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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정원 - 몽크스 하우스의 정원 이야기
캐럴라인 줍 지음, 메이 옮김, 캐럴라인 아버 사진 / 봄날의책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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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크스 하우스를 판매하려 함. 땅은 1에이커의 4분의 3 크기이며 가재도구가 딸린 옛날식 집.

 

잉글랜드 서식스의 마을 로드멜에 있는 몽크스 하우스는 레너드 시드니 울프와 버지니아 울프의 시골집이다. 1919년에 이 벽보를 보고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이 집을 구입한다. 이 책은 내셔널트러스트의 세입자로 10년 넘게 몽크스 하우스를 관리했던 캐럴라인 줍의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정원이야기이다. 정원의 사진과 스케치와 함께 버지니아의 편지, 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 정원에 꽃들이 심겨지고 공간이 확장되고 집이 개조되는 역사는 버지니아의 출간된 작품들과 함께 한다.


 

책 제목을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무색한 면이 있다. 정원을 가꾼 것은 레너드이기 때문이다. 1941년 버지니아가 죽은 후에도 1969년까지 레너드는 이 몽크스 하우스에서 죽기 직전까지 정원을 중심으로 살았다. 버지니아는 정원을 감상하는 쪽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녀가 작품에서 묘사한 꽃들에 대한 글이 오류가 있다고 독자들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버지니아는 정원을 사랑했고 그녀의 많은 작품들이 정원의 한 편에 있는 오두막에서 탄생했다. 이 곳 몽크스 하우스에 지인들을 정기적으로 초대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주로 '블룸즈버리 그룹'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T.S.엘리엇이다.

 

처음 구입했을 당시 저택은 낡아서 여러 군데 손을 보아야 했다. 이런 저택의 모습은 등대로의 세월 편과 여러 작품에 반영된 것 같다,

 

집은 남겨졌다. 집은 버림받았다. 생명이 떠나 버리자 마른 소금 알갱이들만 들이찬, 모래 언덕 위의 빈 조개껍질처럼. 기나긴 밤이 자리 잡았고, 들척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이, 더듬거리는 축축한 숨결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냄비는 녹이 슬었고 깔개는 썩었다. 두꺼비들이 디밀고 들어왔다. 늘어진 숄은 하염없이 이리저리 너풀거렸다. 식품 저장실의 타일 사이로 엉겅퀴가 자라났다. 거실에는 제비가 둥지를 틀었고, 바닥에는 지푸라기들이 널렸으며, 회벽에서는 석고가 수북이 떨어졌다. 서까래들이 앙상하게 드러났고, 장두리 판 뒤에서는 쥐들이 이것저것 가져다 쏠아 댔다. 팔랑나비들이 번데기에서 날아올라 창유리 위에서 파닥거리다 죽어 갔다. 양귀비씨가 달리아 사이에 내려앉았고, 잔디밭에는 긴 잡풀이 무성했으며, 큼직한 아티초크가 장미꽃 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가 하면, 양배추밭에서는 카네이션이 피어났다. 잡풀이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던 소리는 겨울밤이면 북 치는 소리로 변했다. 여름에 온 밤을 녹색으로 물들이던 든든한 나무들과 찔레 덤불에서 나는 소리였다.세월이가다 9. 등대로

 

매입할 당시, 아무도 돌보지 않던 몽크스 하우스의 낡은 저택과 황폐한 정원의 인상이 이 작품에 그려지고 있는 것 같다.

 

외부에 화장실이 있었고, 욕실도 없었다. 1926델러웨이 부인일반 독자로 들어온 수입으로 집안에 욕실과 온수 화덕을 설치한다. 1927년 말 등대로의 판매 수입이 늘어나자 차를 사고, 1928년에는 정원에 이어지는 들판을 매입한다. 버지니아는 이 들판을 매입한 후 로드멜에 대한 감정이 달라지고 그곳의 일부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정원에서 근사한 곳은 과수원이라고 한다. 과수원은 두 사람이 앉아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장소였다.

