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한국 미술을 공부하기 전 전통미술의 상징'을 먼저 배우고 있다(옛그림을 보는 법』으로). 서양화로 말하면 도상학인 셈이다.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고,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라고 했던 곽희나 그림가운데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고 했던 소동파의 말 속에 담긴 시화일체사상(詩畫一體思想)과 기원의 상징이 된 생물과 기물들을 담은 그림 감상법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19세기까지 화가들에 대해서도 익히게 된다


18세기 후반 광통교 일대에는 서화판매점들이 생겼다. 왕실과 사대부들이 향유하던 미술문화가 서민들에게까지 확장되면서 민간에 미술시장이 만들어졌다. 술을 좋아했다는 오원 장승업(1843~1897)이 광통교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다녔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 지역에서 미술품 거래가 활발했음을 알려주는 일화다.

광통교에 서화 가게가 생기게 된 것은 그 근처에 있던 도화서의 존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19p)”

도화서 화원들이 궁궐 외로 주문을 받았던 양반들은 대부분 북촌에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촌과 광통교를 잇는 인사동이 서화골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연히 읽게 된 이 경성의 화가들근대를 거닐다』 두 권(북촌편서촌편)은, 전통 미술 계보를 잇고 서양화를 받아들인, 근대 화가들의 이야기를 북촌과 서촌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다.

 

북촌과 서촌은 미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북촌은 조선시대 명문 집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고, 서촌 지역은 주로 역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고, 일제강점 이후 궁궐이나 총독부와 관련 있는 신흥 부자들이 살고 있어서 경제적 여유가 있던 지역이었다. 이들은 미술계의 고객과 후원자 역할을 했다. 점차 많은 미술가들이 북촌과 서촌에 몰려들었고, 화숙(畵塾)들이 생겨났다.

 

종로구 청진동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은 오원의 적통을 잇는 화원이었고 새로운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던 동양화단의 좌장(23p 북촌편)”이었다. 그는 그의 집에 경묵당(耕墨堂)’이라 이름을 붙이고 개인 화실을 만든다. 그의 화실에서 3년을 배웠던 고희동(1886~1965)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한 최초의 서양 화가다. 안중식은 1911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를 이끈다. 서화미술회출신 이용우(1902~1953), 오일영(1890~1960), 이한복(1897~1944), 김은호(1892~1979), 박승무(1893~1980), 최우석(1899~1964), 노수현(1899~1978), 이상범(1897~1972) 등은 훗날 근대화단의 중심인물들이 된다.

 

