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_읽는_하루

담장을 허물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 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맷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과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 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처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다. 시골집 담장들은 시야를 가둘만큼 높지 않다. 그 담장 마져 허물어버리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내 소유가 되었다. 나를 둘러싼 마음의 담장에 틈을 내고 시선을 밖으로 돌려 보자.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썩 좋은 방법이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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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밖에 더 많다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 풀로 된 섬
샹그리라를 에돌아 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였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였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였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 하는 내가 더 있다

*이문재 시인의 '밖에 더 많다'다.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번민하느라 직면하지 못했던 것들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늘은 그 많은 나 중에 하나와 만나 미소 지을 수 있길 빈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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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너는 내 운명

예술가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가 없어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이란
인류를 사랑하느라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인이란
우주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앤 사람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풀 한 포기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문재 시인의 '너는 내 운명'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사랑'의 방점을 어디에 두는가의 여부가 일상을 좌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이 아닌 나.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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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문재 시인의 '어떤 경우'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귀한 사람이다. '모두에게'를 고집하지 않으면 평화로울 세상.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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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잡초 뽑기

호미로 흙을 파면서
잡초를 뽑는다
잡초들은 내 손으로 어김없이 뽑혀지고
뽑혀진 잡초들은 장외場外로 사라진다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나의 손도 떨린다
하늘은 이 잡초를 길러내셨으나
오늘은 내가 뽑아내고 있다
밭을 절반쯤 매면서
문득 나는 깨달았다
이 밭에서 잡초로 뽑혀나갈 명단 속에
아, 어느새 내 이름도 들어가 있구나!

*김종해의 시 '잡초 뽑기'다. 반세기를 돌아서도 한참 더 나간 지점에 이르렀다. 뽑혀나갈 명단에 내 이름도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애써 거리를 두고 벽을 세우지는 말자.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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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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