 

과수원에는 사과나무가 스물 네 그루 있었다. 약간 삐딱하게 자라기도 한고 곧게 자라기도 한 이 나무들은 몸통 위로 확 퍼진 가지에 붉거나 노란 둥근 방울을 매달았다. 나무마다 넉넉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40p)

-버지니아 울프, <과수원에서>

 

등대로에서 버지니아는 램지 부인이 정원에 니포피아가 있었다고 쓰는데, 그 부분을 쓸 때 버지니아는 몽크스 하우스의 이 니포피아를 생각했을까? 하고 저자는 적고 있다.(47p) 이 정원은 그녀의 작품 곳곳에 그려지고 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충분히 밝았고, 잔디밭은 부드러운 암녹색이었으며, 집은 자주색 시계초가 만발한 녹음 가운데 빛나고 있었고, 까마귀들은 높은 창공에서 울음소리를 떨구고 있었다.……그래서 그들은 정원을 떠나 늘 다니던 길로 해서 테니스장을 지나고 억새밭을 지나 두꺼운 산울타리가 끊어진 틈새를 향해 걸어갔다. 울타리 가에는 빨갛게 타는 잉걸불 같은 레드핫포커꽃들이 피어 있고, 그 사이로 내다보이는 만의 푸른 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르렀다.창문 4,등대로열린책들번역


이 정원이 아니었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등대로는 몽크스 하우스 이전 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출간은 몽크스하우스 시절이고 그때까지 작업은 계속되었다. 

 

올랜도192810월 출간과 함께 새로 매입한 정원부지에 공간을 꾸미는 작업이 시작된다. 맷돌이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테라스 공간은 전문가의 솜씨라고 할 정도로 감각이 뛰어나다. 레너드에게는 정원가의 자질이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모종과 종자를 주문해서, 파종하고 심고, 담장을 허물고, 바닥에 돌을 까는 솜씨는 부러울 지경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희열을 느끼고 있는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물론 이 정원을 버지니아도 사랑했음을 소개된 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다알리아, 카네이션, 패랭이꽃, 해바라기, 아스터, 백일홍, 한련화 같이 흔한 종류의 식물을 심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레너드는 더 드문 종류의 꽃들, 특히 구근류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정원은 구석진 곳이 많고 길을 돌아갈 때마다 다양한 꽃무리가 만드는 장면들로 탄성을 짓게 한다. 작가의 정원 스케치는 설계할 때 스케치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정원과 조경 잡지에 실려있던 매력적인 스케치들이다. 오노린 조베르, 맥문동, 이브 프라이스, 탈리아, 자반풀, 길레니아 트리포리아타, 다이아몬드 프로스트, 알붐 등 생소한 이름들의 꽃들. 특히, 보라색 꽃들은 유럽 정원에 내가 매혹당하는 이유이다. 항상 생각하지만 우리의 정원에는 왜 소재와 색상이 다양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리움 클래디에이터가 정원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을 때의 반가움이 기억나기도 했다. 이 몽크스 하우스에서는 흔한 소재다. 이런 공간 체험은 도시의 아파트의 정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레너드가 이 정원에 세우려했던 온실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것이다. 꽃을 심고 가꾸는 레너드의 입장에서는 그 어느 수집가나 식물학자 못지않게 희귀한 식물을 옮겨와 키우고 싶었을 테고, 그것은 가온(加溫) 철제 온실 계획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정원을 감상하는 버지니아의 입장에서는 흉측한 구조물이 경관을 해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둘은 충돌했고 버지니아는 고집을 꺽지 않았고, 결국 레너드는 가온 온실 계획을 포기한다.

 

버지니아가 이 몽크스 하우스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곳은 글을 쓰기 위해 개조한 정원 한편의 오두막일 것이다. 지금은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버지니아는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고 한다. 책이 여기 저기 쌓여 있고,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런던이 폭격을 당하면서 이 지역에도 폭탄이 떨어지고 불발탄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집 일부가 손상된다. 버지니아의 병세는 악화된다. 아마도 전쟁과 음식, 추위가 영향을 미쳤고, 위기가 오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고 레너드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버지니아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다.