저자는 북촌과 서촌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화숙을 열고 창작활동을 했던 동양화가와 서양화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석영의 형 서화가 지운영, 김정희의 제자 오경석의 아들인 전각의 명인 오세창, 마지막 내시 출신화가 이병직, 임금의 초상을 그린 인물화의 귀재 김은호, 산수화의 거장 배렴, 월북 작가 중 북에서도 명성을 누린 이석호, 김기창, 장우성 등은 북촌편에 소개되고 있는 작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춘곡(春谷) 고희동은 끝까지 하지는 못하고 동양화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서양화의 첫발을 내디딘 작가로 이름을 알린다. 이병직의 얌전하고 단정한 그림과 글씨는 시선을 끈다. 스승 김규진의 필치를 벗어나 자신만의 기법을 갖춘 그림들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미술계도 새로운 구조로 재편되는데 서양화에는 김관호, 이인성, 오지호, 동양화에는 안중식과 조석진의 제자들로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이용우, 등이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이름을 내고 있었다. 순종의 어진을 그린 천재화가 이당 김은호는 권농동 낙청헌화숙을 연다. 17세의 김기창이 찾아간 곳이 이 낙청헌이다. 그 후 그는 낙청헌을 떠나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한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화가들이 중앙고와 휘문고를 거쳐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했다. 그들의 등용문은 조선미술전람회였다. 이 전람회 주최는 총독부였고, 재능 있는 화가지망생들을 지원했다. 이때 설립된 미술가협회와 교육기관 역시 일본의 후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전람회에서 요구하는 그림의 주제 역시 식민 통치의 방향에 적합해야만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낙청헌출신 장우성의 <귀목>이란 그림을 들 수 있다. 1935년 제 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이다. 식민지 한국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향토색을 구현한 전형적인 작품이다. 진취적 기상보다는 원초적 풍습과 소박한 풍경을 담은 그림을 통해 미개함을 주지시키려는 의도를 담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같은 낙청헌출신 백윤문은 일본인을 비하하는 듯한 그림을 출품해서 불려가 조사를 받고 기억상실증에 걸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서촌편에서는 서양화가들이 많이 소개된다. 아무래도 역관들이 자리 잡았던 동네라는 성격과도 통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을까싶다. 이 서촌 편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내용은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동문 나혜석, 천경자 두 사람의 여류작가들과 월북 작가들에 대한 소개다. 북촌편에서 박래현이 김기창 편에서 잠깐 소개된 것이 아쉬웠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어있던 시절 예술계에도 광복 후 자신의 사상을 분명히 드러낸 작가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정현웅, 동양화가 이여성 서양화가 이쾌대 형제 들이 그 예다. 북촌편에서 소개되었던 이석호와 달리 그들은 월북이후 화가로서 공명(功名)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경복고등학교는 많은 서양화가들의 산실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2고보였던 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야마다 신이치와 사토 구니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야마다 신이치는 조선미술협회를 설립한 일본인 3인 중의 한사람이다. 야마다 신이치의 뒤를 이어 부임한 사토 구니오의 지도를 받아 화가로서 성공한 인물들이 유영국, 장욱진, 임완규, 김창억, 이대원, 권옥연 등이다. 서촌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양화가로는 미국유학을 다녀온 장발(張勃 1901~2001), 프랑스에 유학한 이종우, 도쿄미술학교 출신 이제창 ·공진형 등 이다. ‘옥동패라 불린 이승만, 김중현도 서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누하동, 사직동, 옥인동 등에 살던 그들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교류했다.

 

추사 김정희를 추앙해서 추사체를 구현한 이한복, 김정희의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은 오늘날 추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한 동양화가들이다. 이상범이 누하동에 청천화숙을 열고, 많은 제자들과 동양화가들이 서촌으로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근대미술사에도 역시 우리 역사와 함께 걸을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의 삶도 함께 흔들리고 상처와 불운으로 쓰러지고 잊혀지기도 했다. 그림과 글씨에 탁월했던 이완용의 작품,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많은 화가들의 작품과 삽화들을 보면 예술적 재능에 대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분단과 전쟁 속에서 북으로 향했던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침묵과 저평가, 봉건적인 가부장제에서 비운의 삶을 마감한 여성 예술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작품을 그려냈던 그들의 운명과도 같은 열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집들은 허물어지고 자취는 사라져도 작품들이 남았다. 그들의 작품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평가를 받는다.



한국근현대미술전 관람을 가기 전 읽은 두 권의 책은 작품을 감상하는 다른 시선을 갖게 해주었다. 근현대미술사의 맥을 짚게 해주었고, 이번 전시 5개의 섹션 1.우리 땅, 민족의 노래, 2.디아스포라, 민족사의 여백, 3.여성, 또 하나의 미술사」 「4.추상 세계화의 도전과 성취」 「5.조각, 시대를 빚고 깎고중 앞의 3개의 섹션을 장식하고 있는 화가들(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이인성, 구본웅, 이쾌대, 나혜석, 천경자, 박래현, 김환기, 유영국 등)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깊이를 더하게 해주었다.

