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온한 선비다 -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 틈새 한국사 1
이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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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다른 꿈이 세상을 바꾼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들의 이해요구에 부합하는 시각만이 대부분 정사로 사회의 주류를 이룬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을 가진 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알려준다. 왕이 백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듯 승자 역시 패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그들의 삶이었다. 

 흔히들 지금의 시대를 보며 ‘일등만 기억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일등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기 쉽다. 주류가 되기 위해 그들이 벌이는 노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지만 주류만이 전부인양 하는 것은 주류가 주류일 수 있게 하는 비주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이는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주류가 주목받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주류만이 모든 것이라는 사회에서 비주류에 대한 관심이 때론 주류를 뛰어 넘는 시대정신을 말해주기도 한다. 역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당당하게 주류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주목한 점은 오늘날의 일등만을 기억하는 시대성에 비추어 보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이 그것이라고 봅니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는 책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 자신만의 독특한 삶 속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나 후대 사람들에게 그리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이라는 부제처럼 동시대를 살면서도 그 시대의 불합리한 요소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책이다. 

‘광인’ 김시습, ‘비범한 보통인’ 서경덕, ‘반주자학자’ 박세당, ‘양명학자’ 정제두, ‘시골 서생’ 이익, ‘과학사상가’ 홍대용, ‘천주교인’ 이벽, ‘역사에서 사라진’ 유수원, ‘경험주의자’ 최한기 저자가 주목하는 조선의 비주류 사상가들이다. 이들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는 각각의 사상가들에 대한 기존의 익숙한 시각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들의 삶을 고찰한 결과 특징지을 수 있는 낱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낱말들이 내포한 의미를 중심으로 살핀다면 저자가 왜? 세상과 다른 꿈을 꾸었다고 표현했는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에서 살피고 있는 아홉 명의 사람들 중 관심을 끄는 사람으로는 ‘천주교인’ 이벽과 ‘경험주의자’ 최한기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벽이라고 볼 수 있다. 천주교라는 종교적 입장에서 이벽을 살폈다면 관심정도가 덜했겠지만 이벽을 조선을 이끌었던 사상인 유학에 정통한 학자에서 유학의 도리를 벗어난 천주교의 길로 걸어간 사람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새롭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최한기는 일반인들 사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최한기는 조선말 누구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이 사람을 재조명한 것 역시 주목된다. 

‘누구나 삶의 주인공이고자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타인의 삶속에서는 주체일 수 없다. 주체인 나에 비해 주체가 아닌 나는 어떤 면에서든 한층 격하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이벽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도중에 한 표현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살피고 있는 사람들의 삶뿐 만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주류 또는 비주류에 대한 구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비주류로 표현되는 그 비주류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을 담아내고 싶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과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이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현대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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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박제가 지음, 이익성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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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기본 정신을 배우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모두가 옳다고 할 때 그르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 그 의미 속에 포함된다면 우리 역사에서 그러한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하지만, 같은 의미일지라도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당리당략에 의한 말이라면 숨은 뜻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가까운 조선의 역사에서 당당하게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시기가 영조, 정조 때로 보인다. 인진왜란의 혼란을 일정정도 극복하고 오랜 파쟁도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누그러졌던 때가 바로 흔희들 문예부흥기로 이야기하는 그때이다. 특히, 정조왕의 개혁적 정책에 힘입은 세력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北學派)가 활동하던 시기다. 북학파의 중심에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었다. 북학이라는 말은 맹자에서 “진량은 초나라 사람이다. 그는 북쪽으로 유학하여 북방의 학자들도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들 중 초정 박제가(1750~1805)는 박지원과 함께 북학파의 거장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북학의’를 지었다. 박제가는 누구보다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하며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 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하여 이용후생을 실현’할 것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 등이 있다. 이 책은 박제가가 저술한 ‘북학의’를 을유문화사가 원문을 번역하여 1971년 발행한 것을 30여년이 지난 후 새롭게 발간한 개정판이다. 

북학의는 크게 내편, 외편, 진북학의로 세편을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수레, 성, 벽돌, 궁실, 도로, 교량, 목축 등 서른아홉 가지 사항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외편에는 밭, 거름, 농업, 잠업, 과거론, 재부론, 군사론, 장례,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 등 열여섯 가지 박제가의 진솔한 사상이 담겨 있다. 진북학의는 박제가가 영평현령으로 있을 때 정도의 왕지에 의해 내, 외편에서 농사와 관련된 항목을 뽑아 여기에 수리, 지리, 모내기, 농기구 등 항목을 추가하여 다시 작성한 것이다. 

