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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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래, 사랑이 답이다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룰 수 있는 꿈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꿈도 꿀 수 있다. 또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위안을 삼고자 하는 꿈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꿈이든 사람에게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기에 꿈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다보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시기가 청춘이다. 

청춘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것이지만 그 청춘은 만만치 않다. 청춘시절 누구하나 상처와 절망을 겪게 된다. 청춘시절 겪는 상처와 절망에 굴복하여 이후 삶을 질곡으로 보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청춘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도 분명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꿈을 이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가슴 밑바닥에 자리하며 어쩌지 못하는 자신만의 상처로 남아 이후 삶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다. 

기욤 뮈소의 ‘구해줘’는 이렇듯 청춘시절의 상처와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프랑스에서 브로드웨이 진출을 목표로 미국에 건너온 줄리에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지만 여의치 않아 결국 그 꿈을 접고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빈민가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의사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자살로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샘 갤러웨이는 병원에서 일에 빠져 살아간다. 

이 둘은 타임스퀘어 부근 길에서 우연한 만남을 하게 된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둘은 점점 서로에게 매료당하지만 거짓말로 시작된 둘은 서로를 가슴에 담고 헤어지지만 줄리에트의 적극적인 행동에 의해 꿈같은 하루 밤을 보내고 서로에게 운명적인 사람임을 확인한다. 프랑스로 돌아가길 한 줄리에트와 공황에서 어색한 이별을 하지만 그것이 이 두 사람의 운명에 가르는 일이 된다. 줄리에트가 타기로 한 프랑스행 비행기는 사고를 당해 추락하지만 출발 직전 비행기에서 내린 줄리에트는 비행기 폭파관련 자로 연행된다. 이 둘 사이에 한 경찰관이 끼어들며 정해진 운명은 거스를 수 없음을 말하며 죽음의 사자임을 밝힌다. 겨우 만난 운명적인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에게 이를 바꿀 힘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는 있기 마련이다. 그 상처로 인해 지금 현재의 자신은 규정되기 마련이다. 현재를 규정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다 포함하고 있다. 보통의 경우 그 상처를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의 무게를 벗어낼 수 있는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서로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구해줘’는 가슴에 담아둔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외침이다. 그 외침은 특정한 대상이 있기도 하지만 때론 스스로에게 하는 어쩔 수없는 울림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구체적인 성찰을 하게 만들고 있다. 운명에 대한 믿음의 여부를 떠나 인간의 자율의지가 할 수 있는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율의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랑’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 속 두 주인공도 정해진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새로운 삶을 가꿔가는 핵심이 바로 서로를 향한 사랑이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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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읽는 즐거움보다 보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 있다.
너무 보기만 하면 글을 읽고 싶어질 때도 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보기와 읽기 모두를 만족시킨다.

컴퓨터 활자가 생활화 된 지금 우리는 손글씨로 날아든 풋풋한 필체에 상대의 그리움, 배려, 절절함이 더욱 느끼질때가 있다.
이 책은 디지털로 일관된 우리 생활에 내가 숨쉬고 걸어다니는 동네, 그리고 고도(古都)의 깊이까지 느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지녔다. 섬세한 일러스트와 함게 잔잔한 저자의 생각과 역사의 뒤안길을 담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도 평생 곁에 두고 싶은 그런 책을 드물게, 아주 가끔 만날 때가 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바로 이책이 곁에 두고 싶은 책이 책이다.

기간 2011년 7월 27일 ~ 2011년 8월 10일까지
선물 :  지식노마드의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활동 : 아래
1. 스크랩 화면을 자신의 블로그나 카페에 스크랩하기
2. 동네야에 아름다운 동네 사진 10장 올리기
3. 활동성 30포인트 이상

※ 동네야에 사진올리기 (1장당 5point), 글작성 (글 1개당 3point)
활동성은 동네야에 로그인 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발표 2011년 8월 12일
심사 : 최종 심사를 마친 50명에게 도서가 일괄 발송됩니다.

인터넷 주소 : http://www.texter.co.kr/dongneya.php?id=texter 주소를 꼭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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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온한 선비다 -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 틈새 한국사 1
이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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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다른 꿈이 세상을 바꾼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들의 이해요구에 부합하는 시각만이 대부분 정사로 사회의 주류를 이룬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을 가진 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알려준다. 왕이 백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듯 승자 역시 패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그들의 삶이었다. 