이쾌대 <자화상>

이쾌대<군상>

이번 전시에서 오래 머물렀던 작품들은 두 번째 섹션 분단미술사에서 족적을 남긴 변월룡과 이쾌대의 작품이다. 변월룡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한때 북한의 미술계를 이끌었던 화가다. 이쾌대는 형과 함께 월북 작가로서 가장 저평가되었고, 언젠가 재평가되어야 할 주요작가라는 인식되더니, 급기야는 가장 중요한 근대작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대표작 <자화상><군상>이 전시되었는데 그런 평가들을 납득하게 한다. 그가 거제 수용소에서 보낸 편지 글귀를 읽으며, 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들, 그 암울한 현실 속에서 빛나는 그의 작품 속 인간의 모습과 메시지가 안타깝기만 하다.

 

5관까지 갔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거슬러 올라가 오래도록 감상한 작가가 박래현이다. 함께 전시되어있는 나혜석이나 천경자의 작품들이야 워낙 자주 만났었고, 그들에 관한 책들도 많이 접했었다. 박래현은 김기창에 가려서 저평가된 작가라고 한다. 부부라 그런지 그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그들은 작품 변화의 흐름도 함께 했다. 작가의 앵포르멜, 비구상 작품들을 보며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을 납득하게 되었다.

박래현 <이른 아침>


<박래현의 비구상 작품들>


나는 근대사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여전히 그 역사의 숙제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그 정서를 공유한 자의 인지상정이 아닐까?




보고 있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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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4-24 2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분노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화숙이란 단어가 좋게 들립니다...

그레이스 2023-04-24 20:06   좋아요 1 | URL
화숙은 도제식으로 그림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고 하네요^^

그레이스 2023-04-25 06:26   좋아요 2 | URL
아!
백윤문의 <분노>는 장기판을 뒤엎는 사람이 일본 의상을 입고 있어서, 일본인 비하의도가 있다해서, 고초를 겪고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하네요 ㅠ
오랫동안 작품을 그리지 못하다가 말년에 돌아왔는데 예전 실력으로 회복되지 못했다고 해요.

페넬로페 2023-04-25 22:02   좋아요 2 | URL
저도 ‘화숙‘이란 단어가 좋게 들리네요.
이 단어에 이런 뜻이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어요^^

그레이스 2023-04-25 22:07   좋아요 2 | URL
~♡
저도 화숙이란 단어 뜻 처음 알았는데, 그곳에 달린 이름도 너무 좋았어요.
~!^

서곡 2023-04-24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쯧쯧쯧 설명 감사합니다~~

가필드 2023-04-25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한국근대미술전 다녀오셨군요
책 정리도 잘 해주셔서 보기전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될거 같네요 ^^

그레이스 2023-04-25 07:45   좋아요 1 | URL

마침 좋은 책을 읽고 있어서,,, 얼리버드 예매를 해놓긴 했었는데, 다녀오니 읽고 가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4-25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감상기 잘 읽었어요. 이쾌대나 박래현에 주목이 가네요.
책과 전시까지 한번에... 일석이조의 효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짬을 내서 다녀오고 싶어졌어요!

그레이스 2023-04-25 13:00   좋아요 2 | URL
전시도 좋았구요
미술관옆 카페에서 몽촌호 바라보면서 커피 한잔 하는것도 넘 기분 좋았어요^^

yamoo 2023-04-25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미술 전시....이거 어디서 하나요? 설에서 하면 주말을 이용해 보러가야겠어요!

귀한 후기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3-04-25 19:13   좋아요 1 | URL
소마미술관이예요~~
8월27일까지 합니다^^

yamoo 2023-04-27 13: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희선 2023-04-26 0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북으로 간 사람은 잘 모르기도 하네요 작가도 그렇고 화가는 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있군요 여성 작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니... 박래현 그림 좋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3-04-26 07:49   좋아요 1 | URL
예!
저도 박래현 그림 찾아보게 되네요^^

