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글은 너무 솔직하고 디테일해서 당황스럽다. 자신을 소재로 한 글인데, 이렇게까지 밝혀도 괜찮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진정한 장소를 읽고서야 그녀의 의도와 글의 의미들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세월을 읽을 때는 그런 난감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 속 그녀를 불러내어,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의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 읽은 책, 단순한 열정에서는 작가 서론부터 난감했다. 이 소설에서 어떤 메시지를 발견해야 하는가?’에 답을 찾는데 조금 지체 되었다. 연인을 만나기 전까지의 기다림, 설레임, 무기력함, 열정, 상실감, 그리움, 나이 차, 국적, 외도와 같은 일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그동안 지향해왔던 사유를 무시하고, 지양해왔던 태도를 연인에게서 수용하는 듯한 모습이 특별하다. 그래서 아마도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작품중간에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36p)라고 덧붙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자신이 제물이 되어 자신이 속한 종()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서술하는 작가다. 50에 들어선 경계에 서있는, 단순히 열정을 불태우려면 사회적 관념을 뛰어넘어야 할 여성 지식인이 가진 욕망을 드러낸다. 헤어진 후 그녀의 아픔은 육체의 상실에 대한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빈옷장부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첫 장면 역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식료품점의 딸 드니즈 르쉬르는 진통이 오길 기다리며, 그녀의 부모, 살고 있는 환경, 사립학교, 남자(아이)들과의 위험한 만남에 대해 서술한다. “언제나 우등생이며, 일요일에는 짧은 발목 양말을 신는 얼간이이자 장학생(12)”인 그녀가 낙태진통을 기다리는 상황까지 오게 된 과정이다. 첫 페이지에 적힌 텅 빈 옷장에 가짜 보물을 간직해 두었지로 시작하는 폴 엘뤼아르의 시는 유년의 유산들-부모로부터, 어른들로부터, 학교교육으로 받은-이 거짓된 것들이었음을 상징한다. 그녀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15p)”고 말한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남자를 가볍게 만나는 것조차 사회적 격차에서 온 열등감, 모욕감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의 자리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은 그에 대한 기억과 글을 불러낸다. 그녀가 갖고 있는 열등감과 수치심의 근원에 부모님이 있다. 그녀가 빈옷장에서 밝혔듯이 그들의 계급이 갖고 있는 삶의 습관과 특징들로 인해,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이의 소녀에게 많은 독서와 성찰과 수업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고 사립학교를 다니며 부모와의 격차를 경험하게 되고, 특히 아버지와 소원해 지게 되었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그의 사투리가 섞인 언어는 그의 계급을 특징 짓는다. 이 언어는 두 사람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할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버지의 삶, 아버지에 대한 추억,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부끄러움, 그로 인한 자신의 수치심과 죄의식……. 그녀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103p)”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글을 쓰며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우리 집은 잘 살지 못 한다는 인식)이기도 했으니까.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이 모순 사이에서 흔들리는 느낌이다.(남자의 자리48p)”

부끄러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역시 충격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싸움이 끝나고 모두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런 다툼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단 의미일까? “1952615일의 일이다. 내 유년 시절의 정확하고 분명한 첫 번째 날.” 그 사건이 그녀의 부끄러움의 핵이 되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사춘기와 청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주된 정서는 수치심과 분노다. 식당과 잡화점을 잇는 통로에서 숙제하고 책을 읽으며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던 기억 역시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환경이었다.

그녀는 사립학교에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105p)”이라 인식한다. 그리고 부끄러움 속에 편입(105p)”되었다고 고백한다.

 

나에게 가장 슬프게 기억된 장면은 비아리츠 해변에서의 그들이다. “옷을 다 입고 신발을 신은 채 비키니 차림의 그을린 몸들 사이로 해변을 걸어 다니던(117p)” 딸과 아버지는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소외당한 계급임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이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할까?(126p)”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쓴 글이다. 돌아가시기 전 잠시 자신과 함께 살던 어머니,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장기체류하던 어머니, 그리고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해 쓴 일기 형식의 글이다. 딸이 느끼는 주된 감정은 죄책감이다.