 흔히들 지금의 시대를 보며 ‘일등만 기억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일등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기 쉽다. 주류가 되기 위해 그들이 벌이는 노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지만 주류만이 전부인양 하는 것은 주류가 주류일 수 있게 하는 비주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이는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주류가 주목받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주류만이 모든 것이라는 사회에서 비주류에 대한 관심이 때론 주류를 뛰어 넘는 시대정신을 말해주기도 한다. 역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당당하게 주류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주목한 점은 오늘날의 일등만을 기억하는 시대성에 비추어 보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이 그것이라고 봅니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는 책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 자신만의 독특한 삶 속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나 후대 사람들에게 그리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이라는 부제처럼 동시대를 살면서도 그 시대의 불합리한 요소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책이다. 

‘광인’ 김시습, ‘비범한 보통인’ 서경덕, ‘반주자학자’ 박세당, ‘양명학자’ 정제두, ‘시골 서생’ 이익, ‘과학사상가’ 홍대용, ‘천주교인’ 이벽, ‘역사에서 사라진’ 유수원, ‘경험주의자’ 최한기 저자가 주목하는 조선의 비주류 사상가들이다. 이들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는 각각의 사상가들에 대한 기존의 익숙한 시각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들의 삶을 고찰한 결과 특징지을 수 있는 낱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낱말들이 내포한 의미를 중심으로 살핀다면 저자가 왜? 세상과 다른 꿈을 꾸었다고 표현했는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에서 살피고 있는 아홉 명의 사람들 중 관심을 끄는 사람으로는 ‘천주교인’ 이벽과 ‘경험주의자’ 최한기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벽이라고 볼 수 있다. 천주교라는 종교적 입장에서 이벽을 살폈다면 관심정도가 덜했겠지만 이벽을 조선을 이끌었던 사상인 유학에 정통한 학자에서 유학의 도리를 벗어난 천주교의 길로 걸어간 사람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새롭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최한기는 일반인들 사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최한기는 조선말 누구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이 사람을 재조명한 것 역시 주목된다. 

‘누구나 삶의 주인공이고자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타인의 삶속에서는 주체일 수 없다. 주체인 나에 비해 주체가 아닌 나는 어떤 면에서든 한층 격하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이벽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도중에 한 표현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살피고 있는 사람들의 삶뿐 만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주류 또는 비주류에 대한 구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비주류로 표현되는 그 비주류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을 담아내고 싶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과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이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현대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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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박제가 지음, 이익성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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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기본 정신을 배우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모두가 옳다고 할 때 그르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 그 의미 속에 포함된다면 우리 역사에서 그러한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하지만, 같은 의미일지라도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당리당략에 의한 말이라면 숨은 뜻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가까운 조선의 역사에서 당당하게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시기가 영조, 정조 때로 보인다. 인진왜란의 혼란을 일정정도 극복하고 오랜 파쟁도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누그러졌던 때가 바로 흔희들 문예부흥기로 이야기하는 그때이다. 특히, 정조왕의 개혁적 정책에 힘입은 세력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北學派)가 활동하던 시기다. 북학파의 중심에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었다. 북학이라는 말은 맹자에서 “진량은 초나라 사람이다. 그는 북쪽으로 유학하여 북방의 학자들도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들 중 초정 박제가(1750~1805)는 박지원과 함께 북학파의 거장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북학의’를 지었다. 박제가는 누구보다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하며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 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하여 이용후생을 실현’할 것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 등이 있다. 이 책은 박제가가 저술한 ‘북학의’를 을유문화사가 원문을 번역하여 1971년 발행한 것을 30여년이 지난 후 새롭게 발간한 개정판이다. 

북학의는 크게 내편, 외편, 진북학의로 세편을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수레, 성, 벽돌, 궁실, 도로, 교량, 목축 등 서른아홉 가지 사항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외편에는 밭, 거름, 농업, 잠업, 과거론, 재부론, 군사론, 장례,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 등 열여섯 가지 박제가의 진솔한 사상이 담겨 있다. 진북학의는 박제가가 영평현령으로 있을 때 정도의 왕지에 의해 내, 외편에서 농사와 관련된 항목을 뽑아 여기에 수리, 지리, 모내기, 농기구 등 항목을 추가하여 다시 작성한 것이다. 