서니데이 2023-04-26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시를 보러 가기 전이 미리 한번 예습하고 가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대충 보고 빨리 지나가게 되더라구요.
옆에서 도슨트 설명을 들으면서 가는 것도 좋지만, 시간 여유있게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4-26 16:34   좋아요 1 | URL

오늘 춥네요 ㅠ

페크pek0501 2023-04-27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은 공부가 되는 페이퍼입니다. 페이퍼를 읽은 저도 공부가 됐는데 여러 책을 읽고 이 페이퍼를 작성하신 그레이스 님은
더 많은 공부가 되었겠습니다. 한 분야를 파는 공부의 매력이 퐁퐁~~ 느껴집니다. 저도 열공하고 싶은 마음이 솟습니다.^^

그레이스 2023-04-27 16: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파는 것까지는 못하고 몇일 붙들고 있다 쉬었다 다시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페크님~♡
 
30개 도시로 읽는 미국사 - 세상을 움직이는 도시가 들려주는 색다른 미국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김봉중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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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하고 공부하기 좋은 책이다. 도시의 형성, 발전, 또는 쇠락과 관련된 인물, 사건, 배경이 담겨있다. 함께 중요한 미국사, 지리를 찾아 참고하고 있다. 내용을 많이 담은 것보다 요점정리를 좋아하는 청소년들에게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성인인 나도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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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4-24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십개도시 ㄷㄷㄷ 미국이 크긴 크네요!

그레이스 2023-04-24 20:04   좋아요 0 | URL
30개 도시로 보는 일본사도 있어요^^

서곡 2023-04-24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헠 하긴 우리 나라도 삼십개 도시 충분히 추릴 수 있겠죠? ㅎㅎ

그레이스 2023-04-24 20:06   좋아요 1 | URL
크기가 문제는 아닌듯요
가능할듯요^^

페크pek0501 2023-04-27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면적이 세계3위이니 이야기도 무궁무진하게 많겠지요. 탐나는 책입니다.^^

그레이스 2023-04-27 16:16   좋아요 0 | URL
예~
저도 배우는게 많아요.
 
코스타리카 라 알퀴미아 #4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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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열면서 풍겨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향, 함께 온 책에도 배었으면. 조바심내며 드립한 후, 한모금. 산미가 있다고 해서 망설였는데, 부드럽고 신선하다. 입안에 남는 체리 감미, 잔향때문에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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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 -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1
마크 트웨인 지음, 마이클 패트릭 히언 엮음, 박중서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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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페이지에 지나칠 수 없는 경고문이 있다. 그런데 이 주석 달린 책은 버젓이, 사륙배판의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해설과 주석으로 채우고 있다. 각 페이지 마다 소설 본문보다 더 많은 주석이 달려 있다. 삽화, 신문기사, 당시 풍속, 작가노트, 비평가들의 해석 등. 이렇게 많은 의미들을 생산해내는 소설 맨 앞부분에 이런 경고문을 써놓은 트웨인의 유머가 더 빛난다. 어쨌든 이 정도 분량의 주석에 인용된 글을 쓴 사람들은 모두 총살감이다.^^


재미있게 이야기하듯이 쓰려했다는게 작가의 말이지만, 독자는 이전까지는 문학에 사용되지 않던 흑인 노예들의 언어, 비속어들, 사투리들을 담아서 구현하려 했던 미국사회를 읽게 된다. 물론 번역본에서는 이러한 뜻을 알기 어렵지만, 이 주석책에서는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헤밍웨이는 현대 미국 문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1982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워싱턴 대학에서 강연하는 조건으로 허클베리 핀의 저자의 고향인 해니벌에 들를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미시시피 강이야말로 마크 트웨인이 지닌 힘의 원천(206p)”이라고 했다. 이 기념비적인 소설을, 나는 너무 일찍 가볍게 읽었었다.