 

버지니아 사후에 몽크스 하우스는 레너드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온실에는 선인장과 부겐빌레아가 자라고 있다. 두 사람 사후에 황폐된 저택과 정원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매입해 세입자를 두고 관리하고 있다. 해마다 버지니아를 기억하기 위한 방문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다.

 

이 책은 버지니아의 작품을 읽을 때, 정원이나 저택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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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23 00: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책을 번역 출간되었네요 FT주말판에 가끔 울프 레너드 정원 이야기 실렸는데 레너드가 자신의 얼굴 새긴 동판 이정원 어딘가 두었다고 언젠든지 울프 영혼이 머물다가라며, 맷돌 테라스 멋지네요 하지만 정원 손질은 죽 노동 ㅠ.ㅠ,

그레이스 2021-04-23 01:03   좋아요 5 | URL
맞아요
헤르만 헤세도 그 노동에 대해 토로하면서도 계절이 되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부지런함을 자연스럽게 부리게 된다고 했죠.
좋아하지 않으면 못할 일!

바람돌이 2021-04-24 0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도 보고싶네요. 버지니아 울프 책을 봐야 하는데 자꾸 관련책만 보는 느낌이지만 버지니아 울프 책을 읽을 때 이 집을 상상하리라는 말에 훅 끌려버림요. ^^

그레이스 2021-04-24 08:47   좋아요 2 | URL
이번에 <등대로> 읽을 때 계속 연상이 됐어요. 다른 작품 읽을때도 곳곳에 이곳의 경치와 분위기가 묘사되어 있을 듯요. 그러지 않아도 기분좋은 책이예요.^^

scott 2021-05-07 15: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울프 여사님 이달의 당선작!
오월! 울프 여사님의 정원
책구경으로 만 ^ㅅ^

그레이스 2021-05-07 16: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scott님의 매일 올리시는 글들과 부지런하고 친절한 댓글이 격려가 되요.~♡

모나리자 2021-05-07 16: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당선작 축하드려요~^_^
멋진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05-07 16:20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모나리자님도 행복한 주말되세요
어렸을때 상받고 집에 가던 기분이 생각나네요^^
지금 엄마한테 가는길인데...^^

새파랑 2021-05-07 16: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완전 축하드려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1-05-07 16:2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21-05-07 17: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미미 2021-05-07 1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짝짝짝~그레이스님 당선 축하드려요~! 유후~^^*♥

그레이스 2021-05-07 17: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맛있는 저녁시간 되세요~~♡

초딩 2021-05-0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05-08 19: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헤세는 우울증을 깊이 앓았다고 한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면서 그 정서를 극복한 것 같다. 그의 수채화가 예뻤던 기억이 있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 것이나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정신증을 더욱 심화시키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더러 이상심리상태를 예술로 표현하는 예술가들이 있기도 하다. 그 상태에 빠져들어 창작을 하는 경우가 있다.
헤세는 글쓰기를 벗어나 몸으로 하는 일들을 통해 위기를 넘기는 듯하다. 본래 가지고 있는 병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예술가들은 그 병을 예술로 승화시키거나, 아님 다른일로 환기시키며 벗어나거나 한다.
헤세의 정원가꾸기는 생산적이란 생각을 했다.
앞에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과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사실 그녀는 정원 일을 전혀 모르고 감상과 즐기기만 했다. 혹시 그녀가 헤세처럼 직접 남편과 함께 정원일을 했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정원 가꾸기를 즐기는 예술가들. 타라의 정원, 모네의 지베르니, 울프부부의 정원, 헤세의 정원.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데...
타라, 레너드 울프나 헤르만 헤세를 보면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다.
전에 일할 때는 몰랐던 정원에 대한 감성을 발견한다. 정원과 나무 꽃에 대한 책들을 부쩍 꺼내 읽게 되다.