다른 딸에서 다른 딸이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어린 나이에 죽은 언니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어른들의 기억에만 존재하던 다른 딸이다. 언니의 사진과 자신에게 감추던 어른들의 비밀스런 대화 속에서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착한 딸은 작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어두운 부분이다. 다른 딸에게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한다. 어른들은 죽은 다른 딸의 모습과 성품을 작가에게 투영했고 그것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사진의 용도는 내가 가장 난감해했을 만한 작품이었지만, 가장 마지막에 읽어서인지 그냥 수월하게 넘어갔다. 61세의 아니 에르노와 22살 아래 마크 마리가, 그들의 사랑의 흔적을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글로 남긴 책이다. 61세의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 치료 중이었다. 카테테르를 꽂고 방사선 치료를 위한 표식을 그려넣은 몸의 묘사, 수술 후 베네치아로의 여행에서의 이벤트는 드러냄의 의지다. 감추고 억압한 여성의 몸을 폭로하는 것이다.

 

프랑스 여성들의 11%가 유방암에 걸렸고, 유방암을 앓고 있다. 삼백만 여성이 넘는다. 꿰매고, 스캔하고 붉은색, 파란색 그림으로 표시하고, 방사선을 쬐고, 재건한 삼백만의 가슴이 셔츠와 티셔츠 안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언젠가는 과감히 보여 줘야 할 것이다. [내가 내 가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이 드러냄의 의지에 동참하는 것이다.](85p) 

진정한 장소야 말로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가이드북이다.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에서, 그녀는 현재 살고 있는 세르지에서의 생활과 파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일상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공간과 인간에 대한 그녀의 사유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주거환경과 지역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작품에 기록된 사실들을 통합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가족이 그녀에게 미친 정서들, 독서, 그리고 글쓰기……. 빈옷장』 『남자의 자리』 『얼어붙은 여자』……『세월등 작품에 관한 대담이 이어진다. ‘진정한 장소란 작가의 정체성과 항구성을 갖게 하는 그녀를 그녀 되게 하는 진정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저를 최후의 참호로 몬다면, 그래도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은 역시 거기(글쓰기)이니까. 저만의 진정한 장소이죠.(138p)” 

이 책에서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과 삐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읽었다. 구별짓기는 아직 상권만 읽었지만 그녀가 여기서 무엇을 길어냈는지 짐작하게 된다. 계급과 취향과 아비투스에 관한 사회학자의 글은 계급 전향자로서 자신과 부모의 갈등과 유년기에 형성된 수치심에 대해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창을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이다.

사물들은 그녀가 부르주아를 향한 문턱을 넘어가 파리 생활을 할 때 경험했을 자본주의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나처럼 전율했는지 모르겠다.

 

쁘띠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사회세계에 대한 쁘띠 부르주아적 경험은 우선 자신의 신체와 언어를 아주 수줍어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곤란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은 신체와 언어를 한 몸처럼 느끼는 대신이 양자를 타인의 시선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감시하고, 교정하고, 수정한다. 그리고, 소외된 대타 존재 un étre-pour-autrui aliéné를 재소유화하기 위한 절망적 시도에 의해 과잉교정과 서투른 시도 속에서 계속 헤매다 스스로를 타인의 신체와 언어의 소유대상으로 노출시켜 버리고 만다.(구별짓기삐에르 부르디외,334p)”

 

아니 에르노의 작품 읽기는 잠정적으로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오늘도 출판 소식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몇 권을 보게 될 거라 생각된다. 조르주 페렉 읽기가 이어질 듯하다 오늘도 두 권을 더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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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5-31 04: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에 관해 유익한 정보를 배워 갑니다.

그레이스 2023-05-31 06:4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5-31 08: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소논문 쓰셔도 될 수준으로 섭렵하셨는걸요. 저는 달랑 1권이지만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두 번 읽을 독자로서 무슨 의미로 그레이스님께서 이야기하시는지 조금은 알것 같아서 좋았어요.

근데 저 새물결의 [구별짓기]는 절판이던데, 그레이스 님께서는 가지고 계시네요^^ [단순한 열정]에서 음악취향에 대한 묘사였던가? 저도 브루디에를 떠올렸어요.