 

아버지의 학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체벌, 복수 등 폭력이 당연시 되고 있는 사회다. 헉을 문명인으로 만들려는 시도와 훈육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과부댁의 과보호로부터 도망가는 헉과 다른 곳으로 팔려갈 처지로부터 탈주하는 짐은 잭슨 섬에서 우연히 만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여행을 한다. 미성년자와 도망친 노예의 뗏목 여행,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오히려 헉은 관찰자이자 화자가 되어 그들이 들르는 마을과 사람들을 서술하고 있다. 헉의 시선으로 당시 미국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몬태규와 캐플릿가를 연상하게 되는 오래된 숙원(宿怨)’ 관계인 두 집안의 폭력을 목격한 헉은 뗏목으로 돌아오며 나는 그놈의 숙원에서 결국 떠나올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다(509p)”고 말한다. 그리고 뗏목이 얼마나 자유롭고 느긋하며 편안한 장소(509p)”인지를 역설한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뗏목 여행 중 만나게 된 자칭 왕 과 공작이라는 두 사기꾼과 동행은 그들의 여행을 더욱 위태한 모험가운데로 몰아간다. 그들에게 속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욕망을 보게 된다.

 

이 여행의 결말을 위해 톰 소여가 등장한다. 정말 우연한 조우다. 아마도 그래서 트웨인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웃었다. 짐에게 자유를 주고, 헉을 폭력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작가의 방법이다.

 

트웨인은 이 작품을 가리켜 자연의 건전한 '마음'(heart)과 잘못 훈련된 사회의 병든 양심’(conscience)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다. 실제로 헉은 도망노예인 짐과 동행하는 것은 과부댁의 소유물을 훔친 배은망덕이라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사회로부터 오염된 양심을 가짐으로 얼마나 인간다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이 사회로부터 멀어지면서 헉은 그 절도행위 때문에 벌을 받는다면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결심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두 사람의 여행 중 백인 소년과 도망 노예라는 권력관계와 사고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물살에 휩쓸려 서로 헤어진 후, 걱정하고 있는 짐을 속인 헉에게 짐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느냐고? 내가 말해주고말고. 내가 애써 노를 젓느라고, 그리고 너를 찾느라고 힘이 들어서 잠이 들었을 때만 해도 내 가슴은 아주 찢어지는 것 같았는데, 그건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더 이상 내가, 그리고 이 뗏목이 어떻게 될지 도무지 몰랐으니까. 근데 내가 잠에서 깨어나보니 네가 돌아와 있고, 그것도 안 다치고 멀쩡하니 어찌나 감사한지 눈물이 다 날 정도였고, 여차하면 무릎 꿇고 너의 발에다가 입이라도 맞추고도 남을 마음이었지. 근데 네가 기껏 생각한 거는 어떻게 하면 거짓말로 이 짐 영감을 놀려먹을까 하는 궁리였다 이거지. 여기 위에 있는 건 쓰레기. 뭐가 쓰레기인고 하니, 자기 친구의 머리에다가 흙을 끼얹어서 친구를 창피하게 만드는 놈들이 쓰레기란 말이야.(443p)”

 

헉은 어찌나 민망한 마음이던지라고 하지만, 통렬한 교훈을 얻는다. 노예도 감정과 존엄이 있는 존재임을. 헉은 움막으로 가서 짐에게 몸을 낮춘다.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진심 앞에서는 그 누구도 맥을 못 춘다. 짐이 마음을 드러냄으로서 헉은 짐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 여행은 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여정이다. 노예해방이 선언되었어도 여전히 미국 아프리카인들은 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헉에게는 생체권력으로부터의 탈주다자유를 향하는 존재를 억압하는 권력이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질서가 존재하는 사회 안에 반드시 정의가 구현된 것은 아니다.

 

여행은 끝이 났다.

보르헤스는 미시시피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에 자기 손가락을 담그고 말했다.

