은 사람들 모두가 곁에 두고서 오랫동안 찾고 싶은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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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왕제색도 - 빛으로 그리는
이갑수 지음, 도진호 사진 / 궁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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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을 보는 사람의 마음
날마다 지나치는 풍경이 어느 날 아주 정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딱히 이유를 설명할 무엇도 없지만 그 풍경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 그날 이후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게 된다.

비슷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갑수가 주목하는 풍경하나는 다분히 의도적인 바라보기다. 인왕산이 자리한 곳으로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가 이사를 하면서부터 자주 접하는 인왕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연유로 해서 조선시대를 살았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남긴 ‘인왕제색도’라는 그림 한 점에 주목하게 된다. 260년 전 화가의 눈에 들었던 인왕산의 모습과 너무도 닮은 산 모습을 보면서 지난 시간과 더불어 함께해온 산의 모습을 담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인왕산 바라보기는 2009년 9월부터 가을에서 시작하여 다시 가을이 올 때까지 한 해 동안 한 곳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도진호라는 사진가는 사진으로 인왕산의 모습을 담고 이갑수는 시시때때로 산을 오르며 글로 인왕산을 담았다. 이 둘이 만나 사계절이 지나는 동안 인왕산과 함께한 저자의 마음자리가 책으로 출간된 된 것이다. 비로 이 책 ‘신인왕제색도’다.

‘신인왕제색도’의 도화선이 되었던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정선의 나이 76세 때인 1751년(영조 27)에 그려진 작품이다. 겸재 정선의 평생의 벗이었던 사천 이병헌이 죽자 벗을 애절한 마음을 담은 그림으로 비온 뒤 안개가 피어나는 순간을 동쪽에서 멀리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인왕제색도는 중국화풍에서 벗어나 조선 산하를 있는 그대로 담은 진경산수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한다. 화제에 ‘인왕제색(仁旺霽色) 겸재(謙齋) 신미윤월하원(辛未閏月下沅)’이라고 묵서되었고 그 밑에 정선(鄭敾) 원백(元白)이란 방인(方印)이 찍혀 있다.

‘신인왕제색도’에 담긴 모든 인왕산 모습은 바로 겸재 정선이 살았던 곳에서 바라본 모습이라 더 그림에 충실한 시각이 담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왕산 기슭에 사람들이 모여산 것은 오늘날의 일이 아니다.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릴 당시에도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저자 이갑수는 바로 인왕산 아래 둥지를 틀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인왕산과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자연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준다. 구름, 안개, 비, 눈이 오는 동안 인왕산 아래 사람들이 모습이 실감나면서도 따스한 애정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떠 하나의 시각이 제기 되었다. 서울의 한 지점에서 인왕산을 찍듯 인왕산에서 서울의 한 지점, 서울의 풍경을 찍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인왕제색도’와 한 몸인 ‘인왕산 일기’가 추가되었고 한다. 

사진 속 인왕산은 그 모습이 그 모습 같다. 또 같은 사진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도 같은 사진이 없다. 우리들 삶도 사람마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똑 같은 삶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인왕제색도가 그려진 2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왕산 모습은 그리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슭에서 삶의 희노애락을 겪으며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 후손들이 선조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더 시간이 지난다면 사라진 그들처럼 지금 산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사라질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도시에도 우뚝 솟은 산이 있다. 일천 미터가 넘는 산이지만 위엄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넉넉한 품에 사람들을 품어 왔고 또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은 어머니와 같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어온 그 기슭에 많은 사람들이 깃들어 살아간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그 산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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