그레이스 2023-05-31 08:22   좋아요 3 | URL
ㅎㅎ
과찬 감사합니다^^
구별짓기 좋은 책인데, 번역을 좀더 친절하게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더라구요.
다시 재출간 하기엔 프랑스 사회에 대한 진단이 시간이 많이 흘러서 out of date 한 면이 있죠.
읽을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부르디외의 책 몇권을 갖고 있었네요.

페크pek0501 2023-05-31 16: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완전 독서광이십니다. 저는 아니 에르노 작품 중 무엇부터 읽어야할지 모르겠던데, 좋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5-31 16:40   좋아요 3 | URL
^^
언제부턴가 한 작가 시작하면 연결해서 읽게 되더라구요
감사합니다 ~

2023-05-31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5-31 16:47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고민해볼께요~~^^♡

레삭매냐 2023-06-01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K문고에서 선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을 다 읽고 나서 거의 충격...

노벨상 받은 다음에 산 책은
아직 펴 보지도 못했네요.

페렉의 책들도 수집해 두었지만
여전히 -

그레이스 2023-06-01 12:42   좋아요 0 | URL
<단순한 열정>은 첫 페이지 빼고는 그래도 괜찮은듯요^^
<사진의 용도>는 더 충격이죠^^
저는 페렉 두권 더 받았습니다.^^

베터라이프 2023-06-22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분석대로 진정한 장소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3-06-22 23:40   좋아요 0 | URL
응원합니다~♡
 
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적은 너무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다. 도처에 있고,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생체화되어 있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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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30 0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시무시한데요, ㅠㅠ

그레이스 2023-05-30 09:54   좋아요 1 | URL
ㅎㅎ
작가가 우리 안에 있다라고 한 적은 자본주의!
상대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잘 썼어요^^
 
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 그림 시집
정여민 시, 허구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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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감상했던 지인이 말했다. 대부분 시집은 대표 몇작품만 좋은 경우가 많은데 다 너무 좋다고. 버릴게 없다. 13살 아이의 감성이라고 믿겨지지 않는다. 모든 생명, 모든 사물, 모든 사건, 일상이 시가 되는 천재적 감수성과 글솜씨!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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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27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기대가 되네요!!

그레이스 2023-05-27 22:41   좋아요 0 | URL
예 좋았습니다.
21살이 된 정여민군은 어떤 글을 쓸까 궁금하더군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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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취향이 아닌듯 해도 주변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이유를 알듯! 가벼운 듯 읽혀지는데, 가볍게 쓰인 책이 아니다. 좋아하는 고전, 미술, 문학 등의 사색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지식을 주기도, 위안이 되기도, 도전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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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27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민 저자는 아는 게 많아 보이는 글을 쓰는 점이 부러운 점입니다.

그레이스 2023-05-27 22:40   좋아요 0 | URL

정말 많아보입니다.
 
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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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을 위한 교양서적이라고 하지만, 일단 이중나선이라는 제목에서 전문분야의 아우라가 느껴져 선뜻 뽑아서 펼쳐보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몇 페이지를 읽다보면 왜 교양서적이라 했는지 알게 된다. 왓슨이 크릭과 함께 DNA구조를 밝혀내는 과정을 쓴 것인데, 그 과정이란 것이 과학적 지식이 아닌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에 기울어져 있어서 흥미롭다. 잠깐씩 나오는 생물이나 화학 물리학적인 지식을 모르더라도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과학고 지망하는 중학생이나 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는 고등학생을 위한 준비도서로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왓슨과 크릭과 모리스 윌킨스 세 사람은 1962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았다. 1953<네이처>지에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여정의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그의 글쓰기 능력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 프랜시스 크릭은 그리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다.(25p)”로 시작하는 왓슨의 글은 사람에 대한 탐구와 관계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한다. 과학 역시 인문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만난 35세의 크릭은 머리 좋고 통찰력 있는 사람이었으나, 아직 무명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떠들어 대기 좋아하고, 의견이 같지 않을 때는 그 즉시 직설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독특한 성향의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거침없는 성품 때문에 연구소의 동료들은 그와 거리를 두었고, 그가 재능을 보일 때마다 기분 상해 했다. 이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왓슨이 크릭과 함께 한 것은 관심이 같았음을 알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크릭이 자신의 성품이 약점임을 알고 고민하고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릭이 물리학을 떠나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6년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라고 한다. 그 전에는 DNA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왓슨과 함께 이 DNA 연구를 위해 캐번디시에서 팀이 꾸려졌을 당시 그 구성원들 간에는 인간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영국 물리학자 모리스 윌킨스와 크릭이나 왓슨과는 그들을 지배하는 문화와 정신의 차이가 있었다. 이들 간의 성격 차이도 장애요소였다. 윌킨스의 조수 로잘린드 프랭클린과의 갈등 역시 연구의 중요한 변수였다. 윌킨스의 조수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이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결정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X선 회절법으로 찍은 사진을 이 ‘DNA 나선 구조가설을 입증하는 자료로 쓰이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것은 그들의 연구에 있어 접근 방법과 신중함의 창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적수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다. 당시 50대의 폴링은 과학계에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노벨상을 의식하고 이 DNA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폴링의 알파 나선과 그의 연구가 왓슨과 크릭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긍정적 자극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폴링 역시 경쟁의식 때문에 섣부른 발표를 하게 되었고, 그의 이론은 허점을 갖게 되었다.