, 이제 여행은 끝났습니다.(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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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4-14 0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청소년 도서 느낌이 들어서 손이 안가던데 그레이스님이 쓴 글을 보니 제가 잘못판단한거 같아요 ㅋ 주석달린 친절한 책으로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3-04-14 06:29   좋아요 3 | URL

저는 이번이 세번째 읽는 건데요,
청소년 시절 청소년 책으로, 한 6~7년 전에 민음사 판으로, 그리고 이번에.
민음사 판은 짐의 말투를 충청도 사투리로 번역해 놔서 좀 적응하기 힘들었구요.
이 책이 번역도 좋았어요^^
그리고 주석도 좋았습니다.

바람돌이 2023-04-14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허클베리핀을 이 주석판으로 다시 읽어야 할거 같은 느낌이네요. 지금 읽으면 저도 그레이스님처럼 더 깊게 읽을 수 있겠지요? ^^

그레이스 2023-04-14 14:58   좋아요 0 | URL
그럼요!
바람돌이님이신데요.^^
이 주석판 두껍고 비싸긴 한데, 나름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주석으로 읽는 셜록 홈즈>도 있어요^^

cyrus 2023-04-16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석 달린’ 책 시리즈를 사는 게 애서가로서의 저의 목표 중 하나에요. 절판된 게 아쉬운 책이에요. ^^;;

그레이스 2023-04-16 14:59   좋아요 0 | URL
절판되었나요? 몰랐어요
얼마전에 이터널 저니에서도 봤는데...ㅠ

고양이라디오 2023-05-08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석판도 있군요. 두께가ㅎㄷㄷ하네요. 전 마크 트웨인 책 중에서 <톰 소여의 아프리카 모험> 을 제일 재밌게 읽었어요. 진짜 배꼽잡으면서 읽었다는^^ㅎ

그레이스 2023-05-08 16:47   좋아요 1 | URL
아더왕과 코네티컷 양키도 재밌대요.
둘다 있는데 저는 또 미뤄놨네요.^^
트웨인 참 재밌게 잘쓰는 것 같아요^^~♡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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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권을 전부 들고 갈지 한 권만 들고 갈지 잠시 고민하다 세 권만 가방에 담았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사인을 아버지의 해방일지한 권만 받을까, 아님 세권 다 받을까,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 사인해주려면 피곤할텐데 하는 걱정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책들을 계속 사서 읽었던 흥분 사이에서. 결국 나는 세권을 내놓으며 한권만 해주셔도 되요라는 소심한 부탁을 했고, “세 권 다 해드려야죠” “빨치산의 딸두 권은 염치가 없어서 못 가져 왔어요” “염치라뇨.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라는 대화를 나누며, 세권의 책에 작가 사인을 받았다.

 

작가는 구례에 내려간 계기와 그곳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시골 정착기를 소재로 한 단편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즐거운 나의 집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내려간 고향 마을사람들은 두 모녀를 수시로 방문하며 이것저것 가져다주신다고 한다. 그래 뵈도 마음은 ‘city girl’인 작가는 불편했다고 한다. 빨치산 부모님 덕에 타인에 대한 경계가 몸에 배어서 그것이 성격을 형성했다고, 지금도 여전히 한 사람을 삶에 들일 때 오랜 시간이 든다고. 구례에서 산 시간동안 그 긴장과 경계가 조금은 희미해진 듯 보였다. 빨치산의 딸이후 작품들이 종종 그곳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빨치산의 딸은 소설이 아니고 실록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증언을 기록함으로 자신이 누구의 딸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찾는 것에 치열함이 느껴진다. 작가가 고백하듯, 그 때는 자신이 누구의 딸인가(아버지의 해방일지224p)”가 중요했던 시기였다는 생각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을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알게 되면서 나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카인의 표지가 부끄러운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가장 순결한 이름을 물려준 것이었다. 친일파의 딸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의 딸도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이 봉건적 인습에 묶여 있을 때 떨쳐 일어나 빨치산이 되었던 어머니의 딸이었다. 나의 지리산, 내 이름처럼 나는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핏줄을 이어받은 민중의 딸이었다. 나는 비로소 이승만 이래의 독재정권이 부모님에게 덧씌운 허물을 벗겨내고 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혈연적인 정뿐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에서 조국의 아들딸로 부모님을 일떠나게 했던 시대의 모순들은 자식인 내 시대에 와서 오히려 심화된 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하는 고민들을 내 부모 역시 했으려니 하는 생각은 혈육 이상의 애정으로 부모와 나를 결속시켰다.(빨치산의 딸163-64p)”