북학의를 통해 본 박제가의 글은 진솔하고 담백하다. 주장하는 바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고루하거나 군더더기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조선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철저히 실용적인 시각에서 접근한 모습이 돋보인다. 또한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쓴 것이지만 당시 동북아 삼국인 청나라, 조선, 일본의 현실을 비교분석하고 있는 점이 더 철저한 실학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인다. 

‘말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고 한 것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조선의 현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무작정 청나라의 문물을 따라가자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의 글 내면에는 바로 조선 백성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그러한 현실을 극복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급진적인 사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그렇기에 가정을 통해서라도 달라진 현실을 기대하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닌가 싶다. 만약 박제가의 이러한 선진적인 사상이 받아들여졌다면 무척 다른 역사를 만들어 왔을 것이라는 점에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대를 뛰어 넘는 급진적인 사상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면 역사의 진보는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박제가의 개혁사상은 학문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여러 우려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저히 현실을 기반으로 둘 때 그 의의를 살릴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박제가가 현시대를 보면 어떨까? 그가 그토록 바랐던 물질적인 혁신은 그가 상상하는 것을 뛰어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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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역사 - 중세에서 현대까지 살인으로 본 유럽의 풍경
피테르 스피렌부르그 지음, 홍선영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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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일상이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그렇지 않고 타의에 의해 생명의 끈을 놓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의 대부분은 전쟁이나, 살인이다. 스스로가 아닌 타의에 의해 죽음을 맞는 경우는 어떨까?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무수한 관심을 불러왔다. 각종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사회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도 타의에 의한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역사다. 그렇다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방관하거나 방조하거나 때론 묵인 또는 조장하기도 한 사회적 환경은 그 시대의 권력에 의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책 ‘살인의 역사’는 수세기 동안 역사에서 벌어진 살인의 변천 과정에 대한 탐색이다. 살인에 대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을 중심으로 이를 시대 순으로 살피고 있다. 저자가 이 살인에 대해 주목하며 살피는 이야기의 중심은 중세시대의 복수극, 제도저적 장치를 마련하며 진행되어 온 살인의 불법화, 초기 유럽 사회에서 벌어졌던 남성들의 결투,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살인의 광기, 살인의 주변화 등이다.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문명화에 따른 살인의 변화를 함께 엮어내며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살인의 사회적 의미와 문화적 매락을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살인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살인은 개인적 감정의 폭발 보다는 당시 사회 문화적 영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살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개인적인 복수의 수단으로 상대방을 죽이던 중세는 이러한 살인은 큰 범죄 행위가 아니었다. 개인의 도덕심에 의존한 자책 그 이상을 넘어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살인이 중대범죄이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된 것은 국가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이후의 일이다. 가치관의 변화,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확립 등에 의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이다. 

저자는 살인의 주요한 원인으로 ‘명예’를 들고 있다. 이는 중세시대 남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지 위한 살인은 묵인 되는 등 사회적 합의가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예는 개인보다 가문이나 집단 등의 명예가 더 소중한 것이었다. 저자가 예로 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 표본이다. 이러한 부분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쌍둥이 빌딩에 대한 비행기 테러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지만 그것을 저지른 집단에서 보면 집단의 명예를 지키지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대에 들어 살인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선진국으로 알려진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묻지마 식의 폭력과 살인의 증가는 저자가 살핀 점차적인 살인율의 감소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현상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환경, 국가의 제도적 장치마련 등으로 감소되었던 살인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역사와 범죄의 접점에서 사회의 이면을 살인이라는 현상을 통해 탐색하고 있는 저자는 이를 개인의 안전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의 사고방식과 연결시키며, 살인율이 증가하는 이유로는 세계화와 지역주의의 대두로 인한 민족국가의 상대적인 약화를 든다. 또한 국가의 행정력이 사라진 도시의 슬럼 지역에서 육체적 힘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명예 관념이 부활하면서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최근 복지국가로 사회적 보장제도가 아주 잘된 나라고 평가받는 노르웨이에서 희대의 살인 폭력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는 뉴스를 통해 날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폭력 사건을 접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혹, 살인을 포함한 폭력에 대해 그것을 저지른 사람을 이 사회 문화가 그 길로 내 몰고 있지나 않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본성을 지키고 개인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가 놓치고 있는 무엇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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