재미 삼아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고작 몇 달밖에 안 되는 따뜻한기간에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원한다면, 혹은 누군가 정원을 가꾸어달라고 요청한다면 온통 즐거운 것만 보게 된다. 생산하고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가운데 넘쳐 나는 자연의 힘, 다양한 형상과 색채로 드러내는 자연의 유희와 상상력. 여러 면에서 인간적인 여운을 주는 작고 재미나고 소박한 삶 - P15

아주 이따금,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어느 한 순간, 땅 위의 모든피조물 가운데 유독 우리 인간만이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물의 불멸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뿐인 인생인 양 자기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것이다. (1908년)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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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가랑비메이커 단상집 1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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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 책이다. 독립출판 5년간 베스트셀러, 스태디셀러라는 말에 주저 없이 구입했다.

노래가사처럼 쉽게 읽히는 시(詩)들이었다. 읽다보면 그렇게 쉽게 쓰여 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명료한 말들 앞에서 더 자주 복잡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쓰고야 마는 사람이라고... 그녀가 한 줄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덜어내고 수많은 생각의 층위들을 벗겨내야 했는지를 알려주는 독백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눈이 머문 詩들.

끝이라는 것이 단번에 쿵, 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뒤돌아볼 미련도 없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끝을 잡고 늘어졌다고, 결국 끝이 아닌 끄으으으읕만이 남겨졌다는 표현에 나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그렇지! ‘이제부터 끝이야‘ 하고 뒤돌아선다고,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지. 한 번에 매듭을 지을 수는 없지. 수많은 밤을 뒤척이고 낯익은 거리를 서성거리면서 매듭을 짓다가 풀고 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사이가 한 번에 끝나? 헤어지고 나서도 혼자 오랜 시간이별을 할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이건, 이별한 당신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이들로부터 거부당한다 해도 그것이 온 세상으로부터 내팽개쳐진 것은 아니란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이들은 한 점에 불과하니까. 숨을 고르고 뒤돌아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집중하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발견한 사막을 당당히 외치며 나아가라고 한다.
「관계라는 사막에서」 이건, ‘나 지금 혼자야?’ 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바쁘게 살다가 허기보다는 속이 더부룩한 것이 더 괴롭다는 것을 아는 때가 있다. 출발점에서 멀어진다고 목적지와 가까워지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야 한다. 젊음의 때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채 내달리는 것에 중독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돌아가는 길」 이건, ‘나 제대로 가고 있어?’ 라고 묻고 있는 당신을 위해!


누군가 자꾸만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하루를 밟아보라고 한다. 그 하루에 어떤 표정들이 들어차 있는지. 한숨은 몇 번이나 내쉬고, 푹 파묻은 고개는 몇 번이나 흔드는지. 그 하루를 밟고도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미워지는 사람이 있어 괴로운 당신을 위해!



전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시(詩)들 이다.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고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개인의 연애사나 청춘의 아픔을 담은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헤아린다. 등을 쓸어주고 함께 가자고 한다.

양손 가득 쥐고 달려온 사람들은 모르는 가을이 있다고 한다. 빈 손으로 터덜터덜 걸어온 이들에게는.(「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나 그 연약한 사람들끼리 힘이 되어주기 위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헤아려 보라고 그리고 꼭 안아주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가난이 당신의 부유를 노려 볼 이유는 없다고... 우리는 그저 각자의 식사를 할 뿐이라고……. 반대로 당신의 부유에 내 가난을 조롱할 자격도 역시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접속사가 붙여지며 시원한 감정의 폭로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벅차오르는 착각이 확신처럼 번져,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싶어질 때면 조용히 접시를 들고 일어서면 된다. 내 몫의 식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곳을 향하여.’(「각자의 식사」)
명쾌하기도 하고, 마치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시원하게 한판승을 거둔 것 같다. 저들이 달리고 있는 경주로 밖으로 탈주하는 기분! 이건, 나를 위하여!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진심이 담긴 시들로 작은 책을 채웠다. 그냥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앓고 난 뒤 그 병세를 알려주는 선배 같다고 해야 하나? 의사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세세한 것들을. 마음을 앓은 흔적들이 있다. 감정에 침몰당하지 않고 담담하게, 연약하지만 심지 있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놓칠지 모를 것들에 대하여,
나는 놓쳤지만 당신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놓쳐도 돼. 어쩌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칠거야. 그게 우리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나온 시간에 나를 구겨놓고 사라질 것들을 찾아 헤매지 말라고…….