 

작가는 구례라는 곳에서 변화하고 가벼워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가볍게 풀어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의 생활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인상적인 짧은 문장으로 시작되고, 딸의 기억 속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는 너무 진지해서 헛웃음을 웃게 한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13p)”


그들의 대화는 종종 혁명과 민중에서 맺어진다. 그렇게 웃고 넘어가지만, 그 에피소드에 감춰진 노혁명가가 붙들고 있는 신념을 얼핏 보게 되어 마음 아프다. 그러기에 화자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244p)”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질게 뻔한 싸움인 줄 알면서도 지는 편에서 싸웠다. 그리고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진지일색인 아버지의 말은 블랙코미디처럼 들린다. 웃기지만 슬프고, 가볍지만 무겁다.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전장이다. 패한 전쟁터. 그 전쟁과 패배는 그녀에게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를 안겨주었다. 방황하던 고등학생 시절, 하루 동안의 가출을 기억한다. 무작정 집을 나와 걸으면서, 구례를 점점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었다. 그런 그녀를 쫓아온 작은 아버지가 고만 가자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209p)” 하던 몇 마디는, 작은 아버지도 떠나고 싶어서 그 길을 걸었고, 떠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두 사람은 아무 실랑이도 없이 되돌아간다. “워쩌겄냐. 가야제(208p)”하며 가야할 곳, 그래서 돌아설 수밖에 없던 장면이 어느 인생에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딸에게 구례는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163p)”이었다. 이 감옥같던 인연들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아버지 자신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모여든 사람들, 바로 그 인연들로 인해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순간의 아버지를 만난다. 장례식장을 찾은 빨치산 시절의 동지들, 죽은 동지들의 자녀들, 좌파와 우파 친구들,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들, 다문화 가정의 모녀, 그리고 전쟁 때 살려준 순경, 베트남 파병 상이(傷痍)군인 노인 등,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239p)”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181p)”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동창생부터 철물점 사장, 과일 가게 사장, 지물포 사장 등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아버지의 어릴 적 친구 박선생이 하루에 몇 번씩 들락거리며 데리고 왔다. 조선일보 애독자 박선생과 매일 만나 투닥거리면서도 왜 만나냐는 핀잔에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47p)”라고 아버지는 대답했었다.

 

신우형, 복례누이, 복희누이, 상욱아. 총을 쏠 때마다 손이 떨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네. 총구를 하늘로 겨눠도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내 총알에 누군가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마다 기도한다네.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게. 살아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세.(48p)”

 

빨치산 형제자매 친구들에게 미군식량과 함께 남긴 박선생의 편지는 가슴 아픈 우리의 현대사를 시사하고 있다. 더불어 사람은 그가 제일 낫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을 납득하게 된다. 장례식장을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이 현대사와 연결되어있고,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하기에, 아버지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있고, 남 탓만 하던 작은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딸은 아버지의 말이 이해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아버지의 사정은 아버지의 사정이고,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42p)” 하고.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봉건잔재 극복과 구습 타파와 혁명을 논하던 아버지는 산이 아닌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했다. 아버지는 사상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잊은 세상과 권력에 대항해 떨쳐 일어났던 것이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266p)”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화자 고아리는 아버지 장례식 마지막 밤 그동안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고,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생각해보지 않았음을 자각하며 눈물 흘린다. 아버지가 수감된 시간, 잃어버린 그 6년 동안 자신이 그 이전의 삶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단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무치게라는 말은 감옥에 갇힌 긴긴밤을 그리워하며 보냈던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작가는 이 소설을 가볍게 쓰기 위해 여러 번 고쳐 썼다고 했다. 무게를 덜어내도 덜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밥 먹고 사람을 만나고 농담을 주고받는 가벼운 일상이어도, 그 일상을 둘러싼 시대가 슬프면, 눈물이 서리게 마련이다. 세상은 이미 훌쩍 한계를 넘었지만, 여전히 해방 전후의 한계와 맞서 싸우는 중인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의 통렬한 반성이다. 가볍게 쓴다고 해서 그것이 가볍게 읽혀지겠는가.