북학의를 통해 본 박제가의 글은 진솔하고 담백하다. 주장하는 바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고루하거나 군더더기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조선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철저히 실용적인 시각에서 접근한 모습이 돋보인다. 또한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쓴 것이지만 당시 동북아 삼국인 청나라, 조선, 일본의 현실을 비교분석하고 있는 점이 더 철저한 실학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인다. 

‘말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고 한 것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조선의 현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무작정 청나라의 문물을 따라가자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의 글 내면에는 바로 조선 백성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그러한 현실을 극복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급진적인 사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그렇기에 가정을 통해서라도 달라진 현실을 기대하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닌가 싶다. 만약 박제가의 이러한 선진적인 사상이 받아들여졌다면 무척 다른 역사를 만들어 왔을 것이라는 점에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대를 뛰어 넘는 급진적인 사상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면 역사의 진보는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박제가의 개혁사상은 학문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여러 우려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저히 현실을 기반으로 둘 때 그 의의를 살릴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박제가가 현시대를 보면 어떨까? 그가 그토록 바랐던 물질적인 혁신은 그가 상상하는 것을 뛰어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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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역사 - 중세에서 현대까지 살인으로 본 유럽의 풍경
피테르 스피렌부르그 지음, 홍선영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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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일상이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그렇지 않고 타의에 의해 생명의 끈을 놓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의 대부분은 전쟁이나, 살인이다. 스스로가 아닌 타의에 의해 죽음을 맞는 경우는 어떨까?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무수한 관심을 불러왔다. 각종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사회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도 타의에 의한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역사다. 그렇다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방관하거나 방조하거나 때론 묵인 또는 조장하기도 한 사회적 환경은 그 시대의 권력에 의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책 ‘살인의 역사’는 수세기 동안 역사에서 벌어진 살인의 변천 과정에 대한 탐색이다. 살인에 대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을 중심으로 이를 시대 순으로 살피고 있다. 저자가 이 살인에 대해 주목하며 살피는 이야기의 중심은 중세시대의 복수극, 제도저적 장치를 마련하며 진행되어 온 살인의 불법화, 초기 유럽 사회에서 벌어졌던 남성들의 결투,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살인의 광기, 살인의 주변화 등이다.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문명화에 따른 살인의 변화를 함께 엮어내며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살인의 사회적 의미와 문화적 매락을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살인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살인은 개인적 감정의 폭발 보다는 당시 사회 문화적 영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살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개인적인 복수의 수단으로 상대방을 죽이던 중세는 이러한 살인은 큰 범죄 행위가 아니었다. 개인의 도덕심에 의존한 자책 그 이상을 넘어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살인이 중대범죄이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된 것은 국가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이후의 일이다. 가치관의 변화,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확립 등에 의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이다. 