 

한 가닥의 나선에서 이중나선 이론으로 발전하고 다시 그 3차원적인 나선 구조를 찾는 이들의 길은 몇 번의 희열과 절망의 순간들을 거친다. 이 이중 나선의 결합에 있어 뼈대의 위치가 바깥쪽에 위치하게 하고 이 두 나선구조를 이루는 뉴클레오티드의 염기, 퓨린 유도체(아데닌, 구아닌)와 피리미딘 유도체(티민, 시토신)의 차이를 발견함으로 결합의 문제 해결은 결과를 놓고 보면 간단함에도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리고 모형을 만들고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들이 만들어 놓은 장난감 블록처럼 생긴 구조물은 오늘날 컴퓨터 3D프로그램으로 쉽게 구현할 수 있는 형태지만 당시만 해도 철제 모듈을 만들어서 조립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 조립된 모형의 이중나선을 이루는 뉴클레오티드의 연결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 이중나선은 왓슨과 크릭의 생물, 화학, 수학적 지식이 동원된 가설 모형이지만 이 구조를 증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윌킨스의 회절 사진이다. X선 회절법을 이용해 찍은 DNA사진은 왓슨과 크릭의 논문이 실리는 <네이처>지에 다른 논문으로 함께 실렸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윌킨스가 아니라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의견 차이와 불화로 프랭클린이 팀에서 나가면서 자신의 자료를 모두 넘겨주었고, 윌킨스가 이 사진을 논문에 싣기 전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하면서 이들이 이중나선 연구와 결과에 확신을 하고 속도를 내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폴링에 대한 견제가 이런 절차의 무시를 가져왔다고 본다. 사실은 프랭클린의 업적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수여할 때 그녀가 아닌 윌킨스의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3902768?sid=105

 

파인만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자주 과학적 성과만 바라보지, 그 뒤에 있는 과학자들의 윤리와 인격, 성품이 그 성과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이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경쟁을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았고, 신문에 보도된 기사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 경쟁은 모리스 윌킨스, 로잘린드 프랭클린, 라이너스 폴링,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 벌인 것이었다.(24p)"


왓슨이 크릭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케임브리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당시 라이너스 폴링이 이 DNA 연구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프랭클린이 이들과 불화하지 않았다면, 피터 폴링이나 휴 헉슬리와 같은 동료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왓슨이 학교의 권고대로 연구를 중단하고 박테리오 파지 연구에만 몰두했더라면 등등 수많은 변수들이 이중나선을 다른 연구실 다른 과학자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그 수많은 변수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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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5-18 22: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리뷰만 읽어도 멋지단 생각이 드네요. 과학자들의 불화야 익히 들어온 바이긴 하죠!
과학도 인문학이 맞네요
사람이 그 중심에 있으니까요^^

그레이스 2023-05-18 22:36   좋아요 1 | URL
지금이야 더 심하겠죠.
경쟁적으로 같은 주제의 논문을 먼저 내려고들 하니!
모든 분야에서 숙제인듯 합니다.