 

왜 나는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부모로서 이 책을 읽게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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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03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이창래 작가에게
사인 받으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답니다.

사인을 다 받고 싶었으나...
다 욕심이지 - 그래도 두 권은
받았으니 다행이지요.

오오 가볍게 쓰기 ! 그렇지 않
아도 저희 독서 모임에서도 비
슷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역시!

그레이스 2023-04-03 20:02   좋아요 1 | URL
ㅎㅎ
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공감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
^^

서니데이 2023-04-03 1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 사인 받으셨군요. 다 가지고 가셔도 아마 좋아하셨을거예요.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전에 나온 책들도 재출간되는 것 같더라구요.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좋은하루되세요.^^

그레이스 2023-04-03 20:04   좋아요 3 | URL

소재에 대한 질문했었습니다.
아주 좋은 대답을 들었구요~^^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23-04-03 20: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대구 올해의 책 열 권 중 한 권에 선정됐어요. 정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구가 보수의 성지로 악명 높지만, 근현대사로 되돌아보면 빨치산들이 활동했고, 그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지역이기도 하죠.

그레이스 2023-04-03 21: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정말 시간이 많이 지나니까 세상도 변하긴 하죠. 더디게 느껴지지만...!
정지아 작가 책이 뜬다고 하니, 구례분들은 오히려 빨갱이 얘기가 팔리다니 무슨일인가 하신대요.

새파랑 2023-04-03 2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인본 멋지네요~!! 세권을 가지고 지하철을 타고가서 사인을 받는 그레이스님의 열정이 너무 멋집니다 ^^ 요새 이 책이 핫하군요.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4-04 05:15   좋아요 1 | URL
아마 좋으실거예요
핫 한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4-06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해방일지>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b

그레이스 2023-04-06 13:55   좋아요 1 | URL

다들 그러신듯요
여러 입장에서 여러 의미를 얻게 되는 책입니다.

서니데이 2023-04-09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편안한 하루 보내셨나요.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4-09 22:27   좋아요 2 | URL
북플이 계속 안들어가지더니 로그아웃되고 다시 로그인 해서 들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04-16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아버지의 해방일지] 못 읽었는데 그레이스님의 친필 사인본을 3개나 눈으로 음미하는 호강을 미리 하네요
[~해방일지] 읽을 때 그레이스님, 페이퍼가 생각 날 것 같아요.

부모로 읽다/자식으로서 읽다가 어떤 뉘앙스의 말씀이신지 직접 읽어보고 느껴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4-16 20: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얄라알라님의 리뷰 기대할께요.~♡

임승수 2023-05-3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2023-05-30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땡이 2023-11-07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저도 딱 글쓴이님 제목처럼 평을 하고 다녔었는데 친구들 선물사러 들어왔다가 댓글보고 100% 똑같은 마음에 댓글남기고 갑니다. 가볍지만 무겁고, 웃기지만 슬프고. 거기에 더해 멀리서보면 희극. 가까이서보면 비극인 듯한 이 가벼운 책이 얼마나 무겁게 마음에 남는지... 빨치산의 딸도 나중에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그레이스 2023-11-07 10:38   좋아요 0 | URL
예~
같은 마음이시라니 반갑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