시들을 읽으며 ‘그래, 그래’ 하고 마음이 말했다.


“허름한 삶을 입은 것 같아도 대화를 나눌 때면
얼마나 근사한 태도와 건강한 미소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장래희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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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의 2000자를 쓰는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혜숙 옮김 / 루비박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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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0자를 쓰는 힘, 글의 신체성에 관하여


이 책에서 말하는 ‘쓰는 힘’이란 200자 원고지 열 장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다. 저자는 매일 분량을 정해 놓고 쓰는 훈련을 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공적인 글을 쓸 것을 강조한다.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고, 특별히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하라고 한다. 문장력을 향상시키고 말하는 능력도 길러주기 위해서는 독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좋은 문장을 쓴 사람들은 방대한 양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에 관하여 끈기 있게 깊이 생각하는 것도 문장력을 향상 시켜주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독서와 글쓰기와 말하기와 관련된 글 중 인상적인 부분이다.

나는 보통 한 시간 반 정도의 강연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강연을 할 때는 마치 워드프로세서로 문자를 빠르게 타이핑하고 있는 듯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주어와 술어가 서로 호응하고 있는지, 혹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다음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 연결될 것인지 하는 글의 구성, 즉 각 절과 장의 연결이 머릿속에서 착착 정리된다.……
문장력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말도 조리 있게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고력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자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것인지를 항상 확인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44p

글쓰기는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을 예로 들며 설명한다.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 그때마다 ‘이 책에 이런 부분이 있었나?’하고 새삼 놀란다고 한다. 그것은 작가가 이 소설을 즉흥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만큼 철저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라고...
글쓰기에는 우연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문장이 술술 떠올라서 써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업을 통해 글을 쓴다.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가 책 속에 쏟아 넣은 방대한 의미에 압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창조한 의미와 가치이 세계인 것이다.

가치 창조의 글쓰기라는 점에서 비평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작품과 접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만남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비평문을 쓰는 참된 의미이기도 하다. 독자에게 그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시야를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렇게 독자의 뇌와 작가의 뇌가 서로 감응해서 불꽃이 튀는 듯한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비평이다. 48p

그는 글쓰기의 공공성을 강조한다.

의식적으로 글쓰기 훈련을 거듭하면 공적인 감각을 지닐 수 있으며, 내 글을 남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사적인 공간이니까 아무것이나 써도 상관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사적인 이메일을 쓰는 것을 글 쓰는 계기로 삼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런 마음 자세로는 기본적인 문장력을 함양할 수 없다. 글쓰기란,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많은 이들에게 내용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한 공공성을 의식하지 않으면 글쓰기는 완전히 사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히 자기만족이나 개인적인 감정의 발산에 그치기 쉽다. 그러므로 글을 쓸 대에는 사적인 모드와 공적인 모드를 자유자재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자 53p

온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그리고 이 책은 모두 공적인 글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동의하는 부분이다. 대상이 있는 글쓰기는 그 대상을 설득해야 하므로 논리를 세우고 조리가 있어야 한다. 문장이 다듬어 질 수 밖에 없다. 글에 대한 책임도 갖게 되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다.

‘문체’는 글쓴이의 고유한 스타일이다. 이것은 연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몸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몸을 보면 누구인 것을 아는 것처럼, ‘이 글은 누구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문체이다. 사이토 다카시는 이것을 ‘글의 신체성(身體性)’이라고 한다. 문체는 ‘이 글은 누가 쓴 것’인지를 알리는 도장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더욱 글에 책임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글의 신체성’이라는 말이 내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온 반면, 글에 대한 책임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나의 글은 여전히 비문이 많고, 뜻이 모호하고, 성찰이 부족하다.
이 책은 글을 쓰는 데 실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더불어 지속적인 글쓰기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가볍게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옆에 두고 가끔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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