저자는 살인의 주요한 원인으로 ‘명예’를 들고 있다. 이는 중세시대 남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지 위한 살인은 묵인 되는 등 사회적 합의가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예는 개인보다 가문이나 집단 등의 명예가 더 소중한 것이었다. 저자가 예로 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 표본이다. 이러한 부분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쌍둥이 빌딩에 대한 비행기 테러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지만 그것을 저지른 집단에서 보면 집단의 명예를 지키지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대에 들어 살인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선진국으로 알려진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묻지마 식의 폭력과 살인의 증가는 저자가 살핀 점차적인 살인율의 감소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현상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환경, 국가의 제도적 장치마련 등으로 감소되었던 살인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역사와 범죄의 접점에서 사회의 이면을 살인이라는 현상을 통해 탐색하고 있는 저자는 이를 개인의 안전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의 사고방식과 연결시키며, 살인율이 증가하는 이유로는 세계화와 지역주의의 대두로 인한 민족국가의 상대적인 약화를 든다. 또한 국가의 행정력이 사라진 도시의 슬럼 지역에서 육체적 힘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명예 관념이 부활하면서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최근 복지국가로 사회적 보장제도가 아주 잘된 나라고 평가받는 노르웨이에서 희대의 살인 폭력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는 뉴스를 통해 날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폭력 사건을 접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혹, 살인을 포함한 폭력에 대해 그것을 저지른 사람을 이 사회 문화가 그 길로 내 몰고 있지나 않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본성을 지키고 개인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가 놓치고 있는 무엇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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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배신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윤리적 판단을 실험하다
콰메 앤터니 애피아 지음, 이은주 옮김 / 바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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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동의 도덕적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하는 판단이 맞을까?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선택의 다양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물음에 답해야만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음에 대한 답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대부분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이나 사회적 규범 속에서 그 답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자신의 가치와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사람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인식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분명 기준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판단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으로 철학, 심리학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연관 학문으로 인지심리학, 행동경제학 등이 있다. 이들 학문의 탐구영역은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였다. 즉 환경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동을 실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의 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여부이다. 이 책 ‘윤리학의 배신’은 바로 그러한 학문의 탐구과정에 대한 결과를 담았다. 부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윤리적 판단을 실험하다’처럼 다분히 그 목적이 그간 인간에 대한 이해에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될 위험성을 농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람들이 행위에 대한 근거로 드는 윤리적 직관이 사실은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새로운 경험적 도덕 심리학이 아주 오래된 철학적 윤리학의 과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고찰이다. 바로 ‘성격에 대한 고정관념’, ‘자신의 윤리적 직관’을 의심하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가 다양한 실험을 실례로 들어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데 어떤 과정을 거치며 결정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윤리나 도덕으로 여기는 가치가 단지 성격이나 직관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심리적 요소가 개입된 결과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이는 전통적인 도덕철학과 저자가 주목하는 실험철학 간의 대립 양상을 보인다는 시각을 추가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 양상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으로 작용되길 바라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실험적 심리학의 관심분야인 인간의 도덕성의 시작에 대해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기저를 이루는 반응양식으로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동료들의 다섯 가지 모듈을 제시한다. 그것은 동정심, 상호주의, 위계, 순수, 외부인과 성자(내집단과 외집단) 등이며 이를 통해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실험들은 우리의 윤리학적 사고와 직관, 그리고 인류의 번영 혹은 행복과 관련된다. 바로 실험철학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들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무엇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선택을 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의 근거를 명확히 알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선택에 의해 완급 조절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윤리적 판단’에 대한 실험은 그 알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의 한 방법일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용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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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학 -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 Wisdom Classic 3
신동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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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만 존재하는 사회의 핵심논리?
승자만이 기억되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누구나 승자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결코 누구나 최후의 승자는 될 수 없다. 언제나 최후의 승자는 1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역사 이래 끊임없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갔을까?

사회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처세술이다. 세상이 복잡하면 할수록 그 험난한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영웅들이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최후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어지고 또다시 세상은 그 권력에 의해 지배 받게 된다. 이렇게 권력의 최후의 1이 되기까지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를 우뚝 세워가고자 하는 것이 역사와 옛 선인들의 삶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은 개인의 역사를 넘어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지배를 꿈꾸게 했다. 이는 전쟁이 그것이다. 현대 들어 무기를 앞세운 전쟁뿐 아니라 자원을 확보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는 보이지 않은 지배가 더 극심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현대에는 그러한 양상이 더한다. 그동안 미국을 중심이었던 서구에서 중국과 인도를 필두로 하는 동양으로 옮겨오고 있다고 한다. 이미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G2의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혼란기에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반드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라고 하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은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을 이뤘다. 향후 예측되는 부분에서 미국을 넘어서 G1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중국의 힘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자는 것이 이름도 생소한 이 책 ‘후흑학(厚黑學)’이다. 중국 5천 년 역사를 관통하는 처세의 비밀이라고 하는 '후흑'은 글자그대로 해석하자면 ‘후흑(厚黑)’은 두꺼운 얼굴을 뜻하는 면후(面厚)와 시커먼 속마음을 뜻하는 심흑을 줄인 말이다. 이는 중국 청조가 망하는 격동기에 등장하여 수 천년동안 중국을 통치한 성공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 핵심은 ‘실리를 위해 도덕을 폐하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삼국지연의’와 ‘삼국지’ 등 중국 기서들을 바탕으로 그 속에 나타나는 영웅, 호걸, 왕후장상, 성현들을 살펴 후흑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살핀다. 오월동주의 구천과 부차, 유방과 항우, 장량과 한신, 조조와 유비, 손권과 사마의, 장개석과 모택동 등이 그들이다. 이렇게 살핀 결과 이들의 공통점은 ‘간사한 계책이 넘치고 천하의 성인들도 상대의 목을 꺾는 비열한 술수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흑의 기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고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독특하다. 그리고 한자를 후흑이 시각으로 보는 것도 새롭다.

후흑을 기본으로 해서 살핀 중국의 역사는 새롭다. 저자는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역사는 이뤄져 왔음을 전재하고 있다. 하여 G2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결과제이며 분명하게 대안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해 가는 동안 어쩔 수없이 남는 문제는 한쪽 측면을 극도로 부각하는 인간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정당한가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함은 당연하다. 도리를 먼저 생각하며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는 것이 시대에 뒤쳐진다는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승패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 이를 놓고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마치 모든 인간관계가 이것뿐 인양 한다면 그것이 올바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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