yamoo 2023-05-19 09: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궁리하는 과학 시리즈....이 시리즈가 사이언스북스 과학시리즈와 함께 과학의 중요 명저들을 잘 번역해 주고 있는 듯해요. 궁리에서 나온 <우연과 필연>은 그래도 읽을만 했습니다. 이전에 범우사판은 거의 못읽는 수준이었거든요~
이중나선은 뭐, 이전판도 충분히 읽을만 했습니다만, 훨씬 가독성을 높여 주어서 이중나선은 여러 판본을 갖고 있는데, 궁리가 가장 읽기 편하네요..ㅎㅎ

그레이스 2023-05-19 10:01   좋아요 1 | URL

저도 이전 판 읽어봤는데 궁리에서 나온게 더 나았어요**

Jeremy 2023-05-19 1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Double Helix> 를 읽고 흥미가 생겨서
Molecular Cell Biology with an Emphasis on Biochemistry 라는 대학 전공을 선택했고
제가 대학 다닐 당시는 PCR 과 Human Genome Mapping 이 엄청난 화두였는데
30년+ 동안 정말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낸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저 대학 졸업하던 해, 저희 학과 초청 연사로 그 유명한 Linus Pauling 이 왔었는데
자신의 평생 동안의 업적 자랑과 Vitamin C 얘기로 3시간 반 이상 연설하는 바람에
거의 모든 이들이 지겨워서 죽을 뻔 했고 다 잠에 빠졌으며
저는 졸다가 제 이름 호명된 것도 모르고 졸업장 못 받고 지나갈 뻔 했답니다.

저희 아빠는 이 유명한 학자를 만나게 된 게 너무 신기해서 Reception 내내
그 누구도 두려워서 차마 접근하지 못 했던 이 대과학자와 담소하며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답니다.

그나저나 그레이스님의 독서 범위는 정말 광범위하군요.

그레이스 2023-05-19 14:10   좋아요 1 | URL
우와 우와 Jeremy님 폴링을 보셨다니 ...! 이 책에서는 달변에 강연도 스펙타클하게 잘 하는 분으로 소개되던데요^^
전공까지 👍
시대를 앞서가셨네요
저 대학 다닐때만 해도 유전공학이나 생화학 쪽은 신생이었는데요
교수님들이 안계셔서 카이스트에서 강사가 오시고 그랬어요,
미국과 한국의 차이겠죠?

Jeremy 2023-05-19 14:20   좋아요 2 | URL
제가 Linus Pauling 을 보고 악수도 하고 사진도 같이 찍은 해에
이미 91세였는데 본인 말대로 Vitamin C 를 많이 먹어서였는지
그 큰 키도 고대로, 자세도 곧바르고 총기가 넘치다 못해
기억력이 거의 사진 찍은 것 같은 수준이라 정말 굉장한 사람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답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 많고 대단해서
끝을 모른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그렇게 정정했는데 제 대학졸업식 2년 후에 타계하셨지요.
저희 아빠한테도 너무 친절하고 정중해서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레이스 2023-05-19 14:31   좋아요 2 | URL
노벨화학상 말고 노벨평화상도 받은 걸 보면 활동도 많이 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셨던 것 같아요.
이 책에도 잠깐 폴링의 반핵활동과 관련한 일화가 나오기도 해요.
이런 에피소드 넘 감사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5-19 18:25   좋아요 2 | URL
이런 일화 너무 재밌네요^^ 감사합니다ㅎ

고양이라디오 2023-05-19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본 줄 알았는데 안봤었네요. 그레이스님 덕분에 깨닫게 됐습니다. <이중나선> 읽어보고 싶네요. 궁리 판본이 좋군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많이 알아갑니다^^ㅎ

그레이스 2023-05-19 14:09   좋아요 1 | URL
어려운 과학책이 아니라 금방 읽으실듯요.^^
즐독하세요~

레삭매냐 2023-05-20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도도 못해볼 그런 책인 것 같습니다...

‘이중나선‘에 대해 맛만 본 것으루다가.

그레이스 2023-05-20 09:31   좋아요 1 | URL
그렇게 어려운 과학전문 책이 아니라서 레삭매냐님은 충분히 읽고도 남으리라 생각됩니다.
과학지식 없이